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32화 (332/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32화>

***

1.

「···26일 오랑캐가 광평보를 침입하니, 굶주린 오랑캐가 또 난리를 피우는가 싶어 후망(堠望)하던 갑사들에게 적의 수를 묻고, 전투를 준비하였는데 오랑캐가 무기를 버리고 나타나 말하길,

“귀순하고 싶습니다.”

광평보에는 귀순한 오랑캐가 없어 기이한 일이니 더더욱 치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광평보 권관 박산구(朴山救).

2.

「···29일 야인의 추장 반답(班答)이 보(堡)를 찾아오니 신들이 깜짝 놀라 무기를 들고 반답을 맞이하였습니다. 반답은 평소 이 비아리보(非兒里堡) 일대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적호였고, 작년에도 또한 우리 군사 셋에게 상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답이 무기를 버리고 말하길,

“귀국에 귀순하고 싶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였습니다. 반답 같은 적호는 귀순보다 약탈을 택하는데 기이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어 치계합니다.

비아리보 권관 주묵천(朱墨川).

3.

「···이달 5일 적호가 작년에 끌려간 군민 15명을 보내면서 패문(牌文)을 동봉하였는데, 패문에 이르기를,

“이들을 끌고 간 것은 우리가 아니니 어찌 성상의 노여움을 살 일을 했겠습니까? 다만 숨어서 패문만 보내는 것은 우리가 싸운 세월이 자그마치 수십년이기 때문입니다. 혹 귀순 할 수 있겠습니까.”

하여 성보에 귀순 하라는 글월을 천에 써서 내걸었는데 다음 날 운두리보에서 서북 방면으로 40리 떨어진 곳의 적추(賊酋) 목하(木河)가 성문 앞에 나타나 귀순하였습니다. 변경에 귀순하는 오랑캐가 많다고 들었으니 운두리보에서도 해괴한 일이라 생각되므로 치계합니다.

운두리보 권관 최성준(崔成峻)

나는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요동이 절대 함락 될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그렇잖아.

요동이 일개 도적들에게 함락된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요동이 함락 된다는 건 명나라가 함락 된다는 소리나 진배가 없다.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이 함락 됐으니, 이미 명나라에 망조가 들대로 들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니까.

그랬는데, 아무래도 요동의 정세가 내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것 같다.

어쩌면 요동이 함락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변경의 지휘관들이 보내온 치계를 받고 나서 하게 됐다.

이번에 전달 된 치계가 도합 29건이었다.

물론 29건의 치계가 모두 귀순과 관련 된 건 아니었지만, 그중 8건이 귀순과 관련 된 치계였다.

무려 8건이 말이다.

예년 같았으면 귀순에 관련한 치계는 1년에 8건이 있으면 많다 할 정도였을 거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달 사이 8건의 귀순 치계가 올라왔다.

이게 무슨 말이겠는가?

“전하. 요동의 정세가 심상치 않은 듯 하니 변경의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명하시옵고 중앙의 군사들을 변경에 잠시 급파하여 파진(罷陣)케 함이 어떻겠사옵니까?”

이미 성보의 수축을 독려하는 경차관(敬差官)은 보내둔 상태였다.

하지만 각 성보에 주둔하는 군사는 그대로였다.

“중앙의 군사를 급파하자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사성?”

“말그대로지요. 지금 당장은 귀순하는 여진족들이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는 귀순이 아니라 약탈자가 돼서 돌아올지 어찌 알겠소이까? 지금의 군사들로는 갑자기 밀려드는 오랑캐들을 막기 어려우니,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중앙의 군사를 보내야지 않겠소.”

“중앙의 군사를 보냈다가 변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숭재 씨의 말에, 대사성 이점이 인상을 구겼다.

“그리 말하시는 저의가 뭐요?”

“저의? 그러는 대사성께서는 중앙의 군사를 굳이 북방에 보내자 말하는 그 저의가 무엇입니까?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 도적들이 창궐 할 수도 있고 감히 역도들이 준동 할 수도 있는 일이거늘······.”

“이보시오, 제예! 말을 삼가시오! 역도라니! 내 그럼 역도들이 준동하길 바라서 중앙의 군사들을 북방으로 보내자고 했겠소이까!”

“그건 아니지만, 이런 시국에 그런 말씀을 하시니 그 의도도 의심이 되는 게지요.”

“제예!”

아무래도 요동과 변방의 일로 대신들의 신경도 예민해진 것 같다.

나도 당혹스러운데 이 사람들은 아마 더 할 거다.

요동이 함락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미지의 불안감이, 여진족들의 귀순으로 마치 사실처럼 굳혀져버린 셈이니까.

아, 물론 여진족 몇 명 귀순했다고 해서 당장 요동이 함락 되진 않을 거다.

다만 진짜 문제는 그 정세에 있는 거다.

치계에 언급된 귀순 여진족들의 주거지는 대부분 압록강 너머였다.

요동과 인접한 곳이란 말이지.

그런 그들이 왜 명나라가 아니라 우리 조선에 귀순을 했을까?

여기 한양에서 바라보는 요동의 정세와, 요동과 인접하고 있는 여진족들이 느끼는 정세가 다르기 때문일 거다. 생각 이상으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여진족들도 불안하니 명나라 대신 우릴 택한 거겠지.

그리고 그렇다면, 이건 우리끼리 신경질 내면서 싸울 일이 전혀 아니다.

왜냐구?

“알아서 영토 갖다 바치겠다는데 뭐가 문젭니까. 싸우지들 마세요.”

귀순이 몸뚱아리만 오는 귀순만 있나?

영토를 통째로 들고 오는 귀순도 있지.

***

하루가 다르게 한반도와 요동반도의 정세가 어지러워지는 그 사이.

조명 연합군의 선단은 진정한 난세에 입세(入世)했다.

1만 3천 정예군에 230여척의 전선이 하카타의 입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카노시마(志賀島)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230여척의 전선이 일제히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는 모습은 장관이 따로 없었지만, 시카노시마의 섬 주민들에게는 수백년 전의 악몽을 일깨우는 광경이었다.

주민들은 말로만 듣던 원군과 고려군이 절로 떠오르는 연합군의 모습에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

물론 선단의 상륙지는 시카노시마가 아니었다.

시카노시마를 지나쳐, 하카타만의 한가운데 있는 노코노시마(能古島)마저 지나쳤다.

선단은 노코노시마의 서쪽 해안과, 남쪽 해안에 나누어 상륙했다.

역시나 영문을 모르고 고기 잡으러 나온 어선들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났고, 사정은 해안가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모두가 조명 연합군의 모습에 꽁지 빠지게 도망만 친 건 아니었다.

처벅처벅.

이백돌과 주수가 상륙한 서쪽 해안.

해안으로 오요로이(大鎧)차림의 무리가 나타났다.

무리는 비록 갑주와 창칼 따위로 무장하고 있긴 했지만, 적의는 없어 보였다.

그걸 증명한 게 이 무리를 이끄는 것으로 보이는 무사의 행동이었다.

무사는 이백돌과 주수를 보자마자 호시카부토(일본식 투구의 일종)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대뜸 오체투지를 했다. 그리고는 본인을 대내전(오우치)의 신하인 스에 오키후사(陶興房)라 소개했다.

오키후사의 소개는 정중하고도 공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백돌은 뭐가 그리 기분이 나쁜지, 미간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여기 주 장군이 만리길을 달려왔는데 어찌 대내전이 안 나오고 일개 신하 따위를 보냈단 말인가?”

곧 오키후사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키후사의 변명은 역관이 통역했다.

“원래는 약속드린 대로 대내전이 오려 했사오나, 급작스럽게 국왕이 있는 서울(교토)이 폐주(아시카가 요시즈미)의 급습을 받아 몸을 빼기가 어려웠다고 하옵니다.”

“흐음. 폐주는 주 장군과 내가 온다는 사실을 몰랐길래 감히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냐고 물어보거라.”

“아마 알았다면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을 거라 하옵니다.”

몰랐다는 말이다.

어쨌건 폐주의 급습을 받아 자리하지 못 한 것이지만, 그와 별개로 기분은 나쁘다.

“그래, 페주는 잡았다던가?”

“대내전이 폐주의 급습을 막아내니 당황했는지 가장 먼저 꽁지 빠지게 도망을 놨다 하옵니다. 때문에 아직 잡진 못 했사오나, 조만간 잡을 수 있을 것이라 하나이다.”

“음. 그래, 뭐. 대내전이 있어야만 소이전 놈들을 혼쭐 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어차피 대내전이 일본의 서울에서 거리가 꽤 되는 이 박다(지금의 후쿠오카)까지 오기로 약조한 건, 단순히 주수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와 함께, 길 안내를 위해서였다.

뭐, 길 안내야 눈앞의 오키후사란 인물을 보내왔으니, 대내전이 있든 없든 조명 연합군의 작전에 큰 차질은 없다.

“서울의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들러서 여기 주 장군께 필히 인사를 드려야 할 것이라 전하라. 주 장군은 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총애하는 총신이니라.”

“물론이라고 하옵니다.”

고개를 끄덕거린 백돌이 간밤의 비로 질퍽해진 해안가를 가로질렀다.

***

“뭐라?”

다구(茶臼)를 이용해 말차를 갈던 스케모토는 전령의 말에 기함을 터뜨렸다.

물론 스케모토만의 일은 아니었다.

스케모토와 함께 차를 마시던 스케사다(資貞)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조선과 명군이 하카타에 상륙을 했다 하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냔 말이다! 뜬금없이 조선군하고 명군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걸 넘어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의 스케모토였다.

오우치와의 화의를 기대했었지만, 화의는 물 건너 갔다.

하지만 다행히, 아주 다행히 시간을 벌 기회가 생겼다.

시기적절하게 오우치 놈들에 의해 물러난 전임 쇼군 요시즈미가 교토로 진격했기 때문이었다.

오우치 놈들 입장에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에 가까웠을 것이다.

요시즈미를 끌어내리고 나서 간레다이(일종의 섭정)에 오른 요시오키는 이제 천하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입장이었다.눈엣가시인 요시즈미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만 없앤다면 천하인의 꿈도 눈앞에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천하인의 자리를 코앞에 두고 들뜬 상태에서 급습을 받았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물론 말했다시피 스케모토의 입장에선 이건 기회였다.

간레다이에 오른 요시오키라지만, 요시오키는 아직 입지를 제대로 굳히지 못 했다.

풍문에 의하면, 요시즈미를 사로 잡지 못 한 것부터 시작해서 가신단 사이에서도 반발이 일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한 때에 요시즈미의 급습을 받았으니, 이제 더 이상은 이쪽에 집중할 여력이 없을 게 분명했다.

화의가 불발 된 게 오히려 다행한 일이 됐다 여기고, 한숨 돌린 게 바로 한 달 전의 일이었다.

한데 조선군과 명군이 상륙했단다.

조명군이 호의를 갖고서 하카타에 왔을 리는 없을 테고, 오우치를 지지하기로 한 조선이 굳이 오우치의 돈줄을 자르기 위해 하카타에 왔을 리는 더더욱 없을 테니 결국 조명 연합군의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는 알 만한 일이었다.

“그 수는 얼마나 된다더냐!”

넋이 나간 스케모토를 대신해 스케사다가 소리쳤다.

“그게, 1만 정도······.”

전령의 대답에, 넋이 나가 있던 스케모토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뭐, 1만?”

“예.”

“10만이 아니라 고작 1만?”

“그렇사옵니다.”

“허!”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1만이라니······.

아, 물론 오우치에 패퇴해 세가 급격히 줄은 작금에 1만의 군세를 막는 일은 버거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지리에 밝지가 않다.

1만의 군세는 지형을 이용한 전략전술로 능히 무찌를 수가 있는 것이다.

“스케사다, 지금 가용 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끌어 모을대로 끌어 모은다 해도 3천을 살짝 웃도는 수준이옵니다.”

“3천.”

“예. 한데 그건 어찌······.”

“옛 중국의 한나라에서는 1만이 채 안 되는 병력으로 40만이 넘는 병력을 격파한 전투가 있었다지.”

“곤양대전을 이르시옵니까?”

“맞아.”

“하오나 곤양전투와 작금의 상황은 많이 다······.”

“다르지, 달라. 하지만 1만이야. 1만이면 해봄직 하지 않은가?”

“1만이 전부일 리가 없사옵니다. 선발대가 아니겠사옵니까?”

“선발대라면 더더욱 가만 놔둬서는 안 되지. 적의 예봉을 꺾는 것. 그건 무사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지만 아직 적들이 어떤 의도로, 무엇 때문에 상륙했는지 조차 모르온데 섣불리 나섰다가는 낭패를 볼지 모르옵니다. 자중하시는 것이······.”

“자중만 해서는 될 일도 안 되지. 속히 준비하도록.”

“하오나 주군······.”

스케사다는 장장 반시진이 넘도록 스케모토를 설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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