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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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中宗實錄) 3월 5일 기사》
「···하여, 전(前) 경상좌수사 이종인【경상좌수사 이종인은 과거 왜구와 내통한 혐의로 주살 된 신공을 필두로 한 경상도 무신들의 해이한 기강을 바로 잡을 때 죄를 자책하며 사직했다】을 삼도병마사(三道兵馬使)로 불러들이고【이는 본시 상께서 이종인의 재주를 안타까워한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작금의 우리나라에 무재가 있는 인물이 전무한 때문도 있다】로 삼아 병선을 모으도록 했다. 바야흐로 때가 도래하니 신무위총관(神武衛摠管) 이백돌을 신무정왜군(神武征倭軍) 도원수로 삼고, 병조참판 장임을 부원수로 삼아 임금이 보훈청에서 전송하였다. 도원수 이백돌에게는 부월과 교서를 주고 안장을 갖춘 말(鞍馬)과 장검과 갑주, 섯다패를 내렸다. 또한 내방한 황제가 스스로를 남왜정총병관이라 칭하고, 주수라 이름하여 자리에 참가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사관들이 이 날 기사(記事)를 서로에게 미뤘는데 민망함이 지극하였다.
후인들은 들을지어다. 전하건대 이백돌은 상왕이며 백돌은 상왕의 어릴 적 불리던 아명이다. 주수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곧 황제이다.
이런 기행을 사신은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으니, 어찌 지금의 시절을 만나 한 번에 두 제왕의 광행(狂行)을 목도했겠는가? 두 제왕의 행동이 미치광이와 다를 바가 없으니 남녀로 만났다면 필시 천생의 연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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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 이백돌과 총병관 주수는 대장선에 함께 탑승해 있었다.
둘은 죽이 착착 맞았는데, 오죽 둘의 죽이 착착 맞으면 사람들이 둘을 가리켜 죽죽이라 부를 지경이었다.
이백돌이 척하면 주수는 탁하고, 주수가 탁하면 이백돌은 척을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대장선.
주수가 손에 든 뭔가를 척하니 내놓았다.
“이 장군. 어떠시오?”
역관이 주수의 말을 전하자, 이백돌이 호승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무릎을 탁쳤다.
“이를 말이오! 좋소이다, 주 장군!”
“주 장군께서 무릇 섯다에 내기가 빠질 수가 없으니 이번엔 뭘 걸겠냐 하시옵니다.”
“흐음··· 오늘은 좀 통 크게 걸어봄이 어떻겠소?”
“통 크게 말이옵니까?”
“이번 전쟁은 명과 조선 일본. 삼국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외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원과 고려도 하지 못 한 일을 명과 조선이 하게 되었으니 만대에 이르도록 회자될 것이라 하오며, 다만 그것과 내기가 무슨 상관이냐 물으시옵니다.”
“상관이 있지.”
“어떤···?”
이백돌이 눈을 희번득 부라렸다.
“주 장군, 통 크게 공 몰아주기 어떠시오!”
“몰아주기?”
“이번 전쟁은 필히 삼국에 영향을 미치오. 당연히 누가 공을 세우건, 공을 세운 자는 만대의 인구에 회자될 것이외다. 그러니, 그 공을 몰아주자는 것이오. 이번 내기에서 이긴 사람에게 말이지.”
“무슨 말인지 이해는 했다 하시옵고,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달라 하시옵니다.”
“자, 보시오. 주 장군. 상륙해서 소이전(쇼니)를 내가 잡게 되었소. 그런데 내기에선 내가 진 거지. 이때 소이전을 주 장군에게 인도하는 식으로 내기를 해보자는 것이오. 반대로 주 장군이 내기에서 졌다만 소이전을 주 장군이 먼저 생포하면 내게 인도하는 거고.”
“참으로 화끈한 내기같다고 하시온데, 다만 말씀하시길 내 이 장군과의 노름에서 승률이 3할도 채 되지 않으니, 그런 승부수를 던질 순 없고··· 일반적인 공 하나 정도 인도하는 식의 내기를 하는 게 어떻겠소? 라고 하시옵니다.”
“일반적인 공 하나?”
“소이전을 생포하는 쪽에서 인도하는 건, 역시 무리 같지만 소이전의 휘하에 있는 신하 두 셋을 인도하는 건 어찌 무리겠소이까? 이 정도로 타협하십시다. 아무리 내기라 한들, 내가 내기에서 져서 소이전을 인도하게 되면 속이 무척 쓰릴 것 같소.”
잠시 고민하던 이백돌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패 돌리시오.”
곧이어 뱃전에서 섯다판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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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명나라 문안현(지금의 원안현) 치소(治所).
수령이 감무를 돌봐야 할 치소에, 있으라는 수령은 없고 웬 비적떼가 무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꿀꺽.
대도(大刀)나 철퇴 따위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비적떼에, 치소의 관리들은 옴짝달싹도 못 한 채 그저 마른 침만 꼴깍 거렸다.
“처, 청건적······.”
젊은 관리 하나의 마른 입술을 사이로 청건적이란 이름이 거론됐다.
청건적이란 말에 비적떼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제법 명성을 떨치긴 했나 봐?”
“못 들었어? 청건적이라잖아, 청건적!”
“7개 현을 함락 시켰는데 명성을 안 떨치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말은 똑바로 하시게. 7개가 아니라 문안현까지 8개네, 8개.”
“아, 그렇구만.”
비적떼.
아니, 요사이 명성이 자자한 청건적들이 시시덕거리며 포로(?)로 잡은 관리들을 조롱하고 있을 때였다.
치소 뜰로 누군가 들어서자, 한껏 풀어진 모습으로 관리들을 희롱하고 있던 청건적들 모두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뜰로 들어서는 사내에게 알은 체를 했다.
사내는 이리 보나 저리로 보나 젊었다.
오히려 수염이 성성한 다른 청건적보다, 수염이 옅은 편이었고 이마에 주름살이 핀 청건적에 비하면 인상을 구겨도 내 천(川)자 하나 안 그려질 만큼 주름살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어린 사내의 이름은 유육(劉六).
1년 전 쯤, 완평현 지현 왕성의 횡포에 못 이겨 그를 살해한 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분명 의기가 아니라 혈기에 의한 우발적 범죄였었다.
당시에는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있었으니까.
실제로 왕성을 살해한 뒤, 유육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비적떼가 되었다.
행인들을 약탈하고, 관고를 급습하고, 장사치들의 봇짐을 털고······.
그런 그가 마음을 바꿔 먹은 건, 우연히 만난 문안현 선비 조수(趙鐩)덕이었다.
황성에 가고 있던 조수를 우연찮게 만난 육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그의 봇짐을 털려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조수가 그런 말을 했다.
사내대장부가 세상에 이름 떨칠 일을 해도 모자를 판국에, 이깟 도적질로 세상을 허비하고 있다고.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확실히 지금 세상은 난세였다. 난세에는 대장부로서 이름을 떨치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런데 이깟 도적질로 허송세월 하고 있었으니······.
육은 조수를 모사(謀士)로 모셨다.
한낱 비적떼의 두령에 불과했던 본인에게 조 선비가 뭘 믿고 몸을 의탁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 조 선비와의 만남 이후 육은 세상을 다르게 살아가고 있었다.
비적떼일 때는 관고를 급습했지만, 지금은 관아를 급습한다.
관아를 급습해서 수령과 관리들을 사로잡고 속된 말로 관아를 함락시킨다.
이렇게 하면 삶에 찌든 민중들을 구원하진 못 해도, 폭압에서 구제는 해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다보니 자연히 세가 늘어났고, 함락시키는 고을도 많아졌다.
이번에는 문안현을 포함해 벌써 그의 수중에 들어온 고을이 8개현이었다.
이처럼 비적떼로 살 때는 명분과 목표의식 없이 살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폭압 받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구제한다.
혈기 대신 의기를 드높인다.
그 때문에 유육은 청건적이라는 용어를 듣기 꺼려했다.
뭔가, 그 뜻을 훼손하는 비하적인 멸칭처럼 느껴져서 말이다.
터벅터벅.
육은 뜰로 들어서자마자 젊은 관리에게 향했다.
어깨에 대도를 척하니 얹은 모습에, 피칠갑까지 한 육에 관리가 딸꾹질을 했다.
히끅!
“청건적은 누가 청건적이야?”
“소, 소, 소문이······.”
“똑똑히 들어.”
“···”
“농민기의군(農民起義軍). 우린 청건적이 아니라 농민기의군이다.”
육의 청색 두건을 흘긴 젊은 관리가 곧 미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알겠소. 청건적이 아니라 노, 농민기의군.”
“옳지.”
육은 흡족한 표정으로 관리를 일별했다.
“그런데 유 수령(首領). 칠 장군은 어디갔소?”
피칠갑을 하고, 손에는 흉악한 무기 따위를 들고 있는 육과 다른 기의군들과는 달리, 쥘부채 하나 손에 쥔 채 마루에 앉아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선비 하나가 말했다.
농민기의군의 책략가라고 할 수 있는 조수였다.
“아, 조 선생. 칠이는 말 타고 도망간 수령놈 잡으러 갔소.”
“문안현 지현 양용삼(楊龍三)은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악질도 그런 악질이 따로 없습니다.”
“걱정 마시오. 칠 아우 말 타는 솜씨는 조 선생이 더 잘 알잖소. 그보다, 다음은 어디를 치는 게 좋겠소?”
“듣기로는 하북군과 요동군이 출병을 했다더군요.”
“드디어?”
“예. 가뜩이나 어수선한 하북과 요동이 이로인해 더 어수선해질 테니, 지금이 세를 효과적으로 불릴 수 있는 적기입니다. 문안현 남쪽에 있는 대성현(지금의 다청현)을 치시지요.”
“대성현이라. 좋소이다. 다음은 대성현으로 가지.”
얼마 후.
유육이 이끄는 농민기의군이 대성현으로 진격했다.
가히 농민기의군의 기세는 파죽지세 같았다.
***
「요동총병 개원(開元)이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적진에 이르렀으나 패퇴함.」
「패퇴하던 요동총병 개원이 고립되어 군사 천여명을 잃음.」
「요동 도적 진우영(陳禹永)이 요동총병 개원의 군대를 격퇴시키자마자 스스로 대왕이라 칭함.」
「진우영의 세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음. 현재 5천.」
의주목사 김경의(金敬義)가 올린 치서(馳書)였다.
치서는 보다시피 암울하기 짝이 없다.
글쎄, 요동에 도적이 창궐했는데 그 도적의 세가 가히 파죽지세 같다나 뭐라나.
갓직히 말해서 우리 나라랑은 상관 없는 문제겠지만, 문제는 창궐한 도적의 활동지가 요동이라는 게 문제다.
요동이랑 의주는 지척이니까.
고려 때 홍건적이 쳐들어왔던 것처럼, 저 도적 놈들이 여기까지 넘어올지 또 모르잖나.
그래서 김경의의 치서가 조정에 전해지자마자 긴급회의가 열렸다.
“설마 요동이 도적 놈들 수중에 들어가진 않겠지요?”
치서를 읽은 대신들의 표정은 모두 하얗게 질렸다.
요동총병의 군사가 패퇴 했다는 부분 때문인 것 같다.
노공필은, 하얗게 질린 것에서 그치지 않고 불안한 감정을 입 밖으로 꺼냈다.
부쩍 들어 신언지를 안 차고 나오시는 것 같다.
“아무리 진우영이 참칭을 했다 해도 한낱 도적 무리입니다. 도적 무리에 요동이 함락 되기야 하겠습니까?”
“맞습니다. 요동총병 개원도 무략이 탁월한 자라 황제께서 이번 원정길에 발탁하려 했다지 않습니까?”
황제는 한마디로 정의가 가능했다.
미친놈.
내가 가진 표현력으로는 이 이상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
얼마나 미친놈이냐면, 아니··· 미친놈이시냐면.
중국에 도적과 민란이 발생하고 있다는 건, 내가 즉위 때부터 있던 이야기였다.
즉위 때가 뭐야?
내가 진성대군이던 시절에도 간간이 듣던 소식이지.
하지만 지금처럼 중국의 사정이 급박해진 건, 미친 황제씨가 등극하고 난 뒤 부터였다.
일반적인 상식, 그러니까 보편적으로는 제 나라에 반란이 일어나고 봉기가 있으면 관군을 급파해야 한다.
원병을 보내기 보단 토벌대를 조직해 반란군을 때려잡아야 하는 거지.
그런데 황제께서는 토벌대를 조직하는 대신 고맙게도(?) 원병을 보내주셨다.
특히 도적 무리가 가장 빈번하게 활동한다는 요동과 하북의 군사들을 떼어다가 말이다.
요동총병 개원이 고작 3천의 군세를 가지고 진우영 무리를 토벌하려 했던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거다.
황제가 요동군 3만을 끌고 갔는데 무슨 군사를 부려서 진우영을 토벌하겠나?
아무리 무략이 탁월하고 무재가 있는 사람이라도 수적 열세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법인데 말이다.
다만 아까 말했다시피, 황제께는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중국이 어떻게 되건 나랑은 별 상관 없다. 도의적으로 안타깝긴 하지만 나는 황제처럼 미치지가 않았다.
중국 구하자고 우리 나라 파탄 낼 용기가 없단 거다.
“자자. 소란스럽게 굴 필요 전혀 없습니다. 중국의 사정이 급박하긴 하지만, 영상대감의 말처럼 설마 요동이 도적 무리에게 함락되기야 하겠습니까? 우린 우리 일만 잘 하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주에 성 쌓는 일 말인데요. 어디까지 진행 됐습니까?”
“관민들을 부역에 동원시켜 수축하고 있사옵고 거중기와 녹로 덕에 8개월 안에는 끝날 것 같다 하옵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설마 요동이 함락 될 일이 없긴 합니다만, 모름지기 국가의 일이란 늘 최악의 경우도 상정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최악의 경우엔 요동이 함락되고, 진우영의 무리가 조선으로 넘어 오는 것이니 만큼, 압록강과 두만강에 수축이 긴히 필요한 성보들은 죄 파악해서 품의(稟議)하도록 하세요.”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