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30화 (33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30화>

    ***

    “사랑해.”

    다짜고짜 찾아와서, 물 길러 간다는 거 막아 서서는 한다는 말이 사랑 타령이었다.

    사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머리에 이고 있던 항아리 무거운지도 모른 채, 누가 들었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엿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누, 누가 들으면 어쩌려구 그래요.”

    “들으라지.”

    “경을 칠 거여요.”

    다른 이가 경을 친다는 말을 했다면 2절에 이어서 3절까지 횡설수설을 늘어 놨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했다.

    아니, 사혜 앞에 있는 순간에는 극도의 떨림 때문인지 횡설수설을 하지 않았다.

    그녀 앞에 서면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했고, 할 말만 딱 하니 떠올랐다.

    지금도 그랬다.

    “너가 약속했지?”

    “네?”

    “무과에 급제하면 내 마음 진심으로 여겨준다고 했던 거.”

    “하지만······.”

    “안다. 너 역신의 딸인 거.”

    “···저번에는 혼담도 넣으셨다면서요.”

    무관 학교를 수료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어머니께서 혼기가 찬 양갓집 규수 댁에 매파를 보냈었다.

    매파를 받은 규수 댁에서도 긍정적인 태도였고, 당연히 어머니의 입은 귀에 걸렸었다.

    다만.

    “그거 없던 일 됐어.”

    아버지께서 손을 써주셨다.

    “왜 그러셨어요. 명문가 규수였다던데······.”

    “너도 명문가 규수였잖아?”

    “쉿! 누가 들으면 큰 일 나요!”

    질색팔색하는 사혜에 개똥은 마음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따지고 보면 사혜의 죄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역신을 아비로 둔 죄가 죄라면 죄였다.

    그런데 왜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여야 한단 말인가?

    괜히 화가 났다.

    치기 어린 분노 같은 감정이었다.

    개똥은 사혜가 이고 있는 항아리를 빼앗아 내려놓고는,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잠저 뒤편, 장독이 늘어진 장독대였다.

    “나 너 아니었으면 무과에 급제도 못 했어.”

    “원래 하셨을 거여요. 능력이 출중하시잖아요.”

    “아니, 못 했어. 너 때문에 무과 급제했고, 너 때문에 아버지한테 언성도 높여 봤어. 그런데 이제와서 내가 널 잊어?”

    “저도 도련님 마음은 알아요. 하지만, 역신의 딸년과 공신의 혼인이잖아요. 세인들이 알면 수군 거릴 거예요. 저는 상관없지만, 도련님은 무슨 죄겠어요?”

    “그럼 너는 무슨 죈데?”

    “네?”

    “너도 죄 없잖아. 네 아버지가 역적인 게 너 죄는 아니잖아. 스승님도 그러셨어. 사혜 넌 죄 없다구, 세상이 이래서 연좌 된 거라구. 먼 미래였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라고.”

    “···”

    “세인들이 뭐라 떠들건 상관 안 해. 이미 부모님도 허락하셨어. 공만 세우고 돌아오래. 공만 세우면 돼.”

    “하지만······.”

    “스승님도 괜찮대.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셨어. 혼인하게 되면 너 얼마든지 면천 시켜 준대. 그러니까··· 어라?”

    개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개를 떨군 사혜의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곧이어 사혜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는 것이냐?”

    훌쩍.

    “아니어요. 울긴 누가 운다구······.”

    울지 말라는 말은 너무 식상했다.

    스승님께선 말씀하셨다.

    자고로 여자는 마음이 약해졌을 때 사내에게 기대게 된다고.

    지금이 기회라는 사실은 코흘리개가 와도 알 수 있는 사실일 터.

    ‘이럴 때 스승님께서··· 아!’

    사혜 때문에 고민인 자신에게 스승님이 해주신 조언이 있었다.

    그걸 떠올린 개똥이었다.

    “사혜야.”

    “···네?”

    “저기 저 꽃 보이느냐?”

    사혜가 고개를 돌렸다.

    장독대 담장 너머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서는, 담장 밑으로 고개 숙이고 있었다.

    “매화 말이어요?”

    “그래, 매화.”

    끄덕.

    “거기 가서 서보아라.”

    우는 사람 달래긴 커녕 매실나무 옆에 가서 서보라니··· 황당했지만 사람이 경황이 없을 땐 자잘한 문제는 신경이 안 쓰이는 법이었다.

    훌쩍거리던 사혜가 의심 없이 매실 나무 옆에 가서 섰다.

    “사혜야! 사혜 어딨느냐!”

    “···?”

    “네가 매화인지 매화가 너인지 구분이 안 간다, 거기 있으면 어서 말을 해보거라!”

    뒤늦게 상황이 이해 됐는지 사혜가 풉,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거라. 내가 돌아올 동안. 할 수 있겠지?”

    옅게 미소 짓는 사혜였다.

    ***

    -사혜야······.

    -도련님······.

    남녀상열지사라 했던가.

    이 남녀상열지사를 훔쳐보는 못 돼 쳐먹은 이가 있었으니······.

    “좋아 죽네, 좋아 죽어.”

    바로 나다.

    “저렇게 좋을까요?”

    바로 나랑 덕산이다.

    “좋을 때긴 하지. 너도 그랬잖아? 전금이 없으면 죽겠다고 울고불고.”

    “울고불고 까진 안 했습니다요.”

    “내 기억이 왜곡이라도 됐다는 거냐?”

    “그건 아니지만······.”

    “전금이한테 잘 해라.”

    “갑자기 말이 왜 그렇게 됩니까요?”

    “갑자기 생각 나서 갑자기 말 했다, 왜? 안 되냐?”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지금도 잘 하고 있습니다요.”

    “요새 보니까 궁녀들 힐끔거리면서 헤벌쭉하더만 뭘 잘 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남들이 들으면 오해 합니다요! 궁녀들을 힐끔거렸다기 보다는··· 에, 뭐가 묻어가지고 잠깐 쳐다본 건데 그걸 갖다가 힐끔거렸다구 하시면은 쇤네가······.”

    “뭐, 얼굴에 예쁨이 잔뜩 묻어서 힐끔거렸단 거냐?”

    “아뇨!”

    덕산이 질색팔색을 하며 날뛴다.

    궁녀는 왕의 여자다.

    궁녀랑 정분이 나는 순간, 목숨줄 구명 받긴 힘들다.

    그런 덕산이가 우스워서 키득키득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선남선녀를 바라봤다.

    서로 애틋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선남선녀다.

    “저 둘 괜찮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사혜는······.”

    “뭐, 역적 딸년이라고? 그게 뭔 상관이냐. 나도 괜찮고 형님도 괜찮다는데.”

    “아뇨, 그게 아니라 나중에 말입니다요.”

    “나중에? 무슨 나중에?”

    “정말 황제폐하께서 저 둘 혼인할 때 쯤 북경에 오라고 하면 어떡합니까요?”

    16세기에 F4란 말이 통용 될 턱이 없지만, 여기도 F4가 있다.

    나, 형님, 황제, 숭재 씨.

    못 믿겠지만 이 네 명이 F4의 멤버(?)다.

    정사 때문에 네 명이 함께 모여서 잘 놀진 못 하지만, 어쨌든 형님 덕에 나도 황제랑 붙어 먹게 됐고 내가 황제랑 붙어 먹게 되니 숭재 씨도 이 F4의 멤버로 들어오게 된 거다.

    여담인데 외모는 이중에서 내가 제일 나은 것 같고.

    좌우지간, 덕산이가 말한 문제는 뭐냐면 황제가 우연히 개똥이 일을 알게 됐다.

    알게 된 계기도 우스워.

    나랑 형님이랑 황제랑 숭재 씨랑, 네 명이 간만에 모여서 팀 나눠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 개똥이가 찾아왔다.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사혜를 달라나?

    전후 사정 모르는 황제로선 당연히 궁금해 할 테고, 형님이 설명을 해줬다.

    그리고 내막을 알게 된 황제가 고놈 참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면서, 모름지기 사내라면 그 정도 깡다구는 있어야 된다면서 혼례 치르게 되면 북경에 놀러오라지 뭔가?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황제는 진심으로 개똥이를 초대한 게 분명했다.

    긁적긁적.

    “그렇게 되면 나도 못 간 허니문 여행을 개똥이가 가는 건가.”

    “허, 허니··· 문?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요?”

    “아냐, 그냥 혼잣말.”

    “전하 뫼신지가 몇 년이나 됐는데도 도통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요.”

    “나도 날 잘 모르겠는데 너가 날 알면 되겠냐?”

    처음부터 저 두 선남선녀를 훔쳐보려고 했던 건 아니다.

    예전에 2번인가 써먹었던 화투패 가지러 왔다.

    놀러 가는 게 아니고 전쟁하러 가는 건데, 배 타고 십수일 지루해서 어떻게 버티겠냐더라고, 황제가.

    지루할 땐 또 화투가 제일이잖아?

    이 화투패 가지러 온 거다. 가져다가 황제랑 형님 가르쳐드리면 좀 좋아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괜히 훔쳐보다 걸려서 개똥이 무안하게 만들지 말고, 챙길거나 챙겨서 나가자.”

    “네.”

    ***

    꿈인가, 데자뷔인가.

    어디서 본 듯 한 광경이다.

    보훈청 대로변.

    거리를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 것도 모자라, 가가호호의 지붕에도 사람들이 올라가있다.

    임금님 행차에 어떻게든 용안 한 번 보겠다는 사람들이었다.

    몰려든 인파에, 간만에 대목 잡은 엿장수들은 엿판을 길게 늘어뜨리고 호객행위에 여념이 없고, 병사들은 호객행위 하는 엿장수 막는다고 여념이 없다.

    “와아아!”

    “황제폐하께서 오신다면서?”

    “황제폐하가 아니라 총병관이라던데?”

    “총병관? 명나라 장수가 폐하 대신 가는 건가?”

    “나도 잘 모르겠네. 황제가 총병관이고 총병관이 황제라는데······.”

    “황제가 총병관이고, 총병관이 황제라니 무슨 말인가, 대체?”

    “원, 무슨 말장난인지 나도 잘 모르겠네.”

    그리고 수천, 수만 인파가 내지르는 함성과 소음에 내 정신은 몽롱해져간다.

    몽롱해져가는 정신에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 즈음.

    “전하, 총병관과 대장군 들고 있사옵니다.”

    상선 대감의 목소리가 날 깨웠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이거 꿈 아니다.

    아! 이거! 데자뷔도 아니다!

    아! 시발! 그럼 뭐지, 이 얼탱이 없는 상황은?

    “전하, 전하.”

    역시나, 아득해져가는 내 정신을 일깨워준 건 상선 대감이었다.

    “아, 예.”

    “전교를 내리셔야 하옵니다.”

    “아, 전교.”

    뒤늦게 형님을 바라봤다.

    “···이백돌은 앞으로 나오도록 하라.”

    그리고 말했다.

    “신(臣) 신무정왜군 도원수 이백돌!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여태 상왕의 인격이던 형님은 오늘 오전 12시를 기해 도원수 이백돌로 인격 체인지(?)를 하셨다.

    비장한 얼굴에서, 능청 맞은 상왕의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꿈 아니고, 데자뷔도 아니다.

    한숨을 내쉬고 예문관에서 써준 글을 바라봤다.

    “옛말에 하늘이 하는 일을 군주가 알면 그 나라는 흥성한다 했다. 그럼 하늘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백성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이다. 예부터 백성의 마음을 들여다 본 군주가 천하를 내려다보고 그 나라가 흥한다 하였으니, 지금의 민심이 바로 그러하다. 흉계를 획책하는 저 왜적들의 간사함이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도망하여 숨는 신출귀몰한 재주는 날이 갈수록 신묘해졌다. 여기서 놈들의 소굴을 때려 부수지 않는다면, 10년 뒤에는 어찌 바뀔 것인가? 아마 남쪽 해안이 편안한 때가 없을 것이다. 지금 나의 지극한 뜻이 이러하므로, 신무정왜군은 왜구를 소탕하는 일에 망설임을 갖지 말라. 천병이 너희와 함께 하고, 산천의 온신령의 가호가 너희에 있으리라. 이상.”

    대장군 이백돌의 오키나와 출정식 때에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연설도 더듬거리면서 했던 것 같은데 어처구니 없는 일도 한 번이 어처구니 없는 거지, 두 번은 적응이 되는 건지 이번에는 제법 매끄럽게 연설을 마친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출정식은 오키나와 출정식 때와는 살짝 다르다.

    도원수 이백돌이 물러간 대신, 당악(唐樂)과 함께 남왜정총병관 주수가 망토 자락 휘날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본 총병관이 왕에게 이릅니다. 왕의 나라가 동국에 나라를 세우고, 천조의 정삭(책력)을 받들게 되었으니 바야흐로 백여년 넘게 조공을 바치고 충순하였습니다. 이에 성신(聖神)하시고 자비하신 우리 황제폐하께서는 귀방의 어려움을 외면치 아니하시고, 본 총병관과 함께 오만 군사를 원병으로 보냈으니 그 덕의가 매우 후합니다. 그러니 왕은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고 온 천병이 마땅히 왜적들을 무찌를 것입니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다중이가 둘이나 되니 혼란스럽다.

    얼른 내보내는 게(?) 속 편할 것 같아서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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