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29화 (32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29화>

    ***

    “다네히사(胤尚)는?”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의 질문에 지바(千葉) 가(家)의 당주인 다네시게(胤繁)는 면목이 서질 않는지, 스케모토의 시선을 회피한 채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리고 답답한 그의 모습이 스케모토의 화를 돋궜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일을 크게 만드냐 이 말이오!”

    털썩!

    “면목 없사옵니다······.”

    “가뜩이나 화의를 빌미로 겁박하는 오우치 놈들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이제는 내 그대들까지 신경 써야겠소? 언제 오우치 놈들이 거병을 할지 모르는데 그대들까지 신경을 써야겠냐 이 말이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사옵니다.”

    연신 씩씩거리던 스케모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손이 하나라도 모자란 판국에 잘 해보려 한 거겠지만, 일을 벌려도 너무 이상하게 벌려놨다.

    스케모토는 신경질적으로 다네시게를 일별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서 근신하시오.”

    다네시게가 무릎 걸음으로 물러나자, 다네시게는 결국 화를 참지 못 한 채 다구(茶臼)를 내던졌다.

    “주군. 다네히사의 일도 일이지만, 무엇보다 조선이 걸리옵니다.”

    오우치 가의 일전에서 패퇴한 쇼니 가였다.

    멸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쇼니 가를 되살린 건, 여러 중신들이 합심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스케모토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노년인 요코다케 스케사다(横岳資貞)가 있었다.

    “조선이 걸린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때문에 스케모토 역시 스케사다를 정중히 대했다.

    그를 낳아준 건, 쇼니 마사스케(少弐政資)였지만 오우치와의 일전이 있었던 메이오6년(1497년) 자결한 아비를 대신해 그를 길러준 건 스케사다였다.

    “조선과 오우치 놈들이 협력을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요?”

    “그런데 다네히사가 일을 그르쳤습니다. 그르쳐도 보통 그르친 게 아니지요.”

    날이 갈수록 군자금이 바닥나니 어떻게든 군자금을 마련해보려 한 짓이었을 것이다.

    다만 결과론적으로는 스케사다의 말처럼 일을 그르친 게 됐다.

    조선에 적대감만 심게 됐으니까.

    “한데 첩보에 의하면 오우치 가에 조선 사신이 왔다 간 적이 있다 하옵니다.”

    “그건 나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한데 뭐··· 서로 협력하기로 했으니 사신을 주고 받음은 당연한 이치 아니겠소? 그게 왜?”

    “아무리 서로 상생 하기로 했다지만 조선이 먼저 사신을 보낸 적은 없지 않았습니까?”

    “흐음.”

    그러고 보니 그게 의아하긴 했다.

    조선은 콧대가 높은 족속들이었다. 뭣만 하면 자신들을 오랑캐라 깔보고, 쪽바리라 얕잡아 불렀다. 국가대 국가의 일에서도 비슷했다.

    격이 떨어진다고 해서 사신을 먼저 보낸 적은, 적어도 최근엔 없었다.

    “혹 조선이 물리적인 도움을 오우치에 주기라도 한다면은······.”

    “물리적인 도움? 원병 말인가?”

    “예.”

    “설마. 지금까지의 조선을 생각해보십시다. 원병이 웬말이겠습니까.”

    “하지만 주군께서도 유구국의 일화를 듣고 놀라시지 않으셨습니까?”

    멈칫.

    유구국을 잊고 있었다.

    조선이 유구국을 멸망 시켰다는 말에 어찌나 놀랐던지······.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조선이 굳이 오우치를 도울 까닭이······.”

    “없지요. 없사옵니다. 하지만 안일하게 구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옵니다.”

    “어찌했으면 좋겠다는 거요?‘

    “히라도(平戸) 해안을 손봤으면 하옵니다.”

    해안을 손 보자는 말에 스케모토는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지금 해안을 손 본다면 괜히 오우치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을 텐데?”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해야만 하옵니다.”

    “음. 조선이 오우치에 붙어 원병을 보낸다는 것도 추정일 뿐이잖습니까. 지금 같은 시기에 굳이 오우치 놈을 자극하는 건 아닌 듯 합니다.”

    “하지만 주군!”

    스케모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화의부터 맺읍시다. 화의만 맺으면 모든 게 뜻대로 이뤄질 겁니다. 화의만 맺고 와신상담하면서 훗날을 기약합시다.”

    화의에 집착하는 스케모토에 스케사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럼 결국 이 평호(히라도)가 관건인 건가?”

    이 조선에는 황제가 입조(?) 한 뒤로 살맛 난 사람이 몇 사람 있었다.

    누군가가 바로 떠오른다면, 그 사람이 맞다.

    그래, 형님이다.

    형님은 귀국한 뒤로는 거의 창덕궁에서 황제랑만 지내고 있었다.

    아, 처음부터 황제랑만 지냈던 건 아니고, 처음에는 아기새가 어미새 찾는 것처럼 본인만 찾아대는 황제에 질색을 한 형님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확히 말하면 황제랑 술 먹고 야자타임 한 번 한 후로 만날 붙어 다녔다.

    창덕궁에서 황제랑 당구다··· 사냥이다··· 연회다··· 아주 옛날 같았으면 탄핵소가 무더기로 올라왔을 만큼 황제와의 노름에 여념이 없는 형님이었다.

    그런데 노름에 빠진(?) 형님도 이 경복궁에 행차하게 만드는 날이 있었으니··· 바로, 오늘처럼 작전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하루 24시가 모자랄 만큼 황제랑 놀아 제끼는 형님도 이 작전 회의가 있는 날 만큼은 필히 참석하신다.

    “그렇사옵니다.”

    좌우지간.

    형님이 지도의 평호(平戸)라고 표기 된 부분을 가리키며 묻자, 병조참판 장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장임 기억하지?

    왜 있잖아.

    제주목사로 있다가 공 세웠던 양반.

    사람이 좀 독선적인 게 흠인 것 같긴 하지만 이대로 지방에서 썩히기는 아까웠다.

    이만한 무재를 가진 사람도 흔치 않고 말이지.

    그래서 발탁했다.

    말이 발탁이지, 파격적인 인사 조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장임은 학연, 지연, 혈연.

    이 3연 중 어느 하나라도 해당 되는 게 없었다.

    따로 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주도에서 선견지명을 갖고 왜구를 막았던 일만 아니었다면 제주목사 임기를 끝으로 공직 생활도 끝났을 위인이란 말이지.

    그런데 말했다시피 이대로 썩히기 아쉬운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병조참판에 제수했고, 신무정왜군(神武征倭軍)이라 명명 된 이번 정벌군에 부원수로 임명했다. 아, 병조참판에 제수한 건 내 뜻이지만, 부원수로 임명할 땐 형님의 입김이 작용했다.

    도원수와 케미가 잘 맞을 것 같다나?

    참고로 도원수는 이백돌인데, 이백돌은 다들 알 거고.

    “그럼 일기도(이키섬)는?”

    “일기도 말이옵니까?”

    “평호에 성공적으로 상륙하려면 일기도 역시 배제 할 순 없을 텐데?”

    “일기도는 배제한 채 상륙함이 이로울 듯 싶사옵니다.”

    “어째서? 일기도를 배제한 채 상륙한다면 후미가 공격 받는 문제는 둘째치고, 보급로가 차단 당할 터인데······.”

    “소종도 덕이옵니다.”

    장임이 대마도(對馬島)라고 표기 된 섬을 가리켰다.

    “소종도?”

    “일기도가 구주(큐슈) 상륙전에서 중요한 까닭은 보급로 때문이옵니다. 전하의 말씀처럼 일기도를 차지하지 않고서는 보급로가 차단 당해, 상륙을 하더라도 고립 당하고 말 테니 어찌 이로운 형국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소종도가 경상도에 편입 되기 전의 이야기이옵니다.”

    “계속해보라.”

    대마도를 가리킨 장임은 이어서 일기도를 가리켰다.

    “옛 고려와 원의 원정을 살펴본다면 그들 역시 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기도를 점령 했으니 이는 보급 문제 때문이었사옵니다. 수만대군을 일으킨 상황에서, 고작 대마도와 일기도의 수천 도민들을 두려워하진 않았겠지요.”

    “그랬겠지.”

    “그런데 지금의 형세는 이 소종도를 병참기지 삼을 수 있게 된 형국이옵니다. 때문에 고려와 원의 원정 때와는 달리 일기도를 점령할 필요가 없는 것이옵니다. 이 소종도를 병참기지로 삼고, 상륙군의 보급을 잇게 한다면 굳이 일기도를 점령하는 데에 시간과 인력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니 어찌 일기도에 연연하오리까?”

    “일기도는 작은 섬이 아니다. 일기도에서 보급로를 차단하려 들면?”

    “물론 일기도는 작은 섬이 아니옵니다. 하오나 놈들이 어찌 경거망동하겠사옵니까?”

    “경거망동?”

    “일기도에서 연합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보급선을 공격하려면 본인들의 집부터 비워야 하옵니다. 역공을 당할 우려가 있을 텐데 어찌 경거망동하여 보급선을 공격하려 들겠사옵니까?”

    나는 그런가 보다 싶었지만, 장내에 있는 모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형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연 그렇겠구나. 그럼 일기도는 배제한 채 평호에 상륙하고 ······.”

    “저희는 평호보다 여기 박다(지금의 후쿠오카 일대). 박다에 상륙하는 것이 상책일 듯 하옵니다.”

    “언제는 평호에 상륙하자지 않았나?”

    “지금 명군의 황제 직속군 같은 경우에는 저희와 함께 움직이기로 되어 있사옵니다. 직속군과, 신무정왜군을 모두 합해 1만3천이 넘질 않사옵니다. 이들을 데리고 평호에 상륙 했다가는, 지리멸렬 할 것이옵니다. 그러니 여기 박다.”

    모두의 시선이 박다로 옮겨갔다.

    “박다에 상륙하여 거점을 마련하고, 놈들의 이목을 끈 뒤에 하북과 요동군이 평호에 상륙하길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그럼 관건은 하북과 요동군이 예정에 맞추냐, 맞추지 못 하냐가 되겠군.”

    “그렇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이 작전에 대해 뭐라 하시던가?”

    대답은 장임 대신 권균이 했다.

    “황제께서도 이 수가 상책 같다 하셨사옵니다.”

    “그래? 그럼 뭐, 굳이 작전을 변경할 필요가 있나. 이대로 진행하지.”

    작전 회의가 순조롭게 진행되듯이, 시간도 순조롭게 흘러갔다.

    출정일은 3월 5일이었다.

    ***

    결전의 날이 드디어 밝아오고 있었다.

    출정일까진 앞으로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출정일이기 때문에, 신무왜정군에 소속 된 장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대에서 유언장을 작성했다.

    권관직과 함께, 이번에 창설된 신무위 제1연대장 2대대 5중대 중대장직을 맡은 개똥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관학교에서 유언장을 작성한 장병들에 한해서는 4박5일 특별 휴가가 주어졌다.

    4박 5일이라는 극히 짧은 휴가 기간이기 때문에 한양에 적을 둔 장병이 아니고서는, 모두들 휴가를 반납한 채 부대에서 쉬었지만 한양에 적을 두고 있는 개똥은 다행스럽게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4박 5일 휴가를 부모님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어디 부모님 뿐이겠나?

    -왜, 안 먹냐?

    -···스승님도 이런 심정이셨겠군요.

    -전쟁 나가더니 사람이 왜 이렇게 차분해졌어, 안 어울리게.

    -···

    -얼씨구? 죽으러 가냐? 먹어, 인마. 그리고 전쟁 암 것도 아냐. 나도 갔다 왔는데, 어? 알잖아? 너 이 스승님이 여진족하고도 싸워보고, 반란군하고도 싸워보고 어? 근데, 암 것도 아냐. 막상 지나고 보면 말이지?

    간만에 만나 잔소리 대신 흰소리를 늘어 놓으시는 스승님도 보고,

    -개똥이 네가 코흘리개 시절에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 장성하여 나와 함께 정왜(征倭)에 참전한다니 감회가 새롭구나.

    -삼촌 전하··· 정왜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삼촌도 알다시피 제가 중대장이잖습니까? 반면에 삼촌은 도원수로 참전하게 되셨구요. 혹시나 제 휘하에 있는 애들이 알면 곤란하니까 삼촌이 최대한······.

    -우리 개똥이는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서 보기가 좋구나.

    -일관성하니까 생각난 건데······.

    -당구나 치자꾸나.

    삼촌 전하를 만나 당구도 쳤었다.

    -안 가면 안 되느냐?

    -사나이 의개똥··· 이미 가기로 마음 먹었으니 어찌 안 갈 수 있겠습니까?

    -네 마음이 그러하거늘 내 어찌 네 마음을 돌릴 수 있겠느냐? 다만······.

    -말씀하소서, 저하.

    -출정하기 전에 당구나 치자꾸나.

    벗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세자 저하를 만나서도 당구를 쳤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지 못 했다.

    “사혜야··· 크흑.”

    괜히 출정 전에 사혜를 보면 간신히 다잡은 마음이 흔들릴까 싶어, 4박 5일의 일정 속에서도 사혜를 보지 않았는데 휴가 마지막 날이 되니 이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시면 보고 오시지 그러십니까요?”

    몸종 금질이 새끼를 꼬다 말고 말했다.

    개똥은 그 말을 기다렸단 듯 대답했다.

    “그럼 그럴까?”

    “···예. 이미 보고 오기로 마음도 정하신 것 같은데, 후딱 보고 오십시오.”

    “네가 정 그리 말한다면··· 더군다나 너도 이제 나 때문에 전장터에 끌려 가게 됐으니 따지고 보면 전우가 아니냐? 전우나 다름이 없는 것인데 전우인 네가 그리 말하는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예예. 그러니 후딱 다녀오십시오.”

    “전우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생각해보면 전장터란 게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곳이 아니냐? 삼촌 전하나 스승님이나 내가 죽을 일은 절대 없다 말하지만, 사람 인생이란 모르는 거기도 하고. 그런데 전장터에서 죽어 갈 때 회상할 사혜와의 이렇다 할 석별의 정이 없으니 죽어도 곱게 죽진 못 하고 원귀가 돼서 구천을 떠돌 거다. 구천만 떠돌면 다행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구주(큐슈)가 좀 먼 곳이냐? 이역만리에서 구천을 떠돌면 얼마나 억울해 돌아가시겠냐? 그런 의미에서······.”

    “예, 죽어서 원귀 되면 안 되니까 보고 오십쇼.”

    “네가 그리 사정하니 내 어쩔 수 없이 보고오마!”

    “···제가 언제 사정을 했··· 도련님?”

    금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까지 계시던 도련님인데 언제 뛰어나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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