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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28화 (32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28화>

    ***

    “이를 묵과 하는 것은 매국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쇼니가 철천의 원수라지만 결국 외세에 있어서는 힘을 합쳐야지 않겠습니까.”

    “주군. 수백년 전의 분에이(文永) 사건을 떠올리십시오. 우리 조상들 모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고려와 원에 맞써 싸우지 않았었습니까?”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는 대신들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요시오키는 한참이 지나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대학연의》를 읽어 보았는가?”

    지금의 주제와 백만리는 동떨어진, 동문서답에 가까운 말이었다.

    때문에 진지하게 회의에 임하고 있던 가신들 모두 김이 샌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가신들을 일별한 요시오키는 서안의 대학연의를 바라보다가 피식거렸다.

    설마 이 말을 인용할 줄은 몰랐다.

    다만 지금은 그 말을 인용하기 아주 적절한 상황 같았다.

    “《대학연의》에는 실로 고금의 득실이 하나도 빠짐없이 실려 있다. 수신제가(修身齊家)는 물론이고 치국의 도가 한꺼번에 담겨 있으니 과연 제왕으로서는 필히 익혀야 할 서적인 것이다.”

    “주군. 지금 《대학연의》니 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사옵니까? 황제가 군사를 일으켰사옵니다!”

    가신1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평소 요시오키의 위용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데 답답한 소리만 해대는 요시오키가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역시나 평소라면 불호령이 떨어져도 골백번은 떨어졌을 일이지만, 요시오키는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대학연의》를 챙기고는 책을 펼쳐 들었다.

    “무릇 ‘천하의 일은 가까운 것부터 걱정해야 한다' 했다. 지금 가까운 일은 쇼니의 일이다. 그 뒤의 것을 걱정하는 것은 먼 것을 걱정하는 것이니 어찌 이로우랴?”

    “하오나 주군!”

    버럭 소리치는 가신에 인상을 구긴 요시오키가 들고 있던 대학연의를 예의 가신에게 내던졌다.

    “분에이 사건을 언급하기 전에! 힘을 합치자 말 하기 전에!”

    “···”

    “황제의 진노를 어찌 살지부터 말함이 온당하지 않은가? 그대들의 말처럼 황제에게 맞선다고 치지. 황제가 무려 50만대군을 일으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황제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도 모두 주살하겠다 엄포를 놨단 말이다! 이 50만 대군을 어찌 막을지 생각은 하고서 그 따위 망발들을 찌걸이는 것이냐?”

    “주군. 허장성세일 것이옵니다. 황제가 어찌 50만대군을 동원 할 수나 있겠으며······.”

    “그랬다가 정말 50만대군이 일본 전역에 상륙하면?”

    “에?”

    “그랬다가 정말 50만 대군이 일본 전역에 상륙을 한다면 어찌 할 것이냔 말이다. 네가 책임을 지렷다?”

    “···”

    “멍청한 놈들 같으니! 국가의 일에 어찌 요행 따위를 바란단 말인가! 설마 이번에도 분에이 사건 때처럼 신이 태풍(神風)을 일으켜 줄 거라 믿는 건 아니겠지?”

    분에이 사건.

    분명 수백년이나 된 과거의 일이지만, 직접 당시를 살아보진 않았지만 이 신의 바람이 없었다면 어찌 됐을지 대충 가늠이 간다.

    신의 바람이 아니었다면 일본 전역은 여몽 연합군에 쑥대밭이 됐었을 터였다.

    문헌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맹렬한 기세를 언급하고 있었다.

    여몽 연합군의 진격로에 있던 쓰시마.

    이 쓰시마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 하고 연합군에 섬을 내줬었다.

    하물며 지금은 조선과의 약조에 의해 이 쓰시마가 완전히 조선령으로 편입 된 상태다. 쓰시마를 전진기지로 삼는다면, 이쪽에선 알 방법이 없단 말이다.

    그 다음 이키섬.

    역시나 하루만에 섬이 함락됐다.

    문헌에 의하면 전황 자체는 절대 일본에 유리하지 않았다.

    신의 바람이 불기 전까진 말이다.

    이 신의 바람 덕에 당시 막부군이 외세를 몰아 낼 수 있었던 것이지, 무슨 당시 막부군의 무용과 조직력이 특출나서 그들을 몰아 낼 수 있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신의 바람이 불어줄지는 미지수였다.

    더군다나 조선과 명이 과거 여몽 연합군의 패착을 염두에 두지 않을까?

    어떻게든 태풍은 피해서 오려고 할 게 뻔하다.

    그런데 지금 쇼니와 손 잡고 일심단결해서 외세를 몰아내는데 힘 쓴다?

    다 같이 죽잔 것 말이었다.

    “무엇보다 이 기회에 눈엣가시인 쇼니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지 아니한가?”

    황제가 바라는 것은 쇼니가 벌인 짓에 대한 응분의 대가였지, 큐슈라는 영토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은 가만히 앉아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에 가까웠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사옵니다.”

    요시오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그땐 우리와의 전쟁이 되겠지.”

    “···”

    “나 선생!”

    나석수의 사고(思考)로는, 화가 난다고 해서 경전을 내던져버리는 일은 상상조차 불경한 일이었다.

    가신단의 말석에 위치해 눈치코치로 회의를 듣던 나석수는 가신1의 얼굴을 맞고 날아간 대학연의를 챙기다가 갑작스런 요시오키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에!”

    “나 선생도 같은 생각이시지?”

    “어··· 물론입니다! 주군의 뜻이 바로 제 뜻 아니겠습니까?”

    피식거린 요시오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만 가지, 나 선생.”

    “예!”

    ***

    진성대원군이 보위에 올라 왕이 되고 나서 바뀐 사회 분위기를 한 가지 꼽으라면 심계천하(心系天下)를 꼽을 수 있었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세상을 걱정한다, 심계천하.

    세상 걱정이야 지위가 높든 낮든 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이게 바로 진성이 보위에 오르고 나서 바뀐 사회 분위기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대부와 그 자제들은 전쟁이라면 질색팔색하며 회피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불과 몇 년만에 그런 인식에는 변화가 생겼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려거든, 그에 따른 모범을 보여야 한다.

    물론 이 모범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보이는 방법도 있겠고, 학문대성으로 보이는 방법도 있겠으며, 천하에 명성을 떨쳐 보이는 방법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위의 방법들은 쉽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운 방법은 전쟁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금상도 과거 대군인 시절 그랬으니까.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왕이 지위에 따른 사회적 의무를 운운하면 기가 차는 걸 넘어 코까지 차겠지만, 금상은 그 사회적 의무를 싫든 좋든 대군 시절부터 이행한 위인이었다.

    왕자로서 북정에 부원수가 되어 참전했고, 부원수로서 반란군을 평정했었다.

    물론 사회적 분위기가 바뀐 데에는 진성의 일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반란군 평정을 함께 한 별충위의 일화들도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별충위는 사대부 자제들로 구성되었고, 반정 당시 이들이 중심이 돼서 박원종의 난을 진압했었다.

    뭐, 좌우지간.

    이런 복합적인 일들이 한데 얽히고 설켜서 요즘 사회 분위기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 한 가지 모범은 보여야 한다 정도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한 가지 모범도 못 보인 사람들은 마치 음서로 출사한 관리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그건 공신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관학교, 훈련장.

    훈련장 한복판에는 소년 하나가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소년은 이미 무관학교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인사였다.

    공신이면서도 이미 무과에 급제한 무신이었다.

    이 말은 바꿔말하면, 이미 출세가 보장 되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관학교에 입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교해서 다른 훈련병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고 있었으니 당연히 이 무관학교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그에 따른 소문도 여러 가지였다.

    “오늘도 나와 계시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칼 안 휘두르면 죽는 병이라도 걸리셨나?”

    훈련병1이 수군거리자, 그 말은 훈련병 2가 받았다.

    “그러게 말일세. 듣자하니 선달(문무과에 급제했지만 아직 벼슬은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서?”

    “선달 씩이나 되시는 분이 왜 무관학교에 있대?”

    “난들 아나.”

    쏴아아아-.

    밖에는 아침부터 내리던 이슬비가 점차 장대비로 바뀌는 중이었다.

    장대비가 내림에도 훈련에 여념이 없는 예의 소년에 훈련병 3이 끼어들었다.

    “내가 들었는데 말이지?”

    “응?”

    “정인 때문이라더군.”

    “정인? 무슨 정인?”

    “정인이란 말이, 연모하는 정인 말고 또 있단 말인가? 사람 답답하긴.”

    “아, 그래. 근데 정인 때문이라니 그건 무슨 말인가?”

    “이건 자네들만 알아야 하네.”

    끄덕끄덕.

    “정인이 노비라더군.”

    훈련병 1,2가 기함을 내질렀다.

    “노비!?”

    “쉿!”

    “하지만 어찌··· 아무리 세상이 요지경이 됐다지만 공신과 노비가 정인이라니··· 허어. 부친이 알면 뒷 목 잡을 일이구만.”

    훈련병 2의 말에 3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선달님 부친도 알고 계실 걸?”

    “노비랑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거 말인가?”

    끄덕.

    “아무리 창졸간에 출세한 집안이라지만 노비랑, 허어······.”

    “노비도 보통 노비가 아닐세.”

    “보통 노비가 아니면?”

    “듣기로는 옛날에 애비가 역모에 가담해서 노비가 됐다더구만.”

    “그런 노비랑 정을 통한단 말인가?”

    “정을 통한다 뿐인가, 말하지 않았나. 정인 때문에 무관학교에 입교했다고.”

    “아, 사람 감질맛 나게시리··· 뭔데? 계속해보게.”

    “선달님 부친이 노비랑 정을 통한 사이란 거 알고 노발대발 했겠나, 안 했겠나?”

    “했겠지?”

    “그런데 저 선달님 정인을 도저히 포기 못 하겠다고 하셨다지 뭔가.”

    “대단한 사랑꾼이구만. 그런데 그거랑 무관학교랑 무슨 상관인데?”

    “노발대발하던 선달님 부친께서 이번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인정해주겠다 하셨다더구만.”

    훈련병 1과 2가 역시나 기함을 터뜨렸다.

    “저, 전장에서? 독자라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더 알다가도 모를 집안인 게지.”

    “허어. 전장에 등떠민 부친도 부친이지만, 정인 때문에 전장터 가겠다고 한 선달님도 대단하구만 그래. 아, 근데 저 선달님 존함이 어떻게 되나?”

    훈련병 3은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오는지 연신 피식거렸다.

    ***

    “도련님! 도련님! 이러다 고뿔 드십니다요.”

    장대비가 쏟아짐에도 칼을 휘두르던 개똥은 그의 몸종 금질이의 말에 옅게 웃었다.

    “고뿔? 아, 금질아. 고뿔이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왜 고뿔은 고뿔인 걸까? 그러고 보면 스승님은 고뿔을 감기라고도 하셨는데······.”

    “···”

    금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통 집중을 못 하시는 그의 상전이었다.

    그런 상전이 어떻게 무과에 급제 했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주인마님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전장터로 등떠밀다니··· 그런데 또 그 생각을 하면 상전도 이해가 안 간다.

    가란다고 가겠다니······.

    하지만 본시 봉황의 깊은 뜻을 뱁새는 알지 못 하는 법.

    개똥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 날은 오늘처럼 추적추적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개똥은 그 날도 어김없이 어떻게든 사혜 눈도장 찍어보려고, 대감댁··· 아니, 이제는 스승님의 잠저를 찾은 날이기도 했다.

    역시나가 역시나였다.

    그 날도 역시 말도 못 걸어봤다.

    그렇게 허구헛날 스승님 안 계신 저택을 찾게 된 지 어언 3개월.

    갑자기 아버지가 그를 부르더니 집에 매파(媒婆)가 들어왔다지 뭔가?

    비록 그의 가문이 공신 가문이 되긴 했지만, 다른 집안들에 비하면 소위 말하는 뼈대가 부족했다. 그러니 만큼 혼담이 들어온 집안도 만만히 볼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족한 부분을 메꿔줄 수가 있는 집안에 가까웠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해당 집안과 혼사를 치러야했겠지만, 개똥은 그러긴 죽어도 싫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말 한 번 제대로 붙여 본 적 없는 사혜 밖에 없었다.

    이대로면 죽도 밥도 안 되겠다 판단한 개똥은, 그 날로 잠저를 찾아가 사혜에게 그간 품은 마음을 전했다.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힘들었지, 한 번 꺼내고 나니 후련하기도 이만큼 후련할 수가 없었다.

    장장 1년이 넘도록 품은 마음이었으니까.

    물론 사혜는 무척이나 당황해했다.

    그는 역신의 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노비였다. 그런 노비를 친공신(스스로 공을 세워 공신이 된 신하)인 개똥이 사모한다니, 사혜 본인으로서는 당황 수준이 아닐 터였다.

    당황해 하던 사혜는 어느 순간 똑부러지게 말했다.

    무과에 입격 하신다면 그 마음을 진심이라 여기겠다고.

    말로만 무신이 되겠답시고 허송세월 하던 개똥은 그 날로 마음을 잡고 무과 공부에 전념했다.

    나름 기본기가 있었기 때문인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무과에 급제 할 수 있었다.

    무과에 합격해 사혜를 찾아가자, 그녀는 놀라워했다.

    반응을 보건대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 이렇게라도 사람 만들어보려 그런 말을 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더 놓칠 수 없었다.

    아버지께 이실직고했지만, 사혜의 신분이 문제였다.

    역신의 딸이었고, 노비였으니까.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러 날을 매달린 끝에, 아버지께선 이번 전쟁에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인정해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전쟁이 두렵긴 했지만 예전부터 개똥은 장군이 돼서 공을 세우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다.

    그 꿈과 더불어 사혜와의 백년가약을 맺는 일이 바로 이번 출전에 걸려 있었다.

    절대 포기 할 수 없었다.

    “사나이 의개똥! 기필코 공을 세워 돌아올 것이니라! 아, 근데 금질아. 공을 하니까 생각나는 말인데. 너 축구 해본 적 있냐? 이 축구란 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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