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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27화 (32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27화>

    ***

    주후조는 황제라는 본인의 신분도 망각한 채 빠르게, 조선의 삶에 녹아 들어갔다.

    뭐, 녹아든 조선의 삶이라고 해봤자 이제 고작 열흘 남짓에 불과하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점은 딱히 불편한 게 없다는 것이었다.

    내심 소국으로 간다는 편견에, 불편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그런 걱정은 기우였음을 경복궁에 머물며 알게 되었다.

    음식들도 놀라우리만치 입에 맞았다.

    특히 꽈배기라 불린 음식.

    그 음식은 진실로 천상의 맛이었다. 꽈배기를 한 입 크게 베어무는 순간, 후조는 굳이 아미타불이 계신 곳까지 찾아갈 필요가 없이 바로 이곳이 극락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살아있음이 미각을 일깨워주고, 미각이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니 꽈배기를 오물오물 씹는 소리가 마치, 아미타불의 설법을 듣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도 놀라우리만치들 정겨웠다.

    왕과 환복해서 미복을 나간 적이 있었다.

    아들은 어버이를 공경하는 모습을 찾아보는 일이 어렵지 않고, 어버이는 자식을 사랑으로 대하는 모습을 찾아보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과연 예의지국이란 말에 딱 부합했다.

    이 조선이란 나라는 적어도 후조에게 있어서 극락 그 자체였다.

    그 누구도 그에게 미쳤다 수군거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그에게 정사에 매진하라 잔소리하지 않는다.

    이것만 해도 후조에게는 이곳이 바로 불가의 극락이었고, 선계의 무릉도원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진정한 극락과 무릉도원은 바로 지금 시작되고 있었다.

    “오오!”

    몸이 두둥실- 떠오르자, 후조는 체통도 잊고 감탄을 터뜨렸다.

    균형 잡기가 쉽지가 않아 난간을 잡고 서자, 서경덕이란 조선 관리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것이 바로 열기구라는 도구입니다, 폐하.”

    “대단하다! 참으로 대단하다!”

    후조는 어린 아이처럼 신나했다.

    정말로 날았다. 아니, 날고 있었다.

    “폐하!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난간에 기대 밑을 바라보자, 까마득히 마 제독의 얼굴이 보였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걸 보면, 혹 이 열기구가 추락할까 걱정 하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왔다.

    “하하하! 짐이 하늘을 날고 있느니라! 보고 있느냐! 보고 있느냐 이 말이다! 하하하하!”

    “폐하! 조심하소서!”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조심하란 말은 뭔가 우습게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천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 셈이 아닌가?

    천리를 역행해서 하늘을 날고 있는데 새삼 조심하라니··· 모든 게 우습고 우습게만 느껴졌다.

    “푸하하하하! 마 제독!”

    “예, 폐하!”

    “저기 산이 보이고 강이 보이고, 들이 보인다! 너는 보이느냐!”

    “안 보이옵니다, 폐하!”

    “나는 보인다! 이 하늘에선 훤히 다 보인다! 다 보인단 말이다! 하하하하!”

    누가보면 황제가 주색만 밝히더니 드디어 실성을 했구나 싶을 만큼 웃음이 나왔다.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거리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오는데 이걸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이건 참을 수가 없다.

    “화사(화가)들은 짐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가 그림으로 남기라! 알겠느냐!”

    명에서 군사들만 데려오진 않았다.

    여러 수행원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하나가 화사였다.

    이런 걸 염두에 두고 데려온 화사들은 아니었지만, 데려오길 잘 했다.

    하늘을 날면서 느꼈던 이 시원하고도 자유로운 기분을 그림을 통해 다시금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예, 폐하!”

    ***

    “저리도 좋을까?”

    “좋겠죠. 하늘을 날고 있으니까.”

    “저러다가 열기구 하나 달라고 하는 거 아닐지 모르겠다.”

    “달라고 하면 마지못한 척 하다가 선물로 하나 주죠, 뭐.”

    “그래도 귀한 건데······.”

    “의주성 수축도 허락 받았다면서요?”

    끄덕끄덕.

    “그건 확실히 의외더구나. 황제가 아무리 우리 조선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런 명까지 내려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형님과 대화하는 사이.

    열기구에 탑승한 황제가 고개를 빼곰이 내밀더니 손을 흔든다.

    나와 형님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을 것이다.

    나랑 형님은 제후고, 황제는 말그대로 황제니까.

    그런 황제한테 다짜고짜 손을 흔들었으니 명나라 조정에서 알면 눈깔이 뒤집힐 일이지.

    근데 열기구의 묘미가 또 이런 거 아니겠나?

    “출정 준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더냐?”

    “황제 덕에 한결 더 쉬워졌죠, 뭐.”

    누차 말하지만 공으로 5만의 원병을 얻었다.

    이건 한결 쉬워진 정도가 아니다.

    다 된 밥상에 우린 숟가락만 얹는 셈에 가깝다.

    “하긴.”

    고개를 끄덕거린 형님이 열기구로 시선을 옮겼다.

    뭐가 그리 신났는지, 아직도 방방 뛰면서 신나하는 황제가 보였다.

    “그나저나 저 인간은 도통 내려 올 생각을 않는구나.”

    ***

    황제는 형님에게 맡겨(?) 두고 나는 편전에 들었다.

    요새는 대신들 모두 하루가 머다하고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무슨 설레발이냐고?

    들으면 기가 찰 설레발이긴 한데······.

    “교화가 우선이지!”

    “교화라니! 여태 놈들에게 교화가 먹혔었소? 교화가 먹힐 종자였다면 전하께서 어찌 군사를 일으키셨겠냔 말이외다! 놈들은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종자들이오! 모조리 쓸어버려야 하오!”

    “쓸어버리다니 그 무슨 서늘한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오? 전하께서 교화를 펴셔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임을 어찌 모르시오? 지금 당장 놈들을 쓸어버리면 마음은 후련하겠소만, 어찌 도(道)를 일으켰다 자부 할 수 있겠소이까!”

    “허어! 답답한 소리만 하시오, 답답한 소리만! 왕이 백성을 다스릴 땐 덕(德)으로 계도하고, 형(刑)으로 징벌한다 했었소이다. 덕으로 계도하기도 전에 형으로 징벌부터 하면 그게 제왕의 도리겠소이까! 지금은 진실로 전하께서 대업을 남기실 절호의 기회인 것이오! 동시에 왜적들을 교화할 절호의 기회인데, 이를 채찍으로만 다스리려 든다면 어찌 전하의 성덕이 밝다고만 할 수 있겠소이까?”

    이 난리를 보고도 감이 안 잡힌다고?

    후······.

    “모두들 자중들 합시다. 아직 전쟁 시작도 안 했고, 이기지도 않았습니다.”

    “크흠.”

    전후 설레발이다.

    대신들은 이번 전쟁에 무조건 이긴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우리끼리만 나섰다면 이런 확신은 갖지 않았겠지만, 황제가 나선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에 패배할 리는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모두들 전황을 낙관적으로 점치는 중이었다.

    낙관적으로 점만 치면 모르겠는데, 벌써부터 전후 처리를 어떻게 하냐가 조정의 주요 안건으로 상정 될 정도였다.

    어처구니 없긴 하지만 오죽하면 그럴까 싶었다.

    왜구를 소탕한 일은 있었어도 칠 정(征)자까지 붙여가면서 전쟁을 일으킨 적은 없었던 게 바로 이 나라였다.

    그런데 이번에 든든한 후원까지 받으며 전쟁을 일으키게 됐으니, 다들 흡족할 거다.

    “그렇게 자만하다가 질지도 모릅니다. 이길 경우부터 상정하지 말고, 제대로 된 작전부터 좀 세부적으로 짭시다.”

    잔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지만, 어쨌든 전쟁은 전쟁이었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우리는 최악의 경우도 상정하면서, 또 어떻게 해야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시킬지 보다 효율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해나갔다.

    ***

    오우치 요시오키(大內義興)는 미간을 지끈 눌러 감쌌다.

    그런 요시오키를 바라보며 나석수가 어눌한 일본어로 말했다.

    “대감. 맹자께서 《진심편》에서 말씀하시길, ‘국가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백성이고, 가장 가벼운 것이 임금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이는 바로······.”

    요시오키가 손을 내젓자, 신들린 듯 강의하던 나석수가 고개를 조아렸다.

    “나 선생.”

    “예, 대감.”

    “나 선생은 이 일본에 온 걸 후회하지 않으시오?”

    요시오키의 물음에 나석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후회.

    끌려온 처지에 후회란 말이 무슨 소용이겠냐만 처음에는 말그대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끌려오기 전, 식은 밥 한끼 먹이면서 잡소리를 늘어놨었던 진성대군이 제발 무간지옥에 떨어지길 믿지도 않았던 불씨에게 빌고 또 빌었을 정도였다.

    말했듯 처음에만 그랬다.

    진성대군은 식은 밥 한끼를 먹이면서 일본을 금수의 나라라 표현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이 나라는 금수의 나라였다.

    도무지 도라는 게 존재하지 않고 오직 창칼이 우선되는 나라.

    어쩌다 이 나라에 끌려오게 됐고, 어쩌다 이 대내전이라는 사람의 종으로 들어오게 됐고, 또 어쩌다 이 대내전의 선생 노릇을 하게 됐지만, 석수는 이 금수 같은 나라에, 잊고 있었던 열정이 생김을 느꼈다.

    이 성인의 교화가 닿지 않는 곳에 성인의 도를 퍼뜨리자!

    성인의 말씀은커녕 그 구절도 이해 못 하는 나라에 성인을 숭상하게 만들자!

    칼보다는 책이 우선되는, 선비로선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자!

    이 모든 건, 어쩌면 공명심일지도 몰랐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금수의 나라에 일말의 도를 퍼뜨린 선구자가 된다는 공명심.

    공명심이건 뭐건.

    오히려 지금은 자신을 여기에 팔아넘긴 진성대군에게 감사한 마음마저 느끼고 있었다.

    공자는 전국을 주유하면서 난세에 도를 퍼뜨리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공자도 실패한 일을 본인이 한다면, 이만한 광영이 또 어디 있겠나?

    그런고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끌려온 처지에 후회란 감정을 품는 것도 우습지만, 성인의 도를 퍼뜨리고 있으니 어찌 후회되는 감정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후회하오. 마음 같아서는 선생들을 데려온 쓰네히사를 골백번 때려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후회 한다오······.”

    “···”

    “부디 그놈의 맹자 소리좀 안 할 수 없으시겠소?”

    “하지만 소생에게 성인의 말씀을 듣길 원하신 건, 대감이셨습니다.”

    요시오키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본인이었다.

    성인의 말씀을 청했었지.

    그 미련한 과거의 요시오키가 말이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대감께서 보통 남아십니까? 대감께서는 이 나라의 섭정이십니다. 만인의 귀감이 되셔야 할 분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면 어찌 만인의 귀감이 되는 행동이랄 수 있겠습니까?”

    “하. 내 선생의 언변은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겠소이다, 당해낼 수가.”

    “그러니 더더욱 책을 보십시오. 책은 경험하지 못 한 것도 경험하게 하여 그 사람의 언변을 늘려주고, 통찰력을 갖게 합니다. 이만큼 귀중한 보배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선생의 말이 전부 다 맞는데··· 맞는데, 지금은 난세가 아니오. 그놈의 책도 난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 같소.”

    “대감. 이 소생이 방금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책은 경험하지 못 한 것도 경험하게 해줍니다. 한데 어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감의 말씀처럼 이 나라는 난세입니다, 군웅할거의 난세지요. 하지만 난세를 종결 시키는 건 창칼이 아닙니다.”

    석수는 서안 위에 펼친 책을 가리켰다.

    “이 책이지요. 이 《대학연의》에는 실로 고금의 득실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정심(正心)과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의 도가 한 번에 담겨 있어서 제왕으로서는 으뜸 가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감께서는 일본을 평정하고 싶어하시니 더더욱 이 책을 게을리 하셔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내 역시 선생의 언변은 당해낼 수가 없구려. 그래, 계속 하십시다, 해.”

    방긋 웃은 석수가 강의를 이어나가려던 그때였다.

    “주군! 주군!”

    “무슨 일인가?”

    “주군, 큰 일 났사옵니다!”

    “무슨 일이냐 묻지 않는가?”

    무릎 걸음으로 걸어온 가신은 석수를 흘기더니 귀엣말을 건넸다.

    “뭐!”

    곧, 요시오키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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