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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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바로 요나라 성종의 의군천병(성종이 이름 붙인 고려 정벌군)을 격퇴한 흥화진(고려시절 의주에 있던 성보)이로구나.”
압록강을 넘어선 순간도 감격스러웠던 후조였지만, 특히 요사(遼史)에서 활자로만 접하던 흥화진의 변경에 들어서자, 그 감회는 더욱 새로웠다.
본시 태자는 많은 역사서를 독(讀)한다.
제왕으로서 반면교사로 삼을 일화들이 특히 역사서에 많기 때문이었는데 개중에서 후조가 가장 즐겨 읽었던 건, 송사(宋史)와 당사(唐史)였다.
하지만 사서 자체를 즐겨했던 후조 였던 만큼, 요사 역시 틈나는 대로 읽은 사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사서란, 사서마다 인상적인 기록과 구절들이 있기 마련이다.
요사에서는 흥화진 전투가 그랬다.
바로 이곳이었다. 이곳에서 성종의 의군천병이 고려군에게 격퇴를 당했다.
어디 성종의 의군천병만 격퇴 됐다던가.
성종의 뒤를 이은 현종의 십만대군 역시 바로 이곳에서 격퇴를 당했다.
보통 격퇴가 아니라 수공(水攻)에 당한 전술적인 패배였다.
“국왕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폐하께오서 의주의 옛 이름을 어찌 아시냐고 여쭙사옵니다.”
“알다마다. 요 성종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여러 달을 공략 했는데도 끝내 이기지 못 한 채 돌아가지 않았소. 요 성종을 빈 손으로 돌아가게 만든 전투가 있었던 이 흥화진을 내 모를 리가 있나.”
말했다시피 사서는 제왕들이 특히 본 받을 게 많다.
요사에서는 성종이 그렇다.
요 성종은 비록 오랑캐의 핏줄을 타고 났어도 제왕으로서는 본 받을만한 황제였다.
가히 요나라의 유일무이한 성군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의 치세에 있었던 전쟁에서 나가는 전쟁마다 족족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었으니까.
그런 성종이 유일하게 패했던 전투는 고려와의 전투 뿐이었으니 더더욱 흥화진을 모를 리가 없었다.
“폐하께서 우리 이 폐방을 생각하시는 마음에 감히 몸둘 바를겠다 하시나이다.”
“그런데··· 내 요사에서 보던 것과 달리 성이 매우 좁아 보이오. 이러면 되놈(여진족)들에게서 이곳을 잘 수호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소이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과연 폐하의 말씀이 지당하시나이다. 안 그래도 이 의주의 성이 좁고 군사가 적은데 반해, 대국과 왕래하는 교통의 요지중 하나다 보니 칙사가 올 때마다 혹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노심초사 했었다고 하시옵니다. 또, 조정에서도 성을 수축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던 듯 하옵니다.”
“과연 그래 보이오. 한데 어찌 성을 넓히지 않았을꼬?”
“선황제의 뜻이었습니다.”
“폐하께서, 선황제의 뜻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하시옵니다.”
융은 멀리 보이는 의주성를 흘겼다.
의주는 과연 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였다.
여진족 뿐만이 아니라 중국에서 무슨 일이 생겨서 군사가 출동 한다면, 가장 먼저 중국의 대군을 맞이할 관문이 바로 의주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역시 의주의 성보를 수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간간이 제기 됐었다.
실제로 융은 선황인 홍치제 시절 그 주장들을 한데 모아 중국에 주문한 적이 있었다.
의주성의 성보를 수축 할 테니 딴지 걸지 말라는 차원의 주문이었다.
주문 했음에도 지금까지 의주성의 성이 협소 한 건, 주문이 묵살 됐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여차 하면 가장 먼저 함락 시켜야 할 성이 의주성임을 모르진 않는다. 그런데 성보를 수축하겠다는 주문을 들어줄 리가 있나.
라는 내막이 있지만, 조선에 호감을 갖고 있는 황제에게 그런 자질구레한 내막까지 들려줄 필요는 없다고, 융은 판단했다.
“선황제께서 이미 명을 달리 하셨으니 어떤 큰 뜻으로 주문을 묵살 하셨는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천병에 의지하라는 뜻이 아니셨겠습니까?”
“허어··· 아무리 천병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국가의 일이란 어찌 될지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거늘······.”
“···”
“이 짐의 말으로 입 밖에 꺼내기 민망하오만 왕도 보아서 알 것이오. 지금 우리 명의 사정이 생각보다는 여의치 않소이다. 뭔 놈의 도적떼와 역적들이 그리 창궐하는지,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더이다. 그중에서도 하북의 도적떼가 날이 갈수록 그 세가 늘고 있소. 하북의 도적떼 이름이 뭐였더라··· 아!”
“···?”
“유육, 유칠이라는 놈들인데 둘이 형제라더군. 이 두 놈들이 완평현 지현을 살해하고 도적떼가 되었는데 벌써 그 휘하에 모인 도적떼만 1만에 달한다 하니 어찌 걱정이 없겠소이까?”
“아, 과연 그러시겠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이놈들이 지금은 관군들을 피해 거점을 슬슬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뭐 요동에 군사들이 있으니 조선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겠소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소. 저 옛날 홍건적이 고려를 노략질 했던 것처럼, 이 천인공노한 도적떼가 의주성을 넘어온다면 어찌 되겠냐 이 말이외다. 이 도적떼가 의주성을 넘었다는 것은 요동군이 지리멸렬 했다는 뜻이 될 테니, 그때가서 천병을 어찌 기대 하겠소.”
융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과연 기대는 엇나가지 않았다.
“성이 너무 작으면 만약의 일에 대비하기가 아무래도 어렵지. 의주성의 성보는 수축토록 하시오.”
***
이름 : 주후조
연호 : 정덕(正德)
취미1 : 주색잡기
취미2 : 불꽃놀이
취미3 : 동물구경
특기1 : 혼자놀기
특기2 : 학문
성격 : 황제의 체통을 잊지 않으려 근엄한 척 하지만 딱히 근엄한 모습을 보인 일이 많지가 않음. 잔소리는 싫어하는 경향이 강함. 변덕이 심하고 즉흥적이니 주의할 것. 행동에 일관성이 없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많아 명조의 신하들이 당혹해 할 때가 많음. 장군으로 불리면 좋아함. 무(武)에 관심이 많고······.
서대문에 나온 나는 지난 날 학습했던 황제의 신상을 새삼 복습했다.
처음 황제의 신상을 공부할 때도 느꼈지만, 이 황제라는 인간은 뭔가 형님이 딱 연상되는 인물이다.
물론 형님처럼 인싸력 충만하다고 해서 방심해선 안 된다.
형님과 다르게 이 인간은 명색이 황제다.
무엇보다 원병을 데리고 오는 총사령관이었다.
이미 그 신상에 관해서는 빠짐없이 공부했지만 실수는 없어야만 한다.
그렇게 복습하던 사이.
저 멀리 황제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진 행렬의 선두에는 형님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는데, 저 사람이 황제 같았다. 나는 문무백관들을 이끌고 선두로 나아갔다.
돌발 행동이 일어난 건, 내가 막 황제의 행렬에 도착해 고개를 조아리려 할 때 쯤이었다.
날 책봉해준 황제인데 예는 갖춰야되잖아?
그래서 공손히 절을 올리려 했던 것인데 절을 올리기도 전에 말에서 내린 황제가 후다닥 뛰어나와 내 손을 마주 잡는다.
시나리오에 없던 돌발 행동에 당황한 내가 문무백관들을 돌아보자, 황제가 중국말로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연회는 됐으니 당구각은 어디에 있소이까? 라고 하시옵니다.”
역관의 말에 나는 얼이 나갔다.
당구각?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폐하께서, 내 긴 여정에 당구채를 잡질 못 했으니 좀이 쑤셔 참을 수가 없소이다. 라고 하시는데······.”
당구채를 잡지 못 했다?
얼이 나간 채 형님을 바라봤다.
그러자 멋쩍은 표정의 형님이 말했다.
“황성에 있을 때 내 가르쳐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시더구나. 하, 하하.”
***
칙사가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단연 접대였다.
원래 우리의 접대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일개 칙사의 방문이 아니었다. 누차 말하지만 무려 황제의 방문이었다. 그런 황제의 방문인데, 일개 칙사와 동일한 예로 맞이 할 순 없었다.
그래서 나례(儺禮)를 시작으로 예흥청의 공연과 함께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는 게 바로, 황제 맞이 프로젝트의 일환들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들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형님 이래도 됩니까?”
“황제는 허례허식을 극도로 싫어하는 위인이다.”
“허례허식을 극도로 싫어하는 위인이라 해도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건 좀······.”
“어쩌겠느냐. 황제가 접대 보단 당구를 원하는데.”
형님과 나는, 도통 길이 보이지 않는지 고민하고 있는 황제를 흘기며 속닥거렸다.
형님 말대로 황제가 접대 보단 당구를 원했다.
날 보자마자 당구를 치자는데 당황한 내가, ‘아, 우리에게도 다 황제폐하 접대 계획이란 게 있으니 우리 계획에 따르시죠.’ 라는 말을 어떻게 했겠나?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당구각에서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삑!
경쾌한 소음에 형님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쉬운 표정의 황제가 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저,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위인이 정말 황제가 맞는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형님이 준비한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히려 합리적이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당구채를 들었다.
긴가민가 하지만 일단은 황제와의 당구가 중요했다. 황제는 의외로 이 단순한 놀이에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듯 했다.
화자가 아무렇지 않게 씨부린 말을 청자가 확대해석 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황제의 행동에 내가 큰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황제가 만들어놓은 공은 깔끔하진 않았다.
자칫 공을 잘못 쳤다가는, 히로가 날 판이었다.
‘어떻게 쳐야 되려나.’
어떻게 쳐야 깔끔하게 다음 공을 모을지 계산하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우리만치 똘망똘망한 눈빛이었다.
저 눈빛을 마주하니, 뭔가 대단한 큐를 보여줘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간단하게 원쿠션으로 먹을 수 있는 공이었지만, 기리까시를 이용한 3쿠션으로 먹기로 마음먹고, 당구채를 휘둘렀다.
기리까시를 깔끔하게 성공하자 황제의 표정이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입을 쩍 벌리고는,
“그 기술의 이름은 무엇이냐 여쭙사옵니다.”
기리까시라고 하려다가, 우리가 명색이 왜정을 위해 모였는데 일본말을 쓰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한국말로 순화를 시켰다.
“잘라치기라는 기술입니다.”
“나중에 배워가야겠다 하시옵니다.”
배울 게 없어서 이런 걸 배우냐.
궁시렁 거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음 공격을 이어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출병은 언제 하면 좋겠소, 라고 하시옵니다.”
황제가 역관을 통해 물었다.
출병.
기다린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사전에 대신들과 조율한대로 출병 일자를 언급했다.
“지금이 이제 1월이니 배를 띄우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3월이나 4월이 적기 인 듯 싶은데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3월이나 4월이라··· 2~3달 더 여유가 생기겠군. 아주 좋소이다. 그럼 내 황성에 사람을 보내 5만 남왜정병군에서 나머지 4만5천명은 그 즈음해서 출병시키라 하겠소. 괜찮겠소? 라고, 말씀하십니다.”
“괜찮다마다요. 우리나라를 생각해주시는 폐하의 마음에 그저 몸둘 바를 모를 따름입니다.”
진짜로 몸둘 바를 모르겠다.
무려 5만의 용병이 공짜로 생겼거든.
게다가 황제가 말한 ‘나머지 4만5천명’ 이 부분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4만5천에 달하는 이 어마무시한 대군의 군량도 우리가 대는 게 아니었다.
우린 그저 황제를 친위하게 된 5천명의 군사들에 대한 군량만 대면 된다.
나머지 4만 5천명은 보다시피 출병일이 되면 알아서 넘어오기로 되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외교인가?
이건, 말빨 하나로 강동 6주를 얻어냈다는 서희의 담판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외교다.
자, 얼음이 녹고 새싹 돋는 봄.
이때가 되면 제주도를 침략했던 왜놈들은 아마 피똥 싸면서 용서해달란 말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