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24화 (324/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24화>

***

“참말이었다니······.”

누군가에게 맞아 본 기억 자체가 뇌리에 없는 후조였지만, 이번 만큼은 달랐다.

둔기에 머리를 강하게 얻어 맞은 기억이 뇌리에 각인 될 것 같았다.

당혹스러운 건, 조선왕의 말을 통역한 역관도 매한가지인지 어찌할 줄을 몰라한다.

비단 역관 뿐만이 아니었다.

장내의 모두가 그랬다.

유일하게 여유로운 사람이 있다면······.

후루루룩-.

열기구에 대한 설명을 끝마치자마자 대수롭지 않게 국수 면발을 흡입하고 있는 조선왕이었다.

자연스러운 왕의 행동에 후조는 이게 장난이 아님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조선에는 하늘을 나는 도구가 있다.

쿵쾅- 쿵쾅!

가슴이 거세게 요동쳤다.

두방망이질 하는 가슴이 쉬이 진정되질 않았다.

“어, 어떻게?”

상식 밖의 일이었다.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니······.

그의 놀람과 다르게, 왕은 역시나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 원리를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물론 왕에게나 간단한 설명이었지 후조에게는··· 아니, 역관에게는 통역하기 버거운 설명이었다.

“에, 그게··· 그러니까 말이옵니다, 폐하. 그, 조선국왕 전하의 말에 따르면 그러니까··· 이 공기를 가두고 그 공기를 불에 가열하면 그 안은 자연스레 온도가 높아지는데, 이 공기가 높아지면서 생긴 원자라는 것 덕에··· 에, 그 부피라는 것이 올라가고 반면 밀도는, 에······.”

“그게 다 무슨 말이란 말이냐?”

“···황송하옵니다.”

융은 우왕좌왕하는 역관과 후조를 흘긴 채 작게 미소 짓고 말했다.

“아! 좀 더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물고기가 물에 떠있는 원리랑 흡사하다 하옵니다.”

“물고기가 물에 어찌 떠있는 것인데?”

“···”

대답 못 하는 역관에 후조는 자연스레 동석한 양정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직언이 거슬릴 때가 많지만, 학식 만큼은 여러 식자들에게도 인정 받는 정화다.

그런 정화가 모르는 게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황송하옵니다, 폐하······.”

왕의 설명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정화도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장난이라기엔 그 설명이 너무 구체적이면서도 난해하다.

이건 확실히 말장난 따위가 아니었다.

말장난 따위가 아님을 새삼 인지하고 밀려오는 것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창피함이었다.

‘내 그 동안 왕에게 얼마나 자랑을 해댔는데······.’

코끼리 자랑을 시작으로 별에 별 자랑을 해댔었다.

왕에게 색목미녀를 하사한 것도 따지고 보면 자랑의 일종이다.

너는 이런 거 없으니 내가 선심 쓴다.

하는··· 그런데, 왕은 애당초 그런 것들이 죄 필요가 없었다.

무려 하늘을 날 수 있었으니까.

인간의 오랜 욕망이었던 하늘을 정복(?)했는데 미녀가 웬말이고, 코끼리 같은 짐승이 웬말이란 말인가.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창피함을 뒤로한 후조는 면발의 탱탱한 식감을 즐기고 있는 왕을 일별한 채 정화에게 말했다.

“양 동각.”

“예, 폐하.”

“내 얼른 조선으로 출병을 해야겠다.”

평소 같았다면 골백번 말렸을 정화였지만, 이번만큼은 감히 말리질 못 했다.

그로부터 보름 후.

“조선왕이 보내온 주문을 보건대 왜구의 노략이 극에 달해 동국의 군사로는 감히 이를 감당하기 버겁다 하니, 내게 천병을 주문했다. 내 왕의 주문을 받자마자 노한 마음에 무사 주수를 남왜정총병관으로 삼고, 적당한 때에 왕의 귀국편에 출병 시키려 하였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왜구의 무도함에 적당한 때가 있단 말인가? 더욱이 조선은 대대로 상국에 돈독하고, 충정을 보였으니 마땅히 황은을 내릴 만한 나라이다. 상황이 이에 이른 즉. 남왜정총병관 주수를 대장군으로 삼고 천병의 위엄을 해동에 떨치리라.”

황제의 명을 받잡은 남왜정총병관 주수가 하북과 요동의 5만 군대를 이끌고 출병했다.

***

“경하 드리옵니다, 전하.”

“경하 드리옵나이다.”

허침 할아버지의 인사를 시작으로 대신들이 인사를 건넸다.

이 인사는 다름 아니라 하삼도에서 올라온 삼도 관찰사들의 장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므로 풍년이 예상되니 금년에 한하더라도 곤궁한 여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덕으로 큰 수확을 앞두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기곡제(풍년을 기원하던 제사)때문이겠습니까? 전하의 치세에 감복한 하늘이 과연 대풍(大豐)을 내린 듯 합니다.」

경상도 관찰사의 장계.

「···하여 일찍이 그 명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권농관(勸農官)을 따로이 산간벽지에까지 파견하시면서 돌보셨으니 오곡은 풍성합니다. 올해는 대풍을 당할 듯 합니다.」

충청도 관찰사의 장계.

보다시피 삼도에서 올라온 장계들마다 대풍이 들었다는 보고를 해왔다.

이제 수확을 한 달 좀 넘게 남겨두고 있는 9월이니 만큼 갑자기 태풍이 삼남을 휩쓸어버린다던가, 지진해일이 내륙 지방까지 강타해버린다던가, 해충 떼가 논밭을 갉아 먹어버린다던가 하는 자연재해만 없다면 올해는 큰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

풍년이면 풍년이고, 큰 수확을 거두면 거두는 건데 대신들이 왜 경하까지 드리는 거냐고?

가뭄이 들거나 하는 자연 이상이 왕의 실정(失政)으로 인한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 답게, 이런 풍년은 왕의 선정으로 인한 것이라는 믿음 역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인 믿음들이지만.

뭐, 아무튼 올해는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긴 한데 내가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나온 결과물이 맞다.

왜 그러냐면, 내가 얼떨결에 보위에 오르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권농관들을 파견한 일이었다.

정책상 수로를 개간하고 확충하는 건, 형님의 치세에 있었던 일이었다.

형님이 재위에 있던 시절 수로를 늘려 백성들의 농사에 불편함이 없게 하도록 삼남에 한해서라도 정책을 펼쳤었고, 내가 보위에 오르던 시점 즈음에 공사들이 완공됐었다.

근데 말이지?

없던 수로가 뚝딱 생긴다고 생산량이 늘어나나?

절대 아니란 말씀이다.

이 시대는 생각 이상으로 정보가 차단 된 시대였다.

칠십 평생을 논밭만 굽어 보고 산 농부라 할지라도, 신식 농법에는 익숙하지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식 농법은 당연히 모내기 법이다.

물론 모내기 법은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농사법이다.

고려조부터 일부 지역에서는 시행되던 농법이니까.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이 아는 농법이라고 해서, 모두가 알고 있진 않았다.

말했다시피 칠십 평생 논밭을 일군 농부라 해도 모내기 법을 모르는 경우가 수두룩 했고, 이런 경우는 본인들의 경험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농법을 전환하는 일을 꺼려했다.

내가 보위에 오르고 나서 시도때도 없이 권농관을 직파(?) 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모내기 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모내기 법의 이로움을 알게 하기 위해.

그 모내기 법의 농법을 전수시키기 위해.

직파->모내기로 전환한 논이 많은 고을에 한해서는, 이를 치하하는 차원에서 내탕고를 이용해 미리 모를 만들어다가, 모까지 갖다 바쳤을 정도였다.

제아무리 모내기 농법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대신들이라도, 이런 가상했던 내 노력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대풍이란 말에 당연히 경하 운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내 노력과는 별개로, 올해는 순전히 운이 작용했을 수도 있는 거긴 하지만, 어쨌건 대신들은 내 노력을 옆에서 봐왔잖나.

그런 의미에서, 올해의 풍년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 단 몇 년간 지속 되기만 해도 이 나라의 1년 예산이 확 증대 될 거다.

물론 지금도 많이 늘긴 늘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대신들이 하는 말이 그렇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3배 이상 늘었다고들 하니까.

체감이 그런 게 아니라 횡간(예산표)도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예산이 늘어나게 되면, 증액 된 예산으로 또 다른 국가 사업에 투자 할 수 있게 될 테고, 내가 바라마지 않던 도로도 증설 시킬 수 있을 거다.

농업으로 국부를 증대 시키는 건, 한정적이다.

막말로, 이 나라 국토 전체를 산삼밭, 사탕수수 밭으로 도배시킬 게 아닌 이상이라면 말이지.

도로를 증설해서 조금씩 움트는 상업에 활기를 띠게 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적자일지 몰라도 십수년 뒤까지 내다 보면 어마무시한 흑자일 테니까.

이미 계획도 다 짜둔 상태였다.

농업 정책은 삼남 위주로 펼쳤지만 상업 정책은 서북 지역 위주로 펼칠 생각이었다.

내수시장보다 몇 배나 큰 중국이라는 시장과 나름 알짜배기 시장인 여진족들이 북쪽에 있으니 말이다.

뭐, 좌우지간 거기까진 아직 먼 나라 이야기인 것 같고.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확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앞으로도 수고 부탁합니다.”

“여부가 있겠나이까.”

들떠 있는 건 딱 여기까지가 좋을 것 같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지금은 전시체제다.

아직 전쟁 직전이라 실감은 안 나지만, 명목상 전시체제인 건 맞다.

형님도 엄밀히 말하면 원군 청하러 중국에 간 거잖나.

“6천명이던가요?”

분위기를 환기시킨 뒤, 밑도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밑도끝도 없는 내 질문에 답을 한 건, 병조판서 유담년이었다.

“그렇사옵니다. 다만 전라 소모사(召募使, 일종의 모병관) 정인겸(鄭仁謙)이 전라우도의 모병은 아직 집계가 되지 않았다 하니 그 수까지 포함한다면 적게는 6500에, 많게는 7000에 이를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전시제체라고 말했지?

이 전시에, 형님이 원군 청하러 중국에 가 있는 동안 나도 가만 있진 않았다.

삼남에 모병관을 파견해 모병을 했다.

굳이 모병 할 필요 없이 기존 병력을 편성해도 되지 않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슬슬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할 시점이 아닐까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대군 시절에 나는 군역을 폐지하고, 모병제로의 전환을 주장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적이 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지금도 시기상조긴 하지만 시기상조란 이유로 언제까지고 차일피일만 하면 100년이 지나도 그 정책은 시기상조일 거다.

그나마 지금은 예전보단 낫다.

재정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무관학교는요?”

“훈련을 위한 모든 채비는 끝마쳤사옵니다.”

내가 예전에 징병제->모병제로 전환하잔 주장을 하면서 함께 주장했던 게 바로 무관학교 설립이었다.

무과를 폐지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자는 말에 전국각지에서 무과 준비를 하고 있는 무사들이 반대를 하는 통에 흐지부지 됐었는데, 이번에야 말로 시행을 하려고 한다.

무과는 사관학교 개념인 무관학교 대비 체계적일 수가 없다.

암만 말 잘 타고 활 잘 쏘면 뭐하나?

말 잘 타고 활 잘 쏜다는 게, 개인의 무위는 뛰어나단 뜻일지 몰라도 지휘관으로서의 지휘능력은 검증된 게 아닌데.

물론 무관학교에서 교육 받는다고 해서 100% 명장이 된다는 건 아니지만, 무과보다는 사람을 잘 걸러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무관학교는 내가 한 달 전쯤 임사홍과 임숭재, 김감 같은 왕당파 대신들을 살짝 선동(?)해서 지시한 사항이었다.

어물쩡 간보다가 의외로 반대가 심하지 않길래 이분들 통해서 상소 두어개 올려서 물타기 시키고, 아예 가닥을 그쪽으로 잡아 통과시킨 정책중 하나였다.

내가 보위에 오르고 나서 처음으로 해 본 협잡(?)질이기도 했다.

어쨌건, 이 무관학교는 봉해위의 군영에 기존의 건물들을 이용하거나, 몇 개만 지어서 설립하기로 했는데 무관학교의 1기 수료생은 이번에 삼남에서 모병한 병사들이 될 예정이다.

봉해위의 군영 같은 마땅한 훈련소가 있어야지.

이번에 무관학교 만들면서 건물도 증설했겠다··· 이만한 훈련소가 또 없거든.

또, 왕이 되기 전엔 잘 몰랐는데 말이지?

왕이 되고 나니 하나 알겠더라고, 왕이 지근거리에서 부리는 군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호령이 쉬워진다는 사실.

훈련병도 근왕병 개념인 건 매한가지인데 도성과 지척인 곳에 6천명이 넘는 근왕병이 모이니 앞으로 국정을 운영하기도 훨씬 더 쉬워지겠지.

“그래요? 그럼 훈련은······.”

6천명이다.

무려 6천명이 넘는 훈련병들을 형님이 돌아오기 전까지 훈련시켜야 한다.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몇몇 인물이 물망에 올랐지만, 모두 탈락시켰다.

나름 명망 있는 무신들을 탈락시키고 훈련병들의 훈련을 맡게 할 학교장은······.

“내가 맡죠, 뭐.”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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