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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23화 (32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23화>

    ***

    새로운 조선천자가 탄생한 그 시각, 조선.

    “아, 심심하다.”

    요즘 진성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늘 당구치자며 괴롭히던 상왕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왕으로서의 일상도 적응이 된 것인지··· 하루 일을 뚝딱 처리하고 나면 지루한 여가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혼자 놀 수 있는 놀이라도 개발하던가 해야지 이대로 수십년을 푹 썩는다면 우울증 걸려 살아도 산 게 아닌 상태가 될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과 함께 새삼 전생의 기억을 들추면서 혼자 놀만한 놀이를 떠올리던 그때.

    “전하! 전하!”

    세간에는 진성이 보위에 오르면서 구중궁궐의 의미가 퇴색됐다는 말이 조금씩 나돌았다.

    왕이 체통(?) 없이 굴고, 언사가 경박할 때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임금을 근시하는 자들의 체통도 떨어져 심처(深處)의 심처라는 구중궁궐도 예전만 못 하다는 말이 나돌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말이 나돈다 하더라도 궁궐은 심처 중의 심처다.

    경박하고 천박하게 뛰어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었다.

    지금 강녕전에 경박하게 전하를 부르면서, 천박하게 뛰어 들어오는 인물은 진성의 스승이기도 한 이장곤이었다.

    얼마 전까지 홍문관 응교로 있던 이장곤은, 지금은 예문관 직제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이런 영전은 순전히 이장곤이 잘 났기 때문이라기 보다도 제자 하나 잘 둔 덕이라 봐야했다.

    아무리 문장을 잘 짓고, 장래가 촉망받는 인재라 해도 몇 달 만에 승차 할 순 없으니까.

    “에, 스승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 제자가요. 어찌나 심심하던지··· 개미랑 대화를 할 뻔 했지 뭡니까? 제가 당구 가르쳐드릴 테니까, 이번에는······.”

    “전하! 판독이 끝났사옵니다!”

    “그래요? 누구 거랍니까?”

    체신머리 없이 헐레벌떡, 상기 된 표정의 장곤과 다르게 진성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판독이란 다름 아니라 얼마 전, 융이 보낸 황성평 비석이었다.

    비석이 들어오자마자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 됐었다.

    식자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 황성평 비석을 모르는 이가 없었는데, 백여년 가깝게 신비로움의 대명사로 손꼽히던 황성평 비석이 드디어 판독을 위해 옮겨져왔으니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 될 만 한 일이었다.

    다만 비석이 오랜 시간 풍파를 맞았기 때문에 글자를 한 눈에 알아보기가 힘들었고, 이 때문에 진성은 예문관과 교서관 같은 문장가들이 모인 곳에 판독을 명했다.

    물론, 판독을 명하긴 했어도 진성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다.

    비석의 내용이 궁금하긴 하지만, 어마무시하게 궁금하진 않았다.

    끽해야 전해져오는 민담처럼 금나라 황제의 묘비거나 어디 귀족의 묘비 정도 되겠지.

    “비석이 광개토왕의 것으로 판독 되었나이다!”

    광개토왕의 것으로 판독 되었다는 말에 진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文)과 말(言)은 뜻은 같아도 받아들이는 신경이 다르다.

    문자로 정렬 된 글은 보다 직관적이지만, 귀를 통해 전달 되는 말은 직관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광개토?”

    “고구려의 광개토 말이옵니다!”

    벌떡!

    “고구려의 광개토?”

    “예!”

    진성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느꼈다.

    애당초 역알못인 진성이었다.

    거기에 더해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면 폐해겠지만, 학창 시절 공부해서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왕들도 모두 다 까먹었고, 기억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왕은 광개토왕과 장수왕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광개토왕이란다.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던 그 왕!

    “비석의 내용이 정확히 뭡니까?”

    장곤이 뭔가를 건넸다.

    판독한 비석을 해석한 글자들 같았다.

    「···드디어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악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으며······.」

    해석한 글자들을 읽은 진성은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요동의 너른 벌판을 개마무사들이 말달리고, 그 선두에 광개토왕이 환두대도를 하늘 높이 치켜 든 채 호령하는 모습이 자연히 그려졌다.

    이런 그림들이 자연히 떠오를 만큼 비석의 내용은 제법 구체적이면서도 상세했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상선!”

    “불러 계시옵니까, 전하.”

    “승정원에 패초를 보내라 이르세요.”

    대신들을 소집하는 진성이었다.

    ***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세간에 구중궁궐의 의미가 진성이 보위에 오른 후부터 퇴색됐다는 말이 나돌았다면, 패초의 의미가 퇴색 됐다는 말은 상왕이 금상인 시절부터 나돌았다.

    별 것도 아닌 일로 패초를 보내 신하들을 닦달(?) 했으니 아주 헛소리만은 아니었다.

    의미가 퇴색 된 패초를 받고 입궐한 대신들은 하나같이 난색을 표했다.

    아니, 난색이라기 보다는 당혹스러워하고 있다고나 할까?

    아닌 게 아니라 금상이 보위에 오른 후, 이만큼 열정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열정적인 정도가 아니라 광기에 휩싸인 모습에 가까웠다.

    “굳이 그럴 필요가 당연히 있지요! 다른 왕도 아니고 광개토왕 아닙니까?”

    “아, 예. 광개토왕의 비석임이 밝혀진 것은 밝혀진 것이온데 다만 굳이 사우(祠宇)를 짓게 할 필요까진······.”

    “내가 경들에게 언제 말 했던가요?”

    “무얼 말씀이시온지······.”

    “내가 옛날에 공부할 때요.”

    대신들의 시선이 이장곤에게 옮겨지자, 진성은 손사래를 쳤다.

    “직제학의 밑에서 수학하던 때보다 더 옛날에 말입니다.”

    “말씀하소서.”

    “그때 광개토왕도 공부를 했는데 내 어린 나이에 얼마나 감동을 했는지 아십니까들?”

    7살때인지 8살때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당시 읽었던 광개토대왕의 위인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때 느꼈던 감동 역시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흠칫.

    “그런 왕의 사당 하나 없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제향함이 마땅합니다. 아, 그리고 광개토왕의 시호도 올렸으면 좋겠는데··· 봉상시에서는 시호를 선별해서 품처하게 하는 게 낫겠습니까, 아니면 빈청에서 경들이 논의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 봉상시보다는 역시 경들이 빈청에서 논의한 걸 갖다가 말씀해주시는 게 좋겠네요. 그리고······.”

    광개토왕이 뭐라고 진성이 저렇게 흥분해서 시호니 제향 운운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 대신들이었다.

    ***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표구(表具, 일종의 액자)의 시를 곱씹던 황제의 눈에서 주룩 눈물이 새어나오자, 근신하고 있는 유근을 대신해 잠시 동안이나마 황제를 보필하게 된 제독동창(提督東廠, 동창의 우두머리) 마영성(馬永成)은 화들짝 놀랐다.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아.”

    마영성의 물음에 후조는 그제야 본인이 감상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훔쳤다.

    “마 제독.”

    “예, 폐하.”

    “이 시가 참으로 슬프지 아니 한가?”

    읍(揖)을 하며 한 발 자국 물러난 영성이 표구의 시를 읽어 내려갔다.

    형식이라던가 형태가 낯설기 짝이 없다는 문제는 차치하고, 마음에 아릿한 감동을 일게 하기는 했지만 황제의 물음처럼 슬프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어찌 그리 느끼셨사옵니까?”

    후조가 손을 뻗어 표구를 어루만졌다.

    “여기 나오는 사슴이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는 노인과 같지 않던가.”

    “돌아갈 수 없는··· 과거 말이옵니까?”

    “짐이 황제라 하나 시간을 어찌 되돌릴 수 있겠는가. 짐도 백발이 성성해지고, 허리가 굽게 된다면 이 시의 사슴처럼 옛 영광에 잠겨 세월을 보내게 되겠지, 그러다 삼도천을 건너겠지.”

    “폐하께선 아직 창창하시옵니다.”

    고개를 끄덕거린 후조가 시선을 옮겼다.

    밖은 비 개고 구름 가득해 달 밝은데

    문풍에 비친 달은 내 마음처럼 휘어졌구나

    울저해져 창문 여니 문풍 사이로 바람 깃든다

    .

    .

    .

    내 가슴 소장 읽고 쿵쿵 방아찧고

    삼경 북소리는 꼭 우리 성이 기침소리 같아

    쿵쿵 방아 찧는구나

    앞전의 ‘사슴’이란 제목의 시가 조선의 현왕이 지은 시라면, 이건 상왕이 지은 ‘우리 성(誠)이’ 라는 시였다.

    왕의 말에 따르면, 조선의 왕자가 두창에 걸린 적이 있는데 그때의 기분을 술회하며 지은 시라고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가슴 포근해지는 아비의 부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황께서도 이런 마음을 가지신 적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조선의 현왕과 상왕이 참으로 문장에 조예가 깊구나. 아니 그러하냐?”

    “···그러하옵니다.”

    “왕은 취침에 들었겠지?”

    “예. 시간이 시간인지오라··· 한데 그건 어찌······.”

    “난 왕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호탕하고, 호쾌하고, 사내의 기상이 충만하니 과연 당세의 호걸이라 부를 만 한 인물이 아니냐. 그런데 이 사슴이란 시를 읽고 나니 현왕이 궁금해진다. 상왕도 이리 호쾌한 기상을 뽐내는데, 현왕은 어떻겠느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조선국왕 전하께서 현왕 전하를 칭찬하는 일이 많지 않았사옵니까?”

    영성의 말대로였다.

    왕은 현왕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형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다··· 효(孝)하는 마음이 고사 어느 구절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효자다···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과연 윤택하다··· 시를 잘 짓고 문장에 뛰어나다 등등.

    다만.

    “칭찬은 했다만, 어떤 사람인지 듣진 못 했지. 내 그래서 왕이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면 다과라도 들면서 현왕이 어떤 자인지 좀 들어보려 한 것이다. 한데 취침에 들었다면 관두거라.”

    “아··· 그러고 보니 일전에 책봉사로 왔던 노 공(公) 말이옵니다.”

    “노 공이라면··· 지부사 말이냐?”

    “예. 신이 어제 옥하관에서 대작을 한 적이 있는데 황성에 온 뒤로 불면이 도져 잠자리에 쉽사리 들지 않는다 하였사옵니다. 아마 오늘도 그럴 테니 불러들여 현왕이 어떤 분인지 물어보심이 어떻겠사옵니까?”

    “호오. 마 제독이 유근이보다 더 쓸모가 있구나, 하면 어서 불러오라.”

    잠시 후.

    영성이 노공필과 함께 입실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아닌 밤중에 황궁에 끌려온(?) 공필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다짜고짜 부복한 공필을 일으켜세운 후조는 차를 권했다.

    “긴장치 말고 앉으라.”

    “사신이 말하길, 하오나 어찌 감히 앉을 수 있겠냐 되묻나이다.”

    “괜찮으니 앉으라고 전하라.”

    몇 번의 설왕설래가 오가고, 공필이 조심스레 자리에 착석했다.

    얼어붙은 공필에, 긴장도 좀 풀어줄 겸 후조는 공필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오늘은 그 패가 보이지 않는구나.”

    “사신이 말하길, 신언패는 깜빡하여 두고 왔다 하옵니다.”

    “그래, 그래. 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든 여쭈신다면 성심을 다해 아뢰겠다 하옵니다.”

    고개를 끄덕거린 후조는 현왕이 어떤 자인지를 물었다.

    공적인 자리도 아니고 사적인 자리에 갑자기 불려와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공필은, 황제의 질문이 의외로 가벼운 주제라는 점에 안도하면서 진성에 대한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해주었다.

    왕이 왕자 시절 친히 두창을 다스렸다··· 왕이 상재가 있어 여러 상품을 만들어 부를 축적했다··· 왕이 왕자 시절 언사가 조금의 조심성도 없어 비난을 받았는데 지금도 고쳐지지 않아 걱정스럽다··· 왕은 여색을 밝히진 않지만 중전과의 금술이 아주 좋다··· 왕이 왕자시절 반란군을 직접 토평한 적이 있다······.

    아우 사랑이 지극하던 상왕에게 들었던 내용도 있지만 대부분은 새로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후조의 관심을 끄는 건 따로 있었다.

    “꽈배··· 기? 그게 그리 천상의 맛이라고?”

    “예. 사신이 말하길, 대신들도 어쩌다 한 번 하사 받게 되면 제 부모에게도 공양하길 아까워할 만큼의 맛을 자랑한다 하옵니다.”

    “호오, 그런 맛의 음식을 만들어냈다?”

    후조가 관심과 흥미를 보이면서 적당히 추임새를 넣자, 공필의 긴장도 풀려갔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지, 공필은 황제의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있는 말 없는 말까지 죄 전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곧 클라이막스에 다다랐다.

    “···하여서 마침내 하늘을 날았다고 하옵니다.”

    다름 아닌 열기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열기··· 구?”

    “예.”

    끔뻑끔뻑.

    후조는 눈을 붕어마냥 끔뻑거렸다.

    지금껏 이야기를 잘 들었는데 산통이 다 깨진 기분이었다.

    글쎄, 열기구란 도구를 만들어 하늘을 날게 했다지 뭔가.

    “허.”

    짧게 헛바람을 들이킨 후조가 곧 정색했다.

    “사신이 이제 보니 허풍이 심하구나.”

    “아,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참말이라 하옵니다.”

    쾅!

    “내 사신에게 무례하게 굴 생각은 추호도 없다만, 그전에 사신은 짐을 능멸하는 일을 삼가야 할 것이다!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란 말인가! 내 왕을 보아 이 일을 문제 삼진 않겠지만 자중하라!”

    “차, 참말이라고만······.”

    “사신의 나이가 예순이 넘었다더니 노망이 든 모양이로다. 객사로 뫼셔라.”

    “예, 폐하.”

    영성이 사신을 데리고 장내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후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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