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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22화 (322/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22화>

***

“왕은 보시오. 왕이 코끼리 상(象)을 문자로는 봤어도 이리 실물로 본 적은 없을 것이외다. 이게 바로 코끼리 상의 코끼리라는 동물이오. 덩치가 커서 둔해보이지만, 영물이 따로 없다오.”

“이건 파오인데 왕도 들어서 알겠지. 나는 여기서 생활하오. 이게, 왕도 알겠다만 제왕의 자리란 따분하기 그지 없지 않소이까? 한데 이 파오에서 생활하면 구중궁궐의 심처에서 산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너른 벌판에서 산다는 느낌을 받소. 뭐, 썩 괜찮아보인다고? 하하하. 왕이 과연 보는 눈이 있소이다. 내 왕에게도 하나 선물 할 터이니 돌아가거든 꼭 해보시오.”

“어떠시오? 왕의 나라에도 이런 색목인이 있을지 모르겠소만, 내 요새 이 색목미녀들을 보는 낙에 사오. 보시오, 피부가 얼마나 희고 곱소? 제아무리 중국의 이름난 미모의 여인도 이 색목미녀들만은 못 할 거요. 아, 왕의 후원에도 이런 색목미녀가 있소? 아, 없다고? 내 두어명 내어드리리다. 해어화가 따로 없소, 해어화가.”

자금성에 들어온 지 벌써 사흘.

융은 빠듯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첫 날에 베풀어진 연회도 어마무시한 규모였다.

황제는 그의 입조를 축하한다며 연회 때 불꽃을 터뜨렸는데, 그 불꽃이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하늘을 확 가릴 정도의 양의 불꽃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황제는 신이 잔뜩 나서는 본인의 취미를 공유했다.

빠듯한 일정에 피곤하긴 했지만, 융에게도 관심이 가는 취미들이었다.

특히 표방이라는 동물원은 귀국하거들랑 꼭 지어보고 싶은 것 중 하나였다.

천하만방의 진귀한 동물들이 한데 모여 살았는데, 동물들에게는 가히 낙원이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색목미녀들도 융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황제의 말처럼 제아무리 경국지색으로 이름난 여인들이라 할지라도, 이 색목미녀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피부가 어찌나 곱고 희던지··· 거기까지라면 경국지색을 뛰어 넘는단 말도 않는다.

색목미녀들 모두가 하나같이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가슴은 풍만하며, 허리는 잘록하다.

사내가 아니라 같은 계집이 봐도 한 번쯤 돌아볼 만한 미녀들이랄까?

그런 미녀들을 하사 받았다.

어디 미녀들만 받았겠나?

“왜구? 쯧쯧. 하여간 왜놈들의 분탕질은 시대를 가리지 않소이다. 걱정마시오. 내 필히 원군을 보내 힘을 보태리다.”

애당초 융이 만리길을 달려와 황제를 조천한 것은 다른 겁소다도 원군 파병의 약조를 받기 위해서였다.

황제가 제아무리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 해도 이 부분 만큼은 예외 일 수 있다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는데, 웬 걸.

너무도 흔쾌히, 이렇게 흔쾌히 허락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흔쾌히 원군을 약조 받았다.

무릇 인간사에 있어서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

색목미녀에, 파병 약조까지··· 감히 값어치를 매기기 힘들 만큼의 것들을 황제에게 받았는데 입 싹 씻기엔 면이 서질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융도 점점 호탕한 황제가 마음에 들던 참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달까?

“이건 당구라는 것인데, 아마 폐하께서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어떻게 하는 거냐면······.”

그래서 당구를 전수(?)했다.

혹시나 하고 준비해 온 당구대와 당구공이 있었기 때문에 전수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전수를 하긴 했는데······.

“전하. 폐하께오서 당구 노름을 하시는 것이 어떠하온지 여쭙나이다.”

“전하, 폐하께오서 식후에 당구 노름을 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시나이다.”

“전하, 폐하께오서 잠이 오질 않으니 당구 노름을 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시옵니다.”

“전하, 폐하께오서······.”

당구를 전수한 지 다시 사흘.

당구에 푹 빠진 황제는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당구를 청했다.

귀찮으리만치 당구에 푹 빠져서 괴롭히는 황제에 짜증이 확 나다가도, 과거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순순히 당구에 응해줬다.

융도 처음 당구를 막 배웠을 땐, 당구에 맛을 들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구장창 당구만 쳐댔다.

생각해보면 진성이를 엄청 귀찮게 했었다.

당구나 치자, 국정 다 돌봤으면 당구 어떠냐, 밥 먹고 난 김에 소화도 시킬 겸 당구 어떠냐, 날이 우중충한데 곧 비가 올 것 같구나 당구나 치자··· 등등.

지금의 황제도 아마 그럴 것이다.

당구란 게 그만큼의 중독성을 가진 놀이니까.

그리고 중독성이란 오늘, 내일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중독성이라 부른다.

어제 쳤던 당구지만 황제는 오늘 또 당구 노름을 청했다.

물론 융은 거절하지 않았다.

“히로?”

당구대가 설치 된 곳에 나타난 황제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어눌하게 당구 용어를 언급했다.

융도 정확히 히로란 말이 어느 나라의 말인지는 모른다. 다만 진성에게서 당구 용어중 하나라고 배웠을 따름이다.

척 하면 척이고, 탁 하면 탁이라고 히로 있이 치냐 없이 치냐임을 금방 간파 할 수 있었다.

“이제 폐하의 실력도 일취월장하여 이 소왕과 견줄 정도시니 응당 히로가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곧이어 황제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지난 사흘간은 황제를 배려한답시고 히로 없이 쳤었다.

“폐하께서 선공을 해도 되냐 여쭙나이다.”

융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래 당구란 초심자가 선공 하는 것이다.

잠시 후.

탁!

데구르르 굴러간 공이 안타깝게 빗나갔다.

“각이 틀렸습니다. 차라리 우라를 돌리시지 그러셨습니까.”

긁적긁적.

“각이 안 보이셨다 하시나이다.”

뭐, 이제 당구를 배운지 사흘을 지나 나흘째니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해도 우라 각을 볼 만큼은 아닐 터였다.

고개를 끄덕거린 융이 큐를 들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제 미처 여쭙지 못 한 게 하나 있으시다 하옵니다.”

공격과 방어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때.

황제가 역관을 통해 물었다.

“음?”

“이백돌의 이름으로 출정을 했을 때, 대신들의 반대가 심하진 않았냐고 묻는다는 걸 깜빡하셨다고 하시는데 뭐라고 말씀을 드리면 되올지······.”

“아, 그거.”

황제는 당구에도 관심을 보였지만, 유달리 관심을 보인 게 있다면 융이 벌인 기행이었다.

식후에 틈틈이 불러, 조선에서 있었던 일화를 직접 들려주길 원했었는데 그중에 유구국 원정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왕으로서 출정한 것이 아니라 이백돌이란 제2의 인격체로 출정을 하게 됐단 말도 하게 됐는데, 황제는 특히 이 부분에 관심을 보였었다.

왕이 아니라 어찌 이백돌로 출정을 한 것인지, 어떤 곡절이 있었던 건지 등등.

“심했던가? 기억이 안 나는데··· 지부사!”

“불러계시옵니까, 전하.”

“내 대장군으로 출정할 때 대신들에게서 반대가 있었던가?”

“이미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심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옵니다.”

“맞다, 그랬었지.”

“예.”

“역관은 들었는가? 별로 심하진 않았다더군.”

역관이 말을 전하는 사이.

융은 큐를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청이 하나 있으시다 하옵니다.”

“청이 말입니까?”

융이 의아해하며 묻자, 쭈뼛거리던 황제가 소매에서 뭔가를 하나 꺼내 건넸다.

이게 뭔가 하고 살펴보니 웬 이름이다.

이름이······.

“주··· 수? 주수(朱壽)?

“폐하께서 그 이름은 어떠냐고 여쭙사옵니다.”

“이게 어떤 이름인데 폐하께서 내게 저 이름이 어떠냐 묻는 겐가?”

“그것이······.”

이미 황제와 자신의 비정상적인 담화를 수천번 통역하며 이골이 난 역관일 텐데, 그런 역관도 선뜻 황제의 말을 통역하지 못 했다.

대단히 민감하거나, 민망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는데 뭐가 됐든 상관은 없다.

“괜찮으니 황제께서 뭐라 하신 건지 말해보시게.”

“전하께서 왜구를 토벌하는 일에 원군을 청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런데?”

“그 원군들을 지휘할 대장군의 이름이라 하옵니다······.”

융은 반색했다.

“아, 그래? 한데 내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 휘의 주인은 어떤 분이신고?”

“···”

“역관도 모르는가?”

“···폐하이시옵니다.”

주수라는 대장군이 폐하다.

라는 역관의 말이 이해가 안 됐다.

이해가 안 되는 말에 당연히 인지부조화가 일었다. 자연스레 황제를 바라보자, 황제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주수를 대장군으로 임명해 조선에 보내고자 하는 것이 짐의 뜻이고, 왕이 반대치 않았으면 하는 것이 짐의 청이니 부디 왕은 짐의 청을 거절치 마시오.”

끔뻑끔뻑.

“···지부사.”

“예, 전하.”

“경들의 기분이 이러했겠구나.”

“그렇사옵··· 흡!”

“괜찮다.”

뭐라 형용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본인을 대장군으로 임명해 원군의 총책으로 파병한다라······.’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할 때와 당할 때의 기분이 사뭇 다름을 느끼고 있는 융이었다.

***

「···하므로 황제폐하의 덕으로 남왜정총병관(南倭征摠兵官)에 제수 된 신이 보건대 폐하께서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교화를 크게 펴시고, 본시 신심(황제의 마음)이 선하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제후국은 가히 창성(昌盛)한 시대를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에 더해 폐하께서는 형편이 어려운 제후의 청을 뿌리 칠 수 있음에도 그들의 사정을 불쌍히 여기시어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시니 신이 비록 제후국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 은혜는 무수(無數)라 감히 갚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주나라 문왕이 백성 사랑하던 것을 본받으시고, 하나라 임금의 물길을 바로잡던 일을 기리는 때를 삼가 만나서 제후로 하여금 큰 사은을 입게 하셨으니 총병관에 제수 된 신은 마땅히 그 은덕을 잊지 않고, 더욱 단충(丹忠)하여 제후국에 나아가서도 폐하의 제후국과 그 나라 백성들을 사랑하는 뜻에 어긋남이 없게 하겠습니다. 황제폐하 만세!」

봉천전(자금성의 정전).

끔뻑끔뻑.

“···폐하.”

얼이 나간 대신들 사이에서 가까스로 가출한 넋을 되찾아온 동각대학사 양정화였다.

“말하라.”

“황송하오나 남왜정총병관은 무엇이고··· 아니, 주수라는 인물은 누구이옵니까?”

“아, 경들은 주 장군을 모르겠구나.”

“그러하옵니다.”

“주 장군은 정혜(定慧) 선사(禪師)를 근시하던 자인데 그 무위가 탁월하여 악비에 견줄만 하다길래 내 발탁했소.”

황제가 말하는 정혜 선사가 누구였더라··· 기억이 안 나 기억을 더듬던 정화는 뜨악했다.

2년 전.

황제가 부처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부처에 심취한 황제는 심취 정도로 끝난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 정혜(定慧)라는 법명을 내리고, 선사(禪師)라 높여부른 기행을 벌인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기행은 표방을 지음으로써 일단락 됐었는데, 일단락 됐던 정혜 선사를 근시하던 인물이라면······.

“···”

또 시작이 분명했다.

“하오면 남왜정총병관은 무엇이온지······.”

하지만 황제가 본인을 정혜선사라 높여불렀던 기행을 벌인 2년 전처럼, 이번에는 대장군 주수라 부른다 하더라도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남왜정총병관.

정화는 이 말을 듣자마자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총병관이란 직책부터가 그랬다.

그래서 물었던 건데, 어째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다.

“경들이 공사가 다망한 터라 미처 말하지 못 했소마는, 이번에 조선왕이 짐에게 원군을 요청했었소이다.”

웅성웅성.

금시초문인 말에 봉천전이 소란스러워졌다.

“원군··· 말씀이시옵니까?”

“그렇소, 원군.”

“신들은 조선왕이 원군을 청했다는 말은 미처 들은 적이 없사온데······.”

“경들이 하도 공사가 다망해 미처 말하지 못 했다고 말하지 않았소? 좌우지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왕이 원군을 청한 것이 왜구 때문이라 하더이다. 이 왜구 놈들이 말이오, 얼마나 악증(惡症)스러웠던가 하면······.”

어이가 없는 걸 넘어, 하도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혀버린 정화를 대신한 건, 내각수보 유건(劉健)이었다.

일흔이 넘은 노신으로서, 고자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정화가 존경하는 유일무이한 인물이기도 했다.

“폐하! 아니 될 말씀이시옵니다! 지금 도처에서 창궐한 도적떼와 역적 무리도 제대로 토벌하지 못 하여 각지에서 백성들이 신음하고 있는데 어찌 원군을 보낸단 말씀이시옵니까!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유 수보는 또 그놈의 입방정인가? 늙었어도 그 입은 쉬지를 않는구만.”

“폐하, 혹 유 태감이 조선에 원군을 보내는 일이 합당한 일이라 속삭여 폐하께서 원군을 보내시기로 마음 먹으신 것이라면, 더욱 더 명을 거두셔야 하옵니다! 병필태감 유근은 가히 간사하기 짝이 없는 마음씨로 폐하를 능멸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쾅!

“유 수보는 짐이 태감의 말에 부화뇌동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오나, 하오면 어찌 원군을 파병하려 하신단 말씀이시옵니까? 이는 선황이셨다면 결단코 듣지 않으셨을 일이옵니다!”

“선황이 승하하시고 짐이 제위에 오른지가 몇 년인데 자꾸 선황을 들먹인단 말이냐! 수보는 이제 천수를 다해서 오늘 뒈지나 내일 뒈지나 여한이 없기 때문에 그놈의 명줄을 재촉하는 것인가? 인명은 재천이란 말도 황제인 짐에게는 해당이 없는 이야기다! 내 오늘 인명은 재천이 아니라 짐에게 달렸다는 말을 몸소 보여주랴?”

“폐하!”

“여봐라!”

곧이어 금위군이 들이닥치자, 후조는 유건을 가리켰다.

“저 늙고 쓸모없는 버러지를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버려라! 선황의 총애를 받았기로서니 어디 감히 황제를 능멸한단 말인가?”

일흔이 넘은 노신이 금위군들의 우악스런 손길에 질질 끌려나갔다.

경악스런 장면이었지만, 대신들에게는 익숙한 장면이기도 했다.

입바른 소리 하는 대신들의 말로는 늘 저랬으니까.

“또 쓸모없는 버러지가 있느냐?”

“···”

“출병은 조선왕이 귀국하는 날 함께 할 것이니 그리들 알라.”

통고하듯 말한 후조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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