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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21화 (32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21화>

    ***

    오늘은 후조에게 있어서 매우 경사스런 날이었다.

    퍽 마음에 드는 제후가 마침내 경성에 도착해 그를 알현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기 때문이었다.

    이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몇 달 전.

    제후가 조천을 해도 되겠냐는 계청문(啓請文)을 보내왔다.

    처음 이 계청문을 받아본 후조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 이후 기약없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하루가 꼭 1년 같았다.

    들뜬 모습에, 궁인들은 오죽하면 황제가 하다하다 이제는 남색까지 하는거냐 수군 거릴 정도였다.

    대신들은 노골적으로 남색질 운운하진 않았어도, 황제가 여색을 탐하더니 이제는 한나라 애제(哀帝)의 풍모가 보인다 어쩐다 입방아를 놀려댔었다.

    알다시피 애제는 총애하던 신하 동현(董贤)과 비역질 의혹이 있는 황제였다.

    비역질 의혹만 있었다면 다행(?)이겠다만, 동현을 총애하면서 국정에 소홀하다 제위에 등극한지 7년도 채 되지 않아 병사한 인물이 바로 애제였다.

    그런 자를 자신에 빗댔으니, 평소의 후조 였다면 입방아를 놀려댄 대신들을 때려 죽여도 골백번 때려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제후가 조천을 한다.

    괜한 피를 보는 건 불길한 일이었다.

    때려 죽여도 골백번 때려 죽일 일까지, 경사를 앞두고 불길한 일이라며 관둘 만큼 후조는 조선왕과의 만남을 퍽 기대하고 있었다.

    후조가 조선왕에게 호감을 갖게 된 건, 단순히 그의 기행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선왕 덕에 세상에 혼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있었다.

    천자라 한들 다 똑같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칼에 찔리면 피가 나고, 세인들의 화두에 올라 난자 당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낀다.

    후조는 등극한 이래 여러번 세인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처음에는 기대를 모으던 신민들의 실망감이 화두에 올랐고, 그 다음에는 주색에 빠진 자신을 비판하는 신민들의 화두에 올랐으며, 다음으로는 표방을 짓고 진귀한 동물들을 위한 방(房) 지었다는 까닭에 그들의 화두에 올라 난자 당해야만 했다.

    이 모든 건, 그가 황제기 때문에 듣는 말들이었다.

    대부의 자제로 태어나, 지금과 같은 생활을 영위했다면 희대의 탕아라는 말은 들었을지언정 미치광이 황제란 말을 듣진 않았을 테니까.

    때문에 더 고립 된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나 혼자라는 느낌.

    이 고독은 그 어떤 신하들조차 이해 할 수 없다는 느낌.

    그런데!

    우연히 입조한 조선의 사신을 통해 혼자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동국에도 나같은 제왕이 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우리의 흥을 따라오지 못 하는 것이다!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만나서, 너도 나와 같은 심정을 겪었느냐 물어보고 싶었다.

    허심탄회하게 너는 어떤 일을 좋아하느냐 묻고 싶었고, 나의 표방이 어떠하냐 물어보고 싶었다.

    세인들은 비난하고 신하들은 비판만 하는 그의 일들을, 적어도 조선왕이라면 이해해주고 진심으로 즐거워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로.

    “짐의 모습이 혹 천박해보이진 않더냐?”

    조선왕과의 만남이 이제 일식경도 채 남지 않았다.

    황제위에 등극했던 날도 이만큼 떨리진 않았었다.

    만남을 고대하고 또 고대했던 조선왕에게 천박한 꼴을 보일 순 없었다. 후조는 괜히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그의 뒤를 따르던 환관에게 물었다.

    “아니옵니다, 폐하. 늠름하시옵고, 헌거(軒擧)한 모습이 꼭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오랑캐에게서 구제한 고황제(주원장) 폐하를 뵙는 것 같사옵니다.”

    고황제 같단 말에 후조는 체통도 잊은 채 헤헷- 하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고는 너무 경박하게 웃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신색을 가다듬었다.

    천박한 꼴을 조선왕에게 보일 수 없는 것처럼, 경박한 모습 또한 조선왕에게 보일 수 없다.

    그렇게 후조는 기대를 가득 안고 정양문을 나섰다.

    ***

    끔뻑끔뻑.

    “그게 무슨 말이오?”

    “송구가 지극하니 오직 황름(惶懍)할 따름이나이다, 폐하!”

    몇 달 만에 보는 양 동각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입바른 소리만 해대는 저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찢을 때 찢더라도 곡절은 알고 찢고 싶었다.

    “무슨 말이냐니까!”

    “그것이 어찌 아뢰어야 할지 막막하여······.”

    몸둘 바를 몰라하는 양정화에 후조는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고 보면 이 마차도 조선왕에게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개조한 마차였다.

    평범한 마차가 아니란 말이다.

    커다란 바퀴가 달린 수레 위로는 거대한 파오(게르)가 올라가 있었고, 그 좌우로는 승천하는 용을 조각한 석상이 장식돼 있었다. 물론 여기서 끝은 아니었다.

    마차가 아니라 상차(象車)였다.

    무려 네 마리의 코끼리가 이 수레를 끌고 있었다.

    말했듯 조선왕에게 보여주기 위해 개조한 수레였다.

    “바른대로 말해보라! 어찌 있어야 할 왕이 없는 것인가?”

    머잖아 정화가 내막을 털어놨다.

    그러니까, 유근이가 일을 그르쳤단다.

    말로만 듣던 경성에는 처음 오는 왕이 긴장하고 있을까, 그래서 혹 자신을 기다리는 일을 언짢아 하고 있을까,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당황해하고 있을까.

    왕의 비위나 맞추고 있으라고 보냈더니 외려 왕을 언짢게 했단다.

    그것도 황명까지 거역하면서.

    “주인 말 좀 잘 듣는가 싶어 어여삐 여겼더니 이놈이 감히······.”

    “···”

    마뜩찮은 표정으로 입가를 씰룩거린 후조가 곧 말허리를 걷어찼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미친 듯 말을 몰던 후조는 전문대가(前门大街) 즈음에 도달해서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저 멀리 조선왕의 행렬으로 짐작되는 무리가 보였다.

    행렬은 멈춰 있었는데 아마 저기 보이는 유근 때문인 것 같았다.

    왕의 행렬을 멈춰 세운 유근이 조선왕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는데 거리가 있어 확실하진 않지만 목을 빳빳하게 치켜 든 꼴을 보아, 공경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일개 사신 대하듯 왕을 대하는 듯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놈은 황제를 능멸한 것과 다름이 없다.

    후조가 가볍게 말허리를 걷어찼다.

    잠시 후, 왕의 행렬에서도 자신을 알아본 것인지 술렁이기 시작했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유근도 금방 그의 등장을 알아챘다.

    “폐, 폐하!”

    “유 태감.”

    털썩!

    “그, 금위군만 대동한 채 어찌 예까지······.”

    “짐이 분명 예를 갖춰 왕을 대하라 했을 텐데.”

    “아, 그것이······.”

    “양 동각에게 전말은 들었으니 변명은 말라.”

    꿀꺽.

    “짐의 말이 우스웠더냐? 아니면 짐이 북적들처럼 파오에서만 지내니 짐의 말이 오랑캐의 말과 같았더냐?”

    “어, 어찌··· 말씀을 거두어주시옵소서, 폐하!”

    “내 특별히 조선왕은 정양문을 통과해도 된다는 특지를 내렸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너도 모르진 않았을 터.”

    정양문은 오직 황제의 마차만 드나들 수 있었다.

    설사 제후국의 왕이 조천을 하러 온다해도 이 정양문은 통과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조는 조선왕의 정양문 통과를 허락했다.

    번거롭게 다른 명을 내릴 필요 없이, 이 특명 하나면 자신이 조선왕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아서 알아채고 왕을 공손히 뫼실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 착각이었다.

    “폐, 폐하! 오, 오해이시옵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란 말이냐! 내 당장 네놈을······.”

    역정을 내려던 후조가 입을 닫았다.

    조선왕으로 짐작되는 인물과 눈이 마주친 때문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은 첫 인상이 중요한 법.

    초면에 살인하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다.

    하마한 후조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선왕에게 다가갔다.

    ***

    “왕을 부른 것은 짐인데 실례를 했소이다. 왕의 얼굴을 마주하기 민망하기 이를 데 없으니 내 면목이 없소. 태감의 일은 내 대신 사과하리다··· 라고, 하시옵니다.”

    굳이 역관이 황제의 말을 통역하지 않아도, 그 태도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쯤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만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하긴.

    황제의 진면목을 공적인 칙서 따위를 받아보면서 어떻게 알 수 있었겠나?

    칙서를 통해 그린 황제는 거만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위인일 줄 알았는데 정 반대다.

    “폐하께서 사과를 하시니 오히려 소왕(小王)이 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라고 전하면 되겠군.”

    “평소 내 말하지 않아도 내 뜻을 알아차리고, 내 표정만 봐도 뭐가 필요한지 알 정도로 명민하여 가까이 하였는데, 아무래도 충심이 과해 화를 부른 듯 하오이다.”

    융은 고자 놈을 흘겼다.

    아까 정양문에서의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바닥에 바짝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고자 놈이다.

    비 맞은 개새끼 마냥 벌벌 떨고 있는 고자 놈에 통쾌하기 짝이 없다.

    “물론 뜻이 좋았다 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소이까. 신하의 덕목도 그렇소. 충심이 과해 일을 그르쳤으니 내 어찌 믿고 의지하겠소이까. 왕에게 무례를 범한 자이니 왕의 뜻대로 처벌하였으면 하오. 어찌하면 좋겠소? 라고 하시나이다.”

    “좋은 날에 피를 본다면 그것이 어찌 경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사로운 일은 잊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라고 전하면 좀 건방져 보일려나?”

    “그렇진 않을 것이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하시게.”

    역관이 말을 전하자마자 황제가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과연 왕의 마음이 저기- 창해처럼 넓구려. 다만 왕이 용서했더라도 내가 용서치 못 하겠소이다. 왕이 보는 앞에서 태형(笞刑)을 가해 그 죄를 뉘우치게 하겠소, 라고 하시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폐하께서 소왕을 위한다는 마음은 충분히 알았으니 오히려 감당 못 할 황은을 입어 송구스럽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라고 전하지.”

    말이 퍽 마음에 드는지 역시나 황제가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자, 궁 안으로 듭시다. 비록 첫 만남이 매끄럽지 못 했다지만 왕을 위해 준비한 연회는 분명 왕의 마음에도 들 거요.”

    융은 앞장 서 걷는 황제를 뒤따랐다.

    황제와 제후의 관계를 떠나, 사람대 사람으로 보자면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 같았다.

    ***

    “왕은?”

    “긴 여정에 묵은 때가 있은 채로 폐하의 연회를 즐긴다면 부정을 탈지도 모르시겠다면서 목욕재계를 한다 하셨나이다.”

    “으음.”

    고개를 주억거린 후조가 시선을 옮겼다.

    털썩!

    후조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이는 병필태감 유근이었다.

    “양 동각도 이제 막 돌아와 피곤할 터인데 돌아가 쉬시오.”

    “예, 폐하.”

    정화가 물러가고 장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태감.”

    “예!”

    “그대가 병필의 태감 자리에 앉아 온 환관들을 진두지휘하다 보니 황위에 앉은 것 같이 느껴지던가?”

    “시, 신이 어찌 감히! 아니옵니다!”

    “그런데 왜 짐의 영을 바로 세우지 않은 것인가?”

    “그건··· 죽여주시옵소서!”

    “왜 바로 세우지 않은 것이냐 물었다. 내 분명 그대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비록 왕이 조천 하는 것이긴 하나, 왕을 불러 들인 것은 짐이니 조천을 했다고 해서 고개를 조아릴 필요도 없고, 예를 갖출 필요도 없다고, 그러니 가서 왕을 자극하지 말고 최대한 그 비위를 맞추라고.”

    꿀꺽.

    “신은 다만······.”

    “다만?”

    “이번 조선왕의 조천으로 세인들이 놀라고 있는지라······.”

    아무리 표방에서 여인들 치마폭에서 둘러싸여 지내는 후조라 해도 태자 시절에는 총명하고 영특하다 명성이 자자했었다.

    척 하면 탁이었다.

    “짐의 권위를 위함이었다?”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지금 경성에 나도는 소문을 폐하께서도 들어 아시겠지만, 폐하의 위엄에 압도 된 왕이 입조했다는 말들이 나돌고 있사옵니다. 이런 소문은······.”

    “짐에게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지 않겠지.”

    지금 왕이 입조하는 건 황상의 위엄에 압도 됐기 때문이다.

    황상이 단 한 번 호령으로 불러들이니 왕이 만리길을 달려왔다.

    이런 소문만으로도 황제는 그 권위가 선다.

    하물며 여태 예방 한 번 없었던 제후의 조천이니 오죽할까.

    다만.

    “근아.”

    “···예, 폐하.”

    “너는 짐의 권위를 위함이었다고 말한다만 나는 꼭 달리 들린다.”

    “어인 말씀이시온지······.”

    황제의 권위가 우뚝 선다.

    이건 분명 후조에게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진 않는 일이다.

    그럼 그 측근들은 어떨까?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황제의 권위가 우뚝 서면, 그 지근거리에 있는 자들의 권위 역시 덩달아 올라 갈 수 밖에 없다.

    “네놈을 위해서 한 일을 짐을 위해 했다? 나더러 그 말을 믿으란 것이냐?”

    “폐하, 신은 오직 충심으로······.”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짐이 모르지 않는다. 몇 달 전에 도적 무리에게 살해 당한 완평현 지현 역시 네놈의 당여라지?”

    “···”

    후조는 피식 웃었다.

    “왕은 용서한다지만 내 용서가 안 되는구나.”

    “···?”

    “여봐라!”

    그의 말 한 마디에 금위군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저놈을 끌고 나가 오늘의 죄를 태형으로 다스리라.”

    “폐, 폐하! 폐하!”

    질질 끌려나가는 유근에 후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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