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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20화 (32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20화>

    ***

    《조천일기(朝天日記)》

    1.

    「···를 지나쳐 마침내 황성평(皇城坪)에 당도하였다. 말로만 듣던 황성평을 눈으로 목격하니 과연 감회가 새롭고도 몸에 전율이 일어 말고삐를 쥘 수가 없었다. 가만히 황성평의 너른 들판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니 여진인 길라잡이 아두리(亞豆里)가 ‘흉조입니다.’ 하더니 돌아가길 청했다. 곡절을 묻자, ‘이 황성평은 옛날 황제의 무덤가가 있는 곳인데 그 황제가 6월에 죽었기 때문에 6월에 내리는 비는 상서롭지 못 한 것으로 여깁니다.’ 내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 ‘여름에 비가 내리는 것은 천지자연의 지극한 조화이니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비가 사람을 해할 순 없다.’하고 황성평을 둘러보았다. 비석이 가까워지매, 비석의 모습을 확연히 볼 수가 있었는데 높이가 족히 2장(6m)은 되어보였다. 비신은 땅속에 살짝 묻혀 있는 형태였고, 아두리에게 묻자 상서롭지 못 한 곳이라 지역 여진인들은 발을 들이지 않는다 말했다. 책봉사로 대국에 다녀온 적이 있는 노공필에게 ‘경은 비석을 처음 보는가?’ 묻자, 노공필이 놀란 눈으로 처음 본다 답했다. 사행길의 경로란 뻔할 수 밖에 없는데, 황성평은 사신로에서 멀찍이 떨어져 만포에 가까우니 소문으로만 접했지 감히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잠시 후, 비가 그쳐 장막을 치게 하고 노숙했다. 노숙하면서 비석을 조심스럽게 파내라 했는데 마침내 비신 전체가 모습을 드러내니 아두리가, ‘어느 황제의 것인지는 몰라도 제사를 지내 위령함이 어떻겠습니까?’ 두려워하며 말하길래 꾸짖으려다가 과연 군관들 조차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기에 단촐하게나마 제사를 지내게 하고, 드디어 비신에 새겨진 글자를 해독했다. 다만 오랜 세월 풍파를 맞았기 때문인지 해독이 어려웠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달포고 반년이고, 머무르며 비신의 글자를 해독하겠다만 시간이 없어 어가를 호종하는 봉해위 군관과 군사들에게 금상에게 보내 해독케 하라 명하고는 길을 재촉했다. 어느 시대에, 어느 황제가 세운 비일지 자못 궁금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정덕 3년 6월 23일 맑았다가 비옴.

    2.

    「···하여 만리장성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산해관에 들어섰다. 성벽은 견고하고, 누각은 화려하니 봉래산(전설 속의 산)에서도 확인이 가능할 것 같은 자태였다. 내 잠시 대장군으로서 이 성을 함락시킨다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얼마의 군사가 목숨을 잃을지 쉬이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끝내 함락을 시키고 이 성을 넘어가야만 한다면, 먼저 선봉대로 하여금 서편을 쳐서 수비군의 시선을 모은 연후, 화기를 이용하여 본성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허물어진다면 기병대를 투입하여 순식간에 종결시켜야 할 것 같았다. 보통의 공성전으로는 승산이 없을 듯 하다.」

    정덕 3년 7월 4일 맑음.

    3.

    「···하므로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정양문(正陽門)에서 군사들이 튀어나왔다. 이어 양정화가 말하기를, ‘황제께서 제후를 맞이하러 나오실 텐데, 예를 갖추지 말라십니다.’ 의아하기도 이렇게 의아 할 수가 없어, ‘예를 갖추지 말라니 무슨 말입니까?’ 물었다. 곧 정화가 ‘민망하니 더 묻진 마시고 굳이 예를 차리실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머잖아 정양문 너머로 필성(황제가 행차하는 소리)이 들리더니 웬 여인들과 함께 환관이 먼저 나타났다. 이 환관은······.」

    정덕 3년 8월 11일 맑음.

    “조선왕 전하께서는 예를 갖추십시오.”

    앵앵거리는 목소리는 환관의 것이었고, 앵앵거리는 목소리를 통역한 것은 역관이었다.

    역관의 말에 융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자는 누구요?”

    그리고 연행길에 제법 친해진 정화에게 물었다.

    곧 정화가 예의 환관의 정체를 말해주었는데,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이란다.

    이름이 유근이라나 뭐라나?

    황제의 총애를 받건 말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자였다.

    조선에서 내관이 설치는 꼴은 보지 못 했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사뿐히 무시하고 황제가 오기를 기다렸다.

    문제는.

    “허허허. 곧 황제께서 당도하십니다. 예를 갖추십시오.”

    고자 놈의 입방정이 문제였다.

    권세 있는 대갓집의 노비는 어지간한 경아전들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더니 저 환관 놈이 딱 그짝이 아닌가 싶었다.

    제놈이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 받는 거지, 뭔 놈의 입방정이 저리 천박한지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역관!”

    “예, 전하.”

    “내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전해라.”

    “말씀하시옵소서.”

    역관이 고개를 조아리자, 융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환관을 흘겼다.

    “황제폐하께서 친히 사람을 보내와 굳이 예를 갖추지 말라 황명을 내리셨는데 어디 환관 따위가 황명을 번복하려 든단 말인가? 나는 일개 조천사(명나라에 보내는 조선 사신의 총칭)가 아니라 폐하의 부르심이 있어 친히 조천(황제를 알현함)을 자처한 조선왕이다.”

    “저, 전하.”

    “그대로 전하거라.”

    역관이 그 말을 제대로 전달했는지 환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걸 모르진 않사오나 제후로서 대국에 와서 예를 갖춤은 예의지국을 자처하는 나라의 임금으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어이가 없어 헛바람을 들이키자, 중간자 입장에서 난처해 하던 정화가 마지못한 듯 나섰다.

    정화가 곧 중국말로 환관에게 뭐라 말을 했는데, 고자 놈의 성질머리가 괴팍함을 넘어 더럽기 짝이 없는지 외려 정화에게 큰 소리였다.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자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지금 네가 상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함부로 건들면 무슨 사달이 나는지.

    융은 아쉬울 거 없다는 듯 말머리를 돌렸다.

    갑작스런 행동에 정화는 물론이거니와 고자 놈도 당혹스러워 하는 눈초리였다.

    정화가 후다닥 다가와 말했다.

    “어찌 말머리를 돌리십니까?”

    “황제께서는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하시는데, 고자 놈이 예를 갖추라 하니 내 폐하의 장단에 맞춰야 할지, 고자 놈의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모르겠는데, 이딴 걸 생각한다는 것 자체도 기분 더럽기 짝이 없소. 돌아가겠소.”

    “도, 돌아가신다니 어딜 말씀이신지······.”

    “돌아갈 데가 내 나라 밖에 더 있겠소?”

    “왜 이러시옵니까. 먼 길을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한데 폐하를 뵙기도 전에 돌아가신다니요. 이만큼 황망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황망할망정, 먼 길을 달려와 고자 놈에게 호통을 들은 나만큼 황망하시겠소.”

    “···”

    말문이 막혀버린 건지 정화에게서 다른 대답은 없었다.

    “어쨌건 예까지 오며 든 정이 있는데 양 동각에게는 미안하게 됐소이다. 나중에 칙사로 오게 되면 내 후하게 대접하리다.”

    라고 말한 융은 말허리를 가볍게 걷어찼다.

    노공필을 비롯한 수행원들 역시 잠시 갈팡질팡 하다, 그 뒤를 따랐다.

    상왕의 기행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무려 황제를 대상으로 한 기행인지라 다소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미 상왕의 기행에는 이골(?)이 날대로 난 수행원들이었다.

    조선측 수행원들까지 미련없이 융을 따라 등을 돌려버리자, 발등에 불똥 떨어진 신세가 된 건 고자놈··· 아니, 병필태감 유근이었다.

    “아, 아니. 양 동각. 이게 무슨 일이오?”

    이번에는 유근이 정화에게 후다닥 달려나왔다.

    연유를 묻자, 정화는 눈을 샐쭉하게 치켜뜨고는 혀를 찼다.

    “충심이 과하셨소이다.”

    “충심이 과하다니 무슨 말이오?”

    “폐하께서 예를 갖추지 말라셨다면서, 유 태감이 왜 나서서 일을 키우시오?”

    “그야··· 아니, 잠깐. 내가 잘못을 했소이까? 제후가 조천을 하게 됐소이다. 폐하께서 예를 갖출 필요가 없다셨다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소?”

    “조선왕이 보통 제후요? 국초 때부터 조천을 하라 엄포를 놔도 거절하던 조선이오. 하물며 이번에 내 어떤 고생을 하면서 조선왕 전하를 뫼셔왔는데, 그걸··· 어휴.”

    지난 수개월 간의 여정들이 주마등 스쳐가듯 지나가는 듯 했다.

    힘든 나날들이었다.

    사실상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었다. 상왕은 예법에 딱히 얽매이진 않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선 어렵지 않았다.

    다만, 변덕이 죽 끓듯 했다.

    또, 갖가지 기행을 일삼았다.

    기억에 남는 기행은 단연코 기방 난입(?)이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 쯤인가.

    여장을 풀고, 평양감사의 접대를 받으며 객관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환복한 상왕이 방을 건너오더니, 역관 하나만 대동한 채 대뜸 그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어디로 가냐 물어도 대답 않고 도착한 곳은 기방이었다.

    여길 왜 온 거냐 물으니, 평양은 관기도 관기지만 사삿기생이 제일이라 데려왔단다.

    다음은 황성평에서 있었던 일이다.

    황성평에는 조선에선 아주 유명한 비석이 하나 있었는데, 전설이 여러개란다.

    옛 고구려의 왕과 관련된 전설도 있고, 금나라와 관련된 전설도 있고, 심지어 원나라와 관련된 전설도 있다나?

    그러면서 내기를 하자지 뭔가?

    이걸 해독해보고,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지.

    본인은, 지리적으로다가 금나라나 고구려일 가능성 커보이니 둘 중 하나에 걸겠단다.

    당장 기억 나는 것들만 이 정도다.

    왕의 기행이 위험하거나, 두려웠던 건 아니지만 당혹스럽고 환장할 만한 것인 건 분명했다. 이런 것들을 다 참고 드디어 경성에 도착했는데, 왕의 말마따나 고자 놈이 다 망쳐놨으니······.

    가뜩이나 이 고자 놈이 폐하를 감언이설로 꼬드기고, 전횡을 일삼는지라 도륙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지금은 도륙 정도가 아니라 육시를 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대로 돌아가겠소이까?”

    아직 사태 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었다.

    육시가 아니라 능지처참에 처해 포를 떠버리고 싶었다.

    “돌아갈 거요.”

    정화가 지난 날 동안 겪은 조선왕은 그러고도 남는 작자였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상식이 통하더라도 보통의 범주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게 조선왕이다.

    감히 입에 담기 불경하고 불충스러운 말이긴 하다만, 본국의 관리들은 폐하를 두고 미치광이라 말하곤 한다.

    폐하를 비하하거나, 역심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미치광이’란 말 외에 폐하를 설명할 단어가 없기 때문이었다.

    조선왕도 같았다.

    조선왕에게 억하심정이 있다거나, 따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예의도 바른 편이었고, 인간성도 좋았다.

    다만 미치광이 같은 왕이었다.

    그러니 빈정이 상해 돌아간다는 말이 허언은 아닐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뭐라 대꾸하려던 정화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조선왕이 이대로 돌아가 버리는 것도 나을지 몰랐다.

    어쨌건 조선왕을 데려오란 명은 수행했다.

    하지만 왕이 돌아가는 건 유근 때문이다.

    유근이 누구던가.

    황제의 총애를 믿고 전횡을 일삼으며 폐하를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 정사에서 손을 놓게 하는 간신 중의 간신이 아니던가?

    그런 간신적자가 이번 일로 폐하의 눈 밖에 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정화가 묵묵부답으로 있자, 뒤늦게 상황파악이 된 건지 사색에 질린 유근이 어느 새 멀어진 조선왕을 뒤쫓았다.

    운명의 장난인지, 공교롭게도 유근이 짧은 다리를 놀리자마자 필성(황제가 행차하는 소리)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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