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19화 (319/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19화>

***

모화관.

“괜찮겠습니까?”

동각대학사 양정화(楊廷和)는 이번 사행길에 부사로 동행한 한림원 수찬(修撰) 주희주(朱希周)의 말에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황상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 했으니 어디 남경(난징) 같은 곳으로 좌천 되겠지.”

“황상께선 해도 너무 하신 게 아닙니까? 뻔히 안 되는 부탁을 조선왕에게 청하게 하다니요.”

정화는 본인보다도 본인의 처지를 더 안타까워하는 희주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황상께선 생각이 다르셨던 모양이지.”

“허··· 황상께선 조선왕이 그 부탁을 들어줄 거라 생각을 하셨을 거란 말이십니까?”

“어쩌면.”

“추측이 틀려도 문제지만 맞아도 문제입니다. 폐하께서 표방에 머물면서 지내시니 현실 감각이 둔해지셨단 뜻이 아닙니까? 곁에 환간 놈들이 설치지만 않더라도 좀 나을 텐데······.”

“태자 시절에는 총명하신 분이셨네. 언젠가 다시 총명하고 영특했떤 폐하의 모습을 뵐 수 있겠지.”

“안일하게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폐하께서 훗날 진시황처럼 장생술이나 연단술에 심취 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폭군들의 최종 단계는 장생술과 연단술에 있었다.

희주의 말은, 안일하게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 지금의 황제 역시 폭군의 최종 단계를 밞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가까웠다.

듣기만 해도, 들은 귀를 잘라버려야 할 만큼 불경한 소리였지만 표방에 박혀 여색과 동물 구경에 심취한 지금의 황제라면 정말 그리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정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자네같은 젊은 선비들이 뜻을 잘 지켜나가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하옵고······.”

“말씀 하시게.”

“소인이 한 번 청해볼까요?”

“뭘 말인가?”

“폐하의 명 말입니다.”

“이미 왕이 거절하지 않았던가? 청을 세 번이나 거절한 왕이 자네 말인들 듣겠나?”

“저번 연회 때 보니 왕이 꽉 막힌 사람은 아닌 듯 했습니다. 곡절을 잘 설명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희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화는 반백년 세월을 살면서 그렇게 흥이 넘치는 제후는 본 적이 없었다.

연회 때였다.

술이 조금 들어가자 기생들이 입장해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조선국 기생들의 검무는 명국에서도 명성이 자자 했던지라, 정화 역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서 기생들의 검무를 지켜보는데, 글쎄.

술이 좀 오른 왕이 저런 춤사위 말고, 제대로 된 춤사위를 보여주겠다며 생전 듣도 보도 못 한 춤을 춰대지 뭔가?

망측하건 말건, 조선국 관리들이 깜짝 놀라 말리건 말건 말이다.

그런 걸 보면 희주의 말처럼 꽉 막힌 사람은 아닐 거다.

아닐 건데······.

“자네 말대로 아무리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상왕을 황성으로 모셔도 되겠냔 말을 어찌 가납하겠는가?”

제아무리 도학군자로 이름난 사람일지라도 제 가족을 희생시키진 않는 법이다.

하물며 황제의 명은 조선의 상왕을 황성으로 데려오란 것에 있었다.

상왕을 힐책하기 위함은 아니고, 단순히 황상께서 상왕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에 그와 담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 그 목적이다만 그런다 한들 조선왕이 그 청을 가납할 리는 없다.

조선은 개국한 지 100여년이 지나도록 임금이 직접 황제를 알현한 적이 없다.

그런데 상왕이 직접 가서 알현하게 된다면 이건 조선측 입장에선 선례가 된다.

안 좋은 선례.

무엇보다 그 청은 이미 세차례나 거절 당했다.

세 번씩 아쉬운 소릴 하기에도 얼굴이 화끈거렸는데 네 번이나 하기에는 여러모로 수양이 부족했다.

“됐네. 무리한 청이고 무례한 청이었네.”

“하지만 사정만 잘 설명한다면······.”

정화가 고개를 가로 젓던 그때였다.

“대인.”

“무슨 일인가?”

“국왕께서 모화관에 거둥하고 계시다 하옵니다.”

“모화관에?”

“예. 이미 서지(모화관 근처에 있던 연못)를 지나치셨다 하니 곧 당도하실 듯 하옵니다.”

“갑자기 어인 일로······.”

잠깐 동안 당혹감에 허둥거리던 정화였지만 금방 의관을 정제해 침소를 나섰다.

침소를 나서고 모화관의 대문에 도착하자, 때마침 조선왕이 모화관에 들어서고 있었다.

***

정화는 두 귀를 의심했다.

“그게 참말이란 말인가?”

“예, 대인.”

“허어.”

정화는 침음했다.

그리고 조선왕의 얼굴을 훑었다.

제후라지만 일국의 왕이니 그 용안을 뚫어져라 직시한다는 건, 외교적으로도 큰 무례에 가깝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화로서는 의아 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 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왕은 절대, 결단코 상왕을 황성에 올려보낼 수 없다는 태도를 단호히 견지하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변심을 했다.

단순한 변심은 아닐 것이었다.

“말씀은 어찌 전할까요?”

역관의 독촉이었다.

“조정 대신들도 격렬히 반대하던데 갑자기 청을 들어주시는 까닭이 무엇인지 여쭈어 보게.”

역관이 말을 통역하자 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확실히 체통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청을 들어주어도 문제냐고 하시옵니다.”

“그제까지 안 되던 문제가 갑자기 해결이 됐으니 어찌 문제가 아니겠냐고 여쭈시게.”

왕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그리고 옆의 상왕을 바라보며 뭐라 속삭였다.

조선말인지라 뭐라 속삭인 건지 알 순 없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겠다 하십니다.”

역시.

“바라던 바네.”

“얼마 전 제주에 왜구가 침략해 노략질 한 사실은 사신도 들어서 알 것이옵니다.”

“알고 있네.”

“전하께선 그 왜구들을 소탕하려 하신다 하옵니다.”

“소탕한다?”

“예. 하온데······.”

왕의 말을 통역하기 위해,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역관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뭐라 말씀 하셨길래 그러는가?”

“그게··· 왜구를 소탕하는 일에 천군(천자의 군대)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신다고······.”

“뭐라? 천군?”

“예. 그 왜구들이 축전주의 호족인지라 보통 왜구가 아니니 군대를 동원해야 할 터인데 조선의 미약한 힘으로는 역부족이니 감히 불측하게 황제폐하의 도움을 구하고자 한다 하시옵니다. 이리되면 명색이 천군을 영접하게 되는 일이니, 일개 대부를 영접사로 보낼 수나 있겠사옵니까? 상왕 전하께서 직접 황성에 가서 천군을 영접하고, 뫼셔와 왜구를 소탕하는 일에 쓰시겠다 하옵니다.”

역관이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했지만, 한마디로 천군 파병이 조건이란 말이었다.

하지만 천군을 파병하고 말고는 정화의 소관이 아니었다.

사정을 설명했지만 조선왕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뭔가 황제께서 무조건 파병해주실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뭐, 거기까진 내 신경 쓸 필요없겠지.’

어쨌건 정화가 정덕제에게 하명 받은 건, 조선의 상왕을 황성으로 데리고 오란 것이었으니 제 알아서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제 혼자 지레짐작하고 결정을 내려준 건 고마운 일에 가까웠다.

황제께서 아무리 여타의 황제들과는 달리 즉흥적이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라 하나, 파병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덜컥 결정 하실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화는 조선왕과 상왕의 마음이 바뀔새라 얼른 귀국 일정을 잡았다.

***

형님은 날 믿고 따라주었다.

···라기 보다는 난생처음인 명나라 여행이 기대 되시는 것 같았다.

애당초 황도에 다녀오실 수 있겠냐는 물음에 흔쾌히 허락을 하셨었고, 풍문으로만 듣던 황성평(皇城坪)의 비석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겠다며 좋아라 하셨다.

아, 황성평에 있는 비석은 정확한 이름이 없다.

말그대로 황성평 비석이라 불린다.

어느 시대에 쓰여졌는지, 그리고 어느 시대에 세워졌는지 그 누구도 몰랐다.

황성평 비석을 언급하는 사신들은 많았어도, 그 비석을 가까이서 본 사신은 단 한 사람도 없었거든.

때문에 어떻게 보면 미스테리한 비석이라 할 수 있었다.

좌우지간.

남의 손 빌려서 왜구를 소탕 할 수 있게 됐다.

맞다, 이이제이다. 이게 바로 내 플랜이다.

물론 결정적으로 황제가 천군을 파병해주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사신까지 보내오면서 까지 형님의 북경 행을 청했던 황제다.

이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왕은 일거수일투족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나도 그런데 황제는 얼마나 더 하겠나?

그런 황제가 형님의 북경 행을 청했단 말이다.

말했다시피 단순한 호기심이라기 보다는, 어떤 동질감 같은 걸 갖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여태 정조사니 주청사니 책봉사니, 갖가지 사유로 중국에 다녀왔던 분들의 말을 취합해 보자면 중국의 황제는 거의 형님과 흡사했다.

어떤 면에서는 형님보다 더했다.

형님은 최소한 동물원 같은 걸 짓진 않으셨다.

그런데 저번에 책봉 문제로 중국에 다녀온 노공필과 안윤덕의 보고를 들으니 황제는 동물원까지 짓고 허송세월 한단다.

아니, 동물원만 지으면 말을 않지.

호랑이한테 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렸다지 뭔가.

이건 형님이 형님 스스로에게 대장군이란 칭호를 내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멀쩡한 집 놔두고 게르에서 산다니 말 다 했다.

무엇보다, 안윤덕과 노공필은 황제에게 형님의 일화를 들려드리니 황제가 매우 호기심을 가지면서 이것저것 캐물었었다고 보고한 적이 있다.

세상에 스웩 넘치는 제왕은 나 뿐인 줄 알았는데 또 있었네?

했을 가능성이 99.4%다.

당연히 어떻게 노나 궁금했을 테고, 직접 만나서 얘기도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아 물론.

단지 동질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천병을 파병해주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정덕제는 형님과 매우 흡사하다.

지금은 표방에 만족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형님처럼 본인 스스로를 대장군에 제수하고 무위를 뽐내고 싶어할 게다.

나는 그 마음을 형님으로 하여금 끄집어내려는 것 뿐이다.

대신들을 설득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형님이 직접 가시겠다고 한 이상 설득은 무의미했다.

형님의 엄포 한 번이면 설득이랄 게 필요 없었으니까.

그렇게 6월 11일.

형님은 천여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명나라로 향하셨다.

***

형님이 황제와 함께 언제 돌아오실지 몰랐다.

짧으면 3개월 안에 돌아올 테고, 늦으면 6개월은 족히 걸릴 터였다.

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사실 대비라기 보다는 전쟁 준비지만······.

전쟁에 필요한 건 돈이었다.

소이전이 제주도까지 와서 설치는 것도 결국 대내전과의 싸움에서 군자금이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조선군도 나름 크고 작은 전쟁을 몇 번 씩이나 겪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크게 신경 쓸 건 없었다.

이제는 내치에 조금 집중해서 돈이 나오는 시스템을 구축할 시점이었다.

나는 이번에 양정화가 선물로 가져온 사탕수수 종자들을 모두 오키나와로 실어 보냈다.

이제 오키나와는 합법적으로 조선령이다.

본래의 오키나와는 교역으로 먹고 살았는데, 이미 오키나와 관찰사 이계동에게 외국에서 오는 상인들을 모두 본토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려둔 상태였다.

이미 올초에 태국 출신으로 추정되는 상인들이 목포에 온 적도 있었다.

이 태국 상인들을 시작으로, 원래 오키나와로 향하던 동남아의 상인들이 목포나 부산으로 오게 될 테고, 외국인들로 붐비던 나하 항은 파리만 날리게 될 터였다.

그리되면 교역으로 먹고 살았던 오키나와 주민들은 대체할 생계 수단이 절실해진다.

나는 대체할 생계 수단으로 사탕수수 농장을 지을 생각이었다.

설탕으로 가공해서 되팔기만 해도 노다지가 따로 없을 테니까.

물론 이 설탕에만 의존할 생각은 없다.

이제 슬슬 일본과도 교역량을 늘릴 시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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