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18화>
***
벌떡!
“아니, 그 같이 중대한 사실을 왜 이제 전한단 말이냐?”
상왕의 호통에 승전색(承傳色) 정세경(丁世敬)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온양 행궁은 창덕궁보다 더한 심처(深處)였다.
평상시 창덕궁에 계신 상왕이셨다면 이 적막이 따분하다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다니셨겠지만, 행궁에 행차한 뒤로는 웬일인지 적막을 즐기시겠다면서 외인의 출입을 엄금하셨다.
어디 출입만 엄금하셨겠나?
정사로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니 조정의 기별지(조보)는 물론이거니와, 신문도 일체 반입하지 말라 엄포를 놓으셨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호통이라니··· 억울함에 몸져 누울 지경이었지만 상왕께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송구하다는 사람을 더 어떻게 면박을 주겠나?
쯧쯧.
짧게 혀만 찬 융은 몸을 일으켰다.
그에 그를 시종하던 궁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설마 이 옥경(음경)이 탐이 나는 것이냐?”
한참 목욕 중인 융이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몸을 일으키면 당연히 중요 부위가 훤히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전하. 듣기 망극하옵니다.”
“옥경을 옥경이라 하지, 그럼 좌지(坐知)라 한단 말이냐?”
“···전하. 부디 체통을······.”
“농이다, 진성 아우였다면 받아줬을 텐데······.”
좌지라는 말에 분명 우지(右之)로 받아쳐줬을 진성 아우다.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융은 내관이 내어오는 수건을 걸쳤다.
그러고는 승전색 정세경에게 말했다.
“그럼 지금 장임이가 하유(下諭)를 받고 상경하고 있단 말이렷다, 포로로 잡은 적왜들과?”
“그러하옵니다.”
“나도 환궁해야겠다. 속히 채비하라.”
정세경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상 전하께서 환궁하신 뒤에도 한 달을 더 머물겠다고 하신 상왕이셨다.
그리고 막상 한 달이 되자 보름을 더 머물겠다고 하셨다.
보름 더 머물겠다고 말씀 하신 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해서 다시 보름간 머무를 준비를 해뒀었다.
한데 갑자기 돌아갈 채비를 하라니······.
“···알겠사옵니다, 전하.”
창덕궁이 아니라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승전색이었다.
***
우리는 장임의 장계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무려 수백명의 왜구가 우리나라 도서 지역으로 쳐들어왔다.
대신들은 이번 사건을 공공연하게 왜란(倭亂)이라고 일컫거나 왜변(倭變)이라고 까지 부를 정도였다.
그만큼 이번 사건은 심각한 사안중 하나였다.
왜구의 주된 소굴인 대마도가 경상도에 편입 됐고, 대마도주는 대내전과의 거래로 일본에 팔려갔으니 정황상 왜구를 배후에서 조종 할 용의자가 없거든.
또, 사람이 원래 그렇잖나.
눈에 보이는 적보단 안 보이는 적을 더 무섭게 느끼는 거.
대신들도 그런 것 같았다.
당적(중국해적)이나 가왜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분위기였지만, 정말로 왜구면 어떡하냐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수백명의 왜구를 배후에서 조종할 정도면 보통 세력은 아니라는 뜻일 테니까.
그리고 그 보통이 아닌 세력이 우린 누군지도 파악조차 못 하고 있으니까.
때문에 장임의 장계만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것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장계가 도착했다.
장임은 딱 세 가지만 장계에 담았다.
첫 번째.
왕명을 받잡아 백성들에게 거수하게 하여 대정현감 한윤은 팽형에 처했다.
두 번째.
문초 결과 적왜의 수괴가 천엽(千葉) 씨(氏)를 쓴다는 걸 알아냈다.
마지막 세 번째.
마침 물길이 잠잠해졌으니 포로들과 함께 상경하겠다.
1, 3은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2는 엄청난 단서였다.
아니, 엄청난 단서 같았다.
대신들이 천엽 씨란 말을 듣자마자 왁자지껄 해진 걸 보면 말이지.
그래서 물어봤다.
먹는 천엽 말고 다른 천엽이 또 있냐고.
그러자 허침 할아버지가 날 한심하게 바라보신··· 아, 그건 착각이겠지?
아무튼.
“천엽 씨는 보통 천엽개(千葉介) 족속이라 불리는 자들인데, 국초부터 입조하던 자들이옵니다. 또한 축전주(지금의 후쿠오카 일대)의 호족이기도 하니 필시 이 일에 소이전(쇼니 씨)이 개입 된 것이옵니다.”
갑자기 나타난 왜구 + 축전주의 호족 = 소이전.
이란 답이 어떻게 도출 된 건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역시나 날 한심하게 바라보던 허침 할아버지가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신다.
이번에 제주도에 출몰한 적왜의 수괴가 천엽 씨다. 그런데 천엽 씨는 소이전의 가신이다.
일개 가신 나부랭이(?)가 주군의 명도 없이 일을 저질렀을 리는 없을 테니 소이전이 개입한 게 아니면 뭐겠냐.
한마디로, 킹리적 갓심의 일종이었다.
정황이 그렇다면 과연 합리적인 의심 같긴 하다.
‘그나저나 만만한 게 우리구만.’
허침 할아버지의 의심대로라면 우리는 단순히 소이전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고?
아주 간단한 이치다.
소이전 VS 대내전.
승패는 이미 대내전 쪽으로 기운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 승자독식이란 말이 있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패장 가문과는 연을 끊어버리고, 승자인 대내전과만 교역을 하게 됐다.
소이전 입장에선 아마 열불이 났겠지.
돈줄은 돈줄대로 막혀, 전황은 암울해, 앞길은 보이지도 않아··· 어쩌면 할복 직전까지 갔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소이전 입장에서 우리 조선이란 나라는 어차피 교류도 끊겼겠다··· 대대로 약탈을 당해주던(?) 아주 고마운 나라겠다··· 만만히 보고 천엽 씨인지 개엽 씨인지를 보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노략질이란 노략질은 죄다 당해주던 만만한 나라였으니까.
그래서 더 열불이 난다니까?
이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우릴 만만하게 본다.
아니, 내가 막 진성대군이 되기 전인 21세기에서도 말이지? 어? 일본 놈들이··· 하.
아니다.
말을 말자, 말을 말어.
대신 다른 말은 해야겠다.
“경들에게 하문한다.”
나는 난생처음 대신들에게 하대를 했다.
보위에 오르고 나서, 아니.
진성대군 시절부터 늘 공대를 했던 내가 갑자기 하대를 하자, 모두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하느냔 말이다.”
“그게 어인 말씀이시온지······.”
“비록 소이전의 소행이 아니라, 당적의 소행이라 할지라도 이 나라가, 그리고 이 나라 조정이 얼마나 만만하면, 잊을라 치면 왜구니 해적이니 하는 무리가 쳐들어와서 기승을 부리겠는가? 한데 언제까지 더 참아서 호구로 보여야겠느냔 말이다.”
역시나 하대에 적응이 안 되는지, 모두들 몸둘 바를 몰라 한다.
“저, 전하. 언행이 속 되오니 부디 체통을 지키소서.”
“대사성은 말을 삼가라. 체통도 지킬 때가 있고, 지키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은 지키지 말아야 할 때다.”
“···”
“경들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한 대정현감 한윤을 필벌하여 국법의 지엄함을 바로세우고, 팔도 곳곳에 필벌의 두려움을 알게하라 했다. 내 그리하여 그를 입에 담기도 끔찍한 팽형에 처한 것이다.”
“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역시나 대사성 이점이었다.
“오키나와의 원정과 소이전을 토벌하는 일은 그 맥락이 다르옵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소.”
“하온데 어찌··· 바다 너머의 원정이 쉬울 리가 없나이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하면 어찌하면 되겠소이까?”
“소이전에게 사신을 보내 항의함과 동시에 추후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약조를 받아오게끔 하는 것이 온당한 줄로 아뢰옵나이다.”
“약조를 받는다.”
“그러하옵니다.”
“약조를 어기고 내년에는 경상도를 노략질 하려 들면?”
“예?”
“그 후년에는 전라도를 노략질 하려 들면?”
“···”
“또 그 다음에는 한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와서 종묘를 능욕하려 하면?”
“···”
“그때도 대사성은 약조만 받으면 된다 할 것이오?”
“시, 신은 그런 취지에서 드린 말씀이 아니오라······.”
나는 좌중을 돌아봤다.
빡쳐있는 내 모습이 생소한지, 대신들 모두 얼이 나간 표정들이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을 지경이다.
“대관절 어느 나라의 재상이 제 나라 백성이 해를 입었는데도 사신만 보내 해결하라 한단 말인가?”
“···”
“사신은 말이 통하는 상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군사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백날 사신을 보내면 안 통하던 말이 갑자기 통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
“모슬포에서 전사한 방호소 군사가 일흔 두명. 한윤이가 적괴에게 투항하면서 성내에서 살해 당한 백성이 열 아홉 명. 서성리 전투에서 전사한 기병이 스물 한명. 도합 112명이오.”
“···”
“나는 도학군자(道學君子)는 못 되는 위인이거니와, 대자대비하다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발치도 못 따라가는 위인이오. 그런데 대사성은 어찌 참으라고만 하시오?”
“전하의 의중을 모르지 않사옵니다. 신들이 어찌 전하의 의중을 모르겠나이까? 다만 이 일은······.”
형님이 대사성에게 느꼈던 살인 충동이 바로 이런 걸까?
나는 새삼 그 살인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살인 충동 게이지가 66%를 조금 넘겼을 무렵.
“상왕 전하 납시······.”
“됐다, 새삼스럽게 가갈은 무슨.”
먼지 바람을 뒤집어 쓰고 나타난 건, 다름 아닌 형님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형님에 편전안 모두가 얼이 나갔다.
온천욕은 이쯤에서 관두고, 이제 곧 상경하겠다는 서신을 보내오긴 했지만 그 서신을 받아본 게 바로 엊그제였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도착하다니······.
“내 밖에서 듣자하니 도저히 참지 못 하겠어서 한량들이 기방에 난입하듯, 난입하여 그 꼴이 우습게 됐다. 다만.”
“···”
“주상의 말이 참으로 옳은데 대사성은 어찌 토를 그리 다는 것이냐?”
“저, 전하.”
“내 일전에 온양에서도 승정원을 통해 유지를 내렸다만, 주상의 영이 바로 서지 않는 것은 과연 사판에 이름 올린 자들의 부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주상이 보위에 오른 이래 이리 강력하게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 적이 있었더냐?”
“···”
“내 보건대 오늘이 처음이다. 한데 어찌 그 뜻을 막으려 든단 말인가? 뜻이 아름답지 못 하면 신하 된 도리로 막음이 온당하겠다마는, 뜻이 아름다운데도 막는 것은 역적 윤 가 보다 더한 역적이다. 대사성은 윤 가 보다 더한 역적인 것이냐?”
털썩!
“어, 어찌 신이··· 아니옵니다, 전하.”
“하면 잔말 말고 따르라.”
***
“확실히 대사성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강녕전.
형님은 강녕전에 들어오자마자 편전에서의 일을 술회하셨다.
안색이 어두운 걸 보니 편전에서 내 편을 들어주신 건, 내 권위를 염두해주셨기 때문인 것 같다.
왜구 토벌 의견을 어떻게든 관철 시키려 했던 내 의견을 형님 마저 묵살해버리면 내 권위가 지각을 뚫고 들어가 저 내핵까지 파고 들어가 버렸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한 달 전쯤 한윤을 처벌하려고 할 때 한 말 기억하려나?
국가의 일이란 단순히 감정에 치우쳐서 집행해서는 안 되겠지만, 때로는 감정에 치우쳐서 집행할 필요도 있다는 말.
아, 물론 물론 감정에 치우쳐서, 안 하던 하대까지 하면서 의견을 개진했단 뜻은 아니다.
내가 비록 문과충이지만, 그 정도로 감성 충만한 문과충은 아니거든.
“압니다.”
“아는데 어찌··· 대신들의 말처럼 오키나와를 정벌하는 일과 왜구의 소굴을 토벌하는 일은 그 무게가 다를 수 밖에 없느니라.”
“그것도 알지요.”
“한데 어찌 그랬냔 말이다, 이놈아.”
“형님.”
“응?”
“믿는 구석이 있는 놈은 뭘 하는 줄 아십니까?”
곰곰이 생각하시던 형님이 되물으셨다.
“뭘 하는데?”
“강짜를 놉니다.”
“강짜?”
“네. 그래서 말인데요, 형님. 타이밍 기가 막히게 오셨습니다.”
“···?”
“저랑 같이 모화관에 좀 가주십쇼.”
“모화관? 사신이 입조했단 말은 들었다만··· 한데 거긴 왜?”
“믿는 구석이 있는 놈이 뭘 하는지 보여드리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