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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17화 (31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17화>

    ***

    「···서성리는 기병이 움직이기 용이한 평원인데다, 적왜(賊倭)가 아군을 발견치 못 한 듯 하여 따로 군략을 세우진 않고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여 마침내 적왜를 격파하였습니다. 적장과 부상자를 포함하여 248명의 적을 생포했고, 아군의 사상은 41명으로 전사자는 제주목 관노 출신 물쇠(勿金), 석로(石勞), 부개(夫犬), 삼길(三吉), 대정현 관노 출신 승만(升萬), 내개(內介), 동간(同間) 등으로 모두 20명이었습니다. 공을 세운 이들의 명단과 공훈은 별단에 첨부하였습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주도에 왜구가 침략했었단다.

    단순한 왜구의 출몰이었다면, 크게 놀라지도 않았겠지만 제주목사가 올린 왜구들은 단순한 왜구가 아니었다.

    그 수가 무려 수백에 달하는 왜군들이었다.

    왜구는 메뚜기 떼 같은 존재들이다.

    메뚜기가 한 번 훑고 지나가면 성한 농작물이 없는 것처럼, 왜구가 한 번 훑고 지나가면 성한 고을이 없다.

    고작 수십~기백의 왜구가 상륙해도 그럴진대 수백명이면 말 다 했다.군소 고을은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을 수였으니까.

    그나마 제주목사가 금방 무찔러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멀쩡한 고을 하나 폐군(廢郡) 될 뻔 했다.

    “아니, 이 무슨 참람한··· 허어.”

    놀라기는 나보다 대신들이 더한 것 같았다.

    하기사.

    내륙 지방이었다면 봉화가 피어올라서 그 낌새라도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제주도는 오직 배로 소식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다. 막말로 제주도가 왜구들에게 점령 당하고 한참이 지나도록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산간벽지가 바로 제주도인데, 수백명에 달하는 왜구가 출몰했다니 놀랄 만도 하지.

    아닌 게 아니라 왜구가 수백명 이상 떼지어 나타난 건, 십수년만의 일이거든.

    “대마도의 소행일까요?”

    대마도를 소종도로 개명한 지 퍽 오래 됐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대마도라 불렀다.

    “대마도가 경상도에 편입 된 게 언젠데 대마도의 소행이겠습니까? 목사 한숙창이 해적들을 왜구로 변장시켜서 제주도로 보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하면 어찌 수백이··· 허어.”

    “혹 당적(중국 해적)이 아닐까요?”

    “중국 해적이요?”

    “성종 대왕 시절에도 왜구로 변장한 절강의 중국 사람들이 쳐들어온 적이 있지 않았었습니까?”

    변장한 왜구를 이 사람들은 흔히 가왜(假倭)라고 부른다.

    이 가왜에는 조선인도 있고, 중국인도 있다.

    가왜라는 단어 자체가 다국적 해적들인 셈이다.

    “하긴 지부사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요새 중국의 정세가 하수상하다던데······.”

    편전이 점점 소란스러워질 기미가 보이자, 나는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모두 합쭉이가 돼서 읍(揖)을 한다.

    “왜구의 소행인지 당적의 소행인지 지금 판별 하면 뭐합니까? 달라질 것도 없는 걸요. 누구의 소행인지는 제주목사가 적장을 생포했다 하니 추문하여 알아내면 될 일입니다. 다만 제주목사가······.”

    제주목사의 이름을 까먹었다.

    누차 말하지만 조선에는 300개가 넘는 군현이 있다.

    이 군현의 수령들 이름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기란 무리다.

    심지어 현임 제주목사는 내가 임명한 사람도 아니라 더 기억하지 못 한다.

    나는 급히 급보의 상단을 훑었다.

    급보(急報)라는 글자와 함께, 누가 올린 건지 그 이름과 직인도 함께 찍혀져있거든.

    “제주목사 장임이 아주 기특한 일을 했습니다. 판단력도 좋았구요.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순수하게 장임이란 사람이 궁금했다.

    역알못인 내 기억에는 전혀 없는 사람이다.

    조선인으로 완전 적응한 지금의 내 기억에도 전혀 없는 사람이고.

    그런데 반해 판단력이 정말 좋았다.

    나도 전장터에 몇 번 나가봐서 아는데, 장수의 판단력이란 게 말로는 쉽지만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오만가지 잡념이 다 드는데 이걸 떨쳐낸다는 게 예상 외로 쉬운 일이 아니거든.

    특히 속현에 왜구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병을 소집해 곧바로 출동하는 건, 보통 수령들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이 성에 틀어박혔다는 소식에 익숙한 지형, 그것도 평원으로 유인해 단숨에 격파시킨 건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책략의 하나였다.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사실 수령이 군사들을 이끌고 관내를 벗어났다는 것 부터가 엄청난 일이다.

    이웃 고을 구하려다 제 고을 쑥대밭 되는 일 때문에, 몸을 사리는 수령들도 많은 게 현실이니까.

    “과거 상왕 전하께서 장임이는 무재가 탁월하다고 하여 직접 천거한 인물이옵니다.”

    얻어걸린 걸 수도 있지만, 확실히 형님은 보는 눈이 있는 것 같다.

    “다만 현지에서는 원성이 자자한 것으로 아옵니다.”

    이어진 이조판서 신수영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성이 자자해요?”

    “현지에서는 긁어 부스럼을 내는 수령이라 하여 말들이 많았사옵니다. 상언도 수차례나 올라온 줄 아옵니다.”

    나는 자세한 설명을 원했다.

    곧 신수영이 설명을 곁들였다.

    긁어 부스럼을 내는 수령이란 간단했다.

    한마디로 가만 있으면 되는데,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녀서 현지인들로서는 귀찮은 수령이었다는 말이다.

    왜구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각 포구와 군사들을 정비하고,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해 성을 수축하고, 조정에는 직접 부족한 물자를 청하기까지······.

    구관이 명관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처럼, 현지인들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귀찮은 수령임에는 틀림 없는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장임의 그런 노력 덕택에 큰 피해 없이 제주도를 수호 할 수 있었다.

    급보에는 상세한 정황은 안 나와있지만, 그나마 급보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보자면 적들은 모슬포에 상륙했다.

    한데 장임이 부임하기 전까지 이 모슬포에는 방호소란 게 없었다.

    장임이 모슬포에 방호소를 안 만들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나마 방호소에 있는 군사들이 상륙하려는 왜구들을 저지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해신제를 지내고 있던 그곳 백성들 모두 1차적으로 도륙 났을 것이다.

    “그 한윤이란 놈은 어찌 벌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 때문에 대정현감 한윤의 대처가 정말 아쉬웠다.

    방호소의 군사들은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져가면서 왜구의 상륙을 저지했다.

    현성으로 도망간 한윤은 분명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대비할 시간적 여유 말이다.

    근데 한윤은 싸우기도 전에 투항을 해버렸다.

    현성 앞을 가득 메운 적들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거라는 건 십분 이해 할 수 있지만, 한윤이 투항하지만 않았더라도 현성으로 피신한 백성들의 피해는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어떻게 보면 모슬포 방호소 군사들의 죽음이 개죽음이 된 것에 다르지 않았다.

    “대전에 의하면 하나의 성보를 잃고, 하나의 군현을 잃으면 군법으로 다스린다는 명문이 있사옵니다. 하물며 한윤은 군현을 잃은 것이 아니라 갖다 바쳤으니 그 죄를 법에 따라 엄히 물어야 할 줄로 사료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효수하여 본으로 삼는 것이 온당한 처사인 줄 아뢰옵니다.”

    “제주는 비록 북방의 변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실로 남방의 변경이라 부를 만한 곳이옵니다. 해서 옛 대왕들께서도 제주에 부임하는 수령들은 무재가 있거나, 조금이라도 재주가 뛰어난 자들을 보냈는데 작금에 이르러 드러난 한윤의 재주가 무엇이겠나이까? 군민을 버리고 도망한 재주 밖에 없으니 응당 군법으로 다스려 그 목을 치는 것이 전사한 이들의 원혼을 달랠 수 있는 일일 것이옵니다.”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놈의 모가지를 잘라버리라 말했다.

    내 생각도 같았다.

    부민고소금지가 폐지되고, 경찰청이 전국으로 확대돼서 수령의 권한이 예전만 못 하다지만, 여전히 고을 수령은 그 지역의 왕으로 군림한다.

    때문에 적당한 비리, 부정은 군민들 선에서 알아서 눈 감아준다.

    왜 그러겠나?

    괜히 찍히기 싫기 때문도 있겠지만, 유사시 본인들을 지켜줄 사람이 해당 수령 밖에 없다는 걸 군민들도 알기 때문이다.

    그런 바람마저 지키지 못 한 수령은 수령이 아니라 도적이다.

    작은 도적이 나타나면 금부에 명해 추포하게 하고, 큰 도적이 나타나면 토포사를 제수해 토벌케 한다.

    그런고로.

    “경들의 말이 맞습니다. 더군다나 예전에 김운열의 일을 보자면 군민을 버리고 도망한 권관을 팽형에 처하도록 한 일이 있는데 당시에는 잔인하다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통쾌한 일이라 쾌재를 불렀습니다. 국가의 법이란 게 단순히 감정에 치우쳐서 집행해서는 안 되겠지만, 때로는 감정에 치우쳐서 집행할 필요도 있는 듯 합니다. 군민을 버리고 도망한 수령이 바로 그렇습니다. 과거 김운열의 예로 들어, 한윤을 역률로 다스리도록 하여 그 자산은 모조리 적몰하되, 한윤은 현지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 팽형에 처할지 참수하여 효수할지는 민심이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또 국가의 대계는 신상필벌에 있음이니 제주목사 장임에게는 하유(서울로 올라오란 어명)를 내려 진상을 상세히 조사하고, 억울한 이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윤 같은 벼슬아치는 종종 봤지만, 장임 같은 벼슬아치를 보는 일은 쉽지가 않다.

    특히 일개 군졸의 공까지 세세하게 적어서 별단에 첨부한 장수는 단 한차례도 본 적이 없다.

    그 장임이란 사람이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그 얼굴도 한 번 보고 싶었다.

    ***

    얼마 후, 제주도.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장임이 얼이 나간 표정으로 되묻자, 금부도사 박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씀 드린 그대로입니다.”

    “아니, 내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소.”

    “어느 부분이 말이십니까?”

    사실 전부 다 이해를 못 하겠지만, 장임은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을 언급했다.

    “전하께서 한윤을 김운열의 예로 들어 역률로 다스리도록 하시겠단 말은 내 이해하겠소. 근데 관민의 의견을 받아 팽형에 처할지, 참수하여 효수하게 할지는 민심이 결정하게 하란 말은 당최··· 참수하란 어명인 거요, 팽형에 처하란 어명인 거요?”

    “아, 그러니까 말입니다.”

    박호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장임은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일단 대정현 백성들을 현성으로 부르란다.

    불러서, 한윤을 조리돌림 한 번 시키고 장내 한가운데에 세워둔 채 거수하게 하란다.

    저놈을 효수시킬지, 팽형에 처할지.

    그리고 백성들이 가장 많이 거수 하는 쪽으로 처벌을 하란다.

    “허.”

    임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건 확실히 듣도보도 못 한 어명이었다.

    하지만 듣도보도 못 한 어명이든, 들어본 어명이든.

    감히 왕명을 어길 순 없었다.

    장임은 금부도사의 말처럼 대정현의 백성들을 현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하옥해 둔 한윤을 불러다, 한차례 조리돌림을 시켰고 그 다음은 백성들에게 거수하게 했다.

    거수 결과는 팽형에 압승이었다.

    잔인한 형벌인지라, 집행하기 망설여졌지만 역시나 어명을 어길 순 없다.

    임은 금부도사 박호가 제주도에 내려올 때 함께 가져온 커다란 솥단지에 죄인을 가두고 대정현성 앞에서 팽형을 집행했다.

    “주상전하 천세!”

    솥단지 안에서 살려달라 비명을 내지르던 한윤의 외침에 작아질 무렵.

    누군가 외친 산호(만세)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천세, 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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