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16화>
***
다네히사는 손에 꼭 뭔가를 하나씩 들고 귀환하는 수하들에 흐뭇히 미소지었다.
대정현이라 불리는 이 고을은 기대 이상의 보고(寶庫)였다.
당장 관아에 있는 백자들만 해도 값이 얼마던가?
거기다, 민가와 동헌을 뒤져 나온 고화와 고서, 화첩들 역시 본국으로 가져 가기만 한다면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설탕이었다.
관고에 무슨 설탕 꾸러미가 있지 뭔가?
이건 스케모토님 보다도 가주이신 다네시게님께 진상할 생각이었다.
말차와 함께 입가심 용으로 간간이 설탕을 드시지만, 귀한 조미료라 어쩌다 한 번 설탕이 들어와도 늘 아껴 드셨는데 꾸러미 째 가져다 드린다면 필히 기뻐하시리라.
백자와 고서, 고화, 그리고 설탕까지.
모두 기대 이상의 약탈품들이었지만 다네히사가 특히 기대하고 잇는 건 불경과 불상이었다.
태수에게 우연히 들으니 근처에 산방굴사라는 암자가 있단다.
그의 말을 빌리면, 사찰이라기 보다는 암자에 가깝고, 또 암자라기에는 사찰과 흡사해서 불상도 놓여져 있기에 승려들도 많이 찾는 곳이란다.
불상의 수와 불탑에 안치 된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들일지는 봐야 알겠지만 일단 기대는 된다.
“다네히사님!”
수하들이 약탈해온 품목들을 앉은 자리에서 정리하고 있던 다네히사는 반색했다.
산방굴사에 보낸 수하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오, 그래. 노리히로(憲廣)! 그 절간에서 뭘 좀 찾았더냐?”
“다네히사님! 잠깐 밖으로 나와보셔야 할 듯 하옵니다!”
다급한 육성.
다네히사는 으허! 웃음을 터뜨렸다.
노리히로 이 녀석이 뭔가 대단한 걸 찾아온 모양이다.
“얼마나 대단한 걸 찾아왔길래 친히 나와보라고 까지 하는 것이······.”
밖으로 나온 다네히사의 눈에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저게 무슨 연기냐?”
문을 열자마자 멀리서 매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연기냐고 묻질 않느냐!”
“그게··· 아무래도 야스카즈(保和)가 있는 곳에서 피어난 연기 같사옵니다.”
“야스카즈가 있는 곳?”
곧 다네히사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야스카즈가 있는 곳이라면 타고온 군선 30척이 정박 된 곳이었다.
현성에 무혈입성하긴 했어도, 방심 할 순 없는지라 배를 정박한 모슬포란 곳에 야스카즈와 수하 여든 명을 보내뒀었다.
“설마 조선군이 벌써······.”
끔뻑끔뻑.
정신이 멍해졌다.
이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전황을 낙관적으로 점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랬다.
아닌 게 아니라, 성을 점령했다.
이건 예상보다 손쉬운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 밖의 일이었다.
소규모 전투도 없이 적괴가 투항한 셈이었으니까.
그래서 작전을 전면 수정하고, 아예 성을 차지한 채 느긋하게 약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수가 농성을 계속 했었다면 뒷통수 맞을 우려 때문에라도 느긋한 약탈은 금했겠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니까.
거기다 수차례 조선에 노략질 하러 온 경함이 있는 수하들은 입을 모아 말하길, 조선군은 모이기까지 적어도 반나절은 걸릴 것이고, 모였어도 출발하는 데까지는 또 하루 나절이 걸릴 거라 했다.
여기서 또 아군이 진을 친 곳 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아무리 빨라도 하루는 걸릴 거라 했으니, 이게 무슨 의미겠는가?
약군이란 소리였다.
취합 된 여러 정보 역시 같았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정보에 의하면 조선군의 출몰은 아무리 빨라도 하루는 걸려야 한다.
한데 지금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다네히사는 일단 한윤을 불러들였다.
함정이 아닌가 싶어 윽박도 질러보고, 타일러도 보면서 내막을 캐물어봤지만 일관성 있게 울상을 하고는 눈물, 콧물 다 짜는 한윤을 보면 영문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인 듯 싶었다.
“제길!”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놈은 어찌할까요?”
노리히로가 마당에 팽개친 채 여전히 눈물, 콧물 다 짜고 있는 한윤을 가리키며 물었다.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
번뇌할 대상은 하나라도 줄이는 게 좋았다만 혹시 놈을 빌미로 타협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은 살려두도록 해라.”
“지금이라도 퇴각을 하는 것이······.”
“저 많은 걸 두고 말이냐?”
아직 사면초가의 형국은 아니었다..
사위가 포위 된 것도 아니고, 야스카즈가 있는 모슬포도 소규모 조선군에 의해 습격을 받은 수준일 테니 노리히로의 말처럼 퇴각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하지만 태산처럼 쌓아둔 저 약탈품을 두고 발길을 떼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져 갈 수만 있다면야 어찌 남겨두고 가겠사옵니까? 하지만 지금은 일신의 안위도 보장 할 수 없으니 일단은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잠시 고민하던 다네히사가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리히로의 말이 맞다.
약탈은 훗날을 기약해도 된다.
일단은 몸을 내빼는 게 중요하다.
“너는 먼저 발빠른 놈들 몇 명과 함께 성 외곽에 매복한 적들이 없는지 살피도록 해라. 내 본대를 이끌고 나가마.”
“예!”
***
모슬포.
검게 그을린 시체가 있었다.
피칠갑을 한 투구를 군관에게 건넨 장임은 말에서 내려 시체에게 다가갔다.
그을린 시체는 뭐가 그리도 원통한 지 눈을 부릅 뜨고 있었다.
도망간 대정현감 한윤을 대신해 모슬포에 남아 싸웠다는 고만개였다.
장임은 부릅 뜬 고만개의 눈을 조심스레 감겨줬다.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았는지, 고만개의 몸은 성치 않았다.
이제는 수의가 된 고만개의 도포도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서 넝마가 돼있었다.
모슬포에서 고만개와, 그 휘하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의지를 불태운 시체들을 보니 씁쓸했다.
문사(文士)는 학문으로 입신하는 것이 큰 영예이고, 무사(武士)는 전장터에서 전사하는 것이 큰 영예라지만 이런 억울한 죽음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내 이러려고 모슬포에 방호소를 설치한 것이 아니거늘······.”
그가 부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슬포에는 방호소가 없었다.
모두 그가 부임하고 난 후에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만들 때만 하더라도, 적을 막는다는 것까진 예상을 했지만 억울한 죽음을 낳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또의 탓이 아니옵니다.”
군관이 그를 위로했지만, 말 한 마디에 위로가 될 턱이 없었다.
형체 없는 그의 분노는 결국 포로들에게 닿았다.
“저놈이 왜장이렷다?”
“···예.”
왜장에게 다가간 장임은 망설임 없이 칼을 빼들어, 놈을 베어 넘겼다.
왜장은 단말마 비명도 없이 풀썩! 모로 쓰러졌다.
본인들의 장수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자, 포로로 잡은 왜놈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장임은 그 나머지 것들도 베어넘겼다.
그 수가 열이 넘어갈 때 쯤 되자, 손이 아리고 팔이 저려왔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포로까지 베어넘길 때 쯤.
“사또! 놈들이 출성을 했다고 하옵니다!”
유인책이 걸려들었다.
놈들은 필시 길이 비교적 협소하고 구불구불해, 매복의 위험성이 있는 난덕포(지금의 대정읍 동일리) 방면 보다는, 서성리(지금의 대정읍 인성리) 방면으로 움직일 것이었다.
난덕포에서라면 마병들의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겠지만, 서성리라면 대정현에서도 알아주는 평원이다.
마병의 움직임에 제약이 없어진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척후를 보내 알아보니 적이 서성리 방면으로 움직이고 있단다.
적의 위치까지 알게 된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장임은 기병대를 부려 서성리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 왜구들이 보였다.
조잡하고 난잡한 움직임이 아니라, 대오를 딱 갖추어서 행군하는 걸 보면 단순한 왜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잘 정련 된 하나의 군대에 가까웠다.
놈들의 수가 수천에 육박했더라면 진형을 변경했을지도 모르겠지만 400 남짓이었다.
제 아무리 방심은 금물이라지만, 400의 보병은 300에 육박하는 기병대와 충돌하기만 해도 지리멸렬할 터였다.
진형을 변경하면서 놈들이 대비할 시간을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최단시간에 놈들에게 들이닥쳐 놈들의 허를 찌르는 게 좋아 보였다.
“돌격하라!”
그렇게 생각한 장임이 돌격령을 내렸다.
두두두두-.
기병대가 우르르 달려나가기 시작하자, 지축이 뒤흔들렸다.
***
보병 VS 기병.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공성을 펼친다면 당연히 전투 자체가 성립되지 않겠지만 평원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무리 잘 훈련 된 보병일지라도 기병의 충돌을 버텨낼 순 없는 법이었다.
이건 일종의 상식이었다.
상식은 보편성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편성을 띤다는 것은 이변이 발생할 가능성이 극도로 낮다는 뜻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 서성리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전투에 잔뼈가 굵은 왜구들이라지만, 단병기 위주인 왜구들이 기병을 상대 할 순 없었다.
대오를 잘 갖추고 행군하던 다네히사의 왜구들은 장임의 기병대와 충돌하자마자 전열이 무너져내렸다.
다네히사가 악다구니를 써가면서까지 되살리려 했지만 이미 승패는 기운 뒤였다.
아군측 사상자 41명.
적군측 사상자 297명.
전투는 싱겁게, 그러나 대승으로 끝이 났다.
아군측 사상자 중에 사망자는 고작(?) 20명 남짓.
반면 적군의 사망자는 그 수가 거의 200명에 육박했다.
사망자만 따진다면 10대 1의 기념비적인 교환비였다.
특히 이번 전투에 공을 세운 건, 장임이 기병대를 훈련시키면서 도입한 편곤이었다.
장임이 기병대를 만들었을 때 모인 이들은 말을 능수능란하게 타는 이들이 아니었다.
애당초 정원을 채우기도 군정이 모자라, 관노들을 차출해서까지 운용했을 정도인데 관노가 말을 타 본적이 언제 있겠는가?
어떤 군사는 말을 능수능란하게 잘 타지만, 대다수의 군사들은 말을 썩 잘 타는 편이 아니었다.
말을 잘 못 타는데 더 큰 문제는 마상에서 창을 쓰는 일이었다.
이건 더 젬병이었다.
낙마해서 부상 당하는 군사들이 부지기수였는데 알다시피 목사의 임기는 짧게는 2년에서 길어야 4~5년이었다.
최악의 경우 2년 안에 이들을 강군으로 육성시켜야 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 할 수 밖에 없었다.
장임으로서는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했다.
군사들의 마상기예를 포기하든.
마상무예를 포기하든.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장임이 포기한 건, 후자였다.
마상기예가 없는 기병은 기병이 아니었다.
무예는 무기로도 어느 정도 보완이 가능하지만, 기예는 순전히 기병 개인의 몫이었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마상무예 역시 아주 포기 할 수는 없었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과거 명에 사신으로 다녀온 벗, 윤성경에게 들은 도리깨 무기가 떠올랐다.
윤성경은 명나라의 기병들은 그 무기로 여진족을 상대한다며 극찬을 했었는데, 당시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과연 그만한 무기가 없어보였다.
일단 대부분 농사 짓고 온 군사들이다 보니, 도리깨 무기란 게 손에도 잘 익을 듯 했고, 조금만 훈련 시킨다면 창보다 더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포와 화약 같은 화기들을 재보급 받았기 때문에, 이 편곤까지 청할 염치는 없었다.
결국 장임은 사비를 털어 명의 사신단 속에 행상하는 장사치에게 부탁해 편곤을 몇 개 들여왔고, 역시나 사비를 털어 직접 만들어 보급시켰다.
당시에는 그 효과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군관들이 많았지만, 이번 전투로 입증이 된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편곤의 효과가 입증 된 것 뿐이지, 직접 목숨을 건 것은 군사들이었다.
장임은 이들의 공을 가로챌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전후 처리는 부관에게 맡긴 장임은 까먹을새라, 약식으로라도 이들의 공을 기록해나갔다.
“아!”
그전에 할 일이 하나 있긴 하다.
“장 군관!”
“예, 사또!”
“적에게 투항한 한윤이는 발가 벗겨서 현성 밖에 조리돌림 시키도록 하게. 놈이 투항만 하지 않았어도 억울한 죽음은 없었을 걸세.”
“조리돌림 시키면 백성들이 가만 있지 않을 듯 한데 그건 어찌 하올까요?”
“돌 던지는 것 정도는 묵인하게.”
“알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