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15화>
***
제주목 관아.
“그럼 그건 진상하도록 하게나.”
목사 장임(張琳)의 말에 제주목 서면(지금의 애월읍)에 적을 두고 살고 있는 부백겸(夫百謙)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오나 목사또. 그 말은 제가 가진 말들 중에서도 최상품이옵니다. 하온데 그런 말을 어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편의를 조금만 봐주시옵소서.”
제주의 날씨는 내륙과 다르다.
아직 5월 중순 밖에 안 됐음에도 날씨가 찌는 것처럼 더웠다.
장임은 쥘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거드럭거렸다.
“편의? 편의는 됐고, 최상품의 말이니 내게 진상해야지. 내가 설마 나 좋자고 진상하라 말하겠는가?”
백겸은 어이가 없었다.
이만하면 날강두가 따로없었다.
아니, 날강두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었다. 이건 뭐, 제놈이 왕이다, 왕.
“표정이 어찌 그러한가? 꼭 보따리 강탈 당한 행자승 같구만?”
“···아니옵니다.”
“역시 우리 부 선생일세. 부 선생이 아니면 누가 제주를 지키겠느냐 이 말이야.”
왈왈.
개가 짖는다.
“그리고 부 선생.”
“···예, 사또.”
“내 우리 부 선생에게 청이 또 하나 있어.”
또?
백겸은 눈살을 찌푸렸다.
날강두 정도인 줄 알았는데 사또 감투 쓴 도적 놈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사또의 청을 빙자한 명을 거부하면 어찌 되는지, 백겸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작년에 이웃한 마을의 고 씨는 감히 사또의 청을 거절했다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사또에 의해 그 밭이 전부 짓밞혀버렸다.
수확을 고작 보름 앞둔 밭이 말이다.
이웃 마을의 전답 7할이 고 씨의 소유이니, 그 정도로 패가망신하진 않았지만 제법 큰 타격을 입은 건 확실했었다.
“말씀하시옵소서, 사또.”
“부 선생이 가지고 있는 땅 중에 만조악(지금의 망오름)에 있는 땅이 얼마나 되던가?”
“그건 어찌 물으시온지······.”
“거기에 도로를 좀 놔야 될 것 같네.”
청천벽력도 이런 청천벽력이 없었다.
이건 말을 진상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도로를 놓는다니··· 그가 소작 놓고 있는 만조악의 땅은 나름 알짜배기였다.
그의 땅에서 나오는 소출 절반이 만조악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 땅에 도로를 놓는다면 수입은 반토막 날 터였다.
“사또. 거긴 소인의 생계가 달린 땅이옵니다. 하온데 어찌 도로를······.”
“내 누차 말하네만, 조만간 왜구의 침탈이 있을 것이네.”
백겸은 인상을 구겼다.
이번엔 좀 다른가 했더니 또 저 개소리다.
왜구와 무슨 원수라도 졌는지, 사또 새끼는 부임한 이래 틈만 나면 왜구, 왜구 노래를 불러댔었다.
농한기에 쉬고 있는 목민들을 불러내 성을 쌓질 않나··· 조정에 청해 화포와 무기를 보급받질 않나··· 지역 토호들을 불러내 청탁을 빙자한 협박으로 말을 진상 받아 마병을 육성하지 않나······.
제 애미가 왜구 놈한테 칼맞고 뒤졌어도 이렇게 왜구 운운하진 않을 것이었다.
협잡질이 분명했다.
차라리 이 제주에 있는 동안 내가 한몫 단단히 챙기고 떠나야 할 것 같다 말을 하면 이리 억울하지나 않지, 무슨 핑계가 이리도 한결 같단 말인가?
“사또께서도 아시다시피 대마도가 상왕 전하의 성은을 입게 되어, 지금 금상 전하의 덕이 뻗치고 있는데 왜구가 어찌 창궐하겠사옵니까? 기우이시옵니다.”
쾅!
“기우?”
“예.”
“그리 안일하게 굴다가 늘 왜구에 노략질 당한 것이 아닌가. 왜구의 소굴이 어디 대마도에만 있다던가?”
바드득!
백겸은 이를 갈았다.
하는 소리 듣고 있으면 어디 제놈만 나라 걱정하는 충신인 줄 알겠다.
“지역 토박이인 부 선생이 더 잘 알겠지만, 대정현과 서면 지역은 특히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곳일세. 지금 만약 대정현하고 서면에 왜구가 쳐들어오면 어찌 되겠는가?”
“군사를 증강하지 않았습니까?”
“했지, 그러니 소수의 왜구라면 현감이 어련히 막아내겠지. 하지만 그 이상의 수가 대정현과 서면을 침략한다면 어찌 되겠냐 이 말이야!”
“···”
“내 마병을 끌고 구원을 나가야 할 터인데 지금 있는 길목은 아주 협소하니 마병을 몰고 나간다 한들 구원이 어찌 용이하겠는가? 결국 서면과 대정현 일대는 쑥대밭이 되고 마는 것일세! 속세를 떠나 사는 땡추들도 알 만한 일을 자네가 어찌 모른단 말인가?”
개소리가 아주 청산유수다.
“사또, 그걸 누가 모르겠사옵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왜변이 있을 거란 핑계로 자꾸 민간을 침노한다면 인심이 이롭지 않을 것이옵니다. 지금도 목사또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많사옵니다.”
쾅!
“그대가 지금 나를 겁박하는 것인가?”
“겁박이라니요. 당치도 않사옵니다. 소인은 그저 사또께 진언을 올린 것이옵니다.”
“진언? 인심을 두려워하여 해야 할 방어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수천의 백성이 목숨을 잃는 것이네! 왜구가 잠잠한 이때 마땅히 싸움터가 될 지도 모르는 곳들을 닦아 놔야 훗날 수천 백성을 구할 수 있는 일이거늘, 장차 왜변이 생겨도 그 따위 망발을 진언이랍시고 지껄일 텐가?!”
“왜변가 민간을 침노하는 일은 별개의 것이옵니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지금 사또께서 하시는 일이 아무리 뜻이 좋기로서니 장오(뇌물죄)와 관계 됨을 어찌 부정 할 수 있겠나이까?”
장오가 언급되자 장임은 거품을 물었다.
“자, 장오라니! 그대들에게 받은 말을 내가 취했다던가, 그대들에게 받은 땅의 소출을 내 죄 받아 쳐먹었다던가? 하물며 내가 그대들 곳간을 털길 했는가? 한데 무슨 장오란 말인가!”
“조정에서 어찌 그 같은 사실까지 참착을 하리오까? 왜적에 대비하여 방어함은 마땅한 처사시나, 이에 너무 매몰 되신 듯 하여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헛바람을 들이킨 장임이 말했다.
“그럼 어떡하면 좋겠단 말인가?”
“지금도 방비는 충분하옵니다. 설령 왜구가 쳐들어온다 한들 어찌 과거처럼 당하기만 하겠사옵니까?”
“충분하다.”
“그러하옵니다.”
“왜구가 1만이 와도 충분하단 말이냐?”
“크흠··· 1만은······.”
“지금 네가 이 도서에 틀어박혀 왜국의 정세를 읽지 못 하는 듯 하다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조정에선 대내전과 소이전의 일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조정이 소이전 대신 대내전의 입조를 받아 들였으니, 소이전이 가만 있겠더냐? 더 이상 우리 눈치를 볼 필요가 어디 있겠냔 말이다!”
“···”
“왜구는 온다. 꼭 이 제주가 아니더라도 경상도, 전라도 어느 곳에든 필히 온단 말이다! 한데 방비가 충분해? 어디 네놈 집이 털리고 나서도 그 따위 망발을 지껄여 보거······.”
“사또! 사또!”
군관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대정현에 왜구가 출몰했다고 하옵니다!”
왜구란 말에 경기를 일으킨 것은, 장임 보다도 백겸이었다.
“왜, 왜구라니! 정확히 대정현 어디에 출몰 했다더냐?!”
“모슬포입니다.”
“모, 모슬포라면······.”
시집간 딸이 있는 곳이 바로 모슬포였다.
사색에 질린 백겸을 한심하게 흘긴 장임이 말했다.
“그 수는 얼마나 된다더냐?”
“그것까진 잘 모르겠사오나 못 해도 수백은 넘어 보이는 듯 하옵니다. 어, 어찌 하올까요?”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는 모습의 군관이었지만, 그도 당혹에 사로잡힌 표정이었다.
“소란 떨 것 없다. 이럴 때를 대비하고 마병을 키운 것이니, 전원 관아 앞으로 모이도록 하라. 또, 대정현감 한윤에게는 관민들을 모두 현성으로 피신시키라 이르고, 현성문을 굳게 걸어잠근 채 기다리라 전하라. 현성에 조정에서 보급 받은 화포와 비격진천뢰가 있으니 하루나절 쯤이야 어렵지 않게 버틸 것이다.”
“예!”
군관이 돌아가고, 장임은 백겸을 흘겼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군사의 소용이 바로 이런 때 닿는 것이다.”
***
장임은 무재(武才)가 있다고 해서 임금께 직접 천거돼 제주목사에 부임 했었다.
이게 바로 3년 전이었는데 막상 부임해서 본 제주목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왜구가 아니라 오합지졸 당군이 오더라도 손쉽게 노략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걸 모두 뜯어 고쳐야 했다.
조정에 특별히 청해 제주목~대정현의 서른 개가 넘는 포구들에 왜구의 침입을 대비한 철질려를 깔았고, 과거 적선이 정박지로 사용했던 적이 단 한차례라도 있는 조천관포(朝天館浦), 김녕포(金寧浦), 애월포(涯月浦), 명월포(明月浦), 차귀포(遮歸浦) 등지에는 방호소(防護所)를 설치해 각각 1여(旅), 그러니까 130명 씩을 주둔시켰다.
특히 왜구의 침범이 용이한 수산포와 차귀포에는 버려진 성터를 수축하게 했고, 나머지 곳에는 버려진 성터 조차 없어서 성을 짓게 했다.
여기까지 하는데 욕을 무진장 들어먹었다.
성을 짓는 일은 군사를 동원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관민들을 부역에 동원해야 하는 일이었고, 당연히 평생 먹을 욕 그때 다 들어먹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이 가진 대소 군선은 130척에 육박했다.
그런데 관리가 어떻게 됐는지 몰라도 9할이 부패해서 사용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부패한 군선으로는 적선을 추격하긴 커녕 저지하기도 어려웠다.
이것도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동원해 배의 부패한 곳은 개조시켜야 했다.
다음은 화포와 화약이었다.
역시나 관리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 청해서 비격진천뢰, 각종 총통, 소약선(도화선)을 보급 받았다. 이때도 조정에선 말들이 많았다.
제주목사가 이전에 있던 화포와 화약은 죄다 횡령해놓고 지금와서 새로 물자를 청하는 거라면서 말이다.
오욕을 감수하고 연이어 청했고, 보급 받을 수 있었다.
굵직한 것들만 이 정도였는데, 딱 이 정도만 처리하고 나서도 욕을 옴팡지게 먹었다.
특히 관민들에게 말이다.
하지만 장임은 확신이 있었다.
조정에 있으면서 보고 들은 바와, 벗인 부산진 첨사 윤성경에게 들은 것들을 취합한다면 장차 왜변은 기필코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대내전과 소이전의 낌새가 수상찮았기 때문이었다.
타지역을 노략질 한다면 그나마 제주는 평화로울 수 있겠지만, 제주가 노략질 당한다면 그 피해는 비교적 방어가 철저해진 타지역보다 더 클 터였다.
남들에게 미친놈 소리 들으면서, 그리고 오늘은 장오죄를 범한 탐관오리 소리까지 들으면서 왜적에 대비했고, 오늘 드디어 쓰임이 있게 생겼다.
“사또! 모두 모였사옵니다!”
갑주를 마저 챙겨입은 장임이 동헌을 나오자, 군관이 아뢨다.
관아 앞으로 모이자, 잘 훈련 된 마병 300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나 이런 때를 대비하고 육성시킨 마병들이었다.
마병으로 쓸 군사의 수가 부족해, 조정에 어렵사리 허락을 받고 각사에 딸린 일부 관노들을 편입시키면서까지 만든 기병대기도 했다.
“출병하라!”
모두 채비가 됐다면 지체 할 것이 없었다.
말에 오른 장임이 말허리를 걷어찼다.
이럴 때를 대비해 닦아둔 도로가 제법 긴요하게 쓰였다.
부백겸의 만조악 땅을 닦아뒀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렇게 봉소(烽所)가 있는 모슬봉 일대까지 왔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모슬포 방호소에서 당번을 서고 있던 주둔군과 대정현 아전 고만개가 적들의 상륙을 저지하다가 전원 몰살 당했고, 이들을 버리고 도망간 대정현감 한윤이 적과 전투 다운 전투도 없이 투항했다는 소식이었다.
마병들의 소용이 닿는 건, 적들이 상륙에 성공했더라도 현감이 대정현성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적들이 들판이 아니라 현성에 틀어박혀 있다면 기병으로 무슨 공성을 하겠는가?
각 방호소와 정의현에 치계는 보내뒀지만,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었다.
첩보에 의하면 현성 내의 백성들이 살육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적들을 유인 하는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