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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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현 아전 고만개(高灣開)는 멀찍이 말을 탄 채 달아나는 현감 한윤에 실소를 터뜨렸다.
미물도 제 목숨 귀중히 여긴다지만, 이건 귀히 여겨도 너무 귀히 여긴다.
어찌 적이 상륙도 하기도 전에 도망부터 놓는단 말인가?
게다가 그가 2년간 모셨던 사또는 무과 급제자였다.
본인이 식년무과에 난다긴다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당당히 급제했다며 술만 먹으면 그리도 거들먹거렸고, 왜구의 왜(倭)자가 나올라치면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는 허풍은 평상시에도 줄곧 해대는 개소리중 하나였었다.
사또의 허풍을 모두 다 믿었던 건 아니지만, 그가 무과 급제자였다는 사실은 허풍이 아니었다.
진실로 사또는 무신이었다.
그래서 허풍이 좀 심하긴 해도 혹시 외적이나 왜구가 쳐들어오면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기대감 정도는 있었다.
사람이 늘 덜렁거려서 문제긴 하지만, 무과에 남의 이름 빌려 급제한 것도 아닐 테니 그 정도 배포와 지략은 있을 테니까.
한데 기대감은 개뿔.
저기 지금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 놓는 사또 놈을 보고 있으면 기대한 본인이 병신 팔푼이였다.
“나리. 어찌 합니까?”
어이가 없어서 먼지 바람만 일으킨 채 멀리 사라지는 현감의 뒷꽁무니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사또 행차에 불려나온 대정현 군관 김환심이 마찬가지로 얼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한심하기 짝이 없게도 현감이 도망간 지금 이 자리에서 최고 상급자는 고만개 뿐이 없었다.
환심의 물음에 순간 망설여졌다.
원래 사람은 한 번도 겪지 않은 일에 큰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겪어본 일에는 당시의 공포가 생생히 떠올라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왜구의 일도 그랬다.
제주는 왜구의 상륙과 노략에 속수무책 당하던 곳 중 하나였다.
불혹의 나이에 불과한 고만개만 해도 여태 8번이나 대정현에 상륙한 왜구를 접했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이 8번의 상륙 중에 2번은 왜구의 노략이 있었다.
죽도(지금의 차귀도)에 배를 숨겨 정박시킨 왜구가 야음을 틈타 대정현 일대를 노략질 하고 유유히 벗어난 게 불과 12년 전의 일이었고, 식수가 부족하다며 가거도에 배를 대놓고 물자를 보급 받은 뒤, 모슬포에 상륙해서 노략질 하고 유유히 섬을 빠져나간 게 불과 8년 전의 일이었다.
아직도 당시의 참상이 생생하게 떠오를 만큼이나, 이 두 번의 노략은 정말이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이로인해 왜구의 두려움을 잘 아는 고만개였다.
왜구놈들은 자비란 게 없다.
무조건 살육하고 무조건 도륙낸다.
때문에 망설여질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 말에 올라 사또의 뒷꽁무니를 쫓아간다면 대정현성 문이 닫히기 전에 입성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야차 같은 왜구를 피해 목숨은 부지 할 수 있을 테니까.
죽느냐 사느냐에 대한 고민이 가벼울 순 없었다.
하지만 만개는 가볍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아전이다.
비록 나라의 녹을 받는 벼슬아치는 아니라지만, 지방민들의 존경을 받는 아전이었다.
지금 일흔명의 군사들을 지휘 할 수 있는 사람도 본인 밖엔 없었다.
본인마저 도망간다면 구심점이 사라져서 막을 수 있는 왜구도 막지 못 할 터였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용왕제를 지내고 있던 백성들이 입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대정현감과 다르게 제주목사 장임(張琳)이 비교적 유능한 목사라는 점이었다.
그가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속현들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 지시였다.
당장 모슬포만 해도 천연적으로 포구가 좁은 터라 적선이 정박하기 쉽지 않은데 설령 정박을 한다 할지라도, 바로 앞에 긴 말뚝과 철질려가 깔려 있어서 정박과 상륙을 하려면 다수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만개가 한윤에게 일흔명의 군사로 왜구의 상륙을 저지시킬 수 있다고 자신한 것도 바로 이같은 장비들 때문이기도 했다.
“백성들은 모두 피신시키고, 군사들은 활을 들게 하게. 또 혹시 비격진천뢰가 모슬포에도 있던가?”
“예, 작년에 목사께서 조정에 청해 보급되었사옵니다.”
만개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불행중 다행이었다.
“어서 내어오게.”
잠시 후, 군관이 비격진천뢰를 가지고 왔다.
사용법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비격진천뢰를 쏠 화포가 없으니, 적선이 상륙할 때를 노려 심지에 불을 붙이고 던지면 그만이었다.
비격진천뢰가 준비되는 사이 일흔의 군사들이 제각각 자리를 잡았다.
그러는 사이, 적선이 모슬포에 들어섰다.
***
적게는 노를 2~30개 정도 장착한 군선에서, 많게는 5~60개까지 장착한 군선은 그 수만 자그마치 10척은 거뜬히 넘어 보였다.
단순히 한 척에 40명의 사람을 태울 수 있다는 가정을 해도, 최소 400명이 넘는 이들이 타고 있는 셈이었다.
이 선단의 선장은 지바 다네히사(千葉胤尚).
지바(千葉) 씨는 명실상부한 히젠의 명문가로 쇼니 씨를 섬기고 있는 가신단 중 하나인 가문이었다.
비록 과거 가문에 분열이 있어 그 세가 예전만 못 하다지만, 그럼에도 히젠에서 갖는 지바 씨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때문에 다네히사는 본인의 성 씨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
그건 속된 말로 해적질을 하러 바다에 나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건 영광스러운 해적질이었다.
어느 날, 당주이자 이복 동생 동생인 다네시게(胤繁)가 그를 불렀다.
그러고는 주군 가문인 쇼니 씨(소이전)와 오우치 씨(대내전)와의 화친이 불발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전했다.
두 가문의 화친은 오우치 씨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었다.
비록 상락에 성공해 요시즈미(義澄)를 폐위하고, 새로 요시타네(義稙)를 옹립해 간레다이(섭정)에 오른 오우치 요시오키라지만, 아직 천하인이라 부르기엔 모자란 입지였다.
아닌 게 아니라 오우치에 의해 폐위 된 요시즈미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롯카쿠 씨의 오우미(지금의 시가현)로 달아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호소카와(細川), 미요시(三好), 롯카쿠, 야나다(簗田) 일족 등도 오우치 씨의 견제 차원에서 요시즈미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요시오키에 옹립 된 요시타네도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요시오키의 입장에선 적을 여럿 두어 좋은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쇼니 씨와 화친을 하고자 했던 건데, 미처 화의를 맺기도 전에 전황이 오우치 가에 이롭게 돌아가버렸다.
오우치 입장에선 굳이 쇼니 씨와 화친을 맺을 필요가 없어졌고, 히젠과 부젠의 고쿠진들을 규합해 아예 쇼니 씨를 멸문시켜 버릴 작정이었다.
준 천하인이 된 오우치가 마음 먹고 쇼니 씨를 멸문 시키면 지바 가의 안녕도 보장 할 수 없게 된다.
이걸 어린 당주는 모르지 않았다.
다네시게는 오우치의 야욕에 주군 가문을 어떻게든 돕고자 했고, 그 일환이 군자금 확보였다.
병력을 지원하는 건, 이제 무리다.
다만 다네시게는 군자금은 어떻게든 확보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군자금 확보처는 조선이었다.
이미 조선은 주군이신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님을 거부했다.
거부한데 더해, 오우치 가와 손을 잡았으니 이쪽으로서는 조선의 눈치를 볼 필요가 사라진 셈이었다.
더군다나 조선은 쇼니 가문의 가신단이었던 소 씨(대마도주 가문)를 멸하고, 저희들 마음대로 쓰시마를 조선령에 편입하기로 오우치와 거래를 한 나라였다.
결국, 이 해적질은 군자금 확보가 아니더라도 꼭 필요한 복수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 일을 위해 당주이신 다네시게는 있는 병력, 없는 병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그에게 주었다.
그렇게 모인 병력이 자그마치 500.
이 병력은 지바의 여력은 싸그리 긁어 모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무조건 소기의 성과는 달성해야만 했다.
물론 그럴 자신도 있었다.
듣기로 조선이 요즘 부국해졌다 하니 제주도를 기점으로, 방비가 경상도에 비해 비교적 허술한 전라권의 고을 몇 곳만 털어도 충분한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렇듯 자신감 충만한 다네히사였지만 그런 그도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딱 세 가지가 있었다.
“다네히사님! 포구의 입구가 너무 협소합니다!”
첫째가 모슬포의 포구 넓이를 간과한 사실이었고,
“상륙하라!”
콰콰쾅!
두 번째가 배를 정박시키자마자 폭발하는 비격진천뢰였다.
포구의 입구가 좁은 통에, 이 입구를 통과하는 사이 조선군이 발사하는 원거리 무기에 예상보다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물론 예상 보다였지, 많은 피해는 아니었다.
다만 배를 정박시키고 난 뒤의 피해는 제법 컸다.
적들이 퍼붓는 화살비를 뚫고 상륙하자마자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는 비격진천뢰에, 휘하 군사 수 명이 상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적을 간과한 통에 상륙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어려웠지, 하고 난 뒤는 무차별적인 학살에 지나지 않았다.
적군은 어림잡아 예순~일흔은 되어보였는데 비교적 날이 서있긴 해도 그의 수하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기에 수적으로도 열세였으니 곧이어 상황은 마무리 되었다.
“이놈이냐?”
그리고 잠시 후.
수하가, 조선측 지휘관을 끌고 왔다.
피칠한 조선측 지휘관은 변변한 갑주 하나 입고 있지 않았다.
갑자기 변고를 당해 미처 갑주를 챙겨 입을 사이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것치고는 제법 인상 깊게 저항을 해댔다.
“예!”
“참한 뒤에 깃대에 걸고 약탈을 시작하라.”
“옛!”
그렇게 수하들은 주변 마을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생각 보다 순조로운 약탈이었다.
듣기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이 고을을 수호하는 현성이 있다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현성의 수비군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마을 몇 곳을 털 동안 말이다.
예정대로라면 마을 4~5곳을 털고 다른 고을로 옮겨갔겠지만, 수비군들이 모습을 드러내질 않으니 욕심이 생겼다.
미리 보내둔 척후에 의하면 현성의 수비군들은 고작해야 100명도 안 되는 것 같다 하니 조금만 윽박지르면 금세 함락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이 고을의 태수인 한윤이라는 자는, 그의 수하들이 현성 앞에 진을 치자마자 사람을 하나 보내왔다.
예의 사신은 항복 할 테니 목숨만은 살려달란 말을 전했다.
기가 차서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모슬포란 포구에서 격렬히 저항했던 그 군사들과는 대비되는 태도기도 했다.
변변한 전투도 없이 투항이라니······.
물론 다네히사로서는 흡족한 일이었다.
소수의 피해라도 피해는 피해인데, 그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다네히사는 한윤을 길라잡이로 삼아 현성 이곳저곳과, 그 일대를 이잡듯 뒤져 재물을 약탈했다.
이 고을 지리에 익숙한 태수의 안내를 받아서인지, 쉬워도 너무 손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당주께 청해서 약탈을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가.
어림잡아 반나절은 지난 것 같았다.
반나절 동안 다네히사와 수하들도 조금은 풀어졌다.
한껏 긴장을 했는데, 적과의 교전 다운 교전은 없었고 태수라는 작자는 아예 길라잡이를 자처했으니 긴장감이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었다.
현성에 틀어박힌 다네히사는 내친 김에 수하들의 사기를 위해 강간도 허락했다.
현성에는 피난 온 많은 백성이 있었는데 여자가 6할이었다.
수하들을 모두 만족 시키고도 남을 터였다.
수하들은 아무나 붙잡고 강간을 한다지만, 명색이 지바 씨의 일족이 아무나 붙잡고 재미를 볼 순 없었다.
어떡하나 하는 찰나, 예의 태수 한윤이란 작자가 제 첩을 갖다 바쳤다.
강란이란 기생으로 외모도 제법 반반했다.
그렇게 다네히사가 한껏 풀어져서 재미를 보는 그 사이.
다네히사가 간과한 마지막 세 번째가 현성을 향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