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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13화 (31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13화>

    ***

    “이런 쳐죽일!”

    아우 칠(七)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동개(활집)를 챙겨 튀어나갈 기세였다.

    그런 칠을 말린 건, 마을에선 흔히 홀아비라 불리는 고 씨였다.

    “그거 갖고 가서 뭘 어쩌게?”

    “어쩌긴! 내 왕 가(家) 놈의 멱을 단발에 따버릴 거요!”

    “이보게 칠이. 감정적으로 해서 될 일이 아닐세. 일단 진정좀 해.”

    “아니, 고 형(兄). 내 지금 진정을 하게 생겼소? 저번 달에 우리 마을에서만 3명이 죽어나갔소. 우리랑 하등 상관 없는 도적 놈들 토벌 때문에! 그런데 뭐? 빠지려면 정성을 보여? 이게 관헌이오, 도적이오!”

    이번에는 고 씨도 분개하는 칠을 말리지 못 했다.

    사실 도적들이 창궐한 근본 원인은 관헌들에게 있었다.

    환관들이 득세하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입고 있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이중으로 징수하는 건 약과였고, 때로는 공에 눈이 멀어서 도적이랍시고 애꿎은 마을을 지옥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일도 많았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차라리 도적질을 업으로 삼게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섬서에서는 아예 반군이 벌써 2만에 육박했다더이다. 군소 반군들까지 포함하면 아마 5만은 족히 될 건데 어디 섬서만 그러겠소? 산동에는 제언명(齊彦明)이란 위인이 아예 참칭을 했답디다. 산동대왕이라고.”

    “그건 나도 들었네.”

    “지금이야 그 수가 관군들로 토벌 가능한 수준이겠지만, 상황이 계속되면 그 마수가 우리에게까지 뻗칠 거요. 나중엔 반군 토벌까지 우리한테 시킬 거란 말이오. 나중에 반군 토벌에 까지 차출돼 보시오. 지금도 도적 토벌에서 빠지려면 뇌물을 갖다 바치라는 놈들인데, 반군 토벌에 빠진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하겠소? 이때는 아예 빼도 박도 못 하고, 엄한 반군 토벌에 차출 될 게 뻔하오.”

    칠의 말에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말은 자칫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내용의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여태 침묵을 지키던 육이 말했다.

    “칠 아우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아니, 육이. 자네까지 어찌 이래!”

    고 씨의 역정에 육은 말없이 웃옷을 벗었다.

    갑작스런 기행에 모두가 의아해 할 즈음.

    웃옷 벗은 육의 등에 시뻘건 핏물이 고여 있었다.

    “육이, 자네 등이 왜 이러는가?”

    “내 민망하여 형님들과 아우님들한테 말은 안 했소만 방금 매질을 당하고 돌아왔었소.”

    “뭐, 매질?”

    “왕 가 놈한테 어떻게든 이번 차출을 빼달라 하니 말귀가 안 통한다면서 채찍질을 하더이다.”

    “아니, 고작 그런 일로··· 나라 법에 그런 일로 채찍질 하라는 법도 있단 말인가? 허허.”

    “법이야 있는 놈들 것 아니겠습니까. 먹물 잡수신 분들께서 어찌 해석하냐에 따라 다른 거지요.”

    도처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 탄식에 뒤늦게 민망함이 솟구치는지, 육은 옷을 다시 걸쳐 입었다.

    “칠 아우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게 바로 이겁니다. 오늘이야 나만 채찍질 당하고 말았지만 내일은? 내일은 우리 부모들이 당할 거고, 아이들이 당할 겁니다. 놈들에게 설설 기면서 아첨을 해도 놈들에게 우린 결국 화살 받이 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

    “게다가, 뇌물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어찌 없는 살림 죄 갖다 팔아 갖다 바쳐서 빠진다 해도 다음은 어쩌겠습니까? 다음은 갖다 바칠 돈도 없으니 마누라를 갖다 바치겠습니까, 누이라도 갖다 바쳐 목숨을 도모해야겠습니까? 그렇다고 또 토벌에 참가하면 가족들은 누가 먹여 살린단 말입니까? 이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집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릴 즈음.

    육은 동개를 챙겨들었다.

    ***

    황성 인근에 있는 완평현에서 반역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정덕제는 오늘도 표방에서 노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딨을꼬··· 우리 해어화(미인의 별칭)들이 다 어디 있을꼬?”

    변덕이 심한 정덕제의 오늘 노름은 술래잡기였다.

    안대로 눈을 가린 정덕제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숨어 있는 궁녀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오른쪽에서 까르르- 웃음 소리가 터져나오자, 정덕제는 몸을 재빨리 돌려 후다닥 뛰어갔다.

    곧이어 손에 물컹하는 촉감이 느껴졌다.

    “아니, 이건 물에 젖은 연꽃이라더냐? 어찌 이리 물컹한고?”

    정덕제는 안대를 벗었다.

    그의 손이 한 궁녀의 가슴에 올라가 있었다.

    “하하하! 물에 젖은 연꽃이 아니라 봉긋 솟은 태산이었구나.”

    “폐하도, 참.”

    “자, 이번 술래는 너다.”

    정덕제가 궁녀에게 안대를 건네던 그때였다.

    “폐하.”

    누군가 고개를 돌리던 정덕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동각대학사 양정화(楊廷和)였다.

    “양(楊) 동각이 여긴 어인 일이신가? 오늘도 표방을 폐하라 간언 할 거라면 들은 셈 칠테니 돌아가시고.”

    “어찌 정사는 돌보지 않으신단 말씀이시옵니까?”

    “또, 또··· 양 동각은 또 고리타분한 소릴 하는구만. 옛말에 주색은 호걸의 것이오, 자잘한 일에 신경 쓰는 것은 소인의 것이라 했소이다. 호걸이 주색을 탐하고 있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이오?”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고 있으니 문제이지요.”

    “그거라면 내 따로 명을 내려둔 상태이니 걱정마시오.”

    “폐하. 오늘은 완평현에서 지현이 살해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완평현은 황도와 지척이옵니다. 황도와 지척인 곳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는데 폐하께서는······.”

    “짐이 다 조처를 해뒀다지 않은가!”

    “폐하······.”

    “당장 섬서에서 역적도당들에게 살해 당한 관헌이 수두룩한데, 그깟 지현 한 사람 살해 당한 일이 무에 대수란 말인가? 고작 그 소식 때문에 오신 거요?”

    “그 뿐만이 아니옵니다. 유 태감(환관 유근)의 전횡이 날로 성해져 이를 성토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옵고, 당장 오늘 살해 당한 완평현 지현 왕성 역시 유 태감의 수족이라 하니 항간에는 왕성이 유 태감에게 바칠 뇌물을 모으다가 참다 못 한 백성들에게 살해를 당한 것이라는······.”

    “양 동각.”

    “예, 폐하.”

    “모름지기 사람이 큰 일을 도모하다 보면 작은 일은 놓치기 마련이오. 그런 걸로 무슨······.”

    “하오나 유 태감은 사례감의 병필(전 환관들의 수장)이옵니다.”

    “이보시오, 양 동각. 떡 장수가 떡을 좀 만져 콩고물이 묻었기로서니 그걸 탓하는 이가 어디있단 말이오?”

    “폐하!”

    “됐고, 짐이 가만히 보니 우리 양 동각이 할 일이 없어 딴 생각이 자꾸 드는 듯 하니 저기 조선에 유람이나 좀 다녀오시오.”

    “그게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칙사로 다녀오란 말이지, 무슨 말귀를 그리 못 알아 쳐먹는단 말이오?”

    “···”

    “그만 물러가보시오.”

    ***

    제주목 대정현.

    이른 새벽.

    모슬포(毛瑟浦)가 떠들썩했다.

    오늘이 바로 용왕제를 지내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제물들은 모두 평상에 준비됐다.

    돼지머리와 용왕께 바치는 소의 머리 뼈가 바로 그것이었다.

    “거행합시다!”

    곧이어 제관을 맡은 마을의 원로들이 옷을 차려입고 용왕제를 시작했다.

    “저런다고 고기가 많이 잡히나. 어리석긴.”

    용왕제가 진행되면 될수록 분위기는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런 그들을 한심하단 듯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대정현감(大靜縣監) 한윤(韓倫)이었다.

    원래 이런 용왕제에 수령들은 참석하지 않는다.

    속된 말로 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닌 말로, 이런 푸닥거리에 불과한 용왕제를 지낸다고 용왕이 감동해서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준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고 혹세무민의 일종이었다.

    그럼에도 한윤이 오늘 용왕제를 구경나온 것은 아끼는 기생 강란이 이를 보고 싶다 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이 모슬포를 찾진 않았을 터였다.

    “나리. 조정에서도 군사가 출병하면 한낱 마조(말의 신)에게도 제사 드리고, 수군들은 해신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용왕제와 무에 다르겠습니까.”

    “그건 강란이 네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지내는 제례와 이리 무질서한 푸닥거리가 어찌 같단 말이냐? 도대체 이런 건 왜 보고 싶다는 겐지··· 쯧.”

    그러는 사이, 용왕제는 절정에 이르렀다.

    제관들은 제물로 준비한 돼지머리에 불을 붙이고는 축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축문을 다 외우자, 불 붙은 돼지머리에 축문을 태우고는 소 머리 뼈를 두 동강 냈다.

    그리고 동강난 소 머리 뼈에 축문의 재를 옮겨 닮았다.

    “···부디 용왕께서는 뱃사람들을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제관의 외침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두 동강 난 소 머리뼈를 바다에 퐁당 빠뜨렸다.

    이로써 용왕제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제사는 끝이 났지만, 이제 시작이기도 했다.

    장만한 음식들을 먹고 마시며 즐긴다.

    그래야 모든 제사가 끝이 났다.

    한윤도 강란과 함께 미리 준비 된 자리로 가서 착석했다.

    그렇게 시끌벅쩍한 잔치가 시작되던 그때였다.

    제사는 한심했지만 잔치는 제법 즐길만 했다.

    흥을 깨는 외침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터였다.

    “왜, 왜구다!”

    한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구라니, 이 무슨 말인가?

    의아애하는 건 한윤 뿐만이 아니었다.

    잔치를 즐기던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 대동소이했다.

    “사, 사또! 사또, 저길 좀 보십시오!”

    아전 하나가 모슬포 앞바다 너머에 있는 가파도를 가리켰다.

    희끄무레한 왜선 십수척이 정박을 가파도 일대를 유유히 지나 모슬포 쪽으로 향해오고 있었다.

    “저, 저, 저게 뭐냐!”

    강란이 앞에서 말을 더듬는 꼴이 여간 창피한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한윤에게는 그딴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한윤은 스스로를 잘 알았다.

    비록 무과에 급제하긴 했다지만, 차마 무신이라 불릴 만한 인물은 못 된다는 것을.

    게다가 무과에 급제한 이래 왜구나 여진족을 상대해 본 적도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처음 무과에 급제하고 북방에 권관으로 부방한 적이 있긴 하다만 그때도 운이 좋았는지 어쨌는지 단 한 번의 교전도 없이 승차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왜구라니······.

    그나마 활쏘기와 말타기는 좀 자신이 있었지만 해전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왜구다.

    야차와 같다는 왜구!

    상대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이길 수 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싸우지도 않고 어떻게 확신하냐고?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안단 말인가?

    한윤은 대정현감으로 부임하기 전에 중앙에서 임금을 배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대마도의 왜인들로 이뤄진 부대의 열병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아마 지금 오는 왜인들도 그때 그 왜인들과 같으면 같았지 부족하진 않을 것이었다.

    근데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저, 저놈들이 다 어디서 오는 것이란 말이냐!”

    다급한 마음에 아전에게 소리쳤지만, 왜구와 내통한 게 아닌 이상 아전도 알 턱이 없었다.

    “어, 어쩌냐! 어찌해야 하느냔 말이다!”

    “그, 그래도 모슬포는 포구가 좁기 때문에 적선이 정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얼른 군사들을 불러들여 대비를 한다면 능히 적선의 정박을 막을 수 있을 테니 왜구의 상륙만 막아내면 되는 것이옵······.”

    “아, 아니. 아니다! 왜구의 상륙을 막아내면 뭘 한단 말이냐? 포구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상륙 할 수 있는 해안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닌데 아예 노략질을 노리고 온 놈들을 무슨 수로 막아!”

    “하, 하오나 사또. 놈들이 모슬포에 정박하려는 지금이 차라리 적기이옵니다. 지금 놈들을 저지하지 않으면······.”

    “아니다! 아니야! 일단 성으로 퇴각하는 것이 좋겠다. 애당초 현성을 축조한 것이 왜구를 막기 위함이 아니더냐? 싸워도 성을 등지고 싸워야지, 어찌 노출돼서 싸운단 말이냐? 얼른 성으로 돌아가자, 얼른!”

    “사, 사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모슬포에 있는 군사들만 일흔이 넘사옵니다. 이들로 하여금 막는다면 능히 막아낼 수가 있사온데 막기는커녕 일시에 퇴각을 한다면······.”

    “닥치거라! 얼른 퇴각하자, 강란아! 어서 가자꾸나.”

    하얗게 질린 채 넋이 나간 한윤은 누가 잡을 새라 얼른 말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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