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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11화 (31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11화>

    ***

    진성은 여울이를 어떻게 꼬실지 고심하고, 조정은 정미수를 어떻게 벌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비록 옛말에 멸망한 나라의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것이 성왕(聖王)의 법이라는 말이 있사옵니다만, 노산은 근대에 폐위 된 임금이옵니다. 세조대왕과의 혈육의 정을 생각하면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나, 노산은 나약하여 국가를 진흥 시킬 수 없는 임금이니 당시의 제신들 모두가 종묘사직을 위하는 대계에서 부득이하게 폐위한 것이니 어찌 지금에 와서 추복을 논할 수 있겠나이까? 감히 입밖으로 꺼내는 것도 민망하고 두려운 일인데 지금 정미수가 실성하지 않고서야 이같은 언급을 할 까닭이 없으니 금부로 하여금 속히 잡아들이고, 추국하라 명하소서.”

    “그렇사옵니다. 노산의 일은 종사에 지극히 중대한 관계로 감히 조정에서 논의가 된 적이 없었는데 금상 전하나 상왕 전하, 심지어 저하께서도 따로 노산군에 대한 일에 구언(바른 말을 구하던 일)의 전지를 내리지 않았는데 단지 금상 전하께서 단종의 묘소를 복구하란 명을 내렸단 연유로 제 아비와 관계 된 노산의 추복을 바랐으니 그 의도란 게 어떤 것이겠사옵니까? 자식 된 도리로 그 정성은 헤아릴 만 하지만 종사의 앞날을 생각하면 온당치 못 한 일이니 벌하소서.”

    대신들의 말에 침음한 황이였다.

    대리청정을 맡은지 며칠만에 이런 사달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애당초 대리청정을 맡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정미수가 올린 상언의 파급은 어마무시했다.

    노산군을 추복하라니··· 어린 황이었지만 대사성의 말처럼 감히 입에 담기도 두려웠다.

    “금상 전하의 전지는 아직입니까?”

    “선전관이 이제 막 광화문을 들었다 했으니 곧 도착 할 것이옵니다.”

    “하면 선전관을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황이는 초조하게 진성의 뜻을 받들어 오는 선전관을 기다렸다.

    선전관이 입시한 건 그로부터 일식경이 지나서였다.

    “금상 전하의 뜻은 가져 왔는가?”

    선전관이 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이가 물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선전관은 미처 땀을 훔칠 새도 없이 부복했다.

    “예!”

    “뭐라시던가? 금상 전하께서는 뭐라 하시고, 아바마마께서는 또 뭐라 하시던가?”

    “그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상왕 전하께서는 이제 종사의 일은 금상 전하께 맡기셔야 한다 하여 따로 전지를 내려주진 않으셨사옵고, 금상 전하께서는······.”

    꿀꺽.

    “금상 전하께서는? 정미수를 삭직하고 벌하시라던가? 아니면 그 죄를 물어 귀양을 보내시라던가?”

    지레짐작한 황이 속사포처럼 물었지만 선전관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송구하오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들어줌이 온당하겠다고······.”

    “뭐라? 정녕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단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맥이 풀린 황이는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고, 대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놀려댔다.

    “전하께서 어찌 그런 영을 내리신 걸까요?”

    “낸들 알겠소?”

    “전하께서 혹 다른 뜻을 염두에 두시고 내린 영이 아닐지요?”

    “다른 뜻? 어떤 뜻 말이오?”

    “전하의 깊은 뜻을 내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소이까. 다만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겝니다, 그럴지도.”

    대신들의 말처럼 다른 뜻이 있는 걸까?

    황이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하지만 백날을 생각해도 이 일에 다른 뜻은 없어 보였다.

    아닌 말로, 세조의 후계이신 숙부께서 무슨 거창한 뜻이 계셔서 노산군을 추복하라 명하신단 말인가.

    ‘자신감?’

    불현듯 스친 생각이었다.

    노산군을 추복하고 사육신을 신원해서 생기는 잡음들 따위는 왕권으로 모조리 눌러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

    ‘어쩌면······.’

    불현듯 스친 생각이었지만 일리가 있는 추론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게 정답에 가까운 것 같았다.

    다만 이게 정답이라면 굳이? 라는 물음이 남게 된다.

    모든 반발은 왕권으로 눌러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면 굳이 노산군의 추복으로 내세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것도 기행의 일종이시려나?’

    숙부께서는 기행을 자주 벌이셨었다.

    이것도 그 일환이 아닐까 황은 짐작했다.

    다른 게 아니라 이 때문이라면, 노산군의 추복을 딱히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노산군의 추복이 두려운 건 정통성과, 지금 선왕조를 부정하는 것이냐는 여론 형성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기행이긴 해도, 내가 노산군을 추복하든 말든 너네가 감히 문제 제기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자신감으로 이 문제를 승인하신 거라면, 황으로서는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소리였다.

    오히려 훗날 대통을 이어 받을 몸으로서 감사한 일이다.

    선왕조의 일은 언제가 됐건 수면 위로 드러날 문제인데, 그걸 숙부께서 미리 해결해주신 셈이니까.

    또, 그런 강력한 왕권을 그대로 이양해주시는 셈이니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전하께서 이런 분부를 내리실 때, 조정에 분란이 안 생길거라 어찌 생각지 않으셨겠습니까? 다 짐작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분부를 내리신 건, 다 큰 뜻이 계시기 때문일 거라 사료됩니다. 왈가왈부 할 필요가 없을 듯 한데 제공(여러분)들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

    눈치 게임(?)이 시작됐다.

    노산군에 관한 일은 당대에도 문제 될 소지가 다분하지만, 후세에도 책잡힐 우려가 많은 주제 중 하나였다.

    성종대왕 시절에도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모가지 달아난 위인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모두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때.

    좌중을 한심하단 듯 바라보던 임사홍이 말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지 못 하니 이제 와서 더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추복이란 게 비록 죽은 자를 살려내진 못 하더라도 그 명예는 살릴 수 있으니 어찌 불가한 일이겠습니까. 노산군의 추복은 종사로선 매우 신중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겠으나 저하께서 말씀하신대로 금상 전하께서 종사의 대계를 위한 큰 계책을 세우셔서 이런 분부를 내리신 듯 하므로 따름이 온당한 처사라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미수의 상언을 가납하시옵고 봉상시에 명해 노산의 시호를 논하게 하소서.”

    편전이 쥐죽은 듯 얼어붙었다.

    그 쥐죽은 듯 얼어붙은 편전에 찬물을 끼얹은 건 대사성 이점이었다.

    “하지만 좌상. 노산군을 추복하자면 그 처(妻)가 되는 폐비 송씨도 복위해야 할 텐데 죽은 자를 추복하는 일은 그럭저럭 넘어간다 할지라도 산 사람을 복위하는 것은 잡음이 많지 않겠습니까?”

    “산 사람을 복위시키는 것이 오히려 더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요.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폐비가 무슨 죄가 있었겠소이까?”

    “말 조심 하시오! 좌상의 발언이 사초에 기록됨을 모르시오?”

    “아니까 하는 말이지. 송씨는 폐비가 되고 노산군이 죽은 뒤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일 정업원에 가서 불공을 드린다더이다. 누굴 위한 불공이겠소이까? 지아비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불공 아니겠소. 지아비를 위한 마음이 이리 갸륵하고, 깊으니 열녀의 본이 되는 것이고, 그 남동생인 송거(宋琚)는 일찍이 성종대왕의 용서를 입었소이다. 성종대왕 사후, 상왕 전하와 금상 전하까지 두 분의 임금을 거쳤으니 어찌 폐비라 하여 용서 받지 못 하는 죄를 지었다 하겠소이까?”

    “크흠.”

    “게다가 금상 전하께서 노산군을 추복하자는 분부를 어찌 내리셨겠소이까?”

    “그야··· 저하의 말씀대로 종사의 대계를 위해서였겠지요.”

    “바로 그거요. 지금 노산의 일을 매듭 짓지 않으면 훗날 얼마나 큰 분란이 생기겠소? 노산의 일도 그럴진대 폐비의 일은 또 어떻겠소이까? 말이 나온 김에 매듭 지어야 후세가 곤욕을 치르지 않지 않겠소?”

    설득 당했는지 이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황이가 말했다.

    “그럼 송씨의 일도 함께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또, 내 아까도 말했다시피 금상 전하께서 종사의 대계를 위한 큰 계책에서 노산의 일을 매듭 지으려 하시는 듯 하니 금일 이후로 노산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모리배들이 나오지 않도록 경들이 신경들 써주세요.”

    “예, 저하.”

    ***

    성공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더니 여울이는 정확히 열 두 번을 찍으니 넘어왔다.

    함께 탕실에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부끄럼 많은 여울이는, 내외 간에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다.

    그런 여울이에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앞전에도 말했다시피 탕실을 21세기의 대중 목욕탕처럼 생각하면 곤란하다.

    설령 21세기의 대중 목욕탕일지라도, 나는 싫든 좋든 임금이다.

    내가 싫어도 아랫것들이 체통 지키라고 아우성이다.

    때문에 탕실에 들어갈 때도 무조건 옷을 챙겨입는다.

    곤룡포 밑에 받쳐입는 창의(氅衣)가 바로 그것이다.

    참고로 옷 입고 목욕하는 게 이상해보일지 몰라도, 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이제는 별 감흥도 없다.

    좌우지간,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그 창의의 고름을 풀었다.

    “뭐, 뭐하십니까?”

    “목욕을 하려면 옷을 벗어야지요.”

    “모, 목욕을 하, 하는데 어찌 옷을 벗는다고 하십니까. 체통을 지키십시오.”

    더 장난칠까 하다가 관뒀다.

    열 두 번만에 겨우 여울이랑 같이 목욕하게 됐는데 이 기회를 날려버릴 순 없지.

    “장난이었습니다, 장난.”

    그렇게 말한 나는 탕에 들어갔다.

    머잖아 여울이도 탕에 들어왔다.

    여울이는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낯빛이었는데, 여울이가 부끄럼을 너무 타는 것 같길래 일부러 대화를 주도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좀 나아지겠지 싶어서.

    화두는 가벼운 것부터 시작했다.

    첫 여행이 어떠냐.

    어디 또 가고 싶은 데는 없느냐.

    신배는 시집 보내면 나같은 놈한테는 보내면 안 될 것 같다 등등.

    예상대로 얘기를 하다보니 여울이도 조금은 부끄럼이 가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노산군의 추복을 명하셨다지요?”

    “중전이 그걸 어찌 아십니까?”

    “궁인들 사이에 말이 돌고 있으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대비 전하께서도 내색은 안 하셔도 걱정하시던 걸요.”

    궁인들 사이에 말까지 나돈다고?

    그것까진 미처 몰랐다.

    게다가 어머니도 걱정을 하신다는 걸 보니 노산군의 일이 내 생각 이상으로 민감한 사안인 모양이다.

    “어찌 그런 영을 내리셨습니까?”

    한참 온천욕 즐기고 있는 와중 들어온 불청객이 귀찮아서 그랬지만, 여울이한테 곧이 곧대로 말하긴 좀 그렇다.

    “불쌍해서요.”

    “노산군 말입니까?”

    “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라는 대답에 여울이가 날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모르겠다, 딱히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중전과 놀러와서 까지 정사를 논하려니 머리가 다 지끈거립니다. 골치 아픈 정사는 황이한테 맡겨 두고 우리는 오붓하게······.”

    스리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여울이 곁으로 다가갔다.

    “어, 어딜 오십니까?”

    “어딜 가긴요. 가만히 있었습니다.”

    “분명히 움직이셨습니다.”

    “설마요.”

    여울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또 다시 슬쩍 여울이 곁으로 다가갔다.

    “분명히 봤습니다. 어찌 오십니까?”

    “내외가 어찌 함께 탕실에 들어 목욕만 할 수 있겠습니까? 목욕을 하다 보면 또 서로 등도 밀어주고, 등을 밀어주다 보면 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커흠, 그런 의미에서······.”

    이제 대놓고 여울이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당황해하던 여울이도 싫지만은 않은지 완강히 거부하진 않았다.

    그런 여울이에 나는 손을 뻗었다.

    물론 뻗은 손의 목적지가 어딘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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