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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10화 (31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10화>

    ***

    백성들에게 있어서 나랏님의 행차는 평생 가도 한 번 볼까 말까한 행사였다.

    때문에 임금님이 행차 한다는 말이 나돌면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까지 싸그리 구경을 나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번 온행은 백세 노인도 쉽게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금상인 나랑 상왕인 형님이 함께 행차하는 그림이었으니 백세 노인이 아니라 천세 노인도 보지 못 했을 광경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백성들이 더 몰렸다.

    얼마나 몰렸냐면, 넉넉잡아 1시간 30분~2시간 거리에 불과한 경복궁~마포나루까지 반나절이 걸렸다.

    물론 마포나루까지 가는 데에만 반나절이 걸린 거고, 거기서 또 배다리(임시 다리)를 타고 건너는데 꼬박 하루가 걸려버렸다.

    격쟁 때문이었다.

    나랑 형님의 행차에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은 꽹과리를 치면서 어그로(?)를 끌었다.

    바로 이렇게.

    “상감마마! 소인의 억울함을 들어주시옵소서!”

    “전하! 소인의 부모가 억울히 죽었으니 이 원통함을 씻을 길이 없나이다! 살펴주시옵소서!”

    이게 바로 격쟁이다.

    뭔 놈의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지, 그거 일일이 들어준다고 하루가 꼬박 걸려버린 것이다.

    그마저도 객관적으로 판단 했을 때, 진짜 억울한 일을 당한 것 같은 사람은 열에 둘이나 될까 말까다.

    물론, 이의제기를 하는 본인들 입장에선 이런 억울함이 또 없겠지만 제 삼자의 입장에선 애매한 것들이 열에 여덟은 된단 소리다.

    예컨대 작년에 산 노비가 갑자기 병들어 죽은 일을 억울하다고 꽹과리를 쳐댄다.

    예컨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분재기(상속 문서)를 나눠 받았는데 이게 잘못 된 것 같다고 꽹과리를 쳐댄다.

    예컨대 서얼들을 허통 시킨 게 억울하다고 꽹과리를 쳐댄다.

    이런 문제들을 내가 어떻게 해결하겠나?

    무시할 건 가볍게 무시하고, 해결한 건 최대한 해결하면서 길을 재촉했고 그러다 보니 열흘이 지나서야 온양에 도착 할 수 있었다.

    ***

    온양에 도착하고, 군수 손익창(孫益昌)이 연회를 준비 했다고 했지만 나나 형님이나 별 관심도 없었다.

    대신에 우린 산에 올랐다.

    두두두두.

    고요한 산자락이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에 소란스러워졌다.

    푸드드득!

    깜짝 놀란 새들은 날갯짓과 함께 멀리 달아났고, 먹이를 찾아 헤매던 청설모도 귀를 종긋 세운 채 후다닥 달아났다.

    그리고 나는······.

    “이랴!”

    꾸에에에에엑!

    멧돼지 한 마리를 뒤쫓고 있는 중이다.

    저놈을 놓치면 면이 서질 않을 것이다.

    얼마만에 발견한 멋잇감이던가!

    “워워!”

    급히 말고삐를 잡아채고, 오솔길로 달아나는 멧돼지를 향해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다행히 오솔길로 도망가던 멧돼지가 흙탕물을 만나 도망가는 것도 잊은 채 뒹굴고 있었다.

    심호흡과 함께 시위를 놨다.

    쐐애애애액-!

    활을 당기다 보면, 감이란 게 있다.

    이건 맞겠다, 이건 빗나가겠다 하는 감.

    이번엔 전자였다.

    예감은 적중했다.

    꾸에에에엑!

    미간에 정확히 꽃힌 화살에 멧돼지가 비명을 내지르며 나자빠진 것이다.

    “예쓰!”

    말에서 내려 멧돼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 대단한 놈이다.

    송곳니가 과장 조금 보태서, 30cm는 되어보인다.

    몸도 집채만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컸으니 순간, 21세기 도심에 이놈이 나타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의 화력만으로는 역부족이라 어쩌면, 군부대가 동원됐을지도 모르겠다.

    “전하!”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금군들이 이마에 난 구슬땀을 훔치고 있다.

    “아, 내금위장.”

    그 선두에는 내금위장 이극정(李克正)이 있었다.

    “위험하셨사옵니다.”

    “아,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 흥분해서 놈을 뒤쫓다 보니 행렬을 이탈했습니다.”

    “···가시지요. 상왕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벌써 돌아오셨답니까?”

    “예.”

    내금위장을 따라 베이스 캠프(?)로 돌아갔다.

    가보니 과연 형님이 기다리고 계셨는데, 문제는······.

    “아, 또 졌네.”

    캠프 앞에 켭켭이 쌓아 올려진 사냥감들이었다.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멧돼지, 노루, 사슴, 토끼, 얼씨구 산에서 물고기까지?

    “내가 이긴 게지?”

    “예. 제가 또 졌습니다.”

    내가 잡은 거라곤, 아까 목숨 걸고 잡은 멧돼지 한 마리가 전부다.

    한놈만 조진다는 마인드로, 이 한 놈만 쫓아서 다른 건 사냥하지도 못 했다.

    “오호, 미간에 상흔을 보니 단번에 숨통을 끊어놨구나. 크기도 제법 크고.”

    이건 승자의 여유일 뿐이다.

    크기가 크고 단번에 절명시키면 뭐 해.

    고작 한 마리 잡았을 뿐인데.

    “쩝.”

    “하하, 너무 시무룩해하지 말거라. 오늘은 내 운이 좋았던 게다.”

    “잡은 고기들은 어쩔까요?”

    “따라온 몰이꾼과 군사들에게 나눠주고 이만 하산하자꾸나.”

    형님의 말에 하산을 서둘렀다.

    하산하고 나서는 여울이를 찾아갔다.

    코스 1이 형님과의 사냥이었다면 코스 2는 당연히 여울이와의 온천욕이었다.

    내가 굳이 이 먼 곳 까지 왜 왔는데?

    아주 공교롭게도(?) 신배는 어머니랑 있단다.

    이러려고 어머니를 모시고 온 건 아니었는데, 이건 기회다.

    하늘이 주신 기회.

    하늘이 주신 기회를 버릴 수가 없어서 여울이에게 은근슬쩍 같이 탕에 들어가잔 제안을 했다.

    했는데, 여울이가 남사스럽다며 질색팔색을 한다.

    아쉽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보름은 더 있을 생각이니 앞으로도 2주는 넘게 남았다.

    아쉬운대로 탕실에 혼자 들어갔다.

    뜨끈한 아랫목에 몸 지지는 것처럼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피로가 풀리면서 잠도 솔솔온다.

    그래, 다른 게 행복인가?

    이런 게 행복이지.

    지그시 눈을 감으면서 행복감에 젖어있는데 문득 황이가 떠올랐다.

    잘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뭐, 나 같은 암군 기질 다분한 왕과는 다르게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황이니 만큼 잘 하고 있겠지?

    아니, 잘 하고 있을 거다.

    “으어, 시원하다.”

    황이 생각은 접고 온천수 속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여기가 지상낙원이다.

    ***

    진성이 뜨뜻한 온천물에 몸 지지면서 딱 2초 동안만 황이 걱정을 했던 그 시각, 편전.

    편전은 난리가 났다.

    “어··· 일단, 그러니까··· 어······.”

    난리가 난 편전에, 진성이 어련히 잘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 황이는 멘붕 상태였다.

    “속히 교(敎)하여주시옵소서, 저하!”

    일국의 어엿한 세자로서 대리청정을 맡은 황이라지만, 아직 어린 아이에게 결정을 등떠미는 모습을 현대인이 본다면 이건 아동학대요! 라고 외칠 만한 광경이었다.

    물론 허침이라고 해서 결정을 등떠밀고 싶었으랴.

    그만큼 사안이 중대했다.

    “일단, 일단 온양에 사람을 보내 전하께 계(計)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멘붕에 빠진 황이가 기껏 찾은 방법은 진성이었다.

    하지만 아동학대의 주범(?)인 허침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하께서 온양에 내려가시면서 일체의 정사는 이르지 말라 하지 않으셨사옵니까?”

    “하지만 이건 제 선에서 결정하기엔 너무 중차대한 문제가 아닙니까, 영상.”

    지금껏 의젓한 모습만 보여주던 황이는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리는지 손을 달달 떨어댔다.

    일의 발단은 전(前) 영경연사(領經筵事) 정미수가 올린 상언이었다.

    정미수의 상언은 아주 간단했다.

    사육신을 신원(伸冤)하자.

    이게 상언의 요점이었다.

    정미수가 누구던가.

    그 아비인 정종은 역모를 꾀했다가 능지형을 당한 역신이었다.

    물론 세조의 비호로 정미수는 외척이면서도 종친의 대우를 받으면서 자랐지만, 그 핏줄은 결국 역신 정종의 것이었다.

    그런 정종은 사육신과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아니, 누군가에게는 그 이상의 위치일지도 몰랐다.

    노산군을 세조로부터 지키려 노력했고, 노산군을 복위시키려 노력했으며, 끝끝내 군주를 지키지 못 했다는 망연자실에 역모까지 도모했으니까.

    정종을 신원하잔 상언은 아니었지만, 그 의도는 빤할 수 밖에 없었다.

    사육신을 신원하게 되면 정종 역시 재평가 할 수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는 조정이 난리가 나진 않는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하므로 육신의 변고는 뜻밖에 나오게 됐고, 당시 절의를 지킨 육신들을 세조가 주살한 것은 종사를 위한 큰 계책에서 나온 것이나 세조께서 끝까지 상왕인 노산군을 보호하지 못 한 은혜는 어디서 발현한 것이겠습니까? 우리 세조혜장대왕은 하늘이 내리신 성군이긴 하나 선위를 받은 교서를 지금 와서 곱씹어본다면 후세가 의아해 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산군을 끝까지 보호하지 못 하였으니 그것이 세조의 유일한 실정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하청의 운(황하의 물이 맑아지면 성군이 나오게 된다는 고사)을 만나 여러 화란과 갈등을 해결하신 공이 몹시 크니 천명이 감응하고 인심이 감복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런 전하께서 선왕조와 관계된 일이라고 묵혀만 둔다면 어찌 인심을 위로하고 천신(天神)을 감동 시킬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노산군을 추복하여 세조혜장대왕의 실정을 바로잡으소서.」

    사육신의 신원과 함께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하자는 정미수의 상언이었다.

    이 간단하면서도 짧은 상언이 진짜 문제였다.

    사육신은 쉬쉬되긴 해도 그 절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노산군은 다르다.

    노산군을 추복하자면 세조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신 성균관 대사성 이점 아뢰옵나이다.”

    “말씀하세요.”

    “비록 금상전하께서 온행에 거둥하시기 전에 지극한 온정으로 노산군의 묘소를 복구하라 명하셨사오나 추복의 일은 다르옵니다. 이는 경솔히 판단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거니와, 더군다나 미수는 역신 정종의 자식이옵니다. 다른 이가 노산군의 추복을 언급해도 그 의도를 의심할 텐데 미수는 이와 관계된 바가 있으니 더더욱 경솔히 판단 할 문제가 아닌 것이옵니다. 청컨대 금상전하와 상왕전하께 이를 알리시고, 장차 어찌 할지 계하(啓下)를 받는 것이 온당하다 사료되옵니다.”

    “제 생각도 대사성과 같습니다.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아바마마와 숙부 전하께 알리는 게 온당한 듯 합니다.”

    “하옵고 뻔히 노산군의 추복을 언급하게 되면 조정에 분란이 일 걸 알면서도 상언을 올린 미수는 벌하는 것이 후세에 본이 될 듯 하옵니다.”

    황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 문제 역시 숙부 전하께 계하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

    오늘도 실패다.

    뭘 실패 했냐고?

    여울이랑 탕에 같이 들어가는 거, 또 실패하고 말았다.

    옷 벗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옷 입고 들어가는 건데 자꾸 남사스럽다고 한다.

    결국 오늘도 혼자서 탕실에 들어왔다.

    “전하.”

    가뜩이나 연속 4일째 실패라 절로 부아가 치미는데 훼방꾼이 나타났다.

    행궁에서 날 시종하는 곽 내관이었다.

    “왜요.”

    “조정에서 급히 사람이 찾아왔나이다.”

    전쟁 터진 거 아닌 이상 귀찮게 하지 말랬는데··· 후.

    “형님한테 대신 처리좀 부탁드린다고 하세요.”

    “그게, 실은 상왕 전하께 갔사온데 상왕 전하께서 금상 전하께서 처리 함이 온당하다 하시어······.”

    마음대로 쉬지도 못 하는구만.

    “들라하십쇼.”

    잠시 후.

    조정에서 보냈다는 사람이 탕실에 들어섰다.

    “조정에서 무슨 용무로 보냈는가?”

    라고 묻자 조심스레 종이 뭉치를 건넨다.

    “이게 뭔가?”

    “전 영경연사 정미수가 올린 상언이온데 조정에서 경솔히 의논 할 수 없다 하여 전하께 계하를 청했나이다.”

    긁적긁적.

    황이한테 대리청정 맡기면서 전권을 위임 했는데도 경솔히 의논 할 수 없는 문제가 뭘까나.

    얼른 종이 뭉치를 읽어나갔다.

    “아니, 이런 걸로 잘 쉬고 있는 사람을 귀찮게 만들어?”

    내가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고작?

    “···”

    “거, 돌아가서 상언대로 처리하라 이르게. 뭐, 어려운 일도 아니구만. 나가보시게나.”

    “에, 예.”

    전령인지 뭔지를 돌려보내고 다시 몸을 지졌다.

    근데 내일은 여울이 어떻게 꼬셔서 같이 탕에 들어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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