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09화 (309/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09화>

***

“전하, 천안(임금의 눈)이······.”

여기는 편전.

온행이 결정 됐다지만, 아직 처리 할 업무는 남았다.

요 며칠 밤잠까지 설쳐가며 일에 매달렸다.

대신들은 주야로 쉬지 않고 일 하는 날 보고 참으로 성군 같다며 추켜세웠지만, 천만의 콩떡 만만의 인절미다.

일처리를 똑바로 해놓고 가지 않으면 대리 청정을 맡을 세자가 곤란해진다.

아니.

나도 곤란해질지 모른다.

일이 꼬일대로 꼬인다면, 한참 여울이랑 오붓하게 온천욕 즐기는 중에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놀러가서 일 안 하기 위해 오늘도 편전에 나왔다.

왔는데, 김전이 다짜고짜 내 눈을 지적한다.

아무리 지적이 몸에 밴 양반이라지만, 생긴 걸로 지적 한 적은 없었는데······.

빈정이 상해 말이 곱게 나오진 않았다.

“뭐가 말입니까?”

“천안이··· 어찌 천안이! 전하! 속히 어의를 부르소서!”

“내 눈이 뭐요?”

눈살을 찌푸리며 눈덩이를 만졌다. 그러자 이질감이 느껴진다.

“아······.”

난 진짜 바보인가 보다.

날이 너무 좋아서, 후원에서 선글라스 테스트를 좀 해보고 있었는데 그걸 낀 채 그대로 실내에 들어오는 우를 범했다.

“안경의 일종이니 호들갑 떨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경이라면 전하께서 세자 저하께 하사한 그 귀물 말이옵니까?”

“맞습니다.”

“하오나 세자 저하의 그 안경이란 귀물과는 생김새가 다르온데··· 정녕 괜찮으시옵니까?”

계속 불안해하길래 어좌에서 내려와 김전의 앞까지 다가갔다.

“보세요, 안 괜찮아보입니까?”

“···송구하옵니다.”

다시 어좌로 올라가서 늘어지게 기대 앉았다.

“오늘 안건은 뭡니까? 후딱 처리 하십시다.”

말했다시피 놀러갔다가, 한참 여울이랑 오붓하게 온천욕 즐기는 중에 방해 받기 싫어서 주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이 밀려 있어서 어전회의 끝내자마자 강녕전 가서 상소 읽어야 된다.

읽어야 할 상소문이 자그마치 일흔 장이 넘는다.

“중산군(中山君)의 일이 시급한 줄 아뢰옵나이다.”

중산군은 다름 아니라 오키나와의 세자 상유형(尚維衡)이다.

그의 아버지인 의순군은 오키나와로 돌아갔지만 인질인 중산군은 아직 조선에 남아 있었다.

“중산군? 중산군이 왜요?”

“중산군의 나이가 이제 열다섯이온데 아방(조선)의 배움이 익숙하지 않으니 적응에 어려움이 많은 듯 하옵니다.”

“흐음. 계속하세요.”

“중산군은 창졸간에 아비인 의순군과 헤어져 홀로 이역만리 이국의 땅에 남겨졌으니 인지상정으로 헤아려보면 어찌 두려움이 없겠사옵니까? 지금은 오직 전하께서 하사하신 사가에서 지내고 있사온데, 어린 나이에 갇혀 지낸다고 생각하여 마음에 병이 들까 우려 되옵니다.”

하긴.

중산군이 아직 열다섯이긴 해도 어리다.

심지어 아직 상투도 안 틀었다.

장가도 안 갔단 말이다.

게다가 대사헌의 말을 직설로 풀면, 저렇게 갇혀 지내다가 실성하고 그랬다가 누가 보면 어쩌냐?

라는 말이 된다.

실성한 중산군을 명나라 사신이 본다면?

이것도 낭패지.

“일찍이 의순군과 중산군은 왕자의 예로 대하기로 하였으니 특별히 종학(왕실 학교)에 들어 공부 할 수 있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온당한 처사 같사옵니다.”

잠시 고민해보던 김전이 곧 수긍했다.

“그럼 우리 말이 익숙해지는대로 종학에 보내 강론을 받게 하세요.”

“분부 받들겠나이다.”

“자, 다음.”

중산군의 일을 매듭 짓자 마자 다음 안건을 처리했다.

다음 안건은 강원도 영월에서 산사태가 난 일이었다.

비가 내린 뒤의 일반적인 산사태에 가까웠으니, 보통 때 같았으면 인명 피해가 생기지 않은 이상 굳이 어전회의의 안건으로 올라오지도 않았겠지만, 문제는 산사태가 발생한 곳의 위치였다.

“노산군의 묘가?”

“그렇사옵니다.”

“허어.”

나는 탄식했다.

노산군이 누군지 알고 탄식하냐고?

잘 알지.

내가 이래뵈도 전생에 드라마를 여럿 섭렵했었다.

그중에 하나가 노산군이 조연으로 나왔던 《공주의 남자》다.

꼭 드라마가 아니어도, 내가 지금은 이 나라의 왕이었다.

조상도 몰라 볼 리 없잖나.

“전부 다 토사에 쓸려갔다는 말입니까?”

“그런 듯 하옵니다.”

전생에 드라마에서 봤던 어린 노산군의 모습이 아니라, 작은 아버지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힘없이 유배지로 떠난 현실 속 소년의 모습이 자연히 그려졌다.

“어찌 하올까요?”

“어쩌긴요. 노산군의 묘는 잘 추슬러서 봉분을 다시 쌓게 하라 해야지요. 그리고 하는 김에 치제(제사)도 좀 지내주는 게 어떻습니까?”

“치제를 말이옵니까?”

“봉분이 산사태로 훼손 됐으니 찝찝한 마음도 들고··· 그래도 치제라도 한 번 지내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전하께서 노산군의 치제를 언급하신 것은 전하의 어진 덕 때문일 것이라 사료가 되옵니다. 하오나 지금 노산군에게 제사를 지내주게 되면 장차 국가의 화가 될지도 모르오니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말했다시피 내가 노산군을 알고 있는 건 드라마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서 살다보면 여러 풍문도 접하고, 여러 지식도 쌓기 마련이다.

노산군에 관한 일도 그중 하나다.

대사헌의 말처럼 노산군의 제사를 지내주는 건, 딱히 이로운 일은 아니다.

내 증조 할아버지가 그 노산군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니까.

근데 뭐,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봉분 다시 만들어주는 김에 제사라도 지내주고 싶었다.

“제사 한 번 지내준다고 무슨 국가의 화 씩이나 된답니까?”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양 굴었다.

“하오나······.”

“예조판서.”

김봉이 읍을 했다.

“예, 전하.”

“예조판서가 직접 영월에 가서 노산군의 봉분을 복구하십시오. 복구하고 나서는 제사도 좀 지내주시구요.”

난감한 표정의 김봉이 고개를 조아렸고, 김전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 노산군에 제사를 지내주심이 어떤 의미이신지 모르시옵니까?”

“압니다.”

“아시는데 어찌······.”

전생에 드라마를 너무 재밌게 본 기억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불쌍해서 그냥 해주려고 한다 답하려니 너무 없어 보인다.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니 차후 이 일로 왈가왈부하지 마십시오. 어명입니다.”

이것도 왕이 돼서 좋은 점 중 하나다.

불문에 부쳐버리기.

“···예, 전하.”

“자, 그럼 다음 안건.”

노산군의 일은 불문에 부치고 다음 안건들을 처리했다.

이 안건들을 다 처리하고 난 뒤에는 강녕전으로 돌아가 상소문을 읽었고, 상소문을 다 읽은 뒤에는, 각 관사 실무자들의 윤대(보고)를 받았다.

하, 힘들다.

***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다 라는 말이 있다.

장난 삼아 던진 말도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속담의 일종이었다.

물론 이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 있었다.

진성이 무심코 던진 돌에 화들짝 놀란 송씨가 그런 케이스였다.

“뭐라?”

이제 내년이면 일흔을 바라보는 송씨의 하루 일과는 무척이나 단조로웠다.

40년이 넘도록 지켜온 일과기도 했다.

그녀는 하루가 머다하고, 꼭두새벽 일어나 조반도 들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그리고 늘 정업원(淨業院)을 찾아 불공을 드렸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40년이 넘도록 말이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꼭두새벽 일어나 구부정한 몸을 추슬러 정업원에 불공을 드리고 온 송씨는, 시양자(侍養子)이자 시조카인 미수에게 청천벽력에 가까운 소식에 눈을 부릅떴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치제라니?”

“전하께서, 영월 전하(단종)에 대한 치제를 예조판서 김봉으로 하여금 받들게 했다 합니다!”

어안이 벙벙했다.

미수가 영월 전하라 입에 담은 그분은 송씨의 지아비였다.

수십년 전 이별한 지아비.

“그게 참말이냐? 참말인 것이냐?”

“소자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참말입니다.”

참말이라는 미수의 말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억겁 같은 지난 세월이었다.

그녀의 지아비는 잔인무도한 숙부, 세조에게 살해됐다.

지아비께서 그게 억울하고 또 원통해서 이승을 못 떠나실까봐 송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공을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5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50년 동안 그녀의 지아비에게 제사를 지내자는 말이 조정에서 나온 적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말이 나왔단다.

50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오지 않던 말들이, 오늘 드디어 나왔단다.

“혹 금상이 영월 전하를 이용하려 치제를 운운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더냐?”

“그런 것 같진 않았습니다. 단순히 동정이 일어 치제에 대한 분부를 내리신 것 같습니다.”

미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저앉은 송씨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크흐흑.”

한 번 터진 눈물보는 좀처럼 막을 수가 없어보였다.

“크흐흐흑! 전하! 불쌍한 우리 저언하!”

그렇게 송씨가 50년간 참고 참았던 설움을 눈물로 승화시키고 있던 그때.

무심코 던진 돌이 누군가에겐 50년 묵은 한을 푸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진성은······.

***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는 말은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4월 10일.

드디어 디데이가 밝았다.

오직 이 날을 위해 밭 갈던 소처럼 일만 했다.

오직 이 날을 위해서 말이다.

뭐, 어쩌다 보니 스케일이 좀 커지긴 했지만, 모든 채비는 다 끝마친 상태였다.

“영상. 나랑 형님이 없는 사이, 잘 부탁합니다.”

편전.

배웅을 나온 허침 할아버지께 신신당부를 했다.

“염려 놓으시옵소서. 저하를 잘 보필 하겠나이다.”

듣기만 해도 호랑이 기운이 솟구친다.

“알겠습니다. 어련히 잘 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좌상.”

“예, 전하.”

“좌상께서도 영상을 도와서 세자 좀 잘 보필해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이곳 걱정일랑 말고, 편히 온행 다녀오소서.”

이제 조금 마음이 놓인다.

나는 준비해둔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편전을 나섰다.

목적지는 홍례문이었다.

홍례문~광화문 사이의 공터에 대가(大駕)와 여타의 것들이 준비돼 있다.

홍례문에 도착하니 이미 어머니도 와계셨다.

이번 온행에는 어머니도 함께 하시거든.

어머니한테 인사 여쭙고 여울이한테 가봤다.

첫 여행이 설레는지 들뜬 표정이 역력하다.

“자, 이거.”

나도 들떴지만, 그런 나보다 더 들떠 보이는 게 여울이다.

그런 여울이에게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건넸다.

“이게 무엇이어요?”

“여행갈 때 꼭 쓰는 물건입니다. 선글라스라고도 합니다.”

여울이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선글라스를 받았다.

“캄캄한 걸요?”

“그 맛에 쓰는 겁니다. 내 특별히 중전한테 주는 거니까, 남한테 주지 말고 꼭 쓰세요. 알겠지요?”

“알겠습니다.”

들뜬 여울의 모습에 내가 더 흐뭇해질 즈음.

창경궁에서 기거하시던 형님의 어가가 나타났다.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형님과 인사를 나눴다.

형님은 이번 여행이 퍽 기대 되는지, 무복 차림이셨는데 가는 길에 괜찮은 공터나 산이 있으면 사냥을 할 거란다.

하여간 사냥에 죽고 사는 양반이다.

“전하. 출발 하시겠사옵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데, 이번 온행의 호위 총책을 맡은 병조판서 유담년이 다가왔다.

형님께 여쭤보고 어머니께 여쭤봤다.

모두들 괜찮으신다.

“네, 출발하죠.”

드디어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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