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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08화 (30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08화>

    ***

    내막은 형님께 전달됐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 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를 포함한 모든 대신들의 이목이 오직 형님의 입에 집중됐다.

    그리고 말문이 떨어지기만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다.

    “그래?”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던 형님이 이내 시큰둥한 표정으로 반문하신다.

    우리 모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히 놈들을 벌해야겠다 라는 말씀은 다행이 안 하셨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 오랑캐란 족속들은 한시도 방심을 할 수가 없는 종자들이로구나. 어찌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한단 말인가? 쯧쯧.”

    “그래도 금상 전하께서 발빠르게 토벌령을 내리시어 변경을 어지럽힌 적호의 수괴와 그 잔당들을 모조리 소탕 할 수 있었사옵니다. 이제 안정 되었으니 염려 놓으소서.”

    “참말로 안정이 된 것인가?”

    움찔!

    “그렇사옵니다. 도을치가 상경을 하려는 것도 결국 변경이 안정이 됐기 때문인 것이지, 안정이 되지 않았다면 어찌 상경을 했겠나이까?”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다. 우리 아우님이 강단이 있는 군주라 내 참으로 마음이 놓여.”

    “다 형님께 배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좋은 것만 배웠구나. 그래, 그럼 도을치는 어찌할 참이었더냐?”

    “입조를 시켜 관작을 내리고 위무할 생각이었습니다.”

    “위무라··· 좋은 계책이다. 한쪽은 부족 전체가 몰살 당하였으니 이런 소문을 접한 오랑캐들로 하여금 함부로 준동하지 못 하게 할 것이요, 또 한쪽에서는 조정에서 불러들여 위무를 하니 너의 위엄과 자애로움에 적호들이 감화 될 것이다. 참으로 지당한 계책이야.”

    딱히 계략을 생각하고 도을치를 불러들인 건 아니었는데···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흐뭇해 하시는 형님에 나는 얼른 허침 할아버지께 눈치를 드렸다.

    다행히 허침 할아버지는 눈치가 아주 빠르시다.

    “도을치는 어찌 하오리까?”

    나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음. 도을치가 변을 당한 곳이 평안도라 하니 감사(관찰사)에게 특별히 의원을 부려 도을치와 그 일행들을 치료토록 하라 이르고, 몸을 추스르는 대로 입조하라 영을 내리는 것이 안 좋겠습니까?”

    “하오면 그리 이르겠나이다.”

    라고, 허침 할아버지가 말하고 나서 편전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뭐 때문에 편전이 침묵에 잠긴지는 대략 알 거라 믿는다.

    형님 눈치 살피는 침묵이었다.

    아주 다행히 형님은 여진족에 관한 일을 그 이상 캐묻지 않으셨다.

    표정을 보니 여진족은 아예 관심 밖이신 것 같다.

    “후······.”

    그에, 도처에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북방의 일이 이리 매듭 지어졌으니 내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하자면 상진(쇼신)은 대부의 예로서 대우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대사헌은 여전히 봉군(군호를 내림)하였으면 하는가?”

    지금 형님을 거스르면(?) 빈정 상한 형님이 여진족을 족치겠다고 나설지 몰랐다.

    나는 얼른 대사헌에게 눈치를 줬다.

    역시나 김전도 허침 할아버지처럼 눈치 하나는 기똥차게 빠르다.

    “아··· 그것이, 아니옵니다. 신이 깊이 고찰을 해보니 상왕 전하의 말씀도 일리가 있는 듯 하옵니다. 무릇 봉군이라 함은 나라에 티끌 공이라도 있어야 할 수 있는 법인데 상진은 아무런 공이 없으니 그저 대부의 예로서 대하는 것이 온당한 듯 하옵니다.”

    “으음, 나라에 티끌 공을 세웠다.”

    “···?”

    “경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구나. 봉군은 나라에 티끌 공이 있어야 가능한 법인데······.”

    “예. 상진에게는 아무런 공이 없사오니······.”

    “아니지. 아니야. 순순히 나라를 갖다 바친 공을 간과하지 않았는가.”

    “···”

    “이조차 공이라면 공이니 대부의 예로 대할 것이 아니라 경의 말대로 봉군하여 왕자로 대우하는 것이 지당할 듯 싶다. 아우님의 생각은 어떠한가?”

    나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다.

    “형님의 뜻대로 하시죠.”

    “좋다, 그럼 봉군하고 왕자로 대우토록 하자꾸나.“

    “네.”

    상진에 대한 안건이 매듭지어졌지만 오키나와의 안건까지 마무리 된 건 아니었다.

    오키나와는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호족들이 언제 봉기할지 모르는 상태였고, 폭발이라도 한다면 큰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이를 억누를 필요가 있었고, 대신들은 이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상진을 봉군하여 왕자로 대우하되, 이전 탐라국의 일처럼 성주의 관직을 줘서 호족들이 준동하지 못 하게 막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관찰사가 오키나와의 실무를 처리한다면 상진은 얼굴 마담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창칼로 무조건적인 억압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 의견을 채택했다.

    상진의 군호도 논의가 됐는데 형님이 전례에 얽매이지 말고, 나라를 곱게 갖다 바친 공을 높이 사서 의순군(義順君)이라 봉군하자길래, 그러자고 했다.

    의순군 상진에게는 중산국의 이름을 따서 중산 상 씨를 사성했고, 곧이어 성주의 관직도 내려줬다.

    ***

    탁!

    “1점이다.”

    “빗나갈 수 있었는데 아깝게 됐습니다.”

    “하하하! 예끼! 심보를 곱게 써야 하느니라.”

    “축구도 형님께 안 되는데 이 당구마저도 형님께 지면 면이 서겠습니까? 당구만큼은 이겨야죠. 다음 큐는 삑사리(?) 기대하겠습니다.”

    “어림없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큐를 놀리자마자 삑!

    경쾌한 소리와 함께 큐가 빗나갔다.

    형님은 아쉽다는 듯 물러나셨고 나는 큐를 들었다.

    아, 형님께는 달포 전 쯤 당구를 가르쳐드렸다.

    그 아들에 그 아버지(?) 라는 말처럼, 한 번 가르쳐드리자 세자처럼 당구에 푹 빠져서 헤어나올 줄을 모르고 계셨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

    오늘 역시도 어제처럼 점심을 드시자마자 창경궁에서 경복궁까지 찾아오셨다.

    당구 한 게임 하려고.

    “나도 그럼 삑사리 기대하마.”

    “어림없지요.”

    다행히 큐가 빗나가진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1점을 얻었다.

    “에잇!”

    “하하!”

    나는 다음 큐를 준비했다. 기본구다. 깔끔하게 먹을 참이다.

    “그러고 보니 형님.”

    “응?”

    “선위는 언제쯤 할까요?”

    “이제 1년쯤 되지 않았더냐? 한데 벌써 선위?”

    “10년쯤 된 것 같은데요.”

    “아직은 좀 무리가 아니겠더냐? 세자가 너처럼 강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제왕이 되기엔 이르니······.”

    긁적긁적.

    “대리청정이라도 시작해봄은 어떻습니까?”

    “대청을 말이냐?”

    “네.”

    “그리도 왕위가 싫은 것이냐?”

    이거, 좀 뻘쭘하다.

    사실 왕위가 싫다고는 할 수 없다.

    내 말에 사람들 껌뻑 죽지, 똥도 똥이라 안 부르고 매화라고 불러주지, 아무튼 아주 싫은 점만 있는 건 아니다.

    문제는 내 생활이 없다는 점이지.

    취미로 당구도 치곤 하지만, 궐밖 출입이 대원군 시절처럼 자유롭지가 못 하다.

    새장에 갇힌 새 같달까.

    “뭐, 그렇다기 보다는··· 형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흐음, 대청이라··· 하지만 네 보위에 오른지 이제 1년 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대청을 맡기면 말들이 많을 텐데?”

    “명분이 없을 땐 그렇겠죠.”

    “명분? 명분이라도 있단 말이냐?”

    있다마다.

    “더 늦기 전에 가족들 데리고 온행좀 가려구요.”

    “혹 어디가 아픈 것이냐?”

    보통 왕들은 욕창이 나거나 골병 들면 온행을 간다.

    나처럼 막무가내로 가는 건 아니란 말이다.

    근데 난 나고 선왕들은 선왕들이다.

    “아뇨, 중전도 궁궐 생활 답답해 하는 것 같고··· 또, 신배랑도 못 놀아준 지 퍽 오래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겸사겸사 세자한테 대리청정 맡겨보는 기회도 되니 일석이조 아니겠습니까?”

    “뭐, 금상은 네가 아니냐. 네가 한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느냐. 다만······.”

    “말씀하십시오.”

    “그 온행, 나도 데려가면 안 되는 것이냐?”

    어이없어서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왔다.

    “못 데려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같이 가시죠.”

    ***

    여행이란 말은 언제 들어도 참 가슴 설렌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지만, 10년 넘게 집에만 갇혀 지내면 그건 그것대로 개고생이다.

    때로는 밖에 나가서 콧바람도 좀 쐬고 해야 정신 건강도 챙길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고, 대신들 생각은 달랐다.

    놀러 가겠다는 말에 대신들의 반대가 어마무시했다.

    모두가 아주 게거품을 물고 결사 반대를 외쳐댔다.

    온행을 나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중전인 여울이랑 공주인 신배··· 거기다가 상왕 내외까지 같이 간다니 거품 물 만도 하다.

    자칫 불순한 무리가 준동하면 꼼짝없이 당해버리고 마는 형국이니 당연한 반대겠지만, 지금 같은 때에 역모는 일어나봤자 금방 진압되고 말 거다.

    내 입으로 말하기 낯부끄럽지만 저잣거리에서는 태평가가 울려퍼진다.

    한 것도 없는데 태평가라니 민망할 지경이지만, 요점은 백성들이 태평성대라고 부르는 나의 치세(?)에 역모가 일어난다 한들 명분이 없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역모를 일으켜서 뭘 어쩌겠어?

    이런 비논리적인 말들로 따박따박 반박을 해주고, 온행 준비를 서둘렀다.

    온천은 이천으로 갈까, 온양으로 갈까 하다가 온양으로 결정됐다.

    이왕 여행 가는데 가까운 이천보다는, 그나마 좀 더 먼 온양이 여행 가는 기분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온행이 결정되자 나도 나지만, 특히 여울이가 더 신난 것 같았다.

    들어보니 여울이는 일평생 여행 다운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단다.

    22년생을 통틀어 경기권역을 벗어나본 것도 손에 꼽을 정도라니 더 뜻 깊은 여행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온행 준비가 막바지에 다라랐을 즈음.

    희소식 하나가 공야사에서 날아들었다.

    내가 몇 달 전 주문 넣었던 안경이 드디어 완성이 됐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두 가지 종류로 말이다.

    종류가 두 가지나 된다길래 나는 내가 오더 넣은 볼록렌즈를 이용한 안경과, 오목렌즈를 이용한 안경을 공야사 장인들이 만든 줄 알고 당연히 만사 제쳐둔 채 공야사로 달려갔다.

    공야사에는 이미 내가 행차할 거란 소식을 들은 장인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신······.”

    “인사 같은 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안경은 어디있는가?”

    곧이어 공야사 장인이 플레이팅 되듯 금보에 싸인 안경을 가지고 왔다.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왔다.

    진짜로 안경이다.

    물론 현대적인 안경과는 그 느낌인 다소 차이가 나지만, 누가 보더라도 안경임을 알 수 있는 형태였다.

    수정을 깎아 만든 안경알에, 테두리는 뭘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고풍스럽고 다만 안경 다리는 마땅히 대체할 게 없었는지 가느다란 줄에 연결이 된 형태였다.

    “한 번 써봐도 되겠는가?”

    “물론이옵니다.”

    흔쾌히 안경을 건네는 공야사 장인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공손히 안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안경을 쓰자,

    “호오.”

    외양과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안경과는 다르게 다소 뿌연 느낌은 있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돋보기 안경의 느낌이었다.

    ‘대량 생산 할 수만 있으면 이게 다 얼마냐.’

    원래 눈이 침침하다던 황이한테 선물해주려고 제작한 안경이지만, 생각 이상의 퀄리티였다.

    이거라면 노안 때문에 글이 잘 보이지 않는 양반들한테 개당 백석에 팔아도 없어서 못 팔 것 같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여기 사람들은 나이 환갑 먹도록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노안 때문에 눈이 침침해지면, 어떻게든 글자를 읽으려 무진 애를 쓰는데 그런 노인들한테 이 안경을 팔아봐라.

    백석이 아니라 삼백석에 판대도 사갈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재산을 가진 노인들이 많진 않겠지만······.

    “수고했네! 정말 수고 많았어.”

    공야사 장인들을 치하하던 중, 문득 두 종류의 안경을 만들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 한데 두 종류의 안경을 만들었다는 건 무슨 말인가? 하나는 내가 쓰고 있는 이것일 테고. 나머지는······.”

    질문하자마자 예의 공야사 장인이 앞전처럼 플레이팅 되듯 금보에 싸인 안경 하나를 가지고 왔다.

    “이것이옵니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뒤늦게 가져온 안경을 써봤다.

    “백수정이 부족하니, 급한대로 연습을 좀 한답시고 연수정을 깎아 만들게 된 안경이옵니다. 하온데 보시다시피 쓰임이 큰 것 같아 바치게 되었나이다.”

    앞전의 안경은 돋보기 안경이었다.

    반면 연수정을 깎아 만들었다는 이번 안경은······.

    “서, 선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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