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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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 사상자 : 63명(전사 9 중상, 10 )」
「토로다 사상자 : 189명 주살 (전원)
「박도을온(朴都乙溫) 사상자 : 76명 주살 (전원)
「보을거(甫乙居) 사상자 : 143명 주살 (전원)」
「아가무 사상자 : 62명 주살 (전원)
「장사징가 사상자 : 1314명 주살 (전원)」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이제 조선인으로 완전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약간은 현대인의 감성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총 5개 부락의 적호 1784명을 전원 주살 시켰다는 연변 만호 민천동이 올려보낸 별단이었다.
1784명이라니··· 가늠이 잘 안 갔다.
운동장에 전교생을 모아놔도 천명이 될까 말까인데.
물론 예상은 한 일이었다.
나도 명색이 임금이고 대군이던 시절이 있었고, 또 아주 예전에는 북정군 부원수로 참전한 적도 있었으니 대(對) 여진 전략을 모르진 않았다.
다만 장계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주살했다는 내용이 당당히 기재돼 있었다.
노소라면 노약자와 어린 아이도 포함 됐을 터였다.
아무 것도 모를 아이들 말이다.
노약자까지는 예상했지만 어린 아이들까진 예상의 범주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충격이 큰데······.
“승전을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경하드리옵니다!”
찝찝한 기분을 느끼는 건 나만인 모양이다.
대신들은 싱글벙글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뭔가 말로 형용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지만,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딱히 죄책감을 가질 만한 일도 아니었다.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이 시대에 여진족을 토벌한다는 건 전원 사살이라는 전제를 깔고서 진행하는 작전이었다.
거창한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느껴서도 안 된다.
이건 그저 아직 버리지 못 한, 버려지지 않은 현대인의 습성일 뿐이다.
게다가,
「···하므로 장사징가가 친히 우리 백성을 데리고 나타났는데 그 몰골이 마치 귀신과 같으니 적호의 소굴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알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나타나서는 신을 보자마자 오열하며, ‘아니 올 줄 알았습니다’ 말하고 김공석이 ‘주상 전하께서 보내셨다’ 하니 모두들 ‘드디어 살았다’ 대성 통곡을 했습니다.」
이건 민천동이 올린 장계의 일부분이다.
결국 나는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은 셈이다.
어떻게 보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장점이 될지 단점이 될지 모를 현대인의 습성을 잃고, 아무 죄없는 우리 백성을 구했다.
민천동이 구한 백성들 중에는 아직 말도 제대로 트지 못 한 어린 아이도 있었다.
결국 치환이다.
1784명의 목숨과, 18명의 목숨을 맞바꿨다.
현대인 이현호는 사람 목숨에 가치가 어딨겠냐 배웠지만 조선인 이역은 사람 목숨에도 가치가 있다라고 배웠다.
조선인 이역에게는 18명의 목숨이 더 가치 있는 목숨이었다.
그거면 됐다.
“과인은 한 게 없습니다. 수고한 민천동과 북방군들에게는 논공하여 마땅한 포상을 할 수 있도록 정부(의정부)에서 논의해주시고, 아군의 전사자가 9명이라 하니 이들의 장례도 전례에 따라 후하게 치르도록 하며, 남은 유족들은 생계에 어려움이 없도록 보훈청에서 각별히 신경쓰라 하십시오.”
“그리 전하겠나이다.”
“그리고 적호들의 기세가 이번 토벌로 많이 꺾였겠지요?”
여진족도 결국은 사람이다.
이웃한 부족이 대대적인 토벌을 당하면 당연히 두려움의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형님의 1차 북정으로 기세가 완전 꺾이고,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기세가 이번에 확 꺾였을 터였다.
“이를 말이겠사옵니까?”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적호들의 기세를 더 꺾어 놓도록 하지요.”
“하교하소서.”
“내 옛날의 일에 해박하진 않습니다만, 선왕들께서는··· 특히 세종대왕께서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나서 거짓 행동으로 놈들을 동요시키고 감히 발호하지 못 하도록 기세를 꺾었다고 하니 우리도 그리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북방의 각 진보와 번호의 부락에 연변진의 승전을 전하도록 하되, 이 승전에 대한 일은 적호들 사이에서 자연히 전파 되어야 할 것이니 최대한 가감없이 전하도록 하라 하십시오. 이 허세가 잘 먹혀든다면 앞으로 5년간 놈들이 경거망동 못 할 겁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또 민천동의 장계를 보면 도을치와 십수개의 순호들이 입조를 청했다 하는데 이는 어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도을치는 이미 전하께서 상경하란 명을 내렸기 때문에 그 의도에 불순함이 없다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자들은 모두 적호와 번호의 경계인 순호로 있으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입조를 청한 아주 교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옵니다. 지금 받아들이면 허세가 통하지 않을 수 있으니 모두 반려하심이 어떻겠나이까?”
김전을 포함한 대신들은 도을치만 상경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반려하라는 의견에 동의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조선인과 현대인으로서의 모순을 한껏 느끼면서 조회에 임하고 있던 그때였다.
“전하!”
상선 대감이 허둥지둥 뛰쳐 들어왔다.
옛날 같았으면 이런 상선 대감의 행동을 대신들이 나무랐겠지만, 이제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상선 대감도 말이 내관이지, 거의 개국 공신급의 영향력을 갖고 계시거든.
“무슨 일이십니까?”
“망측한 일이오나, 전곶(뚝섬)에서 괴변이 발생했다 하옵니다!”
라는 상선대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우르르쾅쾅! 천둥이 쳤다.
아침에는 해가 쨍쨍하다 못 해 뜨겁기까지 하더니, 비라도 쏟아질 모양이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뇌성벽력이 어디에 떨어지건, 또 무슨 조화를 부리면서 떨어지건 자연의 모습일 뿐이고 괴변이 아니라······.”
“뇌성벽력 때문이 아니옵니다.”
“아니라구요? 아니면 뭔데요?”
“전곶에서 인면조도 아니고, 그렇다고 봉황도 아니고, 붕(전설의 새)도 아닌 것이 하늘에 떠있더니 청숫골(지금의 청담동)로 휙! 날아가다가 갑자기 추락을 했다 하옵니다! 이를 본 조군(조졸)들이 괴변이라 여기고 황급히 아뢴 듯 하옵니다!”
이 말을 종합하자면, 그러니까.
뚝섬에서 정체불명의 UFO가 하늘에 떠있더니 강 너머로 쏜살같이 날아갔고, 잘 날아가다가 갑자기 추락을 했다는 말이 된다.
‘그럼 정말 UFO?’
순간, TV에도 종종 소개 되곤 했던 조선시대 UFO 사건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별에서 온 그대라는 TV 드라마를 하도 재밌게 봐서 찾아보다가, 드라마의 모티프를 조선시대 UFO 목격담에서 찾았다는 말이 신기해서 검색을 한 적이 있었는데 묘사가 딱 지금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
“청숫골에 추락한 UFO가 굉음을 냈다던가, 무슨 우레 소리를 냈다던가··· 아! 추락하면서 무슨 연기같은 걸 내뿜지는 않았다고 합니까?”
어쩌면 나는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15분 전까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으면서 UFO에 흥분하고 있다니······.
근데 흥분이 안 될 수가 없다.
신기하잖아, UFO.
“에? 유, 유··· 유에프···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그러니까. 그 추락한 물체가!”
아니다, 이럴 게 아니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랬는데 직접 가서 보면 되는 거잖아?
여기 사람들이 하도 자연의 조화도 괴변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한지라,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하긴 하지만··· 진짜 UFO일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진짜면?
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외계인과 조우한 왕으로 기록되겠지.
“오늘 조회는 이만 파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상선께서는 내 청숫골에 갈 테니 속히 채비하시구요.”
“하오나 전하. 청숫골은 강 너머에 있는 곳으로 경기도에 속한 곳이옵니다. 어찌 지금과 같은 때에 강 너머까지 거둥을 하시려 하시옵니까?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왜 안 나오나 했다, 김전.
거짓말 안 하고, 진짜로 이제는 이런 걸로 반대 안 하면 섭섭하기 까지 하다니까?
왜 반대 안 하지?
내가 뭐 잘못했나?
밉보였나?
하는 생각들 때문에.
“아니, 그럼 세자한테 양위하고 상왕돼서 편하게 가면 되겠네요.”
“···”
물론 생각만 그렇다는 거고.
이 말 한 마디면 만사오케이다.
양위의 양자가 나오면 대신들은 일단 부복부터 하고 본다.
양위의 양자가 나오게 만든 것도 일단은 불충의 일종이거든.
“이제 서로 알 만큼 알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모두들 편히 일보세요, 같이 가실 분들은 따라오시고.”
***
“형님 꼭 뚝섬까지 오셔야했소? 전하께서 행차하시거나 사열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너가 날 어찌 보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이래뵈도 스승님의 수제자다.”
“반 교수님은?”
경덕은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관짝 알아보러 간다며 간 석평이 보였다.
“송애, 저 친구는 수제자까진 아니지. 내가 진정한 수제자고. 전하께서 행차하셔도 씹선비처럼 살 순 없어서 시험하러 나왔다고 하면 오케이일 거다.”
“근데 형님.”
“왜?”
“오케이가 뭔데 자꾸 오케이, 오케이 거리시오? 송도에 있을 땐 안 그랬잖아?”
“네가 아직 그래서 씹선비라는 것이다. 오케이는 씹선비가 아닌 사람들만 쓰는 일종의 암호다. 만사형통의 다른 말이기도 하지. 장차 쓰임이 있을 테니 배워두거라.”
“아. 알겠소.”
아우에게 큰 가르침을 사사했다는 기쁨도 잠시.
실험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는 긴장해야 할 때 였다.
만반의 준비는 갖췄다.
열기구를 만드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라고 닷새만에 뚝딱 만들어 냈다.
주상 전하께서 처음 열기구를 제작하셨을 때, 작업에는 경덕 자신만 참여한 게 아니었다.
잠저의 행랑식구들도 참여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지금 경덕은 이 이 잠저의 집사로 있었다.
그때 작업에 참여했던 행랑식구들의 도움을 받기 어렵지 않단 말이었다.
열기구는 준비가 됐고, 혹시 모를 화재를 대비해 열기구의 바구니에는 모래포대와 물을 담은 바가지들도 준비해놨다.
“준비됐느냐?”
“물론!”
“그럼 타거라.”
“엥? 형님은?”
“내 찬찬히 생각을 해보니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그나마 네가 죽는 것이 덜 불효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죽는다는 전제를 깔고 가시오?”
“위험천만한 일이지 않느냐. 최악의 경우도 상정을 해야지. 한데 이 최악의 경우에 장남인 내가 죽는다면 부모님께 이만한 불효가 어디 있느냐? 차남인 네가 타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듯 싶다, 숭덕아.”
“뭔 개똥같은 소리야! 같이 타기로 했잖소!”
“난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퍽이나! 형님 안 타면 나도 안 타오!”
“이놈이 물귀신도 아니고 왜 죽을 자리 나까지 끌어 들여?”
“안 타!”
설마 숭덕이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난감하다.
하지만 기껏 만든 열기구였고, 경덕도 열기구의 비행을 그 누구보다 바란 사람중 하나였다.
이대로 물러나긴 아쉬운 일이다.
이럴 때를 대비한 차선책을 써야 될 듯 싶었다.
“덕산아.”
“네, 선생님.”
덕산이 코를 파며 느긋하게 경덕에게 다가왔다.
그런 덕산에, 경덕은 소매를 뒤졌다. 그 손에 종이 하나가 달려나왔다.
“이게 뭡니까요?”
“유언장.”
“유언장이라굽쇼?”
“내가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르게 되면 꼭 송도에 계신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 전해드리거라. 이것도.”
“이건 뭡니까?”
“이건 스승님께 드리는 서신. 잘못되면 전해 드려라.”
후비적, 후비적.
“알겠습니다요.”
“꼴깝 떠는구만, 꼴깝 떨어. 타기나 하시오!”
경덕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운 걸음을 옮겨 열기구의 바구니에 탑승했다.
곧이어 연소장치인 화로에 불이 붙여졌고, 기낭의 공기가 가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열기구가 떠올랐다.
물론 부유 상태였다.
비행을 하려면 바구니와 연결한 밧줄을 잘라내야 한다.
“죽을 준비 됐지?”
“자꾸 재수 없는 소리 할 거요!”
“됐나 보네. 덕산아! 잘라라!”
“예!”
잠시 후.
덕산이 한치 망설임 없이 밧줄을 잘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