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303화 (303/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03화>

***

2월이라 날이 추운데도 불구하고 옷을 겹겹이 껴입은 채, 대청마루에 벌러덩 드러 누워있던 경덕은 대문에서 인기척이 돌려오자 까닥, 고개를 돌렸다.

무료하기 짝이 없다는 듯 누워있다가 들린 인기척에 약간은 들뜬 모습이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니, 뭐야. 송애네.”

“왜 실망을 하고 그러나?”

“난 또 진월(眞月)인가 했지. 에이, 좋다 말았네.”

“진월이라면 저번 적에 그 기생 아이?”

경덕은 석평의 질문에 대꾸는 않고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응?”

“왜 한 번을 안 올까? 이쯤하면 찾아올 때도 됐는데.”

“누가?”

“진월이 말일세, 진월이. 분명 그때 나한테 푹 빠진 것 같았었는데··· 자네도 보지 않았나. 내 품에 쏙 안기면서, 어? 봤지, 자네도?”

자뻑도 이만하면 수준급이었다.

“기생도 기생 나름이지. 이패기생(二牌妓生)한테 무슨 정조를 바라고 그러나?”

“지금 내 진월이를 욕보이는 겐가!”

“아니, 이패기생을 일패기생이라고 할 순 없잖나.”

“뭐, 그렇긴 하지만··· 크흠.”

“그리고 기생 좀 그만 가까이 하게. 장가도 안 가서 상투도 안 튼 자가 무슨 여색을 그리 밝힌단 말인가?”

“자네도 나 때는 기방 전전했다며?”

“아니, 뭐 그렇긴 하지만··· 나는 자네 만큼은 아니었어.”

“그렇다고 치지.”

“정말이라니까?”

“그렇다고 친대도 그러는군. 그보다 숭덕이 놈은 어딨나? 오늘은 왜 같이 안 왔어?”

숭덕은 경덕의 친동생이었다.

경덕과는 3살 터울로 올해 열일곱이었는데 개성 부모님 댁에 얹혀 살다가 올해 1월에 진성대학에 입학한다고 상경했다.

“자네 동생 반만 좀 닮게, 반만.”

“왜, 또?”

“숭덕이 녀석이 얼마나 열심인 줄 아는가? 오늘도 밤늦게까지 공부하겠다고 남겠다지 뭔가.”

경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긴, 내가 다 보고 왔는데.”

석평은 작년 말부터 교원 자격으로 대학에 출강하고 있었다.

진성대학의 설립자인 금상의 교육철학(?)을 몸소 배운 수제자이기도 하고, 다방면에 지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경덕에게도 제의가 들어오긴 했었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인 경덕은 마다했다.

“그럴 리 없대도?”

의아한 경덕이었다.

숭덕이 놈이 차라리 밤늦게 기방을 전전하면 전전했지, 경덕이 아는 숭덕이 놈은 절대 밤늦게까지 공부할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네 동생한테 관심좀 갖게나. 누가 보면 남남인 줄 알겠어. 숭덕이가 요새 얼마나 열심인데?”

“그 녀석이?”

“그래. 오죽 열심히면 별명이 벌레겠나, 벌레.”

“벌레?”

“공부 벌레.”

경덕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개성에서의 녀석 별명은 천방지축, 천덕꾸러기였다.

그런 녀석이 공부 벌레라 불린다니······.

“놈이 뭔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는데?”

“가서 봐보게.”

진월이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숭덕이 놈 공부하는 거 봐서 뭐하겠나 하는 생각에 다시 자리에 드러 누우려던 경덕은 문득 엊그제 부모님이 보내오신 편지가 떠올랐다.

타지살이 고생 많겠지만 특히 숭덕이 놈은 천방지축이니 각별히 신경쓰라는 신신당부가 담긴 편지였다.

안 그래도 불효막심한 자식인데, 동생놈 신경도 못 쓰면 그만한 불효가 없을 터였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니까.”

투덜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덕이었다.

***

재작년 개교한 진성대학은 올해로 개교 3년차를 맞고 있었다.

그런 진성대학은 첫 모집 때부터 치열한 경쟁률을 자랑했었다.

비록 살림은 궁핍하지만 교육열은 높은 집안에서 못 보내서 안달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1기생들의 경쟁률은 6:1 수준에 그쳤지만 해가 거듭할수록 경쟁률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2기생들의 경쟁률은 32:1이었고, 올해 3년차가 되면서 3기생들의 경쟁률은 200:1에 육박했다.

2기생들까지는 한양~경기권에서만 모집을 했지만 3기생들 부터는 모집 제한을 두지 않고 그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 시켰기 때문인데, 거기에 더해 경쟁대학(?)이었던 성균관은 폐교가 됐고 진성대학의 설립자인 진성대원군은 금상이 돼버렸다.

문벌이 높은 집안에서는 인맥을 위해.

한미한 집안에서는 입신양명을 위해.

신분은 낮더라도 땅을 여러 마지기 놀리고 있는 부농 집안에서는 명예를 위해.

심지어 사노로서 주인댁에 기거하는 노비들은 나름의 풍운을 안고서 지원하다 보니 경쟁률이 수백대 일에 육박 할 수 밖에 없었다.

1기 모집 때만 해도 상것들과 공부 할 순 없다며 양반 자제들은 응시를 꺼렸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려 임금이 경영하고 있는 대학이었고, 임금이 기대하는 대학이었다.

게다가 세자도 상시는 아니지만 달에 3~4번씩은 진성대학에서 서연을 받고 있으니 진성대학에 대한 사대부의 인식도 바뀔 수 밖에 없었다.

개성 살던 숭덕도 마찬가지였다.

숭덕은 재작년까지만 해도 진성대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형인 경덕이 금상이 된 진성대원군의 수제자였으므로, 간간이 진성대학에 대한 이야기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듣긴 했지만 당시 숭덕은 진성대원군이 괴상한 괴벽스런 취미가 있구나···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런 진성대학에 숭덕이 관심을 갖게 된 건 작년이었다.

작년은 팔도가 들썩거렸다.

열기구란 기구를 금상이 만들어서 하늘에 띄웠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하늘을 난다.

이 주제는 고금을 막론하고 식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였다.

숭덕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릴 때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새를 흉내낸 적이 있었는데, 10살 때 하늘을 나는 제비를 보면서, 저 제비처럼 날갯짓을 계속하다보면 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높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었고, 남들은 다 입신양명하여 가문을 빚내겠다는 생각을 하는 13살 때에는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을까 도학에 뜻을 두고 공부한 적도 있었다.

물론 모두 허사였다.

하늘을 난다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숭덕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바로 작년.

사람이 하늘을 날았다.

정확히 말하면 공중에 부유하는 물체에 사람이 탑승했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지만, 어쨌든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 된 셈이었다.

처음 소식을 들은 숭덕은 믿지 않았다.

도학을 공부하다 보면, 온갖 사기꾼과 약팔이들이 꼬인다.

열기구에 대한 소식도 그것과 같다 생각했었다.

한데 아니었다.

그 열기구를 제작하는 데 그의 형인 경덕이 참여했고, 실제로 경덕에게 물어본 결과 사실이란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온몸에 전율이 이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니!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사람이 하늘을 나는 원리가 학문의 일종이라는 형의 답변이었다.

숭덕은 대체 그 학문이 뭐냐 물었고, 형인 경덕은 진성학(晉城學)이라는 답서를 보내왔다. 대체 진성학이 뭔가 해서 또 편지를 보내보니, 진성대원군의 학문이란다.

말인가 방구인가 싶었지만 숭덕은 하늘을 나는 원리를 가르치는 그 진성학이란 학문을 배워보고 싶었다.

입에 발린 소리나 해대는 학문 말고, 하늘을 날게 하고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학문을 말이다.

딱히 깊게 고민을 하지도 않았다.

마음을 정한 순간, 부모님께 인사 올리고 곧바로 상경했다.

그리고 다행히 진성대학에 입학 할 수 있었고, 진성대학에서의 생활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기존에 알던 상식이 비상식이 되고, 기존에 알던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놀라움의 연속.

하지만 이중에서도 숭덕이 특히나 관심 보이는 수업은 천문학이었다.

천문학 수업은, 숭덕을 진성대학으로 이끈 열기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과목이니까.

물론 학교 수업 중에 열기구를 실험해보는 수업이 3학년 때 있다고 들었지만, 지금 숭덕은 1학년이다.

조기진급과 졸업이란 제도가 있지만 그보다 더 빨리 실험을 해보고 싶은 숭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 밖에 답이 없었다.

원리를 깨우쳐야 했고, 열기구와 바람의 상관관계도 따져 볼 수 있어야 했다.

제반 지식이 없다면 열기구를 함부로 띄울 수가 없다.

아니, 지금 숭례문에 올라가 있는 열기구처럼 띄울 수는 있겠지만 숭덕은 부유 정도에 그칠 생각이 없었다.

직접 열기구를 조종하면서 하늘을 날아보고 싶었다.

이게 바로 숭덕이 밤늦게까지 남아 공부하는 이유기도 했다.

물론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한다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체력적으로도 힘에 부치고, 무엇보다 개성과 달리 한양은 별천지다.

놀거리와 먹거리가 많다보니 이 유혹을 참는 것도 여간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덕이 이를 인내 할 수 있었던 건······.

“내 꼭 날아보이마.”

진성대학에는 전시 된 열기구가 있었다.

숭례문의 그것처럼 부유하고 있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숭덕은 늘 힘들 때마다 이 전시 된 열기구를 보면서 각오를 다지곤 했다.

조선 최초, 아니 온천하의 최초로 열기구를 조종하고 하늘을 난다.

이름을 떨치는 건 나중 문제고, 오직 하늘을 날아본다.

새처럼 바람을 가르고, 창공에 두둥실 떠올라 산천을 내려다본다.

숭덕은 오직 이 일념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아마, 이변이 없었다면 오늘 역시 전시 된 열기구로 각오를 다지곤 강의실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 했을 터였다.

“여기 있었냐? 한참을 찾았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숭덕은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천문학과 보건 수업을 맡아 하고 있는 반 교수님이 보였고, 반 교수님 옆으로는 그의 형이 보였다.

석평에게 예를 갖춘 숭덕은, 경덕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이시오, 형님이?”

“우리 아우님이 죽을 때가 됐다길래 걱정돼서 와봤지.”

“죽을 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돼서 그런 거라는데, 우리 아우님이 안 하던 공부를 다 한다니 죽을 때가 아니면 뭐겠느냐.”

경덕이 낄낄거리자, 숭덕은 눈살을 찌푸렸다.

“공부한다는 아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훼방 놓으러 왔소?”

“아니, 송애 이 친구가 말하길 네가 밤늦게까지 남아 공부한다는데 도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옛날에 송도(개성)에서는 책거리(졸업) 다운 책거리도 못 해보지 않았느냐.”

“송도 때랑은 다르다니까? 자, 보시오. 형님도 눈이 있으니 이 열기구가 보일 거 아니오?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게 만드는 도구인데 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오? 이 대단한 도구를 두고도 호승심 같은 게 안 생기면 그게 식자인가? 천치지.”

“흠.”

경덕은 새삼 열기구를 바라봤다.

‘하긴.’

아우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처음 열기구를 제작하면서 반신반의하던 감정이, 정말 하늘에 두둥실 떠오르면서 환희로 바뀌었던 걸 경덕도 느낀 적이 있었으니까.

평소 송도에서 하늘을 날려면 어떡해야 되냐는 개떡같은 질문을 자주 해댔던 아우님이니 만큼 특히 더 관심을 보일 만한 물건이다.

애당초 상경을 한 이유도 저 열기구 때문이기도 하고.

“뭐, 열심히 하니 보기는 좋구만. 그럼 열심히 하거라. 이 형은 이만 가보마.”

평생 공부와는 담 쌓고 살던 아우놈이 자진해서 공부하는 게 반신반의했지만, 직접 눈으로 봤다.

그 이상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열심히 하란 말 외에 뭐 더 해줄 말이 있을까.

그렇게 경덕이 걸음을 돌리려던 그때.

“혀, 형님!”

“응?”

“근데 왜 형님은 이 열기구에 시큰둥하시오? 처음에는 아주 경천동지의 대사건이라면서 펄쩍펄쩍 뛰시지 않으셨소.”

“신기한 것도 자주 보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니 진월이도 자주 보다보면 별 감흥이 없으려나. 그럼 안 되는데······.”

“아니, 아우가 진지하게 말하는데 웬 계집 얘기요?”

“아, 계속하거라.”

“아무튼, 형님도 끝까지 다 본 게 아니잖소?”

“뭘 다 본 게 아니냐. 네 앞에 있는 건 풍등이더냐?”

“아니, 보기만 하면 뭘 하겠소?”

“타보기도 했다니까?”

“날아보진 못 했잖소.”

긁적긁적.

“뭐, 그렇긴 한데··· 주상 전하께서 위험하시다 하셔서 그 이상 실험을 금하신 걸 낸들 어쩌냐?”

아쉽다는 어조에 숭덕은 후다닥 뛰어와 경덕의 손을 맞잡았다.

“형님. 같이 해보십시다.”

“이, 이 녀석이 징그럽게··· 이놈아 뭘!”

“같이 날아 보자니까?”

“주상 전하께서 금하셨대도.”

“아니, 주상 전하께서 무구한 생명이 다칠까봐 금하신 거지 자원해서 하는 실험까지 금하신 거겠소?”

“뭐, 그렇긴 하다만.”

“진취적이지 못 한 사고를 하면 씹선비라면서? 이런 거 백날 세워두면 뭐하겠소? 실생활에 적용을 하려고 해야지. 생각해보시오. 바람 잘 만나서 이거 타고 한양에서 충청도까지 몇시진 안에 간다고 생각을 해보란 말이오. 이 얼마나 편리한 물건이요?”

“음.”

묘하게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까 진월이라고 했나? 형님이 만나는 계집인가 본데.”

“형수님한테 계집이라니.”

“거, 좌우지간!”

“···”

“형님이 딱 이 열기구로 하늘을 날아보시구려. 진월이란 계집 아이가 형님을 어찌 보겠소?”

“진월이가?”

“그래! 아니, 진월이 뿐인가? 조선의 여인이란 여인은 다 형님 품에 안기려고 들 걸?”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경덕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럼 해야지!”

“하하, 잘 생각했소.”

“근데 실험하다가 죽으면 개죽음 아니냐?”

“인명이 재천이란 말도 다 허사요. 형님 명줄하고 내 명줄이 얼마나 질긴데 그딴 실험으로 죽겠소?”

“음. 일리가 있구만.”

“그럼 약조했소?”

경덕은 고개를 끄덕거렸고, 두 바보 형제에 석평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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