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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02화 (30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02화>

    ***

    이상할 거다.

    안경광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 일개 문예창작학도가 수정을 이용한 안경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아주 간단한 이치다.

    초등과정의 「체육」 과목을 예로 들어보자.

    체육이란 수업에는 농구와 축구가 포함된다.

    이 체육이란 수업 하나에 여러 구기종목과 스포츠를 배우는 셈이다.

    문예창작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단순히 시와 소설을 잘 쓰는 법만 배우지 않는다.

    문학사도 함께 배운다.

    현대문학을 가장 비중있게 배우지만, 어쨌건 고전~근대문학의 역사를 읊을 수 있을 만큼은 배운다는 말이었다.

    수정안경은 이 고전문학을 공부하다가 알게됐다.

    수업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기껏해야 1~200년 됐을 거라 생각한 안경의 역사가 그 이상 됐다는 게 신기해서 좀 알아봤었다.

    물론 잊고 있었던 수정안경에 대한 기억이었지만 사람의 기억력이란 원래 특정 키워드가 입력되면 떠오른다.

    나는 황이의 눈이 침침하다는 키워드로 잊고 있었던 수정안경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다행히 수정을 공급하는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경주에 내려간 까불이, 과연 소문대로 경주에 옥돌(대리석)과 수정이 채취됐는데 다음달 말이면 본격적인 채취에 나설 수 있을 것 같다는 서계를 보내왔으니까.

    아, 물론 황이 안경 하나 만들어주는데 수정이 무슨 몇 백개씩 소요 되는 건 아니다.

    애당초 내가 안경을 한 두 개만 만들 셈이었다면 굳이 까불을 불러다가 매끄러운 수정이 생산되는 산지가 어딨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겠지.

    황이가 입력해준(?) 키워드 덕에 안경이 떠올랐고, 안경을 떠올린 나는 이걸 하나의 상품으로 연결시켰다.

    회색 시멘트 벽돌 사이에 갇힌 현대인들만 시력이 안 좋은 건 아니다.

    여기도 시력이 안 좋은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특히 책을 자주 보는 사람들일수록 나이가 먹으면 노화와 함께 자연스레 눈이 침침하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 팔면 얼마나 돈이 되겠어?

    연필이나 비누처럼, 안경을 소비하는 사람은 세계 공통이다.

    중국이나 일본 사람이라고 해서 눈이 안 침침 할 리는 없을 테니까.

    국내에서 판매하다가 상황 봐서 일본이나 중국에 수출해도 좋을 거다.

    게다가 볼록렌즈를 이용한 안경 제작은 큰 기술을 요하지도 않는다.

    물론 일평생 세공(細工)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일반인에게 수정 하나 쥐어주고, 안경 만들어봐라하면 당연히 만들지 못 하겠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자, 그러니까 세공으로 밥 빌어먹고 사는 기술자들에게는 대단한 기술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매끄러운 상등품의 수정 원석을 세공하듯 가공하면 되는 일이니까.

    물론 볼록렌즈의 두께를 일정하게 세공 할 수 있냐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수정 몇 개 날려먹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얼마 후.

    상등품의 수정을 공수한 나는 곧바로 공야사(攻冶司) 장인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돋보기 안경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막무가내로 볼록렌즈를 만드는 것보다는 수박 겉핥기식 지식이라도 알고서 만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말이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당구공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공야사 장인들이라서, 몇 번의 시행착오만 겪으면 쓸만한 볼록렌즈를 만들어낼 거라 생각했는데 문과충의 흔한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날려먹은 수정이 벌써 12개다.

    그나마 경주에 내려간 까불이 수정 채취에 성공했다는 낭보를 보내오지 않았다면 공급 부족으로 안경 제작이 중단 될 뻔 했다.

    까불의 말로는 늦은 봄~초여름 안에는 본격적으로 채취에 나설 수 있을 거라는데, 그전에 공야사 장인들이 볼록렌즈를 만들지 못 하면 아무래도 명나라에 기술자를 초빙하던가 해야 될 것 같다.

    지부사의 말로는 황제가 조선에 호감을 갖고 있다 하니 이 정돈 별 탈 없이 들어주겠지.

    뭐, 어쨌든 이 정도면 문제 해결이다.

    무책임한 말 같을지 몰라도 이 이상 해결할 건덕지는 없다.

    내가 아무리 왕이래도 하루 온종일 수정안경에 골몰할 시간적 여유 따윈 없거든.

    “그럼 사상자는요?”

    여긴 편전이다.

    늘 말하지만 나랏일이란 게 한 번 뭘 수습하면 또 다른 사고가 터져서 도저히 쉴래야 쉴 수 없는 구조다.

    지금도 사고가 하나 터져버렸다.

    이번에 터진 사고는 약간 민감했다. 북쪽에서 터진 사고였는데, 형님의 북벌 감행 이후 첫 대형 사고기도 했다.

    연변보 알지들?

    연변보는 그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보에서 진으로 승격돼 만호가 파견 된 게 바로 재작년의 일이었다.

    이제는 어엿한 군사 요충지의 하나로 발전한 셈인데 이 연변진에 이주한 백성들이 이미 개척한 지역 외에 화전을 시도했다가 여진부족민들과 충돌이 발생한 사건이었다.

    “연변진 만호 김공석에 의하면 사상자가 모두 여섯인데 실종자는 서른에 육박한다 하옵니다.”

    “실종자는 모두 끌려갔을 테구요?”

    “아마 그럴 것이옵니다.”

    “어느 부족의 소행입니까?”

    대답은 이계동을 대신해 신임 병조판서가 된 유담년(柳聃年)이 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연변진은 기존에 여진족들이 집거하던 곳이었사옵니다. 상왕 전하께서 북정을 감행하면서 이 오랑캐들이 흩어진 것인데, 흩어지기 전에는 장사징가(蔣舍澄可)가 추장으로 있는 파인(파저강 유역의 야인)의 별종들이었는데 그 이후에 북벌을 감행하면서 장사징가의 족속들이 모조리 북쪽으로 달아나게 되어 공백이 생기니 오도리(건주좌위의 종족)의 별종 도을치(都乙赤)가 부족민 오백을 이끌고 정착하여 터전을 일구게 되었사옵니다. 다만 도을치는 번호(조선에 순종적인 야인)로서 순종을 약조하였으니, 이 약조로 하여금 장사징가에게 화를 입지 않고 있는 것이니 도을치의 소행은 아닐 것이옵고······.”

    “아니, 그래서 누구의 소행 같다는 겁니까?”

    “개인적인 추측이오나 장사징가의 소행이 아닐는지 의심이 되옵니다.”

    “장사징가?”

    “예. 말씀드렸다시피 장사징가는 선대부터 대대로 파저강에서 터전을 일구었사옵니다. 장사징가의 별종 부족들이 점차 남하하면서 연변에 까지 들어와 살게 되었사옵고 북정을 감행하면서 이들이 싹 달아났는데, 장사징가로서는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옵니다. 거기에 더해서 도을치가 아조의 비호를 입고 그 일대에 정착하게 됐으니 장사징가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럼 왜 도을치가 있는 족속을 괴롭힌 게 아니라, 우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 것 같습니까?”

    합리적인 의심이다.

    장사징가의 부족민들은 형님의 북정으로 살던 터전을 버리고 북상했다.

    그 빈자리를 도을치와 그 부족민들이 메꾸게 되었고, 장사징가의 부족보다 세가 현저히 달리는 도을치는 우리 조정에 입조하면서 장사징가의 위협으로부터 부족을 보호하고 있었다.

    장사징가 입장에서는 강대국(?)인 우리 백성들과 군사들을 살상시키기 보다, 눈엣가시 같은 도을치 부족을 괴롭혔어야 상식적으로 맞는 얘기가 된다.

    “그것까진 잘 모르겠사오나 아마 이이제이의 책을 쓴 게 아닐는지요?”

    “이이제이?”

    “연변진과 맞닿은 여진 부족이 도을치의 족속들이니, 연변진의 백성이 해를 입는다면 가장 먼저 의심 받는 부족 역시 도을치의 족속들이옵니다. 이점을 염두에 둔 게 아니었을지요.”

    “얕은 수를 썼다? 흠.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대신들에게 의견을 구하자, 다른 분들도 대체로 동의하는 모습들이었다.

    이제 남은 건 사후 대책 마련과 처리였다.

    장사징가의 소행이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군사를 일으킬 순 없었다.

    뭐, 국제법이 있는 시대도 아니고 장사징가의 부족이 평소 교류하던 우방국 씩이나 되는 것도 아니고··· 아, 또 여러분들 그거 아나?

    역알못인 나는 조선은 되게 평화로운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거 아니었단 사실.

    일단 수 틀리면 군사들부터 일으키고 보는 게 조선이란 나라였지 뭔가.

    뭔 말이냐고?

    내 선왕들의 주된 업적이 여진 부족들 짓밞는 거였다.

    씹선비들한테 성군이란 평을 받는 내 아버지 성종 역시 대대적으로 군사 일으켜서 여진족들 싸그리 짓밞았고, 세조 때는 아예 조명 연합군이 손 잡고 연합작전까지 벌여서 그 씨를 말려버릴 정도였다.

    일종의 삭초제근이랄까?

    그랬으니 물증 없이 전쟁 일으켜도 욕 들어먹진 않겠지만, 지금은 전쟁 일으킬 여력이 없다.

    돈이야 내탕고에 귀속 된 씹선비들 것 끌어다 만들면 되고, 그걸로도 부족하면 내 돈 보태서 일으킬 수야 있겠지만 너무 잦은 전쟁도 민심 이반의 주된 요인중 하나니까.

    될 수 있으면 자제해야지.

    “열기구를 연변진에 배치 시키는 건 어떻겠사옵니까?”

    사후 대책 마련을 논의하던 중, 허침 할아버지가 의견을 개진했다.

    열기구를 군용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처음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장곤 선생님이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었는데 실효성 문제로 묵살됐었다.

    아직까지 열기구는 땅에 고정 시켜서 띄우는 정도 밖에 안 됐다.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다면 정찰용으로는 제격이겠지만 도저히 손 볼 엄두가 안 났다.

    일단 열기구를 바람에 실어 보내려면 시험 비행을 해야 한다.

    시험 비행에는 사람이 탑승한다는 전제가 깔린다.

    일단 나는 절대 못 탄다. 내가 못 타는데 누구한테 이걸 강요 할 수 있겠나?

    아, 물론 시도 자체를 안 해 본 건 아니다.

    악질 범죄자들을 이용해 시험 비행을 하자는 의견이 형님에게서 나왔었는데 이땐 난리가 났었다.

    시험 비행이 성공한다는 건, 지금까지의 열기구처럼 사람이 하늘에 부유(浮游)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최초로 하늘을 날게 되는 일이나 다름이 없는데 이 영광의 타이틀을 악질 범죄자 따위에게 넘길 순 없다는 꼰대적(?)인 주장들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열기구 시험 비행은 답보 상태였다.

    왕이 되고 나서는 시간이 없기도 했었지만.

    “그러려면 시험 비행을 해야지 않습니까.”

    “흐음··· 역시 죄인들로 하여금 시험을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편전이 시끌벅쩍해졌다.

    옛날하고 똑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영광스런 타이틀을 한낱 죄수 나부랭이한테 던져 줄 수 없다··· 그럼 너가 자원하지 그러냐, 내가 왜 하냐 등등······.

    더 시끄러워질까 싶어서 손을 슬쩍 들어올렸다.

    “···”

    “열기구를 배치하는 건 아무래도 아직 시기상조인 듯 하니, 일단은 심문이라도 할 겸 도을치와 장사징가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매듭 지어야 될 것 같습니다.”

    “도을치는 우리 조정에 입조한 세월이 있은지라 상경에 응하겠지만 장사징가가 응하겠사옵니까?”

    “안 하면 너희가 배후라 여기겠다는 엄포라도 놓죠.”

    “···”

    “사상자들은 연변진에서 치료토록 하고, 문제는 실종자들인데······.”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모두 살인멸구를 당했을 것이옵니다.”

    지부사 노공필의 말이다.

    사실 노공필의 말이 일리가 있다.

    여진족이 조선인을 납치하는 케이스는 보통 두 가지다.

    노예로 쓰기 위해서, 여자가 부족해서.

    근데 이번 사건은 둘 모두 아니었다.

    심증대로라면, 장사징가가 우리와 도을치 부족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흉계를 꾸몄던 거니까.

    실종자들을 납치한 뒤, 혹시 모를 불상사까지 차단하기 위해 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98.7%의 확률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인데, 만에 하나 끌려간 백성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원군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연변진에는 특별히 순찰을 게을리 하지 말라 이르고, 일대 진보에도 수상한 소문이 들어오는대로 장계 써서 올려보내라 하십시오.”

    “그리 이르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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