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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301화 (30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01화>

    ***

    “···왕세자가 서연(書筵)하여 강학을 하는 것은 제왕이 되기 전 그 이치를 연구하고 성품을 다하여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는 까닭이니 저하께서는 실로 하루에 세 번 씩이나 진강(수업)을 나오시면서도 조금의 게으름도 피우지 아니 하시니, 상탕의 종시일신(終始日新)과 주나라 문왕의 집희광명(緝熙光明)으로서도 더할 것이 없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제왕은 학문을 익히는 데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사물의 이치를 명확히 구분지어, 간사하게 아첨하는 사람을 배척 할 수 있는 잣대를 만드셔야 하옵고, 대신들의 간쟁을 불편함 없이 받아들이고 정당히 의논 할 수 있게끔 치국의 도리를 깨우치셔야 하는 것이옵니다.”

    “하지만 《시경》에 이르기를, ‘모두에게 시작은 있으나 끝까지 잘한 이는 고금에도 드물다’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은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지만 언제라도 학문을 게을리 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럼 아니한 만 못 한 법이 되지 않을까요?”

    “토대란 것은 갑자기 쌓아올린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옵니다. 지금 당장 다른 것에 빠진다 하여도 금방 학문을 갈고 닦으면 쌓아 올린 토대로서 학문을 익힐 수 있으니, 아니한만 못 하다는 말은 실로 이치에 어긋나는 말인 것이옵니다. 저하께서 시경을 인용하셨으니 신도 마찬가지로 시경을 언급하자면, 《시경》에 이르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배움에 힘 쓴다면 본인도 깨닫지 못 하는 사이에 덕이 닦아진다’하였으니 이런 경지에 이른다면 저하께서는 학문을 게을리 하셔도 이미 성학을 몸소 깨우친 뒤가 될 것이니 걱정할 것이 못 되는 것이옵니다.”

    “아,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는데요.”

    “말씀하시옵소서.”

    “그럼 임금에게는 학문이 중요한 건가요, 효가 중요한 건가요?”

    “으음···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우리나라는 특히 예(禮)와 효(孝)를 중시하여 이것이 곧 나라의 지표로서 적용이 되고 있으니 세종대왕께서도 삼강행실을 찬집하시라 명하신 것이옵니다. 임금이 비록 종사의 주인이라지만, 주인이라 하여 만백성에게 지포료서 적용한 일을 따르지 않는다면 임금의 호령에 어찌 명분이 서겠으며, 정당함이 생기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보면, 학문은 토대를 쌓아 올려 천천히라도 갈고 닦을 수 있겠지만 효는 어버이가 죽고 난 뒤에는 행하고 싶어도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니 효를 좇음이 지당하다 할 수 있을 것이옵······.”

    여기는 동궁이다.

    이계동을 관찰사로 제수한다는 날치기 법안을 통과시키고 강녕전으로 돌아가는 중에 잠깐 들렀다.

    잠깐 탈선(?)해서 당구장 죽돌이가 됐던 세자였지만 지금은 그 증상도 어느 정도 완화가 됐다.

    일주일에 2번 정도까지는 내가 허용한다고 약조했기 때문이었다.

    황이는 그 약조를 아주 잘 지키고 있었다.

    지금도 제왕학을 잘 익히고 있기도 하고, 보는 나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들 만큼 공부에 열성이었다.

    그래, 열심히 공부해야한다. 그래야 내가 얼른 왕 노릇 끝내지.

    “효를 좇지 말고 치(治)를 좇아야지.”

    한참 세자와 서연관들의 질의응답을 지켜보던 나는 참지 못 하고 끼어들었다.

    이런 거 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왕이라는 자리가 날 꼰대로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옛날 같았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을 일인데 이거 조금 못 참고 끼어 들다니······.

    “전하.”

    황이와 서연관들이 황급히 일어나 예를 갖췄다.

    “에헴.”

    꼰대의 전유물(?)인 헛기침 한 번 터뜨려주고 마루에 올랐다.

    “지금 무슨 강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가?”

    질문하자 세자시강원 문학(文學) 서후(徐厚)가 답했다.

    “제왕의 도리에 대한 진강을 하고 있었나이다.”

    “세자가 왕은 학문을 좇아야 되냐, 효를 좇아야 되냐 물은 것 같은데?”

    “그러하옵니다.”

    “근데 왜 효를 좇아야 한다고 대답했나?”

    말하고 나니 머쓱해졌다.

    서연관인 서후는, 여태 1+1=2라고 배웠기 때문에 1+1=2라고 대답했을 텐데, 왜 1+1=2냐고 나무란 격이었다.

    “커흠. 세자는 효를 좇지 말고 치를 좇아라.”

    “어인 말씀이십니까, 숙부 전하?”

    “내가 왕대비 마마께 문안 인사를 자주 가더냐?”

    절레절레.

    “그럼 내가 경연을 자주 열더냐?”

    절레절레.

    “불효하고 불학한다고 날 욕하는 백성이 있더냐?”

    절레절레.

    “나라만 잘 다스리면 그만이다. 뭐, 효라는 게 중요하긴 하겠지만 너의 부왕이신 상왕 전하는 네가 효도하기 보다 나라를 잘 다스렸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실 거다. 또, 따지고 보면 왕이란 것도 결국 나라 잘 다스리라고 있는 건데 나라도 못 다스리면 왕 노릇 할 필요가 없는 거지.”

    “그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어인 말이 되는 것이옵니까?”

    황이는 다 좋은데 호기심이 참 많아.

    그럴 나이긴 하지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너무 많아.

    그래서 할 말이 궁색하긴 한데.

    “수신제가가 집안을 잘 다스리란 말이지, 효하라는 말은 아니잖아?”

    “···”

    “어쨌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으니 내 보기가 좋다. 뭐 필요한 건 없는 것이냐?”

    “없사옵니다. 다만 요새 눈이 좀 침침한 듯 하옵니다.”

    “아니, 네 나이가 이제 지학도 채 안 됐는데 무슨 눈이 벌써 침침하단 말이냐?”

    “밤늦게까지 책을 보기 때문인 듯 하옵니다.”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 앉는 느낌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나를 이 지옥 불구덩이에서 꺼내줄 사람은 황이 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황이의 눈이 침침하다니······.

    오만가지 잡생각이 다 떠올랐다.

    ‘눈이 침침하면 몸이 불편해질 테고··· 몸이 불편해지면 공부에 흥미를 잃을 테고··· 공부에 흥미를 잃으면 공부를 못 하게 될 테고··· 공부를 못 하게 되면 제왕의 기본을 못 익히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눈이 좀 침침하다는 간단한 주제로 비약에 비약을 거듭한 끝에 나는 왕노릇 +30년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박 내관!”

    박 내관은 황이를 보필하는 동궁 내관이었다.

    “예, 전하.”

    “세자가 눈이 침침하다는데 자네는 뭘 하고 있었나!”

    “눈에 좋다는 탕약을 올렸사오나 의원이 말하길 효험을 보기도 전에 책을 손에서 떼질 않으니 효험이 나타나질 않는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그래도 효험을 보게 했어야지!”

    라는 말을 뱉고 나니 억지란 걸 알았다.

    동궁 내관으로선 최선을 다했을 거다.

    좌우지간.

    안 된다.

    황이는 최소 5년 안에 내 뒤를 이어야 한다.

    이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런데 눈이 침침해서 공부하기가 불편하다니······.

    ‘생각하자, 생각.’

    탕약으로는 효험을 못 봤다고 한다.

    중도에 책 읽기를 중단시키면 말끔하게 해결 될 문제겠지만, 황이 고집이 누구 닮아서 쇠고집인지라 들어먹을 것 같진 않다.

    ‘당근 없나.’

    당근이 눈에 참 좋은데, 생각해보면 여기 살면서 당근은 한 번도 못 먹어 봤다.

    당근은 없는 것 같고······.

    그럼 어떡하지?

    황이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데······.

    “아!”

    사람은 목숨이 경각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했던가.

    목숨이 경각에 달리진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상황에 처하자 굳어있던 내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며 뭔가가 떠올랐다.

    “상선!”

    “부, 불러 계시옵니까, 전하.”

    “채방별감 지금 어디에 내려가있다고 했었지요?”

    “채방별감이라 하오시면··· 김까불 말이옵니까?”

    “네.”

    “신이 알기로 단천에서 옥돌(대리석)이 발견되어 내려간 줄로 아옵니다.”

    지방에 출장가 있는 사람 불러 들이긴 좀 그렇지만, 화급을 요하는 일이다.

    “당장 사람 보내서 올려보내도록 하세요, 당장!”

    “아, 알겠사옵니다.”

    ***

    “몇 점쳤냐?”

    깨방정떨며 묻는 내 모습에서는, 왕으로서의 위엄이라고는 쥐뿔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가끔은 필요에 의해서 왕처럼 굴 때가 있지만, 나는 여전히 나로서 행동했고 나로서 사고했다.

    왜,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관짝 들어가야 된단 그런 말도 있잖아.

    이 나이에 관짝 들어갈 순 없지.

    “5점 쳤습지요..”

    “허.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구라를 쳐?”

    “저, 정말로 5점입니다요.”

    “내가 다 봤는데 5점?!”

    “예, 5점.”

    “상선. 덕산이 녀석 5점 친 거 맞습니까?”

    상선에게 물었지만, 상선 대감은 당구를 곁에서 봤으면서도 아직 당구 룰을 이해 못 하신다.

    “소, 송구하옵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신다.

    “덕산이 너. 4점 아니냐?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2점이었는데 잠깐 소피보고 온 사이에 어떻게 3점을 연달아 쳐? 너가 무슨 신이냐?”

    “아니. 정말로 쳤습니다, 전하. 기본구가 연속으로 나와서 쉽게 쳤는데 전하께서 못 보셔놓고는······.”

    “진짜지? 거짓말 아니지?”

    “진짭니다요.”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덕산이지만, 전과가 있는 녀석이라 못 믿는 거다.

    예전에도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3점 친 걸 5점 쳤다고 구라쳤다가 걸린 적이 있거든.

    “이거 뭐, CCTV 돌려 볼 수도 없고. 딱 이번 한 번만 믿어준다?”

    “헤헤.”

    헤실거리는 덕산이를 뒤로한 채 큐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뒤늦게 당구대의 공을 보니 욕지거리가 절로 나온다.

    공들의 위치가 애매함을 넘어 난해할 정도다.

    “야, 내가 당구 좀 족보 있이 치라고 했지? 당구를 인마, 족보 없이 개족보로 치니까 후구가 자꾸 이상하게 뜨잖아.”

    아닌 게 아니라 공들이 대각선 코너에 몰려있다.

    기술의 한계 때문에 대회전도 안 돼서 이건 나미로 비껴쳐야 될 것 같다.

    자세를 잡고 큐를 가볍게 밀었······.

    “전하.”

    삑!

    “아, 삑사리 아니면 들어가는 건데.”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머쓱한 표정의 상선 대감이 서 계신다.

    “채방별감이 알현을 청한다고 하옵니다.”

    “채방별감? 얼른! 얼른 들여보내세요.”

    “아, 예.”

    덕산이에게 또 점수로 구라치면 혼난다는 엄포를 놓고 있을 즈음.

    “전하. 신 채방별감 김······.”

    “오, 우리 사이에 인사는 무슨. 어서 오게, 어서 와.”

    “아, 예.”

    “그래, 단천에서 이제 막 오는 길인가?”

    “그렇사옵니다.”

    “이런 미안할 때가 다있나. 나 때문에 쉬지도 못 하고 바로 입궐했겠구만.”

    “아니옵니다. 한데··· 이게 말로만 듣던 당구이옵니까?”

    여담이지만 요새 신문에는 당구가 자주 언급되곤 한다.

    내가 당구각에서 어명을 내릴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엿새 전에도 넌씨눈 노공필이 명나라 황제한테 책봉은 따놓은 당상인 걸 기념할 겸 대사면령을 내리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제안도 당구각에서 받아들여져서, 승정원을 통해 대사면령이 내려졌었다.

    그러니 당구장 모르면 간첩인 셈이지.

    만!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건 내 나중에 치게 해줌세. 그보다, 내 필요한 게 좀 있는데 말일세.”

    “하교하시옵소서.”

    “채방하면서 수정(水晶)이 발견됐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나?”

    “수정 말이옵니까?”

    “그래, 수정.”

    기억을 더듬어보던 까불이 머잖아 말했다.

    “경주에서 채취됐다는 소문이 돌긴 했습니다만··· 일정상 가보진 못 했사옵니다. 혹 수정이 필요하신 것이옵니까?”

    “맞네. 그것도 아주 깔끔하고 매끈한 백수정으로.”

    “그거라면 공조나 호조에서 알아보시면 될 터인데······.”

    “한 두 개 필요한 게 아니니 그러지.”

    “얼마나 필요하신 것이옵니까?”

    “많이. 아주 많이.”

    “혹 어디에 쓰는 것이길래 대량의 수정이 필요한 지 알 수 있겠사옵니까?”

    말해도 모를 것 같지만, 모르고 찾는 것보단 알고 찾는 게 더 낫겠지.

    “안경 때문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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