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300화>
***
진성이 할 말을 잃은 그 시각.
쇼신은 다른 의미로 할 말을 잃었다.
온몸에 힘이란 힘은 죄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아니, 영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두 발을 딛고 땅에 서있지만 정신이 멍해지면서 꼭 허공에 붕- 떠있는 느김이었다.
“하오나······.”
한참이 지나서 정신을 차린 쇼신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열었는데······.
무슨 말을 해야할지 선뜻 생각이 안 났다.
사실이 그랬다.
나라를 통째로 내놓으라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을까?
그래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지금 와서 물러날 순 없었다.
“신(臣)이 대왕 전하의 진노를 샀으니 지금에 와서 그 벌을 피할 길이 어디 있겠나이까? 과연 대왕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신이 역린지화란 말을 알고 있다면 벌을 피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도리가 없다는 말이니 피할 마음도 없사옵니다! 하여 어떤 벌을 내리신다 한들 천세를 외치며 받을 수 있겠사옵고, 전위 또한 천천세를 외치며 할 수 있는 일이나이다! 그러나 소인이 얕은 학문으로 동서고금의 일을 들춰보건대, 임금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전위를 받는 일은 없었으니 지금 대왕 전하께 전위를 한다면 어찌 전하의 업에 누가 되는 일이 아니겠나이까? 부디 신을 가여이 여기시어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오배삼고두에 이어 스스로 신하 신(臣)자를 입에 올릴 만큼 굴욕적이었지만 종사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납작 엎드려야 했다.
오직 종사를 보전코자 목숨을 내걸고 출성했고, 굴욕적인 오배 삼고두의 예까지 행했다.
지금와서 티끌 먼지만도 못 한 자존심을 내세웠다가는 정말 끝이었다.
수치심에 몸이 달아 오를대로 달아오른 쇼신이었지만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다만 그가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으니······.
긁적긁적.
“멀리 갈 것도 없지.”
잠시 말을 흐린 융은 역관 한 명을 대동한 채 무릎 꿇은 쇼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누가 들을까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우리 태조 강헌대왕은 고려왕의 자리를 찬탈해서 이 조선을 개창하셨고, 우리 세조 혜장대왕은 어린 조카 노산군(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나라를 중흥으로 이끌었으니 어찌 너는 찬탈이 내 왕업에 누가 되는 일이라 하는 것이냐?”
역관의 통역을 듣고 망연자실해 하는 쇼신에게 융은 한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 어깨에 팔을 둘렀다.
“황제의 책봉이나 받는 제후이니 너와 똑같은 처지라 여기고 내 만만했겠지. 그래, 만만했을 것이다. 너는 이 땅에서 성군이라 불리니 특히 자만에 차있었을 테지. 그런데······.”
“···”
“우물 안 개구리라 했다. 이 작은 나라를 통치한다고 해서 천하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약조를 지키지 않을 거였다면 최악의 경우 정도는 대비해 뒀어야지.”
“대왕 전하!”
“지금 네게 베푸는 것은 특전이다. 네게 베푸는 이 특전을 받고 우리나라의 대부로 살겠더냐, 거절하고 망국의 왕으로 남겠더냐?”
둘 다 나라가 망한다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목숨을 구명할 수 있냐 없냐의 차이는 분명했다.
결국 쇼신이 할 수 있는 말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렇게 며칠 후.
남해정토 대장군으로 부월을 받고 온 백돌 장군은 슈리성의 정전에서 보위에 올랐다.
유구국중산왕으로······.
***
참, 나이가 먹으면 시간이 참 쏜살같이 흘러가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15살 때의 1년이 다르고, 20살 때의 1년이 다르고, 25살 때의 1년이 다르고······.
나이가 들수록 한 것도 없는데 1년이 후딱 지나가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다.
이게 뇌 과학자들의 말로는, 도파민 분비에 따른 반응이라던데 솔직히 문과인 내가 그런 의학적인 것까진 모르겠고 실제로 요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 같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지 모르겠다니까.
아침에 문득 생각난 건데, 누구랑 닮은 꼴인 명나라 황제한테 책봉 받은지도 벌써 두달이나 지났지 뭔가.
아니, 두 달이 뭐야?
그새 해도 바뀌었다.
정조사가 보름 전에 출발했고 조정은 올해부터 있을 모내기 농법으로 인해 분주해졌으니까.
이대로라면 진짜 눈 깜짝할 새에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있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됐는데, 아 우리 형님.
아우 생각하는 마음이 기똥 찬 우리 형님이 그런 쓰잘데기 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또 사고를 쳐주셨다.
「···하여 이제 내가 상왕으로 물러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마는 지금 이곳의 정세가 이러하니 내 왕의 청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왕이 계속하여 간청하는데 내 어찌 그 청을 거절 할 수 있었겠으며, 거절하는 건 이 나라 신민들을 외면하는 것이라 여겨 사람 된 도리로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이에 왕에게 국새를 인도받고 이 나라 법궁의 정전에서 즉위하였으니······.」
갈 때는 대장군으로 갔으면서 올 때는 오키나와 임금이 돼서 돌아오시겠다는 서찰이었다.
법적으로 이게 되는지 안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만, 지극히 평범한 내 상식선에서 정리하자면 절대 말이 안 될 것 같다.
왕에서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대장군으로 놀러갔고, 놀러간 나라의 왕이 돼서 돌아온다는데··· 진짜 말이 안 되잖아?
“하······.”
“전하. 상왕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전하셨길래 그리 깊은 한숨을 토하시옵니까?”
나의 한숨 소리에 허침 할아버지는 안절부절 못 하며 물었다.
오키나와에서 온 연락선이 ‘대장군 이백돌’의 공적인 영역의 서계는 전달했던터라 승전 소식은 모두 들은 대신들이지만, ‘상왕 이융’의 사적인 영역에 있는 서찰은 나한테 직접적으로 전달 됐기 때문에 오키나와를 꿀꺽 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 한 대신들이었다.
나는 말없이 허침 할아버지께 서찰을 건네드리려다가 대상을 우의정 채수 아저씨로 수정했다.
허침 할아버지가 올해 예순 다섯이다.
반대로 임사홍 아저씨는 그보다 한 살 적은 예순 넷.
삼정승들 중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그나마 올해 회갑을 맞은 우의정 채수였다.
두 분이 혹시 쓰러질지 몰라 그나마 젊고 건강한 채수 아저씨께 전달한 건데······.
“끄어어억!”
오판이었다.
뒷목 잡고 쓰러지실 뻔 한 걸, 다행히 숭재 씨가 잽싸게 부축해서 볼썽사나운 꼴은 면하셨다.
하지만 볼썽사나운 꼴은 면하셨어도, 졸도는 면하지 못 하셨다.
그대로 혼절해버리신 것이다.
어의가 들어와서 급히 진맥했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단순 졸도란다.
채수 아저씨가 들 것에 실려나가자, 대신들의 의문은 더 증폭 된 듯 했지만, 이미 채수 아저씨마저 실려나간 마당에 환자를 더 만들 수가 없었다.
“전하. 도대체 상왕 전하께서 무슨 글월을 쓰셨길래 우상이······.”
말했다시피 허침 할아버지는 예순 다섯이다.
건강이 상대적이란 거라지만 노인공경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말 할 순 없을 것 같다.
“별 거 아닙니다. 에··· 그보다 관찰사를 좀 파견해야겠는데요.”
“관찰사 말이옵니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관찰사의 감무가 공백이었던 곳은 경상도 밖에 없었사오나 작년 10월에 안처직이 상경하고 장순손(張順孫)이 제수되어 감무를 보고 있는 줄로 아뢰옵나이다.”
내가 고작 3~4달 전에 있었던 인사 조치를 기억 못 할 리도 없을 테지만, 하긴 경상도 관찰사가 아니면 뜬금없이 관찰사가 언급 될 리가 없긴 하지.
“경상도 관찰사는 아니고··· 뭐랄까요.”
나는 대신들이 충격 먹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비유를 생각해봤다.
실례(實例)가 있으면 좋겠는데, 실례라··· 아!
“탐라가 우리 조정에 편입 된 것이 언제였지요?”
“마지막 탐라성주(耽羅星主)가 있었던 때를 이르시옵니까, 아니면 수령이 파견된 때를 이르시옵니까?”
“마지막 탐라성주가 있었던 때가 비슷하겠꾼요.”
“하오면 100여년 전 쯤 탐라성주 고봉례가 입조하여 태종대왕께 인부(도장)를 갖다 바친 일을 예로 들 수가 있겠나이다.”
“그거랑 비슷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인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묻는 영의정에, 뭐라 답할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나는 사실을 알아도, 뒷목 잡고 쓰러질 것 같진 않은 숭재 씨를 어좌 앞으로 불렀다.
사적인 자리에서나 같이 술마시면서 춤추고 놀지, 여긴 공적인 자리였다.
숭재 씨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 앞까지 걸어왔다.
나는 그런 숭재 씨한테 형님의 서간을 전해드렸다.
“이, 이게!”
예상대로 아직 젊은 나이라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저, 전하··· 이, 이건··· 이게 참말이옵니까?”
“오늘이 첫 눈 오는 날(만우절)도 아니고 상왕 전하가 굳이 이런 걸로 장난을 칠 이유가 없으니 참말일 겁니다.”
참말일 거라는 말에 숭재 씨는 한동안 어버버거리셨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이건 참칭이옵니다, 전하!”
귓청 떨어질 만큼 버럭 소리쳤다.
참칭.
그래, 숭재 씨 말대로 이건 어떻게 보면 참칭이다.
생각해보라고, 조선왕 했던 사람이 오키나와에 건너가서 양위를 받고 오키나와 문무백관들의 하례를 받고 왕으로 즉위했다.
이게 솔직히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개족보적인 일이지만 어쨌든 조선 국적의 왕이 두 명이나 된단 말이다.
형님이 제아무리 독립국임을 주장하셔도, 명나라 황제한테 중산왕 책봉을 받은 게 아니다 보니 어찌됐건 참칭이다.
겉모양새만 보면 내가 중산왕을 책봉한, 그러니까 황제만의 특권인 제후 책봉을 해버린 꼴이 돼버린단 말이다.
내가 관찰사 운운한 것도 그런 외교적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오키나와가 이역만리 떨어진 나라라지만, 언젠가는 그 소식이 명나라 조정에도 들어갈 테니까.
형님이 오키나와 중산왕으로 즉위했다는 사실보다는, 내가 거길 무력으로 토평해버리고 관찰사를 파견했다는 게 명나라와의 관계에서는 더 낫겠다는 판단 때문에 말이다.
여담인데, 이런 거 보면 새삼 나도 정치인 다 된 것 같다니까?
이런 득실도 계산할 줄 알고 말이야.
“참칭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시오, 제예?”
“어찌 그런 불경하고 두려운 말씀을 하시는 거요?”
나는 시끌벅쩍해진 편전을 잠재웠다.
어떻게 잠재우냐고?
손 한 번만 들면 된다.
“일단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유구국에 관찰사를 파견해야겠다는 건데··· 누가 좋겠습니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혹 유구국의 일이 소종도(대마도)에 목사를 파견한 일과 같사옵니까?”
양위 받았다는 말만 안 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습니다. 시급한 일이니 인선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시급한 사안이길래 그리 급히······.”
하.
나는 대신들 배려 할 만큼 했다.
했는데도, 사서 충격을 받으시겠다는데 어쩔 수가 없지.
“뭐, 간단히 말씀을 드리면 상왕 전하가 유구국의 법궁을 점거하셨습니다. 점거했는데··· 법궁만 점거한 게 아니라 국새도 점거했답니다.”
“···?”
국새를 점거했다.
대신들은 선뜻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 거··· 양위 받았다구요, 양위.”
“양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오키나와 왕이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쳤단 말입니다, 통째로!”
대신들이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 지금이 적기다.
인지부조화 이후, 내 말을 인지 하게 되면 편전이 도떼기 시장처럼 시끌벅쩍해질 거다.
“이게 어떻게 보면 참칭입니다. 명나라에서 알면 큰 일 나는 수준이 아니니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관찰사를 파견해야 하는 거지요. 유구국이라는 특수성을 인정해서 유구국에 파견 될 관찰사의 품계는 정2품으로 승품해서 보내도록 하고, 누가 좋겠습니까들?”
다행히 작전이 먹혔다.
“소종도의 예로 보자면 한숙창은 감조관으로 섬에 건너갔다가, 썩 오래 머물게 되면서 소종도의 목사로 천거를 받았으니 그때의 예를 적용해서 유구국 순찰사 이계동을 임시 관찰사로 제수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이건 날치기로 통과시켜야 하는 법안이었다.
나는 의견이 나오자마자 의사봉을 두들겼다.
“영상의 말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