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99화>
***
“‘궤(跪) 하라!”
이계동의 외침에 백의 차림의 쇼신이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장내로 나온 쇼신은 오체투지의 자세로 엎드렸다.
“오배(五拜)하라!”
오체투지의 자세로 엎드려 있던 쇼신은 맨발로 다섯 번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굴욕적이었는지 이를 지켜보던 유구국 대신들은 대성통곡을 할 정도였다.
마침내 다섯 번의 절을 마치자 이계동이 소리쳤다.
“삼고두(三叩頭)하니, 일고두요!”
쿵!
쇼신이 머리를 바닥에 세차게 내리 찍었다.
“삼고두하니, 이고두요!”
쿵!
생각 이상으로 세게 박은 건지 쇼신의 이맛살이 터져 나갔다.
“삼고두하니, 삼고두요!”
쿵!
이번에는 앞전의 고두로 부르터진 이맛살이 제대로 터져나가면서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흥하여 평신하시오.”
갑작스레 머리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정신이 아득해지고 시야는 흐려졌다.
눈앞의 조선왕은 잔상처럼 망막에만 맺혔고 일어서는 일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쇼신은 휘청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이미 이마에서 터져나온 피가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이런 굴욕은 일찍이 맛 본 적이 없을 테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챙그랑-.
융은 부동의 자세로 쇼신의 오배삼고두를 지켜보다가, 칼 한 자루를 그의 발치에 내던졌다.
쇼신의 발치에는 3자(90cm) 남짓한 칼이 떨어졌다.
“본시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는 우리나라에 없는 예식이나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오배의 예가 명백히 적혀 있어 내 이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융은 못 마땅한 표정으로 유구국 대신들을 흘겼다.
“대명집례에 의하면 오배 삼고두를 행한 연후에, 산호하라는 구절이 명백히 나와있는데 내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눈치를 주자, 유구국 대신들은 연신 쭈뼛거리다가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천세! 천세! 천천세!”
그제야 마음이 풀린 건지, 흡족한 표정을 짓던 융은 이계동에게 칼 한 자루를 건네 받았다. 그러고는 별안간 칼을 쇼신의 발치에 내던졌다.
챙그랑!
“내 너에게 베푼 은혜는 온천하를 뒤덮고도 남을 지경이었는데 너는 그 은혜를 난망하며 나를 흠모하긴 커녕 헐뜯으려 했으니 과연 네가 역린지화(逆鱗之禍)란 말을 알았다면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
“너는 대국과 우리나라를 이간하며 잇속을 챙기려 하였으니, 감히 소국이 대국들을 이간하려 한 것은 일찍부터 네 목을 걸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을 터. 칼을 거꾸로 쥐고 자결하라. 그리하면 내 너와 너의 신민들이 저지른 죄를 사하리라.”
역관이 융의 말을 전달하자 쇼신은 흠칫 몸을 떨었다.
“네 설마 오배삼고두를 행한다고 네 죄가 사라진다고 여긴 건 아니겠지? 네 신민들을 살리고자 죽기를 각오하고 나온 것 아니더냐. 네가 죽지 않으면 네 신민들이 죽는 것이요, 네가 죽으면 네 신민들이 사는 것이니 자결하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쇼신은 덩그러니 놓여진 칼을 바라보며 마른 침을 꼴깍거렸다.
본인들의 왕이 이국의 왕 앞에 무릎 꿇려지는 굴욕까지 당한 데 모자라, 이제는 자결까지 강요받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쇼신의 신하들이 모두 통곡을 해댔지만 융은 명을 번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뭐, 하는 수 없지. 여봐라!”
“예, 장군!”
“저놈들을 모조리 참하라.”
융이 말한 저놈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던 유구국 관리들이었다.
“예?”
“저놈들 말이다. 왕을 제대로 보필하고 직언하였다면 이런 사달이 나지도 않았을 텐데, 저놈들이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 하고 직언하지 못 하였기 때문에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어려워하는 듯 하니 내 왕의 목숨을 살려주는 댓가로 저놈들의 모가지를 받아야겠다. 속히 참하라.”
“예!”
멈칫거린 이계동이 명을 내리려 할 때였다.
사색에 질린 표정의 쇼신이 허둥거리며 칼을 집어 들었다.
쇼신이 혹시 융에게 달려들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위사들이 융의 곁을 겹겹이 에워쌌지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난 쇼신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칼을 거꾸로 쥐었다.
1자나 되는 칼을 거꾸로 쥔다는 게 편치만은 않은지라, 두 발로는 칼 손잡이를 받치고 칼 끝은 심장에 갖다댄 모습이었다.
이대로 쇼신이 몸을 앞으로 내던지면 잘 벼려진 칼날이 그대로 그의 심장을 꿰뚫을 터였다.
그렇게 쇼신이 한 발 내딛던 그때.
“네 죄는 과연 죽음으로 밖에 사할 길이 없는 것이다. 다만.”
“···?”
“네가 신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니 내 특별히 은전을 베풀고자 한다.”
죽다 살아난 쇼신이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으, 은전 말이옵니까?”
끄덕.
“이 어리석은 왕이 무엇을 하면 되겠사옵니까?”
죽다 살아 났기 때문에 생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진 걸까.
쇼신은 바짝 부복했다.
그런 쇼신을 바라보며 침음한 융은 한참이 지나서 입을 열었다.
“전례에 없는 일이긴 한데··· 찾아보면 고사에는 있으려나?”
“···”
뭘 말씀하시려길래 저렇게 뜸을 들이시는 걸까.
쇼신은 죽음을 각오했을 때보다 더 긴장되는 마음으로 융의 입만 쳐다봤다.
그리고.
긁적긁적.
“에, 그대 왕은 부덕하여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고 신민들은 도탄에 빠뜨렸다. 이뿐이냐? 대국과 우리나라 사이를 이간질하여 잇속을 챙기려 하였으니 불충스럽기가 짝이 없다. 또, 용단을 내리지 못 한 부덕으로 그대 부왕의 능묘까지 훼손 시켰으니 그대 왕은 불효까지 저지른 것이다. 아니 그러하냐?”
“그, 그렇사옵니다.”
“내 본시 너의 목을 친히 베어버리고 너의 신민 모두는 노예로 삼아버려 이 나라 종사를 없애버리려고 했다마는, 네 죽음으로 신민을 지키려 하는 모습이 갸륵하여 생각을 바꿨다.”
“어, 어인 말씀이신지······.”
“양위하라.”
양위라는 말에 쇼신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어린 세자에게로 향했다.
그런 쇼신의 행동에 융은 눈살을 찌푸렸다.
“본시 유구국은 나같은 성군이 다스려야 나라가 안정되는 법인데, 견부견자라 했다. 그대 왕의 핏줄에게 이 나라를 맡긴다면 장차 이 나라가 어찌 되겠는고?”
“···?”
“세자가 아니라 나에게 양위하라.”
청천벽력 같은 개소리였다.
***
“···하여 표방(동물원)을 구경하였는데 실로 천하의 진귀한 동물들이 가득하였사옵니다. 특히 표방의 한가운데에는 황상이 동호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린 호랑이가 있었는데 사납기가 그지 없었사옵고, 또 한 귀퉁에는 코끼리도 있었사옵니다.”
드디어 노공필과 안윤덕이 돌아왔다.
돌아왔는데······.
나는 귀를 의심 할 수 밖에 없었다.
황제가 동물원을 지었다니··· 아니지.
동물원 지은 건 내가 말도 안 해.
멀쩡한 침소 놔두고 게르에서 산다지 뭔가?
캠핑족도 아니고.
어이가 골을 때리다 못 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릴 지경이었지만 노공필의 보고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아, 그런데 황상께서 갑자기 코끼리를 하사해주시겠다지 뭐겠사옵니까?”
“코끼리를 말입니까?”
당시의 일이 떠오르는지 넌씨눈 노공필는 기가 차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켰다.
“예. 부득불 이 코끼리를 하사하시겠다는 걸, 옛날에 코끼리로 인해 발생한 우리나라의 폐단을 아뢰면서 거절 할 수가 있었사옵니다.”
“그리고요? 황제가 다른 말은 안 했습니까?”
“아··· 그게.”
“뭔데요?”
“어, 그게 말입니다. 좌참찬이 좀 아뢰시오. 나는 영··· 크흠.”
말씀하시기 민망한지 노공필은 안윤덕에게 토스했다.
안윤덕도 민망하긴 매한가지인 눈치였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뭡니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그게 황상께서 상왕 전하께 호감을 가지신 듯 한데.”
“형님께 호감? 설마 황상이 비역질도 합니까?”
곡해했나 보다.
안윤덕이 격렬하게 손사래를 치며 부정한다.
“그건 아니옵고 상왕 전하의 일화를 들려드리니 호감을 가지신 듯 했사옵니다.”
“황상이 형님 전하께 호감을 가진 게 실이 될 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예, 그렇지요. 실이 될 게 전혀 없지요. 하온데··· 그.”
“아, 속 터지겠네. 뭡니까?”
“본래 임금이 보위에 오르면 황도에 하례를 드리러 가는 것이 원칙 아니겠사옵니까?”
맞다.
원칙은 원칙이지.
지켜지지 않는 원칙.
“그런데요?”
“상왕 전하께서 하례한 적이 없기도 하고··· 호쾌한 것이 마음에 드신다면서 언제 한 번 황도를 방문했으면 한다고 하셨사옵니다.”
아, 난 또 뭐라고.
임금이 보위에 오르면 황도에 하례 하러 가는 게 원칙이라고 했지?
저 말도 의례 하는 말들이다.
뭐, 문맥상 지금 황제는 형님 전하가 마음에 들어서 부르는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예의상 하는 말이란 말이지.
안 가도 그만이다.
“그거 말씀하시는데 뭘 그리 뜸을 들이십니까. 속 터지는 줄 알았네.”
라는 내 말에 노공필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것 뿐이면 말씀을 안 드리지요.”
“또 있습니까?”
“정 못 오겠다면 황상께서 오시겠다고······.”
“그거 협박이었습니까?”
너네 상왕 인사 오지게 박으러 오라 해라 -> 안 간다 -> 그럼 내가 간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협박으로 보일 여지가 충분하다.
황제가 내려온다고까지 했는데 못 간다는 것도 불충일 테니까.
그래서 물었던 건데.
“아니었사옵니다.”
“그럼 정말로?”
“···예.”
“아니, 뭐 그런 미친황······.”
황제가 다 있답니까?
라고 말하려 했지만 사초에 기록 될 것 같아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문제는 없었구요?”
“이게 또, 문제라고 하면 문제이옵고 문제가 아니라 하면 문제가 아닌 문제인데······.”
“뭔데요, 또?”
“전하께오서 신을 황도에 보내면서 신신당부한 사안 말이옵니다.”
냉큼 떠올랐다.
나는 노공필을 북경에 보내면서 이것 만큼은 꼭 황제한테 받아오라 신신당부한 게 있었다.
“보선 설계도랑 조선공(造船工)들 말입니까?”
바로 이것들이었다.
내가 노공필에게 보선 설계도랑 조선공을 명에 요구하란 말을 신신당부한 건 일종의 보험이었다.
보선 설계도는 그 누구였더라.
옛날에 정화 알지들?
그 정화가 타고 간 배들의 설계도였다.
조선공은 말그대로 배만드는 기술자들이고.
내가 왜 이 두 가지를 요구했냐면, 말했다시피 보험이다.
형님의 천하일주에 대한 욕구를 처음에는 북해국으로 잠재웠다가, 얼떨결에 오키나와로 바뀌었다.
그런데 나나 대신들 입장에서 형님이 오키나와에서 돌아오시면 뭘 하겠다고 하실지 몰랐다.
이제 상왕으로 물러 났겠다··· 돌아와서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겠다··· 이제 남는 건 시간이겠다······.
막말로 또 천하일주를 하시겠다고 할지 몰랐다.
그때가서는 또 다른 화젯거리로 형님의 욕구를 잠재울 생각이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짢나.
뾰족한 수가 안 나오면 진짜 천하일주를 감행해야 될지도 모른다.
보선 설계도는 그래서 요구했다.
혹시 모르니까.
“예.”
“황제가 안 들어줬습니까?”
“아니요. 서계에 첨부한 별단을 읽어보셔서 아시겠사옵니다만, 황상께서 설계도와 조선공들은 칙사 편에 딸려 보내주시기로 약조하셨사옵니다.”
“근데 뭐가 문젭니까?”
“황상께서 왜 이걸 요구하셨냐고 물으셨었사옵니다.”
“입 맞추지 않았었습니까?”
중국 조정에서 너희가 왜 보선 설계도랑 조선공들을 원하냐고 물으면, 해적 소탕을 위해서라고 입을 맞춘 상태였었다.
“그랬었지요. 한데 왜구 소탕을 위해 그 큰 배의 설계도를 원한다는 것에 황상께서 의구심을 품으셨사옵고······.”
“품었고?”
“혹 우리 해안을 노략질 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하셨사옵니다. 그래서 신이 황망한 마음에 그건 절대 아니고, 사실은 우리 상왕께서······.”
아, 이제 이해가 됐다.
보선 설계도 요구 -> 너희가 그게 왜 필요함? -> 왜구 소탕하려고-> 응, 안 속아. 너네 우리 침략하려는 거지? -> 사실 상왕이 천하일주 할지도 몰라서······.
노공필이 아무래도 신언패를 안 차고 간 모양이다.
조선에서만 실언하는 줄 알았는데 중국에서도 실언을 해버렸네.
근데, 잠깐.
“근데 어쨌든 황제가 설계도랑 조선공은 보내주기로 약조했다면서 그게 왜 문젭니까?”
“실은 그래서 상왕 전하를 황도로 모시려는 것 같사온지라······.”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