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98화 (298/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98화>

***

백돌 장군(?)이 극한의 공포를 맛보게 해주겠다는 대상인 쇼신은 극한의 공포보다는 오히려 극한의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아군이 패퇴했다니······.”

정체불명의 함대가 나타났다는 말에 아연실색했고, 정체불명의 그 함대가 조선 국적의 것이라는 사실에 망연자실했었던 쇼신이었다.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놓지는 않았었다.

조선군은 아직 상륙하기 전이었다.

상륙하기 전에 저지만 시킨다면 승산은 있었다.

그 희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보가 날아들었다.

적들이 상륙에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여기까지도 쇼신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상륙한 조선군의 수가 수천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전해졌기 때문에, 어쩌면··· 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 것이었다.

그 희망 역시 산산조각났다.

이번에는 저지선이 돌파 당했다는 비보가 날아든 것이다.

한가닥 희망은 공중분해 된 느낌이고 오로지 절망이 전신을 지배하는 느낌이었다.

털썩.

비보를 접한 채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쇼신은 어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털썩 주저 앉았다.

“크흑!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그에 결사의 각오로 적도들을 막아내란 쇼신의 명을 이행하지 못 한 수군 선장(일종의 제독) 테이켄(鄭賢)은 눈물이 범벅이 된 채 흐느꼈다.

물론 그런다고 패배한 전투가 승리한 전투로 바뀌진 않는다.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쩌면······.”

“전하,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옵니다! 심지를 굳건히 하시옵소서. 전하께서 굳건한 모습을 보이신다면 어찌 군사들이 결사의 각오를 다지지 않겠사오며, 적도들이 아무리 강인하다 한들 주춤하지 않겠사옵니까?”

시타하쿠(蔡鐸)였다.

“하지만 적도들이 저지선까지 돌파 했다고 하질 않는가. 말이 저지선이지, 적도들이 파진(진영을 세움)한 곳과의 거리가 10리(4km)도 채 안 되는데, 바로 진군이라도 한다면은 이를 어찌 막는단 말인고, 어찌······.”

“전하께오서는 지금 심지가 곧지 못 한 상태이옵니다. 창졸간에 일을 당했으니 어찌 아니 그러 하겠사옵니까?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약한 모습을 보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나마 테이켄이 제때 퇴각령을 내려 군사를 전부 잃진 않았으니 왕성에서 수성한다면 적들이 어찌 성을 넘을 수 있겠사옵니까? 각처에서도 근왕병들이 속속 도착 할 테니 비록 적도들의 기세가 지금은 맹렬하다 하나, 금방 수그러들 것이옵니다!”

시타하쿠의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었다.

왕성은 외침에 대비해, 여느 구스쿠(성)들 처럼 얕은 구릉에 지어졌다.

언덕에 지어졌기 때문에 성곽에서 원거리 무기를 투사한다면 적들의 피해도 만만찮을 텐데, 거기에 성곽의 높이만 해도 변변한 장비 없이 넘긴 힘든데다 내성과 외성으로 까지 나뉘어져 있었다.

왕성이 철옹성이라고 까지 부를 순 없어도, 쉬이 함락 될 만큼 녹록하진 않았다.

지금 패퇴해서 성내에 머물고 있는 군사들 역시 2천이 약간 안 된다지만, 이런 지형에 의지한다면 수천에 불과한 조선군을 막는 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다.

물론 ‘일견’에서만.

일견이란 말은 결국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낙관적으로 전망한다면 시타하쿠처럼 강경한 주장을 할 수 있겠지만, 시타하쿠의 ‘일견’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동의 할 수 없을 터였다.

안곤이 그랬다.

“전하. 지금은 항전을 할 때가 아니옵니다. 갑자기 일을 당해 상심이 크시고, 크게 노여워하고 계신 것을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하지만 더 이상 조선군을 자극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리더라도 짧지 않으니 지금은 일단 몸을 굽히시옵고 훗날을······.”

본인의 주장과는 대비되는 안곤의 의견에 시타하쿠가 열을 냈다.

“아니, 그 무슨 말씀이신가! 투항이라도 하자는 말인가?”

“그럼 모두 다 같이 죽잔 말씀이십니까?”

“말이 어찌 그리 된단 말인가, 내 전하께 아뢴대로 지형에 의지한다면 저들을 못 막을 까닭이 어디 있겠으며, 근왕병이 도착만 한다면 저들을 몰아내지 못 할 까닭이 무에 있단 말인가.”

“저들을 겪지 못 한 분은 그런 태평한 소릴 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허. 그럼 그대는 저들을 충분히 겪어봤으니 저항도 없이 투항하고 이 나라 백년 종묘사직을 그대로 갖다 바치자는 말을 하는 게로군? 어찌 명색이 대성씨족(大姓氏族)의 한 사람으로서, 또 일국의 대부로서 그리 무책임하면서도 한심한 소릴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말이 어찌 그리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언제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자는 말을 했습니까? 지금 저들이 어찌 여세를 몰아 진격하지 않고 파진을 했겠습니까? 본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선장의 말로는 적선에 한 척에 탑재 된 화포가 십수척이라, 아군선 쉽사리 접근하지 못 했다고 했습니다. 접근을 하지 못 하니 당연히 적의 상륙도 저지 할 수 없었던 것이구요. 적들이 지금 파진하여 군을 정비하고, 군선의 화포를 운반해 성 앞에 진을 친다면은, 그래도 지형의 이점을 논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강인한 의지로 못 해 낼 건 없네. 전하께서 어찌 이 나라의 초석을 다졌는데 그깟 수천 군사를 막지 못 하겠는가.”

“그 잘난 의지가 왜구를 막았었습니까?”

“뭐라! 지금 그대의 부친인 우미 공은 국익을 위해 먼 길을 마다않고 대국에 가셨네. 그런데 어찌 그 아들이란 작자가, 또 대부란 작자가 그 따위 망발을 내뱉는단 말인가?”

“미야코의 호전적인 오랑캐들을 상대로도 큰 피해 없었던 조선군입니다. 왜구가 침략했을 때도 조선군이 아니었다면 백년 종사가 끊겼겠지요. 미야코의 오랑캐들을 상대한 모습은 보지 못 하셨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조선군이 왜구를 상대하는 모습은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군을 아군이 막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누차 말하지만 강인한 의지로 못 해낼 건 없고, 또한 지형에 의지하면 적이 수백문의 화포를 끌고 온다 한들 함락되지 않을 걸세. 달포. 아니, 보름만 버틴다면 여러 구스쿠에서 근왕병이 도착 할 터이니 적은 고립되는 형국일세. 그때에······.”

“아니, 적장은 그 동안 가만히 있어주겠습니까? 여러 구스쿠에서 모이는 근왕병을 어찌 각개격파 시키려 들지 않겠냔 말입니다! 설령 각개격파 시키지 않는다 해도 저들이 민가에 해를 끼치면요?”

“전쟁일세, 지금은 나라의 국운이 걸렸고 백년 종사가 걸렸네. 하민들의 희생은 불가피 해.”

“나라의 국운이 걸렸다고 어찌 백성을 외면한단 말입니까? 지금 저들이······.”

“그래서, 투항하겠다는 사절이라도 보내잔 말인가?”

비꼬듯 말하는 시타하쿠였지만 안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이해를 하시는군요. 맞습니다. 투항해야 합니다.”

“어전일세! 어찌 그 따위 망발을!”

분위기가 점점 과열될 기미를 보이자 쇼신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거수했다.

“모두들 그만하라.”

“하오나 전하.”

“안곤의 말이 맞다. 격렬하게 저항한다면 그 의지만은 적군에게 떨칠 수 있겠지만 나라를 보전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투항한다면··· 그리되면 수가 생기겠지.”

“전하!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뒤로 지금까지 난관이 없으셨사옵니까? 전하께선 모두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셨는데 어찌 지금 외세에 굴복하려 하신단 말이옵니까! 전하께서 다마우둔(능묘)을 지으신지 채 십년도 되지 않았나이다!”

“다마우둔을 지은지 채 십년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 십년도 되지 않았는데 내 대에 백년 종사를 잘라내랴?”

시타하쿠를 일별한 쇼신이 안곤에게 말했다.

“경이 적장 이계동과는 미야코에 함께 원정도 가 친분이 두터운 편이었으니 경이 가서 나의 지극한 뜻을 알리라. 내 뜻을 알린다면 상륙한 적장의 뜻이 어찌되든 이계동이 외면치만은 않을 것이니 필시 효험이 있을 것이다.”

“예!”

이때까지만 해도 쇼신은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나라를 보전 할 순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희망 역시 일식경이 채 안 돼 산산조각 났다.

일식경 뒤, 사색에 질린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 어찌 된 것인가? 적장에게 내 지극한 뜻을 알렸는가? 상륙한 적장은 누구이고, 뭐라 하는가?”

“그것이······.”

“빨리 말해보라!”

“적장은 조선 임금이었사옵니다.”

쇼신은 표정이 일순 밝아졌다.

“그래? 차라리 다행한 일이다. 내 조선 대왕 전하께 직접 가서 투항의 뜻을 알려야겠다. 노한 마음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겠지만 내 간곡히 조아린다면 거절치만은 않을······.”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

“조선 임금께서 항복을 거부하시겠다고 하시옵니다······.”

쇼신은 순간 인지부조화가 일었다.

항복을 거부하겠다니······.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안곤은 말없이 소매를 뒤적거려 서찰 하나를 건네주었다.

“대왕 전하의 서간인가?”

“···예.”

황급히 서찰을 받아든 쇼신은 불길한 예감을 애써 감추고 글을 읽어내려갔다.

「···하므로 내 네게 이르건대 너는 항전을 해도 죽은 목숨이요, 항복을 해도 죽은 목숨이다. 다만 너희 나라 신민이 구명할 길이 아주 없지도 않으니 내게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라. 머리를 조아리고 너의 죄를 설토하라. 그리하여 마침내 나와 나의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자결하라. 그리하면 너희 나라 신민의 목숨만은 살려줄 수 있도다. 이는 내가 네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은혜이니 이를 거역한다면 너희 나라 신민 모두를 주살하여 너를 원망케 하리라.」

***

“왕이 장군의 말을 따르겠사옵니까?”

계동의 말에 간이 의자에 앉은 우리의 백돌 장군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따르면 죽은 목숨이고, 안 따라도 죽은 목숨이니 본인 의지에 달렸겠지.”

“하오나 만에 하나 정말 왕이 장군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고 스스로 자결을 한다면 이 나라 신민들이 반감을 가지지 않겠사옵니까. 통치가 용이하지 못 할 것이옵니다.”

“다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

“왜 그런 표정을 짓는가?”

“그게 아니오라······.”

“농이다. 내 심기 한 번 거드렸다고 모조리 쓸어버리면 천자도 무사치는 못 할 텐데 어찌 모조리 쓸어버리겠는가.”

“···”

“그나저나.”

“말씀하시옵소서.”

“왕이 고민을 너무 오래하는 듯 싶다.”

계동은 어이가 없었다.

사신으로 온 안곤이 돌아간 지 불과 반시진도 안 됐다.

일식경이나 됐을까?

돌아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왕의 귀에 소식이 들어간 건 일다경도 채 안 될 터였다.

그런데 고민을 너무 오래한다니······.

“그 능묘 이름이 다마우둔이라 했던가?”

“그렇사옵니다.”

“왕이 볼 수 있도록 화포를 쏴서 때려 부수도록 하라.”

“하오나 이 나라의 능묘이온데······.”

“내 선왕들이 능욕을 당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긴 하옵니다만······.”

“오히려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왕의 고민을 내 해결해주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자비가 아니냐.”

“···알겠사옵니다.”

잠시 후.

능묘에 조준 된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수십문에서 발사 된 포환들은 하나같이 능묘에 직격했다.

콰쾅!

포환에 직격 당한 능묘가 무사할 리 없었다.

연기가 걷힌 능묘는, 무덤 주인이 벌떡 일어나 뛰쳐나올 만큼 말그대로 산산조각이 나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융이 이번에는 어디에 방포령을 내려야 할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때였다.

“장군!”

저 멀리 군관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왕이 출성 하였사옵니다!”

융은 귀를 후벼팠다.

“좀 더 오래버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왕이 담이 약하군.”

“···”

“자, 그럼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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