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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96화 (29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96화>

    ***

    노공필과 안윤덕은 두 눈을 의심했다.

    아닌 게 아니라, 둘의 앞에는 앳된 소년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동안인지 노안인진 몰라도 지학을 갓 넘겨보였고, 입주변이 거뭇거뭇 한 것이 이제 막 수염이 자라고 있는 듯 했다.

    외적인 면만 본다면 굳이 두 눈을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 이 소년은 황제였다.

    천하의 중심인 중국의 천자.

    그런 천자가 마치 세상 다 산 노인의 그것처럼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으니, 노공필과 안윤덕의 당혹스러움도 일견 무리는 아니었다.

    “책봉사?”

    한참을 말없이 노공필과 안윤덕을 바라보던 주후조가 입을 열었다.

    “예, 폐하.”

    “책봉을 해달라?”

    “그렇다고 하옵니다.”

    “사신은 들어라.”

    후조가 둘을 바라보며 말하자, 공필과 윤덕은 지극한 예를 갖췄다.

    “너희 나라에 무슨 변고가 있길래 갑자기 책봉을 해달라는 것이냐?”

    곧 안윤덕이 역관을 통해 내막을 설명했다.

    짐짓 따분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던 주후조는 흥미가 생겼는지, 자세를 바로 잡았다.

    “전위(傳位)를 세자가 아니라 아우에게 했다?”

    “예, 폐하.”

    “아우가 모반이라도 일으킨 것인가?”

    모반이란 말에 안윤덕은 펄쩍 뛰며 부정했다.

    내막을 설명하기 까지 장장 일다경 가까이가 소요 됐지만, 역시 흥미로운 대목이었는지 이전처럼 주후조의 표정에는 지루함이란 없었다.

    “허어··· 기이한 일이로다. 아무리 덕을 잃었어도 아우에게 전위하는 일은 많지가 않을 텐데.”

    “하옵고 이 외에 진주(陳奏)할 말씀이 또 있다 하옵니다.”

    잠깐 생기가 돌던 주후조의 표정이 다시금 생기를 잃었다.

    그는 따분한 표정으로 다시 턱을 굈다.

    “제후란 놈들은 죄다 어린 아이 같군. 한다는 말이 죄 부탁 밖에 없어.”

    “···”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이 부분 역시 안윤덕이 역관을 통해 내막을 전달했다.

    내막은 아주 간단했다.

    조선이 상씨(쇼신)와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말이었지만, 간단한 말치고는 그 파급이 컸다.

    지루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던 주후조가 흠칫 몸을 떨 정도였으니 말이다.

    “음.”

    “수차례 상왕(쇼신)에게 해안을 노략질한 사과를 청했으나 상왕이 끝끝내 듣지 않고 오히려 왜구의 소행으로 떠넘긴다 하니 그 꼴을 가히 참을 수가 없어 전왕인 이융이 몸소 친정에 나서려 하니, 이를 허해달라 하옵니다.”

    일부 대목을 제외하면 지금껏 따분하게 설명을 듣던 주후조가 몸을 벌떡 일어났다.

    그에 노공필과 안윤덕은 흠칫 몸을 떨었다.

    둘은 황성까지 오며 새로 등극한 황제의 기행을 수차례 접했다.

    무슨 호랑이 한 마리를 키우면서 동호대장군이란 칭호를 하사하지 않나··· 온갖 동물들을 한데 모아 구경거리로 삼는다고 하질 않나··· 그 기행은 천자로서의 위엄이 전혀 없는 행동들이었다.

    그만큼 예측 할 수가 없는 황제였고, 언제 어디서 발끈할지 몰랐다.

    안윤덕은 상왕의 친정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부터 했다.

    하지만.

    “왕이 친정을 나서려 한단 말이지? 전왕이?”

    “그러하옵니다, 폐하.”

    주후조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더니 뭔가 흥분되는지 발까지 동동 굴러댔다.

    “호오··· 동국에 호걸이 있었구나!”

    라고 말한 주후조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후다닥 안윤덕에게 다가왔다.

    당황한 안윤덕은 넙죽 부복했다.

    “너희 왕은 몇 만의 군대로 정벌에 나서려고 한다더냐?”

    역관의 통역을 들은 안윤덕은 당혹함을 금치 못 했다.

    제후와 제후의 전쟁이었다.

    호통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거늘, 오히려 관심을 보이시다니······.

    “이보시오, 좌참찬. 폐하께서 하문하셨소, 얼른 답하시오.”

    얼이 나가 있는 윤덕을 일깨운 건 노공필이었다.

    노공필에, 고개를 조아린 윤덕이 말했다.

    “신이 본국을 떠나오기 전에 5천의 군대를 부린다는 말들이 조정에서 나왔으니 변화가 없다면 5천의 군대로 대해를 넘을 듯 하옵니다.”

    쾅!

    “뭐라, 5천!”

    방금 전까지 싱글벙글이던 주후조가 바닥을 거세게 내려치자 역시나 윤덕은 흠칫거렸다.

    ‘당최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감이 안 잡혔다.

    시시덕거리다가 갑자기 화를 내시니, 이건 뭐 상왕 전하를 보는 것 같은······.

    크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5천의 군대를 상정한 것은 황제 폐하의 심기를 거스리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황은을 지키고자 함에 있는 것이오니 부디 폐하께오서는······.”

    성격이 지랄 맞건 아니건.

    일단 황제가 화가 난 건 분명해 보인다.

    화의 원인을 지레 짐작한 윤덕은 구구절절히 변명을 이어나갔다.

    황제가 그 말을 잘라내기 전까진.

    “이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인가!”

    “···?”

    “아무리 유구국이란 나라가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 나라에 사직이 세워진지 족히 수백년은 지났는데 그런 나라를 고작 5천으로 토평하려 하니 과연 그대의 전왕은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어안이 벙벙해진 윤덕은 무례란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 한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 참으로 당세의 호걸이요, 풍운아다. 내 당세의 호걸을 알아보지 못 하고 있었으니 이는 짐의 부덕이다. 안윤덕이라고 했더냐?”

    털썩!

    “그,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래, 너희 왕이 친정을 나갈 때 나가더라도, 왕이 무재가 있지 않다면 그 5천의 군사를 지휘하는 일은 벅찰 텐데, 이를 대신하여 전장에 나아가는 장수는 누구인가?”

    대답은 대국에 와서도 넌씨눈 기질이 발동한 노공필했다.

    “저희 전하께서 친히 나가셔서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쾅쾅!

    움찔!

    “친히?”

    “그, 그렇나이다!”

    “이런 호탕한 왕을 내 어찌 이리도 무시하고 홀대를 했었단 말인가. 짐이 생각건대 너희 왕은 그 용맹함이 고금의 호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군사를 일으켜 유구를 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도 이리 사신을 보내왔으니 그 충심은 또 어떠한가. 여봐라!”

    라고 주후조가 소리치자, 공필과 윤덕에게는 익숙한 환관이 들어왔다.

    일전에 칙사로 온 적이 있는 김환동이었다.

    “불러 계시옵나이까, 폐하.”

    “표방(정덕제가 지은 동물원)에 그 아름다운 꽃이 아직도 있더냐?”

    “아, 예. 그렇사옵니다.”

    “그 꽃을 조선왕의 충심과 용맹을 치하하는 차원에서 선물할 것이니 그리 알라.”

    김환동이 읍을 하고 물러갔고, 주후조는······.

    “너희 왕은 어떤 왕이냐?”

    “그게 어인 말씀이시온지······.”

    “혹 너희는 파오(包)를 아느냐?”

    “북적들이 사용하는 가옥이 아니옵니까?”

    “맞다, 북적들이 쓰는 천막 가옥이지. 나는 가끔 피곤함이 도지거나 활기를 잃으면 그 파오에 머물러 생활한다. 이리 생활하면 피곤함이 금세 가시고, 활기 또한 금세 되찾게 되는데 내 좋아서 하는 일도 중신들은 모두 기행이라 수군거린다. 한데 너희 왕의 일화를 듣고 나니 너희 왕도 혹 이런 기행을 일삼는가 해서 물어본 것이다. 어떠하냐?”

    기대 어린 표정의 주후조에 윤덕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행하면 또 상왕전하만한 분이 없으시지 않던가.

    윤덕이 융의 기행을 하나, 하나 언급하자 주후조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그리고.

    쾅쾅!

    주후조는 전매특허라도 된 양 미친 듯 바닥을 내려쳤다.

    “윤허한다! 윤허하고 말고! 너희 전왕의 정벌도 윤허하고, 이번에 왕위에 오른 너희 왕 또한 내 책봉할 것이다! 여봐라!”

    역시나 김환동이 후다닥 뛰쳐나왔다.

    “예, 폐하.”

    “이번에 유구국에서 온 사신 놈들이 아직 있더냐?”

    “그렇사옵니다.”

    “내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건대 조선이 내게 거짓을 고할 까닭이 없어 보인다. 놈들이 이간책으로 날 기만하였으니 어찌 놈들의 면상을 하루라도 더 볼 수 있겠으며, 하루라도 더 황성에 머물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냉큼 쫓아내버려라.”

    “하, 하오나······.”

    “냉큼, 냉큼, 냉큼 쫓아버리라지 않는가!”

    “···예, 폐하.”

    김환동이 물러가자 주후조는 언제 역정을 냈냐는 듯 히죽거리며 윤덕과 공필에게 다가왔다.

    “내 너희에게 표방을 구경시켜 주고 싶구나. 짐의 표방이 어떠한지 두 눈으로 똑똑히 담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 너희 전왕에게 표방이 어떠했는지 감상을 가감없이 토하도록 하라.”

    ***

    그 시각, 도미쿠스쿠 순찰사영.

    “이래도 될는지 모르겠사옵니다, 대감.”

    멀리 궁성을 바라보던 소기파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그래도 저희 손으로 구한 나라이옵고··· 또, 대국에서도 황제 폐하가 어찌 나오실지 모르고······.”

    “평소에는 괄괄한 위인이 이 무슨 나약한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우리 손으로 구한 나라라 한들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황제 폐하가 어찌 나온다 한들 황명이 어명보다 위에 있진 않으니 우린 명을 받잡으면 그만인 걸세.”

    얼마 전, 비답을 실은 연락선이 도착했다.

    켕기는 게 많은(?) 유구국왕은 혹시 모르니 연락선을 샅샅이 뒤졌지만 국왕이 우려하는 화기나 병기가 들었을 리는 만무했다.

    비답은 고스란히 계동의 손에 전달됐다.

    「내 군사를 일으켰으니 항구에서 소란이 발생하면 즉시 거병하여 거점을 확보토록 하라.」

    너무 간단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의 비답이었다.

    이 비답을 받은 이후로 계동은 순찰사영의 망루에 올라 늘 항구 쪽을 바라봤다.

    바닷길이란 게 육로와는 달리 변화무쌍하다 보니 근왕군이 오늘 당도할 수도 있는 일이고, 내일이나 모레 당도 할 수도 있는 일이며, 어쩌면 다음 달에 당도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상황이 언제 발생하든 때에 맞춰 호응해야 했다.

    유구국왕의 태도가 한결 같았다면, 그럼 모르겠다.

    마음 한켠에 찝찝함이 남았을지도.

    하지만 유구국왕의 태도는 일관적이지 못 했다.

    의리만 보더라도 조선군을 이리 박대 할 수는 없는 건데, 거기다 도발까지 감행하고 있다.

    그 수에 말려 들어가는 순간, 할양한 순찰사영을 무력으로 빼앗아버리겠다는 얕은 수였다.

    거기에 더해 명나라에는 사신까지 줄창 보냈다.

    외교적으로 선수를 치겠다는 말이니 괘씸하기가, 왜놈들 보다 더 할 지경이었다.

    제아무리 사람이 간사할 수 밖에 없다지만, 국가 간의 일에 이리 간사하게 구는 건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이리저리 도발하며 간을 보고 있지만, 유구국왕이 명에 보낸 사신이 무슨 말을 황제께 전달했을지 모른다.

    만약 조선군이 무력으로 점령을 했고 이를 몰아내겠다는 이간책을 사신을 통해 전달했다면, 그래서 만약 황제의 윤허를 득했다면 그 순간 군대를 일으킬지도 몰랐다.

    그리되면 고립된 형국의 순찰사군은 지리멸렬이다.

    살기 위해서라도, 수하들을 무사히 고국으로 돌려 보내기 위해서라도 연락선의 비답대로 상황이 발생하면 호응해야 한다.

    단번에 군사를 소집하고 항구로 달려나가, 상륙을 저지하는 유구군을 도륙한다.

    이 일에는 한치 망설임도 없어야 했다.

    “좌우지간, 마음 약한 소리 마시게. 왕이 자초한 일이니.”

    “알겠사옵니다.”

    그 후 한참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 쪽에서 이변은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아닌 듯 싶사옵니다.”

    계동이 고개를 끄덕거리려던 그때였다.

    저 멀리 항구 쪽에서 섬광 같은 게 번쩍였다.

    “전하께서 당도하셨네! 속히 전고를 울려 군사들을 소집하게!”

    “예!”

    소기파가 달려나가 전고를 울렸다.

    둥! 둥! 둥!

    사전에 고지한 신호였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군사들이 한달음에 달려나왔다.

    애당초 모두들 무더운 날씨에도 갑주를 벗지 않은 채 생활 했기 때문에, 따로 준비할 시간조차 필요 없었다.

    “진군하라!”

    황급히 부관이 내어온 말에 오른 계동은 항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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