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95화 (29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95화>

    ***

    형님의 출정식과 모내기 금지의 존폐.

    사실 후자가 더 무거운 사안이었다.

    모내기 금지의 존폐에 대한 사안은 관개 공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수년간에 걸친 그 관개 공사 말이다.

    이 관개 공사는 수년간 계획되고 시행되어온 국책이었다.

    나라의 백년대계를 세우기 위한 초석인 셈이었지.

    관개 공사가 진행되는 삼남에서는 3년이 넘도록 부민들이 무급 노동으로 동원됐고, 그 기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조정에서는 관노들까지 충원시키는 열의를 보였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후자가 더 무거운 사안인 셈이지만 그나마 뭐가 제일 가벼운 사안이냔 내 질문에 허침 할아버지가 모내기 금지의 존폐가 더 가볍다고 대답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모내기 금지 존폐 논의는 사실상 반시진도 안 걸려서 후딱 끝났다.

    관개 공사란 정책 자체가 모내기를 장려하기 위한 정책인데, 관개 공사의 첫 삽을 뜰 때면 모를까 이미 이곳저곳에서 완공됐다는 보고가 접수(?)될 즈음에 모내기법을 반대할 위인이 어딨겠나.

    결국 반시진도 안 걸려서 삼남에 한해 모내기 금지를 폐지한다는 교서를 반포하자는 결론이 도출됐다.

    자, 그럼 형님의 출정식이 왜 무거운 사안인 거냐고?

    “전례에 있는 일입니까?”

    “전례에 있는 일일 리가 없지요······.”

    “흠. 형님 바람대로 했다가는 백성들한테 개족보란 소리 듣기 딱 좋겠는데······.”

    내가 보위에 오른 뒤로 틈만 나면 내 말투를 지적하던 김전도 이번 만큼은 내 말투를 지적하지 않았다.

    김전도 낄까빠빠다.

    낄 데 까고, 빠질 때 빠지는 낄까빠빠.

    “하지만 상왕 전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일이신데······.”

    “아니,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형님께 부월을 하사 합니까?”

    “···”

    형님의 바람.

    아닌 게 아니라 형님은 대장군으로서 출정하고 싶어하셨다.

    지난 날 오키나와에 파병(?)을 갔던 대장군 이융으로서 말이지.

    그게 어쨌나 싶지?

    지난 번에는 그나마 형님 본인이 대장군 이융에게 부월을 하사해서 출정을 하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어떻게 변했나?

    내가 왕위에 오르지 않았나.

    본인이 본인에게 부월을 하사 한 일은 기행이라 칠 수 있지만, 이번 건 좀······.

    “차라리 상왕 전하께서 바라시는대로 성대하게 치르심이 어떻겠사옵니까?”

    김전은 참 헷갈리는 위인이다.

    대부분의 일에 보수적인데 또 가끔은 이렇게 진보적일 때도 있다니까.

    “전례에도 없다면서요.”

    “그렇긴 하지만, 다른 수도 없으니 도리가 있겠사옵니까?”

    “그랬다가는 백성들 보기 낯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 수준이 아닌데, 이건.”

    “하지만 이번 출정은 전하의 출정이 아니라 과연 남해정토 대장군의 2차 출정이 아니겠사옵니까? 상왕께서는 남해정토 대장군으로서 활약하시면서도 휘하의 장수들에게 절대 전하라 부르지 말고, 장군이라 부르게 했다 하니 과연 그 기행은 쉬쉬한다고 쉬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남해정토 대장군의 2차 출정이라는 생각으로, 에··· 출정식을······.”

    의견을 개진하던 김전도 말을 하고 보니 혀가 꼬이는 모양이다.

    그럴 테지.

    제 입으로 말하고도 이게 말인가 방군가 싶을 테니까.

    “나도 대사헌의 말처럼 형님이 원하시는대로 후딱 출정식 치뤄버리고 싶습니다. 근데 이게 또 문제가 있는 게, 대장군으로서 출정식을 치르면 이건 임금의 친정으로 봐야 합니까, 대장군의 친정으로 봐야 합니까?”

    “그야 대장군의 출정으로 봐야지 않겠사온지······.”

    상왕이 대장군으로 출정, 대장군은 사실상 상왕.

    이 말장난에 가까운 기행을 위한 출정식에 부월을 하사하는 순간에는 대장군, 그러나 사실상 상왕.

    ‘아, 몰라.’

    나는 익선관을 내던지고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고민한다고 결론이 나올 사안 같지가 않다.

    “뭐, 그럼 경들도 딱히 반대하진 않는 것 같으니까 형님의 바람대로 치르지요. 백성들이 보고 손가락질 할 수 있으니 백성들은 최대한 불참시키구요.”

    본인들도 어찌해야 할지 모를 일을 내가 대신 처리해줘서였을까.

    김전을 필두로 대신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성상의 전교가 참으로 지당한 전교이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당구각을 만들길 참 잘 한 것 같다.

    적절한 워라밸이 이뤄져서 시간이 잘 갔다.

    벌써 날이 흐르고 흘러서 출정식이 있기로 한 9월 28일의 날이 밝은 것이다.

    나는 출정식을 위해 보훈청으로 행차했다.

    내가 임금이 되고 나서, 이런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이었는데 거짓말 않고 백성들이 족히 수만은 모인 것 같았다. 정치인들이 선거 유세때, 소위 지지자들의 유세뽕 맞고 현실감을 잃어버린다는데 왜 그런지 대충 알 것 같다.

    보훈청에서 간단한 의식이 있고 나서는 출정식이 진행됐다.

    출정식이란 게 으레 그렇듯 특이점이랄 건 없지만 진짜 중요한 대목은 여기서부터다.

    “그럼 상왕 전하께서 대장군이신 건가?”

    “상왕 전하는 상왕이신데 대장군은 또 무슨 말인가?”

    “금상 전하한테 부월 하사 받으면 대장군으로서 나가는 거니까, 상왕 전하가 아니신가? 아닌데, 그럼 상왕 전하는 어떻게 되시는 거지? 대장군이신 건가?”

    “무슨 말인가, 대체?”

    ···백성들의 수군거림에 만인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쪽팔리다.

    이 상황은 뭐랄까··· 적절한 비유가 생각이 안 날 만큼 얼탱이 없는 상황이다.

    굳이 있다면···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이 있는데, 교장 선생님이 학생 신분으로 훈화 말씀 듣는다는 것과 비슷하려나.

    쪽팔리기 그지 없고 이 상황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그러러면 진행하고 있는 출정식을 속개해야 했다.

    “···이백돌은 앞으로 나오라.”

    라는 말에 출정식에 참여한 문무백관 모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돌렸다.

    당당한 건 오직 이백돌 뿐이었는데, 이백돌이 누구냐.

    “신 남해정토 대장군 이백돌! 전교하소서!”

    형님이시다.

    이융이 상왕의 인격체라면 이백돌은 대장군의 인격체다.

    형님은 아예 컨셉을 이쪽으로 잡으신 것 같다.

    근데 뭐 어쩌겠어.

    민망한 건 너희의 몫일지 몰라도 본인께서 그렇게 해달라고 하시는데.

    “그, 뭐더라······.”

    갑작스레 쏟아진 눈총들에 당혹했다.

    예문관에서 글을 써준 게 있는데 그 글들이 눈에 안 들어온다.

    제길.

    “에, 그··· 오키나와 왕은 참으로 무도하도다. 우리 상왕 전하와 신의로 약조한 게 있었는데, 지금 그 신의를 헌신짝 버리듯 버려버리고··· 저기, 우리 군사를 핍박하려고 하고 있으니 내가 차마 그 꼴은 못 보겠다.”

    “···”

    “곡절이 이런고로 경을 남해정토 대장군에 임명하여 무도한 무리를 무력으로 토평코자 하니 경은 나의 명을 신명처럼 받들어서 적진으로 나아가되, 나의 군사들이 상하는 일이 없게 하고, 혹 나의 군사들이 상하는 일이 있다면 곱절로 되갚아주어라. 그리하여 마침내 적도들을 굴종시키라, 이상.”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축에도 못 끼는 지루한 연설을 하고 나자 곧바로 군가가 터져나왔다.

    원래라면 당연히 아악이 연주됐어야 하겠지만 이번 출정식은 오로지 형님을 위한 출정식이다.

    당연히 군가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핫, 둘!”

    “너와 나! 종묘 지키는~ 성은에 살았다~!”

    형님이 가장 좋아하는 진짜 사나이였다······.

    군가까지 불러지자, 이 쪽팔림을 도저히 감수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무리 지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물론, 들뜰대로 들뜬 형님은,

    “전하께서 보고 계시니 목청이 터지도록 군가하라!”

    내 뜻을 곡해하셨다.

    후대에 형님과 나는 쌍쌍바로 취급되겠지?

    ‘휴.’

    ***

    유구국.

    “도미쿠스쿠 쪽의 움직임은?”

    어좌에 자못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던 쇼신이 물었다.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고 있사옵니다.”

    “이계동이 움직여줬더라면 그만한 명분이 없었을 텐데··· 의외로 신중한 인사였던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쇼신이었다.

    수차례 도발을 감행했지만 도미쿠스쿠의 조선군은 꿈쩍도 않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였더라면 여러모로 명분을 살 수 있는 일이었는데 아쉽다.

    “본인들의 나라가 아니니 신중을 기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한 번 더 도발을 해봄은 어떤가? 살짝만 건드리고 빠진다면 이번에는 반응을 할 것도 같은데······.”

    “하오나 이미 4차례였사옵니다. 자칫 또 한 번 도발을 감행했다가 조선군이 정말 궐기한다면 비록 그 수는 현저히 달리나 모두 정예이니 우리 군의 피해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들을 도미쿠스쿠에 머물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쇼신은 도미쿠스쿠의 조선군이 신경써였다.

    물론 처음부터 신경이 쓰였던 건 아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그들의 주둔이 반갑기까지 했다.

    한차례 왜구의 침략으로 아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패퇴를 거듭했고 일부는 왜장에게 투항하는 일도 발생했다.

    조선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왜구 무리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임금의 권위가 실추 됐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면 할거(割據)하려는 호족들을 가까스로 억제시키고 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왕권이 실추 됐으니, 언제 들고 일어나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형국이었다.

    다만 조선군이 주둔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성씨족들도 감히 함부로 들고 일어나진 못 할 테니까.

    하지만 조선군의 주둔이 반가웠던 건 초창기 때 뿐이었다. 이미 조정의 혼란은 얼추 수습이 됐다.

    반기를 들 만한 자들은 보이지 않았고, 좋든 싫든 전후 복구에 힘을 쓰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런데 조선군이 떡 버티고 있으니 이게 보통 눈엣가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혼란한 상황 때문에 미처 신경 쓸 겨를도 없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보니 이는 마치 집 안에 호랑이를 들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조선군을 이용해 왕좌와 왕권을 지켜낸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조선군 때문에 왕권이 실추 된 것도 사실이다.

    왕이 막아내지 못 한 외세를 조선군이 막아냈으니까.

    그래서 결국 직할지를 할양해줬어야 하니까.

    더구나 저들은 철두철미했다.

    쇼신은 저들이 도미쿠스쿠에 머물며 사고 한 번 쯤은 칠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저들을 지휘하는 이계동이 어찌 단속하는지는 몰라도, 조선군에 의한 사고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차라리 사고라도 발생했다면 여론을 선동해 몰아내기라도 할 텐데, 사고가 한 건도 없으니 쇼신으로서는 답답 할 수 밖에.

    더군다나 듣기로 도미쿠스쿠 일부 지역에서는 조선군을 칭송하는 백성들도 있다 하니 이대로는 원활한 통치가 불가하다.

    “조금만 기다리시옵소서. 우미가 상국에 사신으로 갔으니 조만간 희소식을 들고 돌아 올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물론이옵니다.”

    쇼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조선군이 물러나는 건 시간 문제다. 초조해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설마 조선왕이 전쟁이라도 일으키겠는가?

    ‘그건 있을 수 없지.’

    왕도 결국은 위정자다.

    위정자는 득실과 명분을 따진다.

    쇼신이 조선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도 결국 위정자인 그의 입장에서 득이 되기 때문이지, 실이 됐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반대로 조선왕도 마찬가지다.

    이번 일로 득실을 따지려 들 테고, 그 득실에는 전쟁이라는 강수도 포함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전쟁을 일으킨다 한들 무슨 득이 되겠는가?

    안전 장치로 올해만 두차례나 사신을 보내놨다.

    설령 조선왕이 전쟁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금방 명나라에서 중재를 하려 들 것이다.

    조선왕 역시 이를 거역 할 순 없을 테고, 울며 겨자 먹기로 회군하겠지.

    그리되면 모든 게 태평해진다.

    유구는 다시 예전과 같은 평온을 찾을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도미쿠스쿠에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면 즉시 이르게 하고, 명에서 사신이 돌아오는대로······.”

    쇼신이 바로 다음 지시를 이어나가던 그때였다.

    “크, 큰일 났사옵니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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