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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94화 (29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94화>

    ***

    약간 당황한 허침은 머잖아 입을 열었다.

    “공사천이 신선을 사모하는 일은 그저 마음에 방탕함을 얻고 절제를 잃는 일일 뿐이지만, 제왕이 신선을 사모하여 그 신선의 자취를 찾으려 하는 것은 나라가 방탕함을 얻고 절제를 잃는 일이옵니다. 저하의 말씀처럼 세간에 신선이 있다는 허망한 말들이 나돌긴 하옵니다만, 무제도 결국 허망한 신선술을 믿어 천고에 이르도록 후인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지 않겠사옵니까. 제왕은 사사로운 말들은 삼가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옵나이다.”

    “아······.”

    “진정한 제왕은 굳이 신선의 도나 방사의 설에 얽매일 필요가 없사옵니다. 부왕을 보시옵소서.”

    “아바마마 말인가요?”

    “그렇사옵니다. 부왕께서는 어떤 변덕을 부리셔도 위태롭지 않게 보이시고, 낮은 자세를 취하셔도 높게 보이시니 이것은 바로 부왕의 큰 덕에 있는 것이옵니다. 이처럼, 제왕이 높아도 위태롭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부왕처럼 저절로 귀함을 지킬 수가 있고, 차도 넘치지 않게 하면 부를 지킬 수가 있으니 이야말로 중용의 치(治)라고 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다만 이를 조금이라도 어기게 된다면 그 화는 사직과 신민이 입게 되는 것이니 저하께서는 각별히 유념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이제 조금 알겠습니다.”

    허침은 깨우쳤다는 표정의 세자에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본시 신선과 방술의 요사한 행위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 요망한 술책은 기이하여 사람의 눈을 사로 잡사옵니다. 누군들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겠사오나 특히 세간에 신선이 있다는 둥··· 신선에게 목숨을 구명 받았다는 둥··· 하는 것들은 모두 미혹한 소리이오니 한 귀로 흘려 보내소서.”

    “그리 하겠습니다. 한데 궁금한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말씀하시옵소서.”

    “신선의 도라는 것은 결국 자연의 조화에 어긋나기 때문에 미혹한 일이라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 할 수가 있겠나이다.”

    “그럼 우리 숙부 전하께서 열기구를 띄운 것은 신선의 도입니까, 자연의 조화입니까?”

    허침은 말문이 막혔다.

    막혔지만 제자의 호기심에 어버버- 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 그건 전하께오서 말씀하시기를, 음양의 기운을 사람의 손으로 잘 다스린, 일종의 자연의 조화라 하였으니 액면 그대로 천지만물에 깃든 자연의 조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비가 내리는 일을 보고 요사한 행위라 하진 않으니 어찌 신선의 도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지만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건 신선의 도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긴 하오나··· 그 원리란 결국 자연의 조화를 이용한 것이니 어찌 신선의 도겠사옵니까?”

    “음.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요?”

    “예.”

    “제가 듣기로 숙부 전하께서 북행랑을 뜯어서 당구각이라는 곳을 설치 했다고 들었는데 이는 제왕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인가요, 제왕의 도리에 부합하는 일인가요?”

    허침은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대단한 호기심이시다.

    당구각이란 곳은 결국 제왕의 놀음을 위한 곳이다.

    제왕의 놀음이란 제왕으로선 지극히 삼가야 할 행태지만, 사냥처럼 민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니 사실상 열기구가 신선의 도냐, 자연의 조화냐, 물은 세자의 질문처럼 애매모호한 일이었다.

    “에······.”

    “···?”

    “제왕의 도리란 중용에 있사옵니다. 너무 정사에만 매진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롭지 못 한 일이니 민폐를 끼치지 않는 선이라면 어찌 제왕의 도리에 어긋난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결국 허침은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여담이옵니다만, 저하께서는 특히 더 몸가짐을 바르게 하셔야 하옵니다. 지금 저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라 이런저런 것에 관심이 생기실 것이옵니다. 하지만 제왕의 학문을 지금 갈고 닦지 않으면 결국 나중에 그 피해를 입는 것은 백성이니 저하께서는 지금처럼만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학문에 임하소서.”

    “그러겠습니다.”

    방긋 웃는 세자에 허침도 덩달아 방긋 미소 지었다.

    세자는 확실히 왕재가 탁월하다.

    이대로 잘만 자란다면 훗날 성군이라 불려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분이다.

    ‘부디 이대로만 자라주시길······.’

    허침은 할아비가 손주를 생각하는 그것처럼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물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간과한 채.

    “저하.”

    동궁내관이었다.

    “무슨 일이냐?”

    “의 도령께서 찾아오셨사옵니다.”

    “개똥이가 왔단 말이냐?”

    “예.”

    “알았다, 내 곧 간다고 전하거라.”

    “알겠사옵니다.”

    동궁내관이 물러가고, 어안이 벙벙한 허침에 황이가 말했다.

    “석강도 마침 끝이 났으니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개똥이가 왔다네요.”

    “저, 저하! 신이 아까 한 말은······.”

    “제왕의 도리란 중용에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너무 정사나 학문에만 매진해도 그건 그것대로 이롭지 못 한 일이니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논다고 잘못될 게 있을까요?”

    “···”

    “그럼.”

    꾸벅 인사를 올리고 자선당을 빠져나가는 황이였다.

    ***

    당구장 하면 자장면이란 공식이 반세기 가깝게 이어져내려왔지만, 그 공식도 나라는 대단한 수학자에 의해 바뀔 것 같다.

    앞으로는 당구장 하면 냉면이란 공식이 성립되겠지.

    후루룩-.

    그만큼 당구각에서 먹는 냉면은 맛이 기똥찼다.

    이건 뭐랄까··· 이게, 설명이 안 되네.

    당구장에서 자장면 먹는 맛 하고는 다른데··· 굳이 꼽자면 한겨울에 노천탕에 몸 담근 느낌?

    밖은 영하의 날씨지만 탕 안은 팔팔 끓고 있는.

    거기다가 사이드 메뉴로 만두까지 곁들이니 낙원이 따로 없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다니까?

    덕산이랑도 벌써 몇 게임을 했는지 모르겠다.

    현호로 살 때는 2~3게임만 하면 지쳤는데 지금은 최소 5게임은 했음에도 지치질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에너지가 솟구친다.

    처음에는 별 흥미를 못 느끼던 덕산이도 점차 길이 보이는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계속 하자고 보챌 정도다.

    그런 와중.

    “세자랑 개똥이 왔구나?”

    개똥이와 황이가 찾아왔다.

    어쩐 일이냐고 물으니 둘이서 놀다가, 내가 당구각이라는 놀이터를 만들었단 걸 궁인들한테 듣고 찾아왔단다.

    “밥은?”

    “저는 안 먹었는데요. 세자 저하는 먹었다고 해가지고 지금요. 박 내관이 밖에 가서 엿 사온다고 했는데 저는 엿 안 먹는다 해가지고······.”

    슬슬 존잘남의 태가 보이는 개똥이지만, 말투는 여전하다.

    그나마 이것도 고쳐진 거다.

    요새는 횡설수설을 2절까지 밖에 안 하는데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4절까지 해댔었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궁녀1에게 냉면 두 그릇하고 만두 좀 더 가져오라 말했다.

    “근데 스승님 뭐하시는 거예요?”

    한참 덕산이랑 게임 중이었다. 궁녀가 나가고 큐를 잡자마자 개똥이가 묻는다.

    그러고 보니 내가 보위에 오르고도 변함없이 구는 사람이 또 있었다.

    개똥이.

    이 녀석은 아직도 날 대감이라 부르거나 스승님이라 부른다.

    물론 내가 그러라고 시켰다.

    솔직히 개똥이한테까지 전하라고 불리면 낯간지러워서 못 참을 것 같아서.

    “이거?”

    “네.”

    나는 호기심 충만한 개똥이에게 당구를 설명해줬다.

    막대기로 공을 굴리고, 굴러간 공이 또 다른 공을 맞추면 점수를 얻는다는 부분에서 흥미를 느꼈을까?

    녀석은 내 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내 큐를 건네고 치는 방법을 설명해줬다.

    멀뚱멀뚱 있는 황이도 내심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함께.

    “자, 이렇게 해서······.”

    타악.

    “이게 재밌는 거예요? 별 재미 없어 보이는데.”

    개똥이는 금방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하기사, 당구란 게 처음 접하면 재미 있을 수가 없다.

    이건 쳐봐야 안다.

    한 번 쳐보면 괜찮은데? 했다가 두 번째 치면 그 헤어나올 수 없는 늪으로 빠져 드는 거지.

    “둘이 한 번 쳐볼래?”

    흥미를 잃은 개똥이에게 괜한 오기가 일어 큐를 건넸다.

    잠시 고민하던 개똥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황이는 별 생각없이 덕산이에게 큐를 받아든다.

    ***

    “제대로 빠진 모양이군.”

    나는 내 앞에 멀뚱멀뚱 서있는 동궁 내관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딱히 동궁 내관을 비난한 건 아니지만, 내관은 본인이 다 민망한 지 괜히 고개를 조아렸다.

    여담인데, 이런 거 보면 참 내가 왕이 됐다는 거 실감해.

    내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다가 몸짓 한 번, 손 짓 한 번에 각기 다른 반응들을 보이니까.

    “불허하겠네.”

    “아뢰옵기 송궁하오나 전하.”

    “말하게.”

    “신이 저하를 뫼신지 이제 5년이 되었사온데 저하께오서는 상왕 전하께도 두 번 씩이나 청을 올린 적이 없나이다. 하물며 지금 금상 전하께는 세 번 씩이나 청을 올리고 있으니 오죽한 마음이겠나이까? 신은 동궁에 속해서 국본을 뫼시는 몸이니 감히 죽음을 무릅 쓰고 아뢰나이다.”

    이름이 박 뭐시기였던 것 같은데, 저 내관의 충정은 높이 사겠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아니, 어제는 서연도 빼먹었다며?”

    “그건······.”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하문하소서.”

    “세자가 서연 빼먹은 적은 병 날 때 빼고는 없었다던데 이번에 개똥이랑 당구 치겠답시고 서연까지 빼먹었네. 그런데 비현각 서행랑에 당구각을 설치하게 해달라고?”

    “···”

    역시나 박 내관은 본인이 다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황이의 청.

    다름 아니라 당구각 설치를 윤허 해달라는 청이었다.

    보름 전, 우연히 당구를 접한 황이였다.

    밤이 늦도록 개똥이랑 당구를 치더니 여간 재미 들린 게 아닌지, 그 다음 날도 당구각을 빌려 달란다.

    호의로 빌려줬다.

    황이도 요새 제왕학 익힌다고 눈코뜰새 없이 바쁜 것 같기도 하고, 사적으로는 또 내 조카잖아.

    그런데 그 다음 날도 당구각을 쓰겠다네?

    그리고 그 다음 날, 다음 날, 다음 날··· 닷새 연속 당구장을 빌려서 개똥이랑 당구를 쳐댔다.

    오죽하면 이를 지켜보던 대신들이 황이의 비행을 나한테 떠넘겼을 정도였을까.

    황이는 딱 모범생 같은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만든 당구각에 폭 빠져서 닷새 연속 당구만 쳐댔으니, 대신들이 날 탓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난 억울하다.

    내가 즐기려고 만들었고 호의로 빌려준 것에 불과한데 왜 욕은 내가 먹냐구.

    여기까지면 말을 안 해.

    이틀 전에 황이가 찾아오더라고, 당구장 빌려달라는 말인 줄 알고 적당히 놀고 공부하라고 하려는데 글쎄, 서행랑을 일부 개조해서 당구장을 만들고 싶다네?

    불허했다.

    불허 할 수 밖에 없지. 가뜩이나 허구헛날 당구장 빌려달라고 찾아오는데 제 집 앞에 당구장 만들어줘봐, 얼마나 놀아 제끼겠어.

    내가 아무리 놀자왕이라지만 그건 용납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허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이 박 내관을 문안인사란 핑계로 보내놓고는 청을 한다.

    “안 된다고 전하게나.”

    황이에겐 미안하지만 아무리 내가 숙부래도 이건 어쩔 수 없다.

    나를 위해서라도 황이는 모범적인 제왕학 수업을 받아야 한다.

    잠깐의 일탈도 용납 할 수가 없다.

    그래야 1년이라도 더 빨리 선위를 할 수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당구에 폭 빠져봐.

    5년 왕노릇 하고 선위하면 됐을 일이, 10년 뒤로 미뤄질지도 모른다니까?

    이번 만큼은 눈 딱 감고 잔인해져야 한다.

    “···알겠사옵니다.”

    박 내관을 내보낸 나는 상선의 도움을 받아 편전으로 향했다.

    상참이 있었기 때문인데 박 내관 때문에 늦은 감이 있었다.

    과연 편전에 도착하자, 이미 와있던 대신들이 시끌벅쩍 떠들며 날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내가 도착하자마자,

    “전하, 신이 듣기로 저하께오서 당구각에서 놀음하는 일이 잦다 들었사온데 이는 나라의 형세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전하와 저하께서 천륜지간은 아니나 숙질(叔姪)의 관계이니 과연 따끔하게 질책을 하소서. 신은 저하께서 학문을 게을리 한다는 말을 요즘처럼 들은 적이 없었나이다.”

    대사헌 김전의 비난이 날아든다.

    나는 어제, 그리고 그제, 그리고 글피 전.

    했던 말을 또 반복 할 수 밖에 없었다.

    “과인이 부덕한 소치입니다. 알아 듣게 훈육하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뭐라고만 하지는 맙시다. 세자는 어린 나이부터 글을 깨우쳐서 지금에 이르도록 학문만 익히지 않았습니까.”

    “아비가 자식을 훈육하는 일에 회초리만한 것이 없사옵니다. 비록 사적으로는 숙질이라지만, 임금과 세자의 위치란 공사의 구분이 엄격해야 하는 법이옵니다.”

    “아, 거. 알았다니까, 그러시네. 오늘 안건은 뭡니까?”

    “상왕 전하의 출정이 스무일 뒤이온데, 이를 약식으로 치룰지 정식으로 성대하게 치룰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옵고, 다음으로는 모내기 금지의 존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나이다.”

    코를 긁적거렸다.

    “그나마 뭐가 제일 가벼운 사안입니까?”

    “후자이옵니다.”

    “후자부터 하지요.”

    오늘 하루도 스트레스 왕창 받는 하루가 될 것 같다.

    일 끝나면 바로 덕산이 불러서 당구 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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