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92화 (29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92화>

    ***

    “으음. 어떤 게 괜찮으려나.”

    결장이 도져버렸다.

    어떤 결장이냐면······.

    1. 선온공주(善溫公主)

    2. 의온공주(懿溫公主)

    3. 의덕공주(懿德公主)

    4. 선의공주(善懿公主)

    5. 숙의공주(淑懿公主)

    신배의 공주 책봉시 호(號) 리스트다.

    처음 리스트에 올라갔던 게 20개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줄이고 줄여서 5개다.

    그런데도 뭐가 좋을지 결정을 못 하겠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2번이나 5번이 마음에 들긴 한다.

    아름다울 의에 따뜻할 온, 의온공주.

    맑을 숙에 아름다울 의, 숙의공주.

    여울이는 의온공주가 괜찮겠다는데 의온공주로 정하자니, 숙의공주가 좀 아쉽고··· 숙의공주로 냉큼 정해버리자니 반대로 의온공주가 또 아쉽고.

    뫼비우스의 띠 같은 고민 중이다.

    “밖에 복금이 없느냐?”

    한참을 고민하다가 지밀나인 복금이를 불렀다.

    복금이는 어제 저녁 수라 받다가 이름 물어봐서 알게 된 아이다.

    “불러 계시옵니까, 전하?”

    “너는 이중에서 어떤 게 괜찮은 것 같으냐?”

    리스트를 훑어보던 복금이 화들짝 놀라 부복했다.

    “소, 소녀가 어찌 감히······.”

    “괜찮아, 편히 골라봐. 어떤 게 입에 착착 달라 붙느냐?”

    “주,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내가 널 왜 죽여? 편히 골라보라니까.”

    죽여달라는 복금에, 괜찮다며 재촉하자 복금이 마지못한 척 입을 열었다.

    “소, 소녀는 의온공주가 입에 달라 붙사옵니다.”

    “그래?”

    “예, 전하.”

    “알았어, 가 봐.”

    복금이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래, 의온공주로 하는 게 좋겠다.

    숙의공주가 조금 아쉬워지긴 하겠지만, 여울이도 의온공주라는 이름을 더 마음에 들어하니 그게 좋겠다.

    “그럼 의온공주로.”

    나는 나머지 리스트들은 모두 화로에 태웠다.

    괜히 리스트를 남겨놨다가는 결장이 무한반복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 온다! 온다, 와!”

    그렇게 리스트들을 화로에 넣을 즈음.

    나는 배를 움켜잡은 채 방긋 미소 지었다.

    실성해서 그런 건 당연히 아니고, 신호가 온다.

    측간 가라는 신호!

    원래 사람이 극도의 긴장을 하거나 낯선 환경에 가면 똥을 못 싸잖아?

    내가 즉위하고 지난 사흘 동안 그랬다.

    사흘을 내리 똥을 못 쌌다고, 근데 드디어 신호가 온다.

    드디어 말이지.

    “매화틀, 매화틀!”

    측간 가라는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어버릴까봐 쿵쿵 뛰면서 소리치자, 밖이 부산스러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복이나인 몇 명이 매화틀을 대령해왔다.

    대령은 해왔는데······.

    “너희는 왜 안 나가는 것이냐?”

    “어인 말씀이시온지······.”

    “일 봐야 되는··· 으헉! 빨리 나가거라!”

    “하오나 매화를 받아서 다시 나가야 하온데······.”

    “똥을 왜 받아 나가!”

    “내의원에 가져가야 하옵니다······.”

    그게 뭔 개떡같은 말이냐고 자초지종을 묻자 내 똥을 가져가서 의원들이 그 맛을 봐야한단다.

    ‘왕이 된 남자, 그거 실화였어?’

    영화 왕이 된 남자에서 주인공이 똥을 나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누는 장면이 있다.

    영화적 설정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조선에서 생활한지 몇 년짼데 그런 것도 아직 몰랐냐고?

    아니, 내가 아무리 궁궐을 밥먹듯 드나 다녔다지만 형님이 똥 싸는 것 까지 일일이 확인 했겠냐고!

    “으흐억! 나, 나는 똥 맛 볼 필요도 없이 건강하니까 나, 나가거라!”

    “주, 죽여주시옵소서!”

    “너, 너희가 아, 안 나가면 내가 죽겠다!”

    나인들이 난처해하는 걸 보니 나가면 안 되는 모양이다.

    제기랄.

    뿌지지직-.

    어쩔 수 없이 나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저질렀다.

    수치심이 물밀 듯 밀려왔지만 나인들은 익숙한 반응이다.

    시원하게 일을 보고 나니 또 영화, 왕이 된 남자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보면 직접 닦아주려고 하던데, 그것만은 안 되지.

    “닦는 것은 내가 할 것이다!”

    그것도 안 된다고 말하던 나인들에, 호통을 쳐서 결국 뒤처리는 내가 했다.

    잠시 후, 나인들이 매화틀을 가지고 나갔고······.

    “···”

    나는 얼이 나갔다.

    이 미칠듯한 수치심을 앞으로는 평생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하다.

    “전하, 도승지 들었사옵니다.”

    넋이 나간 채 허공만 응시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권균이 입시했음을 알려왔다.

    굵은 똥을 쌌다. 냄새도 아주 지독했지.

    그 똥내를 다른 사람이 맡게 하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은 또 없다.

    똥내가 날까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드, 들라하라.”

    드르륵.

    “전하, 용안이 어두우시온데 혹 무슨 일이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슨 용건이죠?”

    “아, 그게 저잣거리에서 소란이 있었사옵니다.”

    “소란? 무슨 소란요?”

    “그게 입에 담기 망측하긴 하오나 상왕 전하께오서도 연루된 일인지라 아뢰지 않을 수가 없어서··· 크흠.”

    “뭔데요?”

    채근하자 권균이 내막을 털어놓는다.

    저잣거리의 소란이란 게 간단했다.

    형님, 예전에 했던 짓 또 하셨다.

    예전에도 그런 적 있었잖아, 기방에서 소란 피운 사람 포졸들이 잡아 들이고 나니 형님 이었던 적.

    왜 순순히 체포 당했냐고 물으니 한량들은 어떻게 체포되나 체험해보고 싶으셨다고 했던 적.

    비슷한 상황이었다.

    한량들하고 시비가 붙었고 포청에 끌려갔는데 입 다물고 계시다가 날이 밝은 뒤에 비로서 창경궁 상왕이라고 정체를 밝히신 거다.

    “아니, 형님은 언더커버보스도 아니고 왜 자꾸······.”

    “···어, 언더···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아, 아니예요. 계속하세요.”

    “여기서 상왕 전하께 무례를 범한 자들이 넷이온데 모두 포청에 있다가 금부로 압송을 시켰사옵니다. 어찌 하면 좋을지요?”

    “그건 빈청에서 논하게 하세요.”

    “아, 알겠사옵니다.”

    진짜 제기랄이다.

    형님은 꿀빨고 나는 물먹고.

    이게 뭐냐고!

    한숨을 내쉬던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도승지!”

    “예, 전하.”

    “우리 조카는 제왕학 잘 익히고 있습니까?”

    “아, 예. 신이 알기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는 거 아니니까, 절대적으로 공부 게을리 하지 말라고 전해주십시오. 그래야······.”

    그래야 얼른 선위 할 수 있으니까.

    뒷말은 꾹 삼킨 채 도승지를 내보냈다.

    도승지가 나가고 나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제 남은 건 하나다.

    세자 황이 나이가 지금 세는 나이로 열한살 정도니까··· 어디보자, 앞으로······.

    “스발! 못 해도 4~5년은 더 해야 되겠네.”

    ***

    원래 사람은 당하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형님의 처지를 새삼 느끼고 이해했다.

    나는 그나마 초창기 때 형님에 비하면 거의 놀고 먹는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도 이 정도인데, 형님은 얼마나 놀고 싶었겠냐고.

    나?

    내가 지금 엄청 놀고 싶거든?

    근데 놀지도 못 해.

    아, 물론 대신들이 반대하는 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힘들어서 놀질 못 하겠다.

    무슨 말이냐고?

    일평생 책상머리 앞에 앉아있던 교수가 갑자기 힘쓰는 일을 한다면 할 수 있겠어?

    못 하지.

    내가 그래.

    대군으로 띵가띵가 놀다가 왕이 되면서 하루 일과가 타이트해졌다.

    여러모로 긴장되는 상황이고, 예전에 비하면 여러모로 바쁜 일상들.

    왕으로 살면서 취미 생활 즐긴다는 건, 마치 군대에서 남는 시간에 자기계발한다는 말과 같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불가한 일이지.

    특히나 사냥이나 축구처럼 몸 쓰는 일이라면 더더욱.

    짬 좀 차고 왕 일이 익숙해지면 가능할지 몰라도 지금은 힘들다.

    그런데 모순되게 또 놀고는 싶어.

    “이 자식은 또 뭐라고 징징거려.”

    모순되는 감정에 애꿎은 상소에 분풀이를 하고 말았다.

    하··· 상소문.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것도 진짜 너무 힘들어.

    옛날에 형님이 모든 공문은 언문으로 작성케 해달라는 청을 들어주신 적이 있었는데 마음 같아서는 이 상소문도 앞으로는 언문으로 쓰게 하라 하고 싶을 정도다.

    짧으면 말이라도 안 하지, 무슨 논문 읽는 기분이라니까?

    촤락-.

    분한 마음에 읽던 상소문은 접고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누워있다 보니 출출하다.

    “밖에 복금이 있느냐?”

    “예, 전하.”

    “출출하구나.”

    왕이 되니까 이거 하나는 좋다.

    대군으로 살 때도 입 하나 벙긋 하면 계집종들이 알아서 밤참을 내어오긴 했지만, 어지간하면 그런 부탁은 잘 하지 않았다.

    부엌의 계집종들도 잘 시간은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여기는 거의 24시 교대로 대기한다.

    딱히 미안해 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특별히 분부하실 참이 계시옵니까?”

    “냉면이 좋겠구나.”

    “예.”

    잠시 후.

    살얼음 동동 띄운 냉면이 도착했다.

    냉면을 보니까, 고추장 양념 범벅 된 비냉이 먹고 싶어진다.

    비냉을 생각하니까 또 짜장면이 먹고 싶어지네.

    현호로 살 때는 돈 아까워서 잘 안 먹었는데, 여기는 넘치는 게 돈이어도 못 먹는다니······.

    그러고 보면 짜장면은 당구장에서 먹는 게 제일 맛있는데, 이 온면은 또 어떨 때 먹어야 제일 맛있······.

    “당구장?”

    내가 왜 여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사냥보다 덜 활동적인 취미 활동이다.

    역시나, 축구보다 덜 활동적이면서도 아주 건전한 취미 활동이지.

    이거 못 만드나?

    만들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벌떡!

    “밖에 게 아무도 없느냐!”

    “불러 계시옵니까, 전하.”

    “공조판서랑 그리고 호조판서랑··· 어, 일단 이 두 사람한테 패초를 보내서 입궐하도록 해라!”

    “정원(승정원)에는 무슨 용건이라 아뢰오면 되올지요?”

    “어명을 뭐 그리 시시콜콜 따진단 말이냐!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오라고 해라!”

    “에, 예.”

    ***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당한 공조판서 이계맹과 호조판서 이손은 피곤한 모습 대신,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강녕전에 들어왔다.

    묻지도 따지지 말고 오라는 어명(?)에 피곤함보다도 놀란 마음이 더 컸었겠지.

    “전하, 불러 계셨다고 들었사옵······.”

    “공판.”

    “아, 예. 전하.”

    “내가 이걸 좀 만들어볼까 하는데 어떻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두 사람이 오기 전에 스케치해둔 당구대와 당구공을 보여드렸다.

    공조판서는 이게 뭔 개소린가··· 그림을 살펴보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엇이옵니까?”

    나는 내가 기억하는 당구대와 당구공을 구구절절하게 설명드렸다.

    “그 당구대라는 것은 반석(盤石)을 갈아서 만들면 되긴 하겠사옵고 이 당구공이라는 것 역시 돌을 구체로 잘 갈아서 만들면 될 것 같긴 하옵니다만.”

    당구대는 돌을 평평하게 간다면 가능할 것 같다.

    근데 당구공은 돌을 갈아서 만들면 무게 때문에 큐대가 아니라 방망이로 쳐야 굴러갈 것 같은 느낌이다.

    “당구대는 무게가 얼마나 되던 상관 없지만 당구공은 좀 가벼워야 합니다.”

    “가벼운 거라면 나무로 만드는 건 어떨는지요? 안에 적당히 무게감 있는 걸 넣으면 될 것 같습니다만.”

    “나무구체 안에 뭘 넣어버리면 공이 굴러갈 때 무게 배분이 안 되잖아요.”

    “하오면······.”

    고민하는 이계맹 대신 이손이 답했다.

    “상아로 만드는 건 어떨는지요?”

    “상아요?”

    “예. 상아라면 적당한 무게감과 적당한 가벼움이 존재하니,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 당구공이란 것에 적합할 듯 하옵니다.”

    “오, 그래요?”

    “문제는 상아를 어떻게 동글게 갈아내냐는 건데······.”

    이번에는 반대로 이계맹이 답했다.

    “그거야 도공들이 도자기 빚듯 공을 빚으면 되는 것 아니겠소?”

    “도자기 빚듯?“

    옳거니!

    괜찮은 방법 같다.

    남은 문제는 큐대인데··· 초크랑 고무가 없으니 난감하지만, 이건 따로 대체재가 없다.

    재미는 좀 반감 되겠지만 없는대로 금속 막대기라던가 나무 막대기로 쳐야지 뭐.

    “그럼 한 번 시도들 해주세요.”

    “아, 예. 날이 밝는대로 알아 보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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