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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91화 (29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91화>

    ***

    눈을 떴다.

    다들 그런 적 있잖아?

    눈을 뜨자마자 꿈이라는 사실에 안도한 적들.

    내가 그랬다.

    아, 다행이다. 꿈이었다.

    그래, 요새 너무 시달렸더니 악몽을······.

    “전하, 상선이옵니다.”

    익숙한 음성에 허둥지둥 주변을 돌아봤다.

    “아······.”

    그리고 탄식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어보지만 현실이 꿈으로 바뀔리는 만무.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그래, 오늘은 왕으로 즉위한 지 딱 이틀째 되는 날이다.

    “무슨 일이세요?”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사시말(오전9시)이옵니다.”

    늦잠 자서 깨우러 오셨다는 말씀 같다.

    왕이라면 보통 5~6시에 일어나야 하니까.

    “아, 네.”

    “아침 수라는 어찌 대령 하오리까?”

    수라라는 말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 수라라는 말에 또 한 번 왕이 된 게 실감이 난다.

    잠저에 있을 때는 계집종들이 진지라고 표현들 했찌, 수라라고는 안 했으니까.

    잠시 동안 먹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오늘은 왕이 된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어제는 귀신에 홀린 듯 즉위식 뚝딱 치르고 왕이 됐으니 진짜 왕이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이튿날인 오늘은 진짜 왕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모든 게 낯설고, 모든 게 부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을 터.

    배라도 든든하게 채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지금 갖다 달라 말했다.

    “지금 갖다 주세요.”

    “그리 이르겠나이다.”

    상선 대감이 물러가고 나인들이 들어왔다.

    왜 들어오냐고 물어보니 세숫물 갖다 주러 왔단다.

    나인들이 가져온 세숫물에 세수를 하자 잠이 좀 깬다.

    그리고 그 사이.

    12첩 반상의 수라가 들어왔다.

    가짓수가 엄청 많긴 하지만 내가 대군일 때 먹던 것들과 질적인 차이는 없어서 대충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왕대비전에 찾아가 어머니께 문안을 여쭙고 나왔다.

    나오니 하늘은 창명한데 내 인생은 먹구름이 가득 낀 기분이다.

    “이 곤룡포도 너무 불편하고.”

    너무 거추장스럽다.

    내가 입궐할 때 관복을 안 입었던 것도 사실 입기 거추장스럽기 때문이었는데 늘 도포만 입고 살다보니 특히 더 불편함이 도드라지는 기분이다.

    소매통도 너무 크니 이거 언제 날 잡아서 소매통좀 줄여달라고 말하던가 해야지.

    “그래, 다음 일정은 뭡니까?”

    “조계로 받아 보시오리까, 상참을 열라 하오리까?”

    서면 보고 받을래, 면대면 보고 받을래?

    라는 질문이다.

    왕이 된 첫날부터 서면 보고 받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상참을 택했다.

    편전에 가자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다.

    왕이 바뀐다고 해서 삼정승과 육조 장관들이 바뀔리는 없다.

    모두 내가 아는 그분들이다.

    영의정 허침, 좌의정 임사홍, 우의정 채수, 좌찬성 유자광, 우찬성 박안성, 우참찬 김수동, 이조판서 신수영, 예조판서 김봉, 형조판서 김굉필, 호조판서 이손, 공조판서 이계맹, 대사헌 김전, 대사성 이점, 대제학 김감, 도승지 권균······.

    모두 안면이 익다 못 해 친숙한 분들이지만,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대원군으로서 저들을 마주하는 것과 왕으로서 마주하는 건 역시 기분이 야리꾸리하달까?

    그건 나만의 느낌이 아닌 것 같았다.

    “합······.”

    편전의 분위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어색함 속에서 영의정 할아버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마, 원래 부르던대로 합하라고 부르려 했던 것 같은데 금세 자각한 듯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조아리셨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괜찬습니다. 저도 낯선데 여러분들은 오죽할까요.”

    이건 진짜 말로 형용 할 수 없는 어색함이고 낯선 환경이다.

    나도 그럴 텐데 저분들은 더하겠지.

    예를 갖춰야 할 종친 정도에서 갑자기 충성을 바쳐야 할 왕으로 모시게 됐으니.

    모순적인 감정들을 느끼고 있을 게다.

    “크흠.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상왕 전하께서 창경궁으로 이어(移御) 하시면서 전각의 물품들도 모두 가져가게 하셨었사옵니다. 지금 전각의 물품들이 많이 비는데 이는 어찌 채울지 따로 분부가 계시옵니까?”

    형님은 내가 즉위하기 전부터 이미 창경궁으로 이사를 하셨다.

    그게 보름 전의 일인데 기존에 형님이 쓰시던 물겉이나 전각의 물건들도 이사하시면서 좀 가져가셨다.

    “그건 내명부의 소관이니 부인에게··· 가 아니라 중궁에게 맡기면 될 듯 합니다.”

    “중궁전에 말이옵니까?”

    자고로 집 안 인테리어는 여자가 할 때 더 모양이 예쁘게 잘 나오는 법이다.

    “네.”

    “아, 예. 알겠사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편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극도의 어색함을 마주하면 온몸이 쭈뼛거린다지?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온몸이 쿡쿡 쑤신다.

    나도 그런데 대신들은 가시가 아니라 창칼로 쑤심 당하는 기분일 거다.

    어색함을 가까스로 떨쳐내고 입을 열었다.

    “다음 현안은요?”

    미친 듯한 어색함에 진저리 치고 계시던 허침 할아버지는, 내 말이 반가운 듯 허둥거리기까지 하시면서 얼른 좌의정 아저씨를 바라보셨다.

    마찬가지로, 극도의 어색함에 치를 떨고 계시던 좌의정 아저씨는 흠칫 놀라 말까지 더듬거리셨다.

    “그, 그 다음··· 에, 다음 현안은 그게··· 아! 왕녀 책봉은 어찌 하면 되올지요?”

    “왕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덧붙이려다 말았다.

    좌의정 아저씨가 말한 왕녀는 신배다.

    내가 왕이 됐다.

    여울이는 왕비가 되고 신배는 당연히 공주가 된다.

    “그건 제가 차차 생각해보고 말씀들 드리겠습니다.”

    “아, 예······.”

    극도의 어색함이 다시 편전에 내려앉았다.

    상선 대감이 괜히 서면보고 받을 거냐 물어보신 게 아닌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면 보고나 받을 걸.

    다행히.

    “왕녀 책봉 문제를 차일로 미루시온다면 중궁 책봉 의식은 어찌 치루면 되올지요?”

    이조판서 신수영이다.

    내가 왕이 되면서 국구가 되신 내 장인 어른 익창군의 친동생이니 나랑은 족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 책봉 의식은 절차대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하오면 관상감에 명해 길일을 택일하도록 하고, 택일 된 길일은 전하께 아뢰도록 하겠사옵니다. 하옵고 의식이 있을 때 책안(책봉문을 놓는 상)과 인안(도장을 올려놓는 상)은 전례대로 동쪽에 설치하도록 하옵고 명을 반포하는 자리는 정전의 왼쪽에 설치하며, 압책관 이하의 관리들의 위(位)는 등급마다 자리를 다르게 배정하되······.”

    왜 형님이 거수를 자주 하셨는지 알겠다.

    나도 거수를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이조판서의 입이 꾹 닫힌다.

    “전교가 계시옵니까?”

    “아니요. 설명은 됐으니까 알아서들 준비해달라구요.”

    “예.”

    “전하, 신 사헌부 대사헌 김전 아뢰옵나이다.”

    제길.

    “이제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이튿날인지라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실 테지만은, 신은 사헌부의 장관이요 직언을 게을리 할 수 없으니 아뢰나이다. 전하의 어투는 졸렬하진 않으나 궁중에서 위엄을 갖고 사람을 부리기에는 부적합하다 할 수 있사옵니다. 특히 노신에게 존대하는 것은 공경의 뜻을 나타낸다 할 수도 있으니 바람직한 일이지만 궁인들에게까지 존대의 말을 하는 것은 제왕의 위엄을 훼손하는 일이니 삼가시옵고, 신들에게도 되도록 공대를 삼가소서.”

    김전이 제일 먼저 트집 잡을 줄은 알았는데 설마 말투로 트집을 잡힐 줄은 몰랐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차 고치겠습니다.”

    “아, 하옵고.”

    “네네.”

    “오늘은 기침이 늦으셨다 들었사온데 제왕이라 함은 일찍 일어나되 늦게 취침에 드는 것이니 이를 잊지 마시옵고 또한 제왕은 학문을 갈고 닦는 것이 왕업을 갈고 닦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경연을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옵니다. 지금 막 보위에 오르셨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테지만 선비의 근본은 하루라도 더 일찍 도를 닦는 것에 있고, 제왕의 도는 작심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에 있으니 오늘 조강은 불참하시더라도, 이 자리에서 경연관을 선정하고 주강을 여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나이다. 신이 보기에 경연관으로는······.”

    어쭈, 이것봐라?

    “자, 잠깐!”

    “예?”

    “왜 은근슬쩍 경연을 언급하는 겁니까?”

    “으, 은근슬쩍이라니요··· 전하. 신이 아까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제왕의 말은 위엄을 담고 있는 것이옵니다. 제왕은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위엄이 있게 입을 열어야 하는 것이니 속된 말은 삼가소서.”

    “어물쩡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요! 갑자기 경연이 왜 나옵니까?”

    항의하자 김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이 경연을 여는 것은 봄에 꽃이 피는 일처럼 자연한 조화이옵니다.”

    얼씨구?

    “내가 막 보위에 올라서 정신이 없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경연을 열 정도로 정신이 없는 건 아닙니다. 전하께서 나한테 내선한 건 내 식견이 성현보다 넓고, 천성이 성인의 그것을 뛰어 넘는터라 딱히 배움이 필요 없을 지경이라 내선한다는 뜻을 밝히셨으니 나는 따로 배울 필요가 없는 몸인 겁니다. 그런데 뭔 경연입니까?”

    “하오나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옵니다. 비록 상왕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 건 맞지만······.”

    “경연은 안 합니다. 아니, 못 해요. 막말로다가 전하께서도 안 한 걸 내가 왜 합니까?”

    “···”

    “경연의 경자도 꺼내지 마십시오.”

    “하오나······.”

    “한번만 더 경연의 경자가 나오면 경들 경기 일으키게 동궁한테 양위해버립니다.”

    내가 즉위하자마자 어린 세자한테 양위한다.

    개족보도 이런 개족보가 없을 것이다.

    어물쩡 경연을 재개하려 했던 김전은 결국 강경한 내 태도에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김전에 이어서 대사성 이점까지 경연 운운할까봐 나는 서둘러 다음 현안을 물었다.

    “상왕 전하와 왕대비 전하의 책보를 올릴 필요가 있사오니 봉숭도감을 설치해야 하옵고······.”

    “이제 종묘에 납시어 적법하게 전위 받았음을 고해야 하오니 이를 보낼 인사를 택하되 고하는 말은 전하께오서 작성해야 하옵니다.”

    “중궁전의 호를 정해야 하온데, 상왕께서 창경궁으로 이어하시기 전에 새로 중궁전에 오실 분이 평소 검소하고 아랫사람을 온정으로 베푸는 바가 있으니 그 호는 온비(溫妃)로 했으면 한다는 말씀을 하셨으나 정확하진 않으니 이를 상왕께 여쭙는 것이 좋겠사옵고······.”

    “전하께서 잠저에 계시다 즉위하시긴 했사오나 무릇 태실은 왕가의 근본이 되옵니다. 장차 길일을 정해 태(胎)를 봉해야 할 것이오니 청컨대 전례대로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길지를 정하고 마땅히 그 태를 봉하게 하소서.”

    “또한 신수근이 상왕의 은혜로 익창군에 봉해진게 최근의 일이오나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시매 한 나라의 장인(國舅)이 됐사오니 부원군으로 봉함이 온당한 처사 같나이다. 이를 빈청에 논의케 함이 어떻겠사오며······.”

    ···진짜 튀고 싶다.

    ***

    창경궁.

    “진성이는 잘 하고 있다더냐?”

    “새로 보위에 오르신 분을 신이 왈가왈부 할 수는 없는 일이오나 다만 오늘 약간 소란이 있었사옵니다.”

    “소란? 무슨 소란 말인가?”

    “전하께서 상참을 받으시면서 현안을 처리하던 중에, 대사헌이 경연을 언급했사옵니다.”

    “경연?”

    “예. 김전이 경연을 재개하라 하였는데······.”

    “진성이 재개할 리가 없을 텐데? 어찌 되었더냐?”

    “아, 예. 해서 전하께서 강경히 말씀하시길, 한 번만 더 경연의 경자만 나오면 동궁 저하께 양위 해버린다 하시어 경연은 열지 않기로 되었사옵니다.”

    “푸하하하하! 과연 진성이 강단 있게 구는구나. 내 내심 걱정하는 바가 있었는데 이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겠다. 다행이다, 아주 다행이야.”

    “···”

    “또 다른 건 없더냐?”

    “집안의 노복들을 궁에 들이고 싶다는 말씀도 하셔서 소란이 일긴 했사옵니다.”

    상선의 말에 융은 이해가 갔다.

    일평생 사저에서 지냈던 진성이니 노복들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을 게다.

    “그래서?”

    “대신들이 잡인도 궁궐에 출입 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찮은 천인들을 궐에 들일 순 없다 하여 소란이 일었사오나 전하께서 앞전처럼 그들이 없으면 정사를 돌볼 수 없으니 차라리 동궁 저하께 양위 해버리겠다고 말씀하시니······.”

    그 이상 말하기는 망측한지 상선은 말끝을 흐렸지만 그 뒷말이 어떨지는 상상이 갔다.

    “역시 다행이구나.”

    “해서 예법에 어긋나긴 합니다만, 잠저의 부엌에서 일하던 계집종들은 입궐하여 나인의 직첩을 받고 수라간에서 일하게 되었사옵고 사내종들은 내관의 예를 따르진 않았사오나 다만 서리(경아전)의 자리를 신설하여 궐에서 머물게 하셨사옵니다.”

    “덕산이도 말인가?”

    “예.”

    융은 흐뭇하게 웃었다.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자, 그럼 나가볼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 굳이 답답한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있을 필요도 없다.

    환복한 융은 궁을 나섰다.

    목적지는 기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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