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90화 (290/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90화>

***

“전하! 전하의 춘추가 아직 한창이신 때에 종사의 대통을 동궁도 아니고, 종친에게 전하려 하시옵니까? 이는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니 지금이라도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그렇사옵니다! 전하와 대원군의 우애가 참으로 돈독하다는 것을 신들이 모르는 바는 아니나, 대원군이 대통을 잇게 된다면 동궁의 입지가 어찌 되겠나이까! 전하께서는 대원군이 대통을 잇게 하고, 다시 세자 저하께서 대통을 물려 받으면 된다 하셨지만, 이 얼마나 우스운 선례겠사옵니까! 부디 헤아려주시옵소서!”

“지금 대원군이 달포째 자취를 감췄나이다! 혹자는 역적의 누명을 쓸까 놀란 마음에 숨었다고 이는 얼토당토 않은 소문이옵고, 신은 왕자사부로서 대원군을 사사하였사옵니다. 대원군의 성품을 보자면 대원군은 왕위에 전혀 관심이 없고, 권력에 하등의 욕심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왕위에 오르는 것이 마뜩치 않아 자취를 감춘 것······.”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여긴 강녕전이다.

한 달 전에도 읍소하고 계신 분들이 아직도 읍소하고 계신다.

백관이 모두 읍소하면 행정이 마비 될 테니 교대로 읍소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번 파트에는 장곤 선생님도 보인다.

읍소하던 중에 날 알아본 장곤 선생님은 흠칫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세상 다 잃은 사람의 그것처럼 한숨을 내쉬고 꾸벅 스승께 인사를 올렸다.

그런 내 모습에 장곤 선생님은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비비적거리셨다.

한달간 자취를 감춘 내가 모습을 드러내니 믿기지 않으셨던 모양인데.

“···선생님. 손 안 씻고 눈 비비지마세요. 다래끼 납니다.”

가뜩이나 선생님 밥 먹을 때도 손 안 씻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는데 그러다 정말 다래끼 나신다.

“하, 합하께서 어찌······.”

“면목 없습니다.”

“그게 무슨······.”

“아니, 그러게 좀 여러분들 모두 읍소를 좀··· 그냥, 지부상소를 하시지들.”

백관들이 모두 도끼 쳐들고 목 베달라고 하면 형님도 뜻을 거두셨을지 모르겠다.

나 스스로를 자책 할 순 없고, 남탓 기질이 발동해서 그냥 대신들 탓을 해봤다.

나는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올리고 터벅터벅 강녕전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걸 바로 죽을 자리 알고 찾아 간다고 하는 걸까?

새삼 호국영령들이 존경스럽다.

그분들은 덤덤하게 죽을 자리를 찾아갔겠지만, 나는 덤덤하긴 커녕 기분이 진짜 싱숭생숭하다.

“전하. 대원군께서 드셨나이다.”

내관의 말에 강녕전각 안에서,

“푸하하하하!”

아주 파안대소가 터져나왔다.

그래, 자고로 패자는 말이 없어야 하는 법.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승자가 패자한테 가져가는 건 단순한 승리만이 아니라고.

안으로 들어가자 간신히 웃음기를 참고 있는 형님이 보였다.

“어마마마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당연히 괜찮아지셨겠지.

아니, 애당초 아프질 않으셨겠지.

알면서도 불효자가 될 순 없어서 물었다.

“아··· 어마마마 말이지? 열성조의 보우가 있으셨는지 다행히 쾌차하셨다. 한데 그 소문을 네가 어찌?”

바드득.

“이 구중궁궐의 입이란 게 참으로 무거워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대비전의 환후에 이상이 있다면 특히나 입을 가벼이 놀려서는 아니 되거늘, 이 아랫것들이란 게 참······.”

바드득.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 다행스러운 일이지. 큭큭.”

진다는 건 역시 기분 좋은 일 만은 아니다.

“그래, 한달 간 어디서 지낸 것이냐?”

“남촌이요.”

“남촌? 남산골에서 지냈단 말이냐?”

“네.”

형님은 한차례 탄식과 함께 무릎을 탁 내리치셨다.

“이런 낭패가 있나···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내 그런 줄도 모르고 허허.”

“···”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거라. 내 오죽하면 이러 했겠느냐?”

“···안 나쁩니다.”

“자, 그러면··· 상선.”

“예, 전하. 불러 계시옵니까.”

“삼정승들 좀 불러오라.”

“예.”

잠시 후.

삼정승들이 입시했다.

형님의 부름에 읍소하고 있다가 달려나온 삼정승들은 불길한 기운을 마구 뿜어대는 형님에, 하나같이 무거운 표정들이었다.

“대원군에게 내선하는 일을 준비도록 해야겠다.”

털썩!

“저, 전하!”

“내 이미 내선의 뜻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으니 경들은 읍소 따위로 내 뜻을 꺾으려 들지말고, 거행토록 하라.”

“하, 하오나······.”

“어허.”

형님의 호통에 내가 끼어들었다.

“영상대감.”

“아, 예.”

“전하의 분부대로 하십시오.”

“그게 어인······.”

“저희가 지지 않았습니까. 더 무슨 말이 필요 하겠습니까?”

패자가 자질구레하게 변명 따위를 늘어놓는 건 여러모로 구차한 일이다.

***

형님은 철저히 계획적이셨던 것 같다.

아마 그러셨겠지.

내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니 당혹하셨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뭐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진 것도 아니고 가족들 데리고 사라진 거니 금방 날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겠지.

내가 여섯 번이나 도망을 쳤으니 이번에 찾으면 도망 못 치게 한다는 판단을 하셨을 거다.

그래서 이번에는 찾자마자 즉위시킬 계책을 마련하신 것 같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삼정승들을 통해 형님이 나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다는 뜻이 빈청으로 전달되자 모든 문무백관들이 하던 일을 중단하고 한달음에 달려와 읍소를 했었다.

춘추가 한창인데 왜 상왕이 되려하냐··· 대통을 대원군한테 넘겨주려 하냐··· 이런 예가 없었다··· 등등.

모두들 진짜 울면서 말했다.

이때는 경복궁이 한바탕 소란 정도가 아니라 초상 난 것 같은 분위기였었다.

내가 뭐 잘 못 한 것도 없고 나도 강제로 즉위 되는 건데도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었달까.

이런 읍소는 물론 형님이 한마디로 일축시켰다.

-내가 더 왕위에 있으면 역적이 수백은 더 창궐할 것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얼토당토 않은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노비조합도 역적이라고 볼 수는 없었고 지금 같은 왕의 철권에 대항할 권력은 없는 실정이니까.

한마디로 협박이었다.

오바마의 협박과 트럼프의 협박.

뭐가 더 무서울까?

후자일 거다.

그리고 형님 역시 후자에 속했다.

나는 가만 있었냐고?

아니다.

아무리 패자라 승복 할 수 밖에 없더래도, 이건 진짜 아니다 싶은 마음에 이불킥 대여섯번 치다가 형님한테 도저히 못 해 먹겠다고 투정을 부렸었다.

씨알도 안 먹혔다.

모든 소란을 평정(?)한 형님은 나의 투정에 내가 또 도망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즉위식을 서두르셨다.

내가 아직 즉위도 안 했는데 명나라에 미리 책봉사를 보내겠답시고 안윤덕 씨를 책봉사로 삼아 보냈고 예문관에는 내가 즉위하면 반포할 교서도 작성하게 하고······.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어떻게 되긴 시발!

“···”

금붕어 마냥 눈만 끔뻑거리고 있지.

“전하, 즉조(卽阼)에 오르시면 되옵니다.”

금붕어처럼 끔뻑끔뻑.

눈만 끔뻑거리면서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면류복 소매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상선 대감이 찾아오셨다.

정전 뜰에서의 준비가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안 가면 안 됩니까?”

“아니 되옵니다. 상왕 전하께오서도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형님을 상왕 전하라 부르는 상선 대감의 말에 나는 오늘 즉위식이 실감이 났다.

사실 지금까지는 실감이라고 할 것 까지도 없었다.

잠저··· 아, 내 북촌집은 이제 잠저라 불린다.

좌우지간, 잠저에서 손가락 빨면서 그냥 기다린 것 밖에 없고 대신들 협박하는 일이나··· 관리들 들들 볶아서 즉위식 준비시킨 건 형님이었으니, 나는 하던대로 집에서 놀고 먹은 것 밖에 없었다.

즉위하면 그렇게 놀고 먹는 것도 힘들 것 같아서 숭재 씨 불러서 미친 듯 놀고 먹었다.

왕이 되면 절대 못 할 테니 열흘간 잔치 벌여서 주지육림을 벌였고 사냥도 마구 나갔다.

이제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까.

확실히 그 모든 취미 생활은 이제 끝이겠지.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거리자 내 머리 위로 양산이 드리워졌다.

사극에서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양산이다.

그 양산 옆에는 어가도 준비돼있었는데, 나는 그대로 천근만근처럼 무거운 몸을 어가에 실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가가 나아가자, 나아갈 때마다 심장이 요동쳤다.

지난 대군으로서의 삶도 주마등 스쳐지나가듯 스쳐지나갔다.

막 자고 일어났는데 조선이었다.

그것도 대군의 신분이었고, 멘붕을 겪으면서 3개월간 미쳐날뛰었다.

미쳐 날뛰다가 뒤늦게 이 현상을 체념 할 수 있었고,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스펙타클했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존나게 재밌기도 했고, 젠장.

그 재미는 이제 모두 안녕이다.

젠장! 젠장!

지난 날의 삶을 되짚다보니 그새 근정전에 도착했다.

어가에서 내린 나는 상선 대감이 말한 오른쪽 계단, 즉조를 이용해 전각을 올랐다.

내가 전각에 올라 준비 된 어좌에 착석하자, 연주되고 있던 음악도 그치고 대례복을 입은 문무백관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집중 될 무렵.

예관들이 왕을 상징하는 대보(大寶)를 전해주었다.

긴장되는 마음에 대보를 떨어뜨릴 뻔 했지만 가까스로 받아내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 뒤는 가만 있으면 백관들이 알아서들 진행한다.

형님의 조언이었다.

나는 형님의 조언대로 가만있었다, 그러자 다음은 예문관에서 작성한 전위교서가 반포됐다.

말그대로 형님이 나한테 왕위를 물려주신다는 교서다.

당연히 이 교서는 내가 읽지 않고 예관이 대신 읽는다.

“···하므로 이를 중외에 포고하니 너희 대소신료는 나의 지극한 뜻을 알아서 받들도록 교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따르라.”

예관이 이 전위교서를 읽는데만 장장 10분 정도 걸렸다.

10분 정도 전위교서 낭독이 있고 나서 다음 의식은 백관의 하례였다.

이건 한마디로, 대보도 받고, 전위교서 받고 적법하게 왕위에 오른 새 왕인 나에게 신하들이 인사 오지게 박는다는 의미다.

이 장엄하면서도 숙연한 의식은 장장 한시간 가깝에 이어졌다.

이제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이다.

마지막은 즉위교서 반포다.

이건 귀찮지만 내가 읽어야 한다.

“아아.”

일단 목청을 가다듬었다.

거의 두시간 가깝게 목을 쓰지 않았더니 목이 쉰 기분이다.

“모두 들을지어다.”

내 한마디에 모두가 고개를 조아린다.

이건 좀 신기하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하늘의 령을 받아 마침내 동국을 평안하게 하고, 이어 성군들이 나셨다. 우리 부왕은 문치로 태평을 이뤄 성군이라 불렸고, 상왕께서는 스스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선대왕들에게 물려받은 왕업을 크게 떨쳤다. 이리하여 마침내 나라 안팎이 평안하고 나라의 곳간은 넉넉하고 가득해졌으며, 천하의 온나라 사신이 몰려와 복종하길 청하니, 문치는 선왕의 그것과 같이 태평하고 무위는 태종대왕의 그것처럼 맹렬하니 과연 나라가 자연히 평안해졌다. 바야흐로 예(禮)가 부흥하고, 악(樂)이 갖춰져서 상왕의 인애와 두터운 은택은 오직 백성에게 흡족히 젖어 들었으니 선왕이 이룩한 승평(昇平)의 극치를 과연 어느 나라의 왕들이 이뤘겠는가. 이런 태평성대를 맞은지가 벌써 10여년이 넘었는데 상왕께서 갑자기 명하여 왕위를 계승케 하시니 경들도 알겠지만 나는 본시 학문이 얕고 성품은 용렬하니, 나이는 이제 고작 약관을 갓 넘은 나이라 경력이랄 것도 없고 세상을 바라보는 연륜 또한 없으니 거듭 울며불며 사양하기를 반복했으나 마침내 윤허를 얻지 못 하고 오직 대통을 이어 왕업을 이어받으라는 명에 정덕 2년 8월 20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위(位)에 나아가 백관의 조하를 받고 선왕을 상왕으로 높이고, 중전을 대비로 모시게 되었도다.”

“···”

“이르노라! 내 왕위에 오르면서 일체의 제도와 덕과 치(治)는 모두 상왕 전하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할 것이니 비록 내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바꿈이 없을 것이다. 지금 비록 이 의례가 내가 감당하기 벅차긴 하지만, 이 대례란 참으로 거룩하고 신명하고 또한 상왕의 특별한 전지이니 내 어찌 그 뜻을 꿰뚫어보지 않고 오히려 외면하겠는가? 내 오직 100여년 종사의 소중함과 상왕의 어짊을 따라 베풀어 바야흐로 상왕이 욕되게 하는 일이 없고, 오직 상왕의 은택이 이 땅에 고루 퍼지게 하리라. 이를 중외에 포고하노니 나라의 모든 신민이 듣고 알게하라.”

마침내 즉위교서 반포가 끝났지만 의식이 모두 끝난 건 아니다.

판통례(나라의 의식에서 절차에 따라 임금을 인도하던 벼슬아치)가 소리쳤다.

“국궁(몸을 굽힘)!”

그 한마디에 문무백관 모두가 몸을 수그렸다.

“사배(四拜)!”

이 말에는 문무백관이 나한테 네 번 절을 올렸다.

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불과 몇 년전만 해도 나는 스승님께 두 번 절을 올리는 무례를 범하고 말았었다.

그런 내가 왕이라니······.

“흥(일어나라)! 평신(몸을 제대로 폄)하라!”

판통례의 인도에 따라 국궁사배 의식마저 끝이 났다.

그 다음은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나왔다.

“주상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백관들이 힘차게 천세 소리를 외쳐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이제는 상왕이 되신 형님이,

“천세! 천세!”

함박웃음을 짓고 백관들과 같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천세를 외치고 계셨다.

제기랄.

《중종실록(中宗實錄] ) 즉위년 8월 20일 기사》

「···하므로 일체의 의식이 끝나고 마침내 진성대원군이 백관의 하례를 받고 즉위하였으니 이분이 곧 훗날의 중종대왕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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