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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89화 (28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89화>

    ***

    약관 정도로 보이는 용모 준수한 선비의 얼굴에는 땀이 한가득이었다.

    피맛골에 들어선 선비는,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인지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연신 뒤를 힐끗거렸다.

    “따돌렸나?”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 건지 사내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정오쯤부터 내린 보슬비 때문에 길은 진창 된 지 오래였지만, 옷이 좀 더러워지는 건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예의 선비는 더위를 좀 쫓아낼 생각인지 쓰고 있는 갓을 부채 대용으로 펄럭거렸다.

    아니, 펄럭거리려 할 때였다.

    “분명 여기로 오셨던 것 같은데··· 자네는 저쪽으로 가보게. 나는 이쪽을 좀 더 살펴볼 테니.”

    “예.”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선비가 흠칫 몸을 떨었다.

    갓을 펄럭거리며 열을 식힐 만큼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음에도 목소리를 듣자마자 오한이라도 들었는지 몸을 부르르- 떨 정도였다.

    선비는, 저도 모르게 힘을 줘서 품없이 찌그러진 갓을 조심스레 쓰고는 모퉁이로 돌아가 고개를 살짝 내밀어봤다.

    너머에는, 홍철릭 차림의 금군 셋이 매의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저 멀리 금군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찾았는가?”

    절레절레.

    “못 찾았습니다. 찾으셨습니까?”

    절레절레.

    “도대체 어디 숨으신 겐지 나도 못······.”

    “헙!”

    선비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홍철릭 차림의 금군과 마침 눈이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저기다!”

    금군의 외침에 놀란 선비는 삐뚤게 쓴 갓을 바로 고쳐 쓰지도 못 한 채, 걸음아 나살려라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그 뒤를 처음에는 금군 넷이 쫓더니, 이윽고 여덟이 됐고, 여덟은 금방 스물로 늘었다.

    그리고······.

    “헉헉!”

    막다른 길에 몰린 선비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런 선비의 주위를 금군들이 에워쌌다.

    “아니, 안 한다니까!”

    “전하. 어찌 도망을 가시옵니까?”

    “전하는 누가 전하야, 이것들아!”

    “속히 환궁하소서!”

    “아니, 환궁이라니! 형님이 시켰냐!”

    “상왕전하께오서 시키신 일은 맞사오나 어찌 일국의 임금이 왕좌를 비울 수 있단 말이옵니까? 대신들도 기다리고 있으니 환궁하소서.”

    “안 가! 안 가, 이 미친놈들아!”

    발악하는 선비의 팔을 금군들이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선비가 계속해서 발버둥치며 저항했지만, 금군들의 완력을 당해낼 순 없었다.

    결국 선비는 질질 끌려가게 됐고······.

    “허억!”

    눈을 뜨자마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아아아······.”

    이건 마치 학창시절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지각인 줄 알고 잠이 싹 달아났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일요일인 걸 깨닫는 그런 안도감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안도감이다.

    존나 다행이다.

    꿈이었다.

    근데 이 무슨 개같은 악몽이냐고.

    정황을 보면 내가 왕이 됐다가 도망이라도 친 모양인데···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해.

    목이 탔다.

    자리끼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을 좀 들이키자 속이 진정 되는 것 같다.

    이마를 슬쩍 훑어보니 땀이 흥건하다.

    이건 진짜 귀신에 쫓기는 꿈보다 더한 악몽이다.

    “대감마님. 대감마님 기침 하셨습니까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밖에서 속삭이는 덕산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덕산이보고 놀란다더니, 덕산이 목소리 듣고 깜짝 놀라서 방문을 벌컥 열어제꼈다.

    “왜, 이 자식아!”

    “상선 대감께서 찾아오셨는뎁쇼.”

    사, 상선 대감?

    “나 있다고 했냐?”

    “안 했습죠.”

    “상선 대감이 뭐래? 알았대?”

    “네. 알았다고 하고 가시던데요.”

    나는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근데 무슨 일입니까요? 멀쩡한 대감마님 방 놔두고 행랑에서 주무시질 않나··· 어제 상선 대감이 찾아오실 때는 갑자기 광에 숨으시질 않나······.”

    말이 나와서 말인데 노복들한테 잘 해줘야겠다.

    내 방도 벼룩이랑 이가 없는 건 아니거든?

    근데 행랑의 벼룩하고 이는 내 방 한 4배는 되는 것 같다.

    어제는 쥐까지 봤다.

    최소한 내 방에 쥐는 없는데 말이지.

    “그건 알 필요 없다. 앞으로도 상선 대감 오시면 나 없다고 해. 나 끌려가면······.”

    순간 곤룡포 입은 내 모습이 떠올랐다.

    상상이 곧 씨가 된다.

    나는 부정이라도 탈새라 고개를 마구 흔들어, 부정을 털어냈다.

    “아무튼 안 되니까. 지금처럼 없다고 해. 알겠지?”

    “아······.”

    “왜?”

    긁적긁적.

    “그게 말입니다요, 대감마님.”

    “뭔데?”

    “상선 대감은 돌아가셨거든요?”

    “근데?”

    “그게요.”

    뜸들이는 덕산이에 꿈에서 금군들을 마주치고 든 오한이 갑자기 들었다.

    이건 인간의 생존 본능··· 그런 것과 같은 오한이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오한에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자······.

    “우리 아우님은 벌써부터 왕재를 보이는구나. 하찮은 천인의 삶까지 헤아리려 몸소 행랑에서 잠을 주무셨으니 이 어찌 왕재가 아닌가?”

    “더, 덕산이··· 덕산이 너!”

    “소, 송구합니다요······.”

    고개를 조아리는 덕산이의 뒤로 꿈에서 본 것과 같은 옷차림의 금군들이 보였다.

    형님은 그 금군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숨바꼭질도 내 매번 술래만 하니 질리지 않느냐. 자, 환궁하자꾸나.”

    ***

    “헉헉!”

    온몸에 땀샘이란 땀샘이 아주 폭발을 했다.

    한여름에 불알 터져라 뛰었으니 땀샘이 폭발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만.

    “따돌렸나?”

    다행히 인기척은 들려오지 않는다.

    후.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다섯 번째인가?

    아, 아니구나.

    이번 도망까지 포함하면 여섯 번째다.

    나흘 전에 형님이 강녕전에서 왕의 장점을 늘어놓을 때 잽싸게 튀고 나서, 그 날 저녁에 한 번 튀었고, 또 그 다음 날엔가?

    승정원에서 패초를 들고 왔을 때 설마하는 마음으로 입궐했다가 설마가 사람 잡아서 튀었고, 그 다음 날에는 상선 대감이 오셔서 덕산이한테는 나 없다고 하고 광에 숨었고, 그 다음 날 아침 상선 대감 돌아간 줄 알았는데 형님한테 질질 끌려왔다가(?) 비로소 오늘 아침.

    아니, 아침도 아니지.

    금군들이 교대하는 시간에 맞춰 담장을 넘었으니 이게 딱 여섯 번째 도망이다.

    왜 도망자의 삶을 택했냐고?

    아니, 시발··· 욕해서 미안하지만, 내가 택한 도망자의 삶이 아니다.

    이 세상이! 정확히는 형님이 떠민 도망자의 삶이다!

    왕은 못 한다.

    형님이 왕의 장점을 늘어 놓으실 때 나 진짜 저거 사달라고 마트 한가운데 앉아 떼쓰는 6살 꼬꼬마처럼, 절대 못 하겠다고 발악을 했었다.

    근데 말이지?

    이번엔 형님도 양보를 못 하시겠다지 뭐야?

    이건 혼또니 레알이다.

    형님은 날 진짜 왕위에 올리시려 하시는 거다.

    그 느낌을 살발하게 받아버렸는데 어떻게 도망자의 삶을 안 택하겠어?

    물론 조금씩 지치는 도망자의 삶이긴 하다만, 곤룡포 입은 내 모습을 생각하면 지치는 것도 싹 달아난다.

    곤룡포 입고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신들이 지랄하는 거 듣고··· 이런 거 난 못 한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내가 먼저 지쳐 나가 떨어지든.

    형님이 먼저 지쳐 나가 떨어지든.

    둘 중 하나다.

    먼저 지쳐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왕 되는 거다.

    물론 이번 여섯 번째 도망은 자신이 있다.

    아마 형님이 먼저 지쳐 나가 떨어지실 거다.

    “그나저나 뭔 비야.”

    더위는 식혀서 좋다만 부슬비가 내린다.

    그러고 보면 전날에 잠깐 내린 소나기 때문에 바닥도 진창이네.

    뭐, 어때.

    지금 당장은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다 불현 듯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어제 꿈에서 본 거랑 똑같은 것 같은······.”

    데자뷔?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분명 여기로 오셨던 것 같은데··· 자네는 저쪽으로 가보게.”

    꿈처럼 금군이 쫓아왔다.

    정말 데자뷔인가?

    라는 생각이 틀렸음은 금방 드러났다.

    “어라. 여기 계시다! 뭣들 하느냐!”

    꿈과는 다르게 금군이 날 곧바로 찾아냈거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또 불알 터져라 뛰었다.

    역시 데자뷔는 아닌 것 같다.

    꿈에서는 금방 막다른 길에 몰려서 잡혔는데 지금은 다르다.

    아주 가뿐하게 따돌렸다.

    “후.”

    잠시 숨을 고른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우리 집이다.

    집에 도착한 나는 덕산이부터 찾았다.

    “대감마님?”

    “준비 다 했냐?”

    “네, 다 하기는 했는뎁쇼.”

    “안방마님은?”

    “안채에 계십니다요.”

    “다행이네. 가마는? 가마는 준비했어?”

    “물론입죠.”

    “오케이. 아주 완벽해.”

    이번 여섯 번째 도망이 실패하지 않을 거라 확신을 하는 이유.

    이번에는 나 혼자 튀지 않을 거다.

    가족들 데리고 야반도주··· 아니, 아침이니까 조반도주겠군.

    조반도주할 거다.

    내가 이래뵈도 전국팔도에 걸쳐서 땅만 많은 게 아니라고.

    별장도 겁나게 많아요.

    공신 책봉 되면서 받은 거랑, 원래 가지고 있던 거랑, 형님이 생색 낸답시고 하사한 거랑··· 노비조합 놈들거 하사해주신 거랑··· 솔직히 나도 내가 몇 채의 별장을 갖고 있는지 모를 정도니 말 다 했다.

    딱 23채까지 세다가 페이지가 한참 남았길래 세는 거 관뒀거든.

    좌우지간, 여울이랑 신배 데리고 조반도주할 거다.

    일단 튀는 것만 성공해서 별장에 숨어들 수만 있으면 미션 성공이다.

    어디로 갈지도 미리 정해놨다.

    남촌에 있는 별장이다.

    굳이 왜 멀리 안 튀고 남촌 별장으로 가냐고?

    자고로 꼬리가 길면 밞히는 법.

    사대문을 가마 타고 나가는 사람들이 뭐, 몇 만명이나 되면 모를까.

    금방 꼬리가 잡히고 말 거다.

    거기서 꼬리가 안 잡혀도, 행선지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격자도 많아진다.

    하지만 남촌은 다르지.

    몰래 숨어들기만 하면··· 그러면 형님도 찾기 어려우실 거다.

    누군들 저놈이 멀리 튀었겠거니 생각하지, 등잔 밑에 숨었다고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부인, 준비 다 끝났습니까?”

    “네, 잠시만요.”

    잠시 후.

    여울이가 신배 손 잡고 나왔다.

    나는 얼른 신배를 안아 들었다.

    “한데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이랍니까? 난리통에 피난 가는 것도 아니구······.”

    “이유는 내가 도착하면 다 알려드릴게요. 일단 갑시다.”

    떨떠름해하는 여울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혹시 미행이 붙었나 싶어서 집 주변을 덕산이로 하여금 살피게 한 건 덤이다.

    다행히 미행이라던가, 아까 피맛골에서 맞딱뜨린 금군들은 안 보였다.

    나는 가슴 조이며 여울이랑 신배는 가마에 태우고, 가마꾼으로 변장해서 가마를 맸다.

    우리집에서 남촌 별장까지는 8~10리 정도 거리에 있었다.

    km로 환산하면 대략 3~4km 정도였다.

    딱 1시간이 걸려 도착 할 수 있었다.

    말이 별장이지, 이 집에도 있을 만한 건 다 있다.

    크기도 15칸이나 돼서 불편함이 없고, 저번에 하사 받은 노복들도 한 여섯 상시 거주시켜서 청결하다.

    무사히 도착도 했겠다, 이제는 존버만이 답이다.

    딱 서너달··· 아니, 최소 한 달만 버티자.

    한 달이라도 내가 자취를 감춘다면 형님도 깨우치시겠지.

    아, 저 새끼 가식이 아니라 진짜 왕 하기 싫나 보구나··· 하고.

    “자, 이제 말씀해보시어요. 멀쩡한 집 놔두고 별서(별장)은 왜 오신 겁니까? 변장까지 하시구요.”

    나는 여울이한테 형님과 있었던 일을 모두 말씀 드렸다.

    사실 형님이 나한테 선위하려는 거.

    이거, 도성 사람들 중에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다 아는 내용이다.

    여울이가 모르는 건, 내가 노비들한테 함구시켜서다.

    솔직히 여울이가 중전마마 되고 싶다고 하면··· 애처가인 나로선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왕이 되면 못 할 것들, 그러니까 단점들만 늘어 놓으면서 형님이 나한테 선위하려고 해서 도망갔다는 사실을 여울이한테 털어놨다.

    여울이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행히 중전마마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이틀이 흐르고, 일주일이 흐르고, 보름이 흘렀다.

    별장 생활은 제법 만족스러웠다.

    북촌집이랑 끽해야 3km 떨어진 거지만 풍광이 다르다 보니, 뭔가 시골에 온 기분도 나고··· 간만에 여유를 만끽하는 기분이었다.

    일이 바빠서 신배랑도 잘 못 놀아줬는데 여기서 만큼은 실컷 놀아줄 수도 있었다.

    바깥 소식은 덕산이를 통해서 들었다.

    덕산이에 의하면 내가 갑자기 자취를 감춰서 도성이 발칵 뒤집혔다는데 솔직히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내 목적은 오로지 존버.

    존버만이 답이다.

    그렇게 떡상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존버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대, 대감마님.”

    “응?”

    “그, 그게······.”

    “왜, 뭔데?”

    “밖에 흉측한 소문이 돌고 있는뎁쇼.”

    “흉측한 소문? 뭐? 내가 역모라도 일으켰대?”

    “아뇨, 그건 아니구요.”

    “그럼?”

    “대비마마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구······.”

    덕산이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나는 한참이 지나 실소를 내뱉었다.

    “허.”

    “대감마님?”

    어머니가 쓰러졌다는데 실소하는 내가 천하에 불효막심한 개새끼로 보였겠지, 덕산이에겐?

    하지만 이 실소는 불효막심한 불효자라서 나온 실소가 아니다.

    “하··· 이걸 생각 못 했네."

    패배를 인정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나온 실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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