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88화 (288/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88화>

***

시간이 멎은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크로노스라는 신이 세상의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라 믿었다는데, 그 크로노스가 영험한 힘으로 정말 시간을 정지시킨 기분이었다.

착각임이 드러난 건, 찰나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인지부조화로 인해 얼어붙은 편전 분위기를 만끽하듯 훑어본 형님이 금방 입을 여셨거든.

“경들의 표정을 보니 가관이라 부언하지 않을 수 없겠다. 무릇 임금이 국본을 세우는 일은 나라의 근간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그럼 내선(왕위를 물려줌)하는 일은 어떤가? 동서고금의 왕들이 내선한 일을 떠올려보라. 나라의 처한 형국이 부득이해서 내선한 일도 있고, 혹은 왕이 한가롭게 놀면서 즐기기 위해 내선한 일도 있었다. 다만 우리 선대왕들이 내선한 까닭은 모두 나라에 변고가 있어서였으니 태조께서 공정왕에게 내선한 일, 공정왕이 태종께 내선한 일, 태종이 세종께 내선한 일. 모두 그러한 것이 아니었던가.”

“···”

“내 지금 진성에게 내선하려는 까닭도 바로 그런 변고 때문이다. 지금의 형편이 당시 대왕들이 내선하던 때와 같진 않지만 나같은 미치광이 왕이 하루라도 더 왕위에 머물러 있으면 분명 또 다른 역적이 길러질 것이요, 나라의 대계가 바로잡히지 못 할 것이다.”

“···”

“하물며 나같은 부덕하고 천하에 둘도 없는 미치광이 왕이 또 전쟁을 일으키려 하니 임금의 직분을 이처럼 소홀히 하는 왕이 천하 어느 역사에 있었겠는가 말이다. 물론 세자는 명석하고 총명하다. 그래서 훗날 대왕이라 불릴 자질이 충분하다. 문제는 아직 어리지. 경들이 더욱 잘 알겠지만 자질이란 본시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 하는 법이다. 제아무리 왕재를 타고 난 이라 한들 거골장(백정) 밑에서 자란다면 정육하는 일 말고 다른 걸 어찌 깨우치랴. 하물며 부왕이 나같은 미치광이 왕이니 국본으로 있으면서 보고 배운 게 미친 짓 밖에 더 있으랴? 부왕의 미친 짓을 보면 대왕의 자질이 아니라 폭군의 자질을 기를 것이 자명하다.”

“···”

“나야 뭐, 좋은 시대에 좋은 재상들을 만나서 가까스로 성군이라 불리고 있다만, 그 자질은 폭군에 있음이라. 하지만 세자의 시대에 과연 나같이 좋은 행운을 만날 수 있겠는가? ”

“···”

“내가 진성에게 내선하려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내 여러날 생각해보건대 과연 진성은 어려서 학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식견이 넓어 성현도 감히 그 식견에 견주지 못 한다. 성품은 어려서부터 성인의 말씀을 깨우치지 않았는데도 성인이 행한 바와 같으니 과연 공맹과 불씨는 깨달음을 얻어 성품이 고쳐졌지만, 진성은 알아서 깨우쳐 성품이 곧 성인과 같았다. 또한 어려서 말을 타거나 활을 당긴 일을 즐겨 하지 않았는데도 군사의 책이 가히 공명에 비견하니, 그래서 박원종이 발호 했을 때도 결단을 내려 종사를 구원한 것이 아닌가? 관직에 출사하면서는 대소신민에게 인심을 얻은 일이 많고 천성이 선하고 남을 배려하여 백성을 위해 한 일이 많으니 나는 진성을 보면서 부끄러운 일이 참으로 많았다. 예컨대 고작 적장자란 까닭으로 내가 왕위를 꿰차고 있지 않았나··· 하는 자성을 한 적도 있고, 진성의 영명한 꾀를 보면 과연 왕재다, 감탄한 적도 많았으니 진성의 인의는 날 적부터 만들어졌고 형에게 공경함은 천성에서 비롯됨이라. 이런 까닭으로, 지금 선왕들이 내선할 때처럼 나라에 큰 변고는 없지만, 나같은 왕이 변고라면 변고이니 아직 어린 세자에게 어찌 대통을 맡기겠는가. 맡겨야 한다면 진성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

장장 10분?

모르겠다, 체감상 10분은 됐던 것 같은데 크로노스한테 농락 당해서 10분이 흘렀는지 30분이 흘렀는지.

좌우지간 형님의 장연설이 끝나고나자마자 나는 꿈인가?

볼을 꼬집어봤다.

꾸우욱-.

···아프다.

통증을 느끼고 있을 즈음.

털썩!

나는 아직 인지부조화가 끝나지 않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비몽사몽하고 있는데 대신들은 이미 현실임을 깨달았나 보다.

나 빼고 모두 털썩, 털썩 오체투지 하고 있다.

“저, 전하! 어찌 그런 두려운 말씀을 하시옵나이까?”

씹선비의 대가이신 대사헌 김전은 아연실색해서 말까지 더듬거리시고.

“크흐흐흑! 전하! 말씀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신은 말씀을 듣자마자 두렵고 놀란 마음을 감히 추스를 수가 없나이다!”

얼씨구.

대사성 이점은 아예 흐느끼기 까지?

그나마 냉정을 유지하는 건 허침 할아버지신데······.

“공정왕께서 태종대왕께 내선하신 일은 우애가 돈독한 탓도 있었지만 전하께서 말씀하신 나라의 변고 때문이었나이다. 지금 나라에 변고랄 것이 전혀 없는데 어찌 듣기 민망하옵고 두렵고 오직 황망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신은 귀를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오니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쿵쿵!

그런 허침 할아버지도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찍어대며 읍소하신다.

그럼 나는 뭐하냐고?

“아.”

크로노스에게 농락 당한 정신이 뒤늦게 돌아왔다.

나도 얼른 부복했다.

다른 대신들에 비하면 한 템포 정도가 아니라 세 템포 정도 늦은 거지만 어쩌겠어.

귀신한테 홀린 기분이었는데.

좌우지간, 일단 나는 신하다.

이건 뭐랄까, 사랑과 우정사이가 아니라 신하와 형제 사이랄까?

그 경계가 모호하긴 한데 이럴 땐 무조건 신하다.

지금도 역알못이지만 내가 막 진성대군이 됐을 때, 선위해준다고 하면 생각좀 해보겠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대답을 내놨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선위를 덥썩 물면 안 된다는 것 쯤은 안다.

특히 시국이 이럴 땐 더더욱.

다만.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대신들처럼 고상한 말을 해대면서 정중히 거절할 말을 떠올릴 만큼의 문장가는 못 된다.

긁적긁적.

“경들은 모두 일어나라.”

“하오나 신하로서 그런 황망한 말을 듣고 어찌 몸을 바로 일으켜 세울 수 있겠나이까? 신들은 오직 두렵고, 두려운 마음 뿐이니 생각하면 전하께오서는 그 춘추가 아직 한창이시나이다! 따로 환후가 계신 것도 아니옵고, 스스로 부덕하다 하시지만 천하에 부덕한 왕을 위해 어느 백성이 태평가를 부르겠나이까! 말씀을 거두어주시옵소서!”

“그렇사옵니다, 전하! 수명어천(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름)한 일은 하늘이 정한 운수이옵니다! 이는 사람의 운명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니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것은 실로 하늘이 정한 운수인 것이나이다! 그런데 어찌 천명을 받지 못 한 대군에게 선위를 하려 하시나이까!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시니 신은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지를 받들 수 없나이다!”

대사성 이점의 발언이다.

이건 좀 기분 나쁜데?

내가 왕재가 아닌 건 알겠는데, 천명 운운할 필욘 없잖아!

“전하! 지금 역대 선왕들께서는 모두 세 분의 대왕이 내선하셨사옵니다. 전하께서 대원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면 훗날 대원군은 다시 세자께 왕위를 물려주시게 될 것이옵니다. 그리하면 이제 곧 나라가 개창한 100여년 만에 다섯 명의 왕이 내선한 일이 되는데, 이 일을 중국에 어찌 고하겠사옵니까? 대군을 책봉하기 위해 사신을 보낸다면 중국 조정에서는 필시 냉소하면서 ‘조선의 가법이란 참으로 얼토당토 않으니 진실로 동쪽의 오랑캐(東夷)가 따로 없다’ 여길 것이옵니다. 도대체 무슨 말로, 어떻게 중국 조정에 이 사실을 아뢰어 책봉을 받을 수 있겠나이까?”

“크흐흐흑! 영의정의 말이 참으로 지당하나이다! 무인년과, 경진년, 무술년에 세 명의 대왕들이 각각 내선하신 일은 모두 변명할 말이라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변명할 일도 전혀 없사오니 천하에 민망할 일이 이보다 더하겠사옵니까?”

“전하께서 내선하려는 징조라도 보이셨다면은 신들이 이처럼 창졸간에 일을 당하고 놀라지도 않겠사옵고 두려운 마음도 갖지 않았겠사오나 일언반구 없이 갑자기 선위를 언급하시니 신들이 어지를 어찌 받들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나도 한 마디 해야겠는데 할 말이 생각이 안 난다.

제기랄.

그 사이, 형님이 손등을 감싼 비갑 부위를 긁적거리며 입을 여셨다.

“내가 내선을 하겠다는데 왜 경들이 난리인지 모르겠고··· 일언반구 말도 없이, 또한 징조도 보이지 않고 갑자기 내선을 언급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여러 날 생각한 결과다. 솔직히 말하면 3년 전부터 생각했도다.”

“하오나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지 않으셨나이까?”

“당시에는 나라 사정이 어려워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지, 내 안 하고 싶어서 안 했겠는가? 잠자리에 들 때면 늘 진성에게 선위하고 나는 상왕으로 물러나 태평한 정치를 펴는 일을 상상하곤 했다. 상선에게는 내가 내선하려는 뜻을 자주 밝혔으니, 이는 상선이 특히 잘 아는 일일 것이다. 아니 그러한가?”

“에? 그, 그게······.”

“뭐, 종법이 좀 꼬이긴 하겠다만 이미 선왕들께서도 종법이 꼬이는 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는데 내 대에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오나 전하! 이는······.”

형님과 대신들의 설전이 벌어졌다.

장장 십여분 가까운 설전 덕에, 나는 고상하게 말할 문장이 떠올랐다.

“전하! 전하와 저는 비록 배는 다를지언정 형제로, 이같은 골육의 정이 있다지만 전하와 저는 군신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전하께서 춘추가 젊다 못 해 말을 타는 일도 거뜬하시고, 왜구가 쳐들어와서 나라가 경각에 박두(迫頭)한 때도 아니고, 국가의 사태가 위급하지도 않은 시점에 선위를 언급하시니 신하로서 감당하기 벅찹니다. 전하께서는 제가 날 적부터 성현의 식견을 뛰어넘고, 천성은 성인보다 더한다 하였지만, 저같은 부덕하고 탐욕스럽고 용렬한 위인이 왕위에 오른다면 이는 수명어천하지 못 한 소인이 왕위에 오른 일인 것입니다. 지금 하늘이 전하의 선정에 감동해서 이 나라에 복을 내려 한발(가뭄귀신)도 물러난지 여러해 되었고, 우박도 내리지 않고, 비가 너무 많이 내려 홍수가 일어났다는 보고도 없는데 만약 제가 왕위에 오른다면 하늘에서 감동하긴 커녕 화가 나서 이 땅에 재앙을 내릴 것입니다. 물러간 한발이 찾아와서 가뭄이 들 것이고, 한여름에 폭설이 내려 농작물이 모두 얼어 죽을 것이고, 또 갑자기 하늘에 이변이 생기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한다면은······.”

“천하는 둥글다.”

“에?”

“네가 한 말이 아니냐.”

“아, 예. 그랬었죠.”

“천하는 둥글고, 모든 자연재해는 하늘의 변고가 아니라 자연의 조화다. 이 또한 네가 한 말이다.”

“···”

“네가 왕위에 올라 가뭄이 든다면 그건 그저 우연의 일치가 되는 것이고, 한여름에 폭설이 내린다면 그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인 것이요, 갑자기 일식이 찾아온다면 그 역시 우연의 일치일 뿐인 것이다. 하늘의 재앙이고 자시고 할 게 없단 말이지.”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저런 자연재해가 단순 자연의 조화란 사실을 알려드리지 말 걸 그랬다.

방심한 틈에 카운터 제대로 맞았는데?

“아무튼 안 됩니다. 저는 왕재도 아니고, 또 왕위에 오르면 그 뭐야. 아무튼 여러모로 힘듭니다.”

내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기신 형님은 잠시 후 입을 여셨다.

“경들은 모두 물러가 있어라. 내 진성과 독대를 좀 해야겠다.”

“예, 전하.”

힐끗.

“사관들은 어찌 안 나가는 것인고?”

“무릇 사관의 소임은······.”

“잘난 사관들 목숨은 열 개라서 안 나가는 모양이지?”

후다닥.

***

알다시피 편전에는 형님의 배려로 의자가 하나 더 놓여져있다.

형님이 통상 원좌라 부르시는 의자, 기억하지?

대신들이 내게 파이팅! 무언의 눈치를 보내며 나가고, 사관들은 겁에 질린 채(?) 나갔다.

보는 눈이 사라진 나는 부복해 있다가 벌떡 일어나 원좌에 앉았다.

그리고 의자의 방향을 살짝 틀어 형님과 1:1로 마주봤다.

“아니죠?”

“응? 뭐가?”

“에이. 형님, 막말로다가··· 아까는 제가 보는 눈이 많아서 말씀 안 드렸는데요.”

“응, 그래. 편히 말하거라.”

“그거 때문이죠?”

“그거라니?”

“그거 있잖아요, 그거.”

“허허.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형님에 나는 은근하게 말했다.

“전쟁이요, 전쟁.”

“전쟁?”

“괜히 대신들이 형님 친정 나가시는 거 반대할까봐, 형님 친정 나가시면서 저한테 섭정 맡기면 또 제가 섭정하는 거 거부할까봐, 일부러 이러시는 거죠?”

“···”

“맞죠?”

긁적긁적.

“아닌데.”

“···”

“옛말에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신하들이 달리 해석해서 곤란한 일이 있으니 왕은 몸가짐을 특히 바르게 하란 말이 있다. 그 고사와 같구나. 내 친정 나가는 걸 대신들이 반대한다고 아니 나가겠느냐?”

···아닐 거다.

한다면 하는 분이니까.

“섭정이야··· 뭐, 너는 천성이 착하니 내가 너한테 미뤄버리고 떠나버리면 세자가 끙끙 앓는 모습 보기 힘들어서라도 그 원좌에 다시 앉을 테고. 아니 그러하냐?”

···이것도 맞다.

나란 사람은 너무 착해서 붓다도 울고갈 위인이니까.

“굳이 선위니 뭐니 조정에 논란거리 만들어서 친정 나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라는 형님의 말씀에 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럼 왜······.”

나는 형님께 말씀드린대로, 형님이 선위 운운한 게 친정나가고, 나한테 섭정을 맡기려는 고도의 술책이라 생각했었다.

아까는 보는 눈이 많아서 속내를 털어놓지 못 했을 뿐.

근데 아니라신다.

아니면 왜 때문에 선위를 운운하신 건데?

다른 의도가 있으신가 해서 물었다.

물었는데······.

“정말로 선위하려는 게다. 뭐, 나도 아까는 보는 눈이 많아서 말은 못 했다만 3년 전부터 생각했단 건 거짓말이고 한 열흘 전부터 생각한거긴 하다만, 생각해보니 그렇더구나. 내가 이리 자주 나가는데, 왕위를 자꾸 비워두면 역적이 발호할 테고··· 그렇다고 세자한테 선위하자니 세자의 나이가 어려 오히려 역적을 기를 수 있고. 해결책을 고민하다보니 네가 떠오르지 뭐냐.”

정신이 혼미하다.

이거슨 마치 지옥행 열차에 탑승한 어떤, 그러한, 기분의 느낌적인 기분······.

멀리 저승사자가 손짓하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래서 말인데, 진성아. 왕이라고 나쁠 것도 없다. 오히려 좋은 게 더 많지. 얼마나 좋은 게 많냐면 말이다······.”

왕의 장점을 구구절절하리만치 늘어놓는 형님이셨지만 나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나는 유체 이탈 중이다.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 염라대왕의 부름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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