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87화>
***
“전쟁?”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조정의 분위기가 한 달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왜관에 내려가기 전만 해도 조정은 화기애애했다.
또 한 번 다 같이 합심해서 어심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올라온 조정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전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궐내 각사의 관리들은 숨까지 헐떡거리면서 움직이고, 특히 광화문의 수문장은 쉴 틈이 없다.
수문을 할라치면 궐에서 사람이 나가고, 좀 쉴라치면 사람이 들어오니 쉴 틈이 어딨겠나.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어서 의정부에 가봤다.
갔더니 허침 할아버지가 하신다는 말씀이 글쎄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단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허침 할아버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면서 푸념하듯, 내가 없는 사이 벌어진 일들을 설명해주셨다.
“다른 분들은 뭘 하셨어요! 저번처럼 어심 돌렸어야지요.”
“어찌 시도를 안 해 봤겠습니까? 하지만 어지에 입지(立志)가 확고하니 백관이 달라붙은들 어찌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럴 게 아니다.
나는 당장 강녕전으로 뛰어갔다.
관복도 안 입고 도포 자락 휘날리면서 뛰어가는 모습이, 남들이 본다면 꼭 미친 샌님 같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헐레벌떡 뛰어서 도착한 강녕전.
전각 안에서는 형님의 육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해서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내 저번에 가서 보니 그 나라의 군대란 참으로 형편이 없었다. 방심은 금물이겠지만 왕도로 짓쳐 들어가 왕을 사로 잡는다면 놈들의 기강이란 해이해질대로 해이해져, 왜구에게도 투항을 하는 기강이니 필시 도처에서 투항을 할 것이다. 그러니······.”
“전하. 진성대원군 드셨사옵니다.”
“오, 마침 시기적절하구나. 어서 들라하라.”
안으로 들자 왕당파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임사홍, 임숭재, 김감이 있었다.
허침 할아버지의 말로는 이 왕당파 대신들은 처음에는 다소 어이없는 반응을 보였어도, 이후에는 전쟁을 적극 찬동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비들을 소탕한 뒤, 구심점을 이룰 필요가 있었는데 이분들은 그 구심점을 전쟁으로 생각한 것 같다는 부연 설명을 다셨다.
좌우지간, 형님은 내가 들자마자 외인부대를 물으셨다.
보통은 이럴 때, 안부부터 묻는 형님인데 딱히 의아해 할 필요는 없었다.
“네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마침 적절하게 그 왜인들을 전쟁에 부릴 수 있게 됐으니 이 어찌 선경지명이 아니랴.”
···내가 고용한 용병들을 전쟁에 참전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계셨으니까.
안으로 들자 형님과 왕당파 대신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침소에는 커다란 장방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어지럽게 전쟁 도구들이 흩어져있었다.
지도라던가··· 등채라던가··· 인형들이라던가.
지도나 인형에 살벌한 느낌을 받진 않겠지만 한 눈에 봐도 전략 회의 중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형님. 참말입니까?”
나는 수산시장에서 고등어 반토막 내서 팔 듯, 맥락을 토막내서 물었다.
“참말이니라.”
“하지만······.”
순간 형님이 바드득 이를 갈았다.
정말 살벌하게, 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러면서 종이 하나를 건네주셨는데, 뭔가 하고 보니 오키나와에 남아 있는 순찰사 이계동이 보내온 것이었다.
읽어보니 순찰사 아저씨가 계속 왕을 설득하고는 있는데, 오키나와 왕은 약조를 안 지키려고 뻗대고 있다는 게 주였다.
“그건 달포 전 쯤 올라온 것이고, 이것도 한 번 읽어보거라.”
라고 말씀하신 형님이 다른 서계도 건네주셨다.
“그건 엿새 전 동래에서 올려보낸 이계동의 서계니라.”
찬찬히 이계동의 서계를 읽어본 나는 경악했다.
서계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오키나와 군과 우리 군사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단다.
알다시피 이계동 아저씨와 우리 군대는 할양 받은 도미구스쿠 지역에 머물고 있다.
서계에 의하면, 요새 오키나와의 분위기가 심상찮아서 특히나 이계동은 군사들에게 외부 출입을 삼가라는 령을 내렸고 군사들은 그 령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단다.
문제는 오키나와 군이었다.
오키나와 군이 슬금슬금 도미구스쿠 지역을 침범(?)하더니 그 근처 냇가에서 낚시를 했다지 뭔가.
두 나라 사이에 관계가 괜찮을 때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지금은 이계동이 오키나와 왕에게 꾸준히 약조를 이행하라 압박을 넣는 상황이다.
그 상황에 오키나와 군이 할양 받은 영토를 침범했으니 이계동이 가만 있었겠어?
군사들을 풀었는데 오키나와 군이 못 나가겠다 뻗대다가 충돌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지만 부상자가 여섯이나 발생한 충돌이었다.
“이계동은 단순히 적군이 우리 영토를 침범했다고 하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순박하다. 그들이 과연 우리 정예군들의 위엄을 보고도 침범해서 낚시를 했겠더냐? 이는 필시 왕의 의도가 담긴 것이다.”
바드득.
“바로 목 밑에 우리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칼을 들이밀고 있는 형국이 아니었더냐? 왕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쉬웠던 게지.”
그 말을 시작으로 형님은 펄쩍 뛰시며 분노하셨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지만 세뇌라도 된 건지, 점점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다.
형님이 특히 분노하신 부분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낸 대목이었다.
그것도 두차례나.
형님은 대국의 힘을 빌려 약조를 불이행하려는 오키나와의 태도에 치를 떠신 것 같았다.
일견 이해가 갔다.
오죽 화가 나셨으면 북해국 구원이라는 야망(?)을 잠시 접어두시고, 전쟁으로 목적을 변경하셨을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형님은 말씀하시는 내내 찢어 죽여도 시원찮다느니··· 의리를 개똥으로 아는 것이라느니··· 왕으로서 입에 담기 민망한 욕설들을 마구 하셨다.
태도를 보니 이전처럼 대신들이 합심한다고 해서 돌릴 수 있는 어심이 아닌 것 같다.
‘약속은 좀 지키지.’
해외 온천 여행이나마 갈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는데 이렇게 되면 또 나가리다.
오키나와 왕이 원망스럽다.
그놈의 약속만 지켰으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게 아닌가?
“근데 명나라는 괜찮을까요?”
좌우지간.
형님의 태도를 보면 말했듯 전쟁에 대한 의지를 꺾을 순 없어 보였다.
그래서 물었다.
오키나와의 전쟁은 마치 그것과 같다.
미국 관점에서의 한국과 일본의 전쟁?
적절한 비유는 아니려나?
뭐, 나에겐 비슷한 느낌인데 중국에서는 태클을 걸어올 게 자명했다.
갑자기 동맹국 둘이서 치고 박고 싸우는 거니까.
“이미 조치 해뒀다.”
“조치요?”
“이미 지부사가 사행길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끝물에 왕당파 대신 반열에 합류한 넌씨눈 노공필이 안 보인다.
“사행길이라면······.”
“명나라는 걱정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황제에게 진주(進奏)한 뒤에 곧바로 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유구를 칠 것이다. 그래서 내 개만도 못한 의리를 가진 왕을 육시 내버리고 말 것이다. 기필코.”
***
날이 밝자마자 나는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지금은 섭정승으로서 권한이 전혀 없는 터라, 마찬가지로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할 권한도 없지만 전관예우라는 말이 괜히 생겨 났겠어?
배상대책회의라는 거창한 말 대신, 빈청에서 오랜만에 다들 차 한 잔 하자고 부르니 다 모였다.
어, 어제 회의를 열지 못 한 건 형님 때문이다.
어제 형님의 전쟁에 대한 열의를 알 수 있었는데, 오키나와 왕을 육시 내버릴 거라느니··· 그놈의 신민을 모조리 잡아다 노비로 삼아 버릴 것이라느니··· 무시무시한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으시던 형님은 문득 외인부대가 생각나셨는지, 외인부대를 언급하시면서 그들을 친히 열병하셨다.
아직 제식훈련이 덜 된 외인부대는 봉해위 같은 정규군으로서의 군기정연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형님은 그들을 보는 내내 감탄하셨다.
사실 나도 감탄했다.
저러니 해안가란 해안가는 왜구들한테 죄다 털렸지··· 라는 이해도 새삼 됐고.
그런 형님은 저들을 선봉에 내세우면 과연 이이제의 책이 되겠다며 좋아하셨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고.
“···”
차 한 잔 하자고 불러들 냈지만, 모두 한마디 말들도 없었다.
선뜻 운을 떼기가 어려운 것이리라.
결국 내가 먼저 운을 뗐다.
“갑자기 전쟁이라니 충격적이지요?”
조심스레 운을 떼자 대사헌 김전이 받아쳤다.
“이게 다 좌의정 때문입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시오?”
“좌상께서 전하를 부추기지 않으셨소이까!”
“어허. 말씀을 바로 하셔야지. 부추기긴 뭘 부추긴단 말이외까? 누굴 역적으로 만드려고.”
“어심이 유구국 정토에 있었겠소이까? 좌상께서 자꾸 신의를 들먹이면서 전쟁 운운하니 전하께서도 혹하신 게 아니냔 말이외다!”
“말씀 똑바로 하시오! 이 사람의 직언을 전하께서 귀담아 들으신다면 그대는 진즉에 목이 떨어졌소이다. 어디, 전하를 한 두 사람 직언에 흔들리는 주관 없는 왕으로 만드시오?”
“그게 아니라 좌상께서······.”
갑작스러운 전쟁에 평화로운 조정도 다시 전쟁터가 된 것 같다.
안 그래도 김전은 임사홍 아저씨를 싫어하는데, 이번 일로 더 큰 반감을 가진 것 같다.
근데 임사홍 아저씨 말씀처럼, 형님은 아저씨가 부추긴다고 해서 부추겨질 사람이 아니다.
내가 볼 때 진짜로 전쟁을 할 생각이셨고, 임사홍 아저씨는 그냥 따른 죄 밖에 없다.
“자자. 다들 싸우지들 마시구요. 앞으로 어떡합니까? 대책을 좀 세워야지 않겠습니까?”
대책을 세워야지 않겠냐고 했지만 뒤늦은 감이 있었다.
이미 지부사는 명나라에 전쟁 통보를 하러 떠난 뒤였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평양에는 도착했을 거다.
말을 달린다면 돌려 세울 순 있겠지만, 글쎄.
형님이 허락할 리 만무하고.
“저번처럼 어심을 돌릴 순 없겠습니까?”
내가 물었지만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지가 확고하십니다.”
“그럼 정말 전쟁 밖엔 없는 겁니까?”
물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제기랄.
욕지거리가 절로 나오던 그때였다.
“다들 예 계셨군요.”
상선께서 빈청을 찾아오셨다.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 찾아들 계십니다.”
우리는 알았다 답하고 별다른 대책도 논의하지 못 한 채 편전을 찾았다.
편전에 들자, 우리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형님이 용포가 아니라 갑주를 입고 계셨다.
우리 모두 넋이 나간 채로 형님의 갑옷 입은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자,
“내 경들에게 긴히 논할 것이 있어서 불렀도다.”
“하, 하교하소서.”
“내 간밤에 깊이 생각을 해봤느니라.”
“어인 말씀이신지······.”
“왕의 친정은 대내가 불안정하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잦은 왕의 친정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자칫 역적을 기를 수도 있으니 이번에 역적들이 창궐한 까닭이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
“내 그래서 경들에게 하문할 것이 있다.”
“하, 하문하소서.”
“선대왕들 중에 상왕이 되신 분들은 모두 몇 분이셨는가?”
형님이 모를 리가 없다.
모를 리가 없는 질문을 하니 모두 얼척이 없다는 표정이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대표로 대사성 이점이 답했다.
“공정왕(정종)과 태종 두 분 이셨나이다.”
“두 분의 우애는 어땠는가?”
“우애의 지정(至情)이 천고에 비할 만한 이들이 있었겠나이까? 두 분의 우애로 신명을 보존하고, 날이 갈수록 그 우애가 돈독해졌으니 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우애였나이다.”
“두 분의 우애는 어찌 발현한 것이겠는가?”
“어, 어인 말씀이시온지······.”
“내 생각건대 형제간에 친친(親親)하는 우애란 실로 인륜의 상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두 분의 우애란 대사성의 말처럼 천고에 비할 만한 이들이 없을 정도로 돈독하셨다. 형은 아우를 믿고, 아우는 형을 믿었으니 서로 대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던 것 아닌가.”
“그, 그러하나이다.”
“그럼 나와 진성의 우애는 어떤가?”
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에 당혹스러운 건 나뿐만이 아닌지, 대신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어, 어인 말씀이시온지······.”
“내 생각해보니 나는 부덕하여 어좌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지금 또한 불민하여 정사를 돌보면서 나라의 대계를 세우기 보다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거리낌 없이 칼을 빼드려 하니 천하에 이런 미치광이 왕이 어디있단 말이냐?”
“드, 듣기 망측하옵니다, 전하.”
“망측한 말이 아니라 사실이다. 내 생각건대 나와 진성의 우애는 가히 공정왕과 태종대왕에 비할 만 하다. 서로를 대함에 있어 끔찍이 아끼고, 생각하기가 밤낮이 따로 없으니 과연 두 대왕도 이러했겠는가?”
“···”
“그런데 말했다시피 나는 지금 또 정사를 팽개치고 어좌를 비우려하는 부덕한 왕인데 나의 치세에 몇 번이나 이런 일이 반복되겠는가? 그렇다고 어린 세자에게 양위를 하겠는가? 어린 세자에게 양위를 했다가는 간신들이 발호하고, 박원종 같은 역신이 발호할 것이다. 만약 그같은 때에 내가 대내에 없다면 필시 어린 세자로서는 감당하기 벅찰 것이다.”
“···?”
모두들, 양위를 안 하면 되잖아?
라는 표정이었다.
그건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공정왕께서 태종께 양위 했던 것처럼 나는 진성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국사를 보다 효과적으로 돌봤으면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