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85화>
***
“어때요?”
내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묻자 여울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히려 해외여행이라니까요, 해외여행?”
“북해국이 어떤 나라인지 전혀 모르잖습니까? 그런 나라에 어찌······.”
“아니예요. 위험할 것도 전혀 없다니까?”
혹하는 표정의 여울이에 나는 서둘러 약을 쳤다.
“거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데요. 사람들은 얼마나 인심이 후하구요. 알려지지 않은 나라긴 하지만 그래서 더 사람들이 순수하다니까요? 우리나라 시골 보세요. 시골 인심이 후하지, 서울 사람들 인심이 후해요?”
잠깐, 무시하지 마라.
여기도 도시와 시골이 엄연히 존재한다.
실제로 언제였지.
보름 좀 안 됐을 거다. 한참 일하고 있는데 서울 시장 격인 한성판윤 아저씨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러더니 한양 인구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라 지금이라도 도시계획을 설정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탈이 생길 것 같단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얼마나 증가 추세고, 정확히 한양 인구를 얼마 정도로 추산하길래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22만이란다.
고작 22만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엄청난 대도시다.
도시계획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나는 판윤 아저씨께 알아서 전문가들과 상의하고 알려달란 말씀을 드렸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중요한 건, 고작 22만이지만 여기도 도시와 시골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여기도 시골 인심이 도시 인심보다 후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야··· 시골 사람들 인심이 후하겠지요.”
“북해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 인심이 얼마나 후한데요?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긴가민가한 표정의 여울이다.
아, 나는 지금 여울이를 설득하고 있다.
내가 북해국을 구원하는 일에 책임자가 된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지난 사흘 동안 나 뭐하고 지냈는 줄 알아?
더 이상은 나랑 관계 없을 거라 생각했던 퀴블러로스의 사망단계를 겪고 있었다.
부정과 분노와 타협과 우울 그리고 수용의 사망단계 말이다.
그나마 이미 사망단계를 진성대군이 되면서 한차례 겪어 봤기 때문인지 부정과 분노와 타협.
이 3단계는 생략하고 우울과 수용의 단계만을 거쳤다.
처음에는 엄청 우울했다.
여울이와의 첫 여행이 파토가 난 거니까.
또 최소 1년 정도는 떠나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말하기 좀 민망한데, 우울의 단계를 거치면서 여울이랑 난생 처음으로 부부 싸움이란 것도 해봤다.
여차저차해서 온천 여행은 못 가겠다는 내 말에 여울이는 실망하는 기색을 내보이면서 약간 언성을 높였다.
나는 나대로 푹 쳐져있는데 여울이가 언성을 높이니 또 화가 나서 이게 부부 싸움으로 변질이 돼버렸다.
그렇게 여울이랑 난생 부부 싸움을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미칠 듯한 우울감을 느끼고 있던 바로 어제.
새삼 북해국이 훗카이도란 게 떠올랐다.
그래, 북해국은 훗카이도다. 북해국이라는 국명은 결국 내가 지어낸 국명이고, 어쨌든 훗카이도다.
근데 훗카이도는 뭐가 유명하다?
바로 온천 아니겠나.
-생각해보니까 나쁠 것도 전혀 없잖아? 너 인마. 대학 시절 생각해 봐. 동기들 군대가기 전에 삿포로로 온천 여행 간다고 했을 때 졸라게 부러워 했지? 지금도 똑같잖아. 훗카이도나 북해국이나··· 온천은 있을 거 아니냐고.
-아! 여울이도 데려가면··· 여울이랑 첫 해외여행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온천도 즐겨, 해외여행도 가··· 이거 완전 일석쓰리조 잖아?
여행계획 파토와 여울이와의 부부싸움으로 우울해 하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우울감을 떨치고 수용의 단계로 진입 할 수가 있었다.
얼마나 좋아, 해외여행?
좌우지간.
가까스로 수용의 단계를 밞은 나였지만 남은 과제가 있었으니··· 여울이 설득하기다.
“하지만 역시 신배까지 데리고 가기는 좀······.”
원래는 온양에 가족끼리 가려고 했었다.
그래서 당연히 훗카이도 여행도 가족끼리 가자는 말을 한 거고.
여울이는 다른 것보다도 그게 걸리는 모양이다.
물론 나라고 걱정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대비도 없이 가족 여행을 제안했겠어?
“풍토병이 걱정 되는 거예요, 아니면 왜구들이 걱정 되는 거예요?”
“풍토병도 풍토병이지만 아무래도 왜구들이······.”
“그건 절대 걱정 할 거 없어요, 절대! 부인, 북방정예군들만 천명이 넘게 참가한다니까요?”
“북방군들까지요?”
얼떨결에 북해국 구원 작전(?)의 책임자가 되면서 1급 기밀 문서들도 인계 받았다.
형님은 북해국 구원 작전에 북방의 정예군들까지 동원 할 생각을 갖고 계셨다.
무려 1,122명의 정예군들을 말이다.
천명이 넘는 병력이 북방에서 한순간에 빠지면 안보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니냐고?
천 명 정도 빠진다고 여진족한테 잡혀 먹었을 거면 아마 진작 잡혀 먹었을 걸?
게다가 여진족 자식들, 만날 덕산이가 그놈들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 같다는 둥··· 귀신도 그놈들은 무서워서 피할 거라는 둥··· 온통 무서운 이야기만 잔뜩 하길래, 진짜 그런 줄 알았는데 이것들 순 겁쟁이들이다.
내가 부원수로 여진족을 토벌하러 갔다는 소문이 여진족들 사이에 퍼진 이후로 지금까지, 여진족들의 발호가 없거든.
물론 그렇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겠지만.
“네. 북방 군사들만 참가하는 게 아니라 봉해위, 별충위, 갑사들, 그리고 하삼도 관군들까지 다 합치면 5천명이 넘게 참가해요.”
“그래도 영······.”
5천명이나 넘게 우릴 호위해줄 거라는데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이 방법까진 안 쓰려고 했는데······.
하는 수 없다.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 될 것 같다.
“부인. 내가 부인 불안감 없애줄 테니까 한 달만, 아니다. 딱 보름만 기다리고 계세요.”
“···네?”
어리둥절해하는 여울이를 놔둔 채 나는 집을 나왔다.
보름이면 촉박하다.
***
집을 나오자마자 편전에 왔다.
형님한테 윤허를 받기 위해서인데 마침 대신들도 와있다.
“북해국 구원 방안을 벌써 다 계획한 것이냐?”
내가 방문하자 형님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얼떨결에 북해국 구원 작전의 책임자가 되면서, 부가적으로 따라온 효과가 있었다.
섭정질 때려치우는 효과였다.
나는 북해국 구원 작전의 방안을 구체적으로 계획하려면, 섭정질 해서는 안 된다는 논지로 형님을 설득시켰고 형님은 마지못해 다시 편전에서 정사를 보고 계신다.
“아뇨. 짜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
“네. 그래서 말인데요. 형님한테 윤허 받을 게 좀 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어전 앞에서 이따위 무례가 어딨냐고 대사헌 김전이 거품부터 물었겠지만 지금은 그런가 보다 넘어간다.
씹선비의 대가도 익숙함에 속으면 선비질 따위는 잊게 되는 모양이다.
“윤허 받을 것? 무엇이냐, 말해보거라.”
“외인부대를 창설하고 싶은데요.”
“외, 외인부대? 그건 무엇인고?”
나는 외인부대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를 설명드렸다.
그러자.
“대감, 그건 사병이옵니다.”
잊고 있던 선비의 기개가 마구잡이로 터져나왔는지 김전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딴지를 건다.
아닌 게 아니라 사병은 한 100년 전 쯤 태종대왕이 금지 시킨 거라고 들었다.
당연히 지금 사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사병 소유 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는 즉시 빼도박도 못 하는 역적돼서 모가지 잘려나가거든.
“사병이 아니죠.”
“아니, 호위를 맡기고 사비로 돈을 주는 것이 어찌 사병이 아니옵니까? 더욱이 왜인들이라면 검에 능하여 일당백의······.”
“전하한테 윤허를 받으니 사병이 아니죠.”
“···”
유치뽕짝한 논리가 통했을까.
김전은 감히 반박조차 못 했다.
게다가.
“그 외인부대란 것은 어찌 만드려는 것이냐?”
형님도 가만 있는데 대사헌 본인께서 뭘 더 어쩌시겠어?
좌우지간.
나는 형님의 물음에 찬찬히 외인부대 창설 이유를 밝혔다.
“그러니까, 부부인(府夫人)과 함께 북해국에 가고 싶은데 부부인이 두려워한다?”
“네. 제가 이런 말씀까진 안 드리려고 했는데······.”
“음?”
“부부싸움도 했다니까요?”
“부부싸움?”
나는 차근차근 내막을 설명드렸다.
원래 온천 여행 계획했는데 갑자기 북해국 가게 돼서 틀어졌다··· 그것 때문에 여울이가 삐졌고 부부싸움을 하게 됐다··· 그래서 생각한 게 북해국 가는 김에 여울이랑 온천욕 즐기는 건데 여울이가 왜구를 무서워한다··· 외인부대 창설을 이거 때문에 하려는 거니까 허락해줘라··· 등등.
사실 개인 사생활과 관계된 거라 이런 것까진 말씀 드릴 필요가 없지만 이건 일종의 시위다.
형 때문에 부부싸움까지 하게 됐는데 윤허 안 해 줄거야?
같은 시위.
“불허할 까닭은 없다만 본시 왜인이란 성품이 교활해서 삯을 주고 부리면 필시 배반을 할 텐데?”
나도 그걸 걱정 안 한 건 아니다.
근데 외인부대라고 해도 뭐, 거창하게 천명 이상씩 고용해서 외인군단을 만들어버리려는 게 아니라 딱 500명 정도만 고용할 생각이다.
그에 반해 조선인으로 구성 된 정예병력은 5천명이다.
말이 5천명이지, 짐꾼이며 수행원들까지 합하면 최소 8천은 될 걸?
8000 VS 500.
외인부대의 용병(?)들이 설령 영화 《300》에 감명 받았다고 해도 날 배반하면서 생길 뻔한 부작용을 감내하려고 하진 않을 거다.
그리고 외인부대를 창설하는 목적 자체는 여울이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에 있지, 내가 미쳤다고 왜인들한테만 호위를 맡기겠어?
1차 호위는 무조건 봉해위한테 맡기고 2차 호위 같은 것만 외인부대에 맡길 생각이다.
“그 왜인들이 생각이 없지 않는 이상 설마 배반을 하려구요.”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와 같은 무논리에 형님마저 할 말을 잃은 것인지, 형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셨다.
“유, 윤허하마.”
꾸벅.
“감사합니다.”
***
나는 무슨 한이 있어도 여행을 가고 싶다.
온천 여행 말이다.
혼자 가는 온천 여행은 의미 없다. 무조건 여울이랑 같이 온천욕 즐기고 싶다.
그래서 온행 계획도 세웠던 거니까.
한겨울에 바깥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노천탕에서 몸을 뜨뜻하게 지진다.
물론 둘 다 벗은 채로 말이지.
그런데 이게 되려면 여울이가 여행에 같이 가야만 가능한 일이다.
여울이가 안 가려는 건 불안감 때문이라고 했고, 나는 불안감 없애준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 약속 무조건 지킬 거다.
지켜서 둘이 알 몸으로 노천탕에서 몸 지질 거다.
형님한테 윤허도 받았겠다, 이제 남은 건 외인부대를 창설 하는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려울 것도 없다.
졸라 살벌한, 그래서 저번에 그··· 이름이 뭐였더라.
대내전 사신 있잖아.
이름이··· 아.
아마고 쓰네히사.
일본인들 이름은 영 뇌리에 안 남는다니까.
좌우지간 엄청 살벌해서 날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내 기선을 제압해버렸던 그 쓰네히사 같은 일본인들 딱 500명을 고용한다.
그 500명들로 외인부대를 창설해서, 여울이한테 보여준다.
물론 살짝의 훈련은 필요하겠지.
그 왜인들은 대부분 실전을 겪은 베테랑들일 거다. 눈빛만 봐도 살벌할 텐데 봉해위가 나한테 받은 제식훈련까지 받아봐라.
듬직한 정도가 아닐 걸?
저 부대가 호위해주면 북해국이 아니라 염라국도 다녀올 수 있다고 할 거다.
그런의미에서, 사람이 실의에 빠지면 무력해지지만, 희망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바뀌는 법.
온천 여행에 수포로 돌아가 실의에 빠졌지만, 훗카이도 온천 여행이란 희망이 생겼다.
형님한테 윤허를 받자마자, 나는 이 희망을 토대로 대마도 풍(風)씨 시조가 된 환선 씨를 찾아갔다.
대마도주가 야쿠자 두목이라면, 환선 씨는 야쿠자 행동대장쯤 됐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잘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아주 다행히 환선 씨는 밞이 넓었다.
오백명까진 무리여도 2~300명은 거뜬하단다.
그럼 이제 남은 일은 고용이다.
환선 씨가 언급한 사람들은 모두 소종도에 머물고 있거나, 왜관에 넘어와서 교역을 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나 혼자서 무시무시한 야쿠자 소굴로 걸어 들어가긴 좀 그렇고.
환선 씨에게 같이 가달란 부탁을 했다.
물론 전함사 제검으로서 공직 생활을 하고 있는 환선 씨라, 시간을 비우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건 나한테 어린 아이 손목 비틀기보다도 쉽다.
다이렉트로 형님과 통해서 환선 씨 병가 처리 내고, 바로 다음날 짐싸서 왜관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