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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84화 (28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84화>

    ***

    “이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1년이라니요? 아니, 말이 1년이지 사실 그 이상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예?”

    대사헌 김전.

    “불충스러운 말이긴 합니다만··· 천하일주에 대한 어심을 충심으로 막아냈다 생각했는데 결국 이런 사달이 났습니다 그려.”

    좌참찬 안윤덕.

    “맞습니다. 대사헌의 말씀처럼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지요. 차라리 다른 곳이면 내 모르겠습니다. 북해국이라니요? 북해국은 여태 아국과 통한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 전하께서 가셨다가 자칫 오랑캐들에게 화라도 입으신다면은······.”

    대사성 이점.

    “어허. 대사성은 말씀을 가려하시오! 화라니! 그 무슨 입에 담기도 망측한 소릴 하신단 말이외까?”

    좌의정 임사홍.

    “좌우지간, 우려하던 일이 생겼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들? 지부사. 지부사는 전하께 언질 받은 바가 없으십니까?”

    영의정 허침.

    “이 사람이라고 있었겠습니까. 북해국 구원에 관한 일은 사실상 전하께서 모두 다 계획하고 계셨던 걸요.”

    지부사 겸 넌씨눈 노공필.

    모두들 시끌벅쩍 거리며 장기화 될지도 모르는 섭정에 펄쩍 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만 할까.

    가장 미치고 펄쩍 뛰겠는 건 바로 난데 말이다.

    ‘이번 섭정만 마무리 하면 여울이랑 놀러 갈랬는데······.’

    돈이 있는 삶은 언제나 옳다.

    그런 의미에서 진성대군으로 살면서 온천을 한 번도 안 가봤지 뭐야?

    이번 섭정질만 마무리 짓는대로 온행을 떠나려고 했다.

    날이 적당히 선선해지는 백로(白鷺)때나 추분(秋分) 쯤?

    목적지도 이미 정해놨다.

    온양이다.

    온천은 온양이 끝내준다더라고.

    그런데 이렇게 되면 나가리다.

    무엇보다.

    ‘아, 진짜 하기 싫은데.’

    형님이 아프데서 재차 섭정질을 하고 있는 거지만, 병이 아니었다면 아마 시작도 안 했을 걸?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관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누구는 물질에 무게를 두고 살아 갈 수도 있겠고, 또 누군가는 권력에 무게를 두고 살아갈 수도 있단 말이지.

    물질과 권력.

    나는 이 두 가지에 해당사항 없다.

    세계적인 부호에 손꼽힐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모순적이겠지만 난 딱히 물질에 무게를 두고 살진 않는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돈이 쫓아온 거지.

    역시, 대원군이라는 최초의 작위에 봉작 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모순적이겠지만 딱히 권력에 무게를 두지도 않는다.

    전생이었다면 몰라도 말이지.

    뭐, 있어서 나쁠 건 없지만.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은 중용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일과 삶이 균형잡혀진 삶.

    이건 빈한했던 시절에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걸?

    없이 살던 현호 시절 누군가가, 너 한 달에 450~500시간 일하고 연봉 1억 받을래, 한달에 200~250시간 일하고 4~5천만원 받을래?

    묻는다면 난 무조건 후자를 택했을 거다.

    삶의 가치가 달라지는 거니까.

    근데 섭정질 더 하라는 말은 적어도 나한테 있어서는 한 달 500시간 일하되, 돈은 4천만원만 받아가란 말과 진배가 없다.

    500시간 일하고 1억 받는 것도 싫은데 500시간 일하고 4천만원 받는 건 더 싫다.

    이것 뿐이면 말을 안 해.

    섭정질 하다보면 신경 쓸 게 얼마나 많은데?

    엄살이라고?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바로 얼마 전에 대내전의 사신들이 천여명의 씹선비들과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때 대금으로 뭘 받아야 하네 마네로 조정에서 실랑이가 있었다.

    실랑이가 끝나고 나서는, 대내전이 형님께 진상하겠답시고 값비싼 물건들을 갖다 바쳤는데 답례품으로는 뭐가 좋겠냐로 장장 이틀을 회의했다.

    A라는 물건 주면 어떠냐?

    의견이 나오면 금방,

    저놈들 태도 봐라, 무슨 오랑캐한테 A를 주냐? B주는 것도 아깝다.

    라는 반박 의견이 튀어 나온다.

    B를 중점으로 논의를 이어가다 보면 다시,

    저놈들이 헌상한 게 제법 비싼 물건인 건 맞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헌상한 게 아니라 교활한 마음으로 갖다 바친 거니 A, B모두 온당하지 않다. 답례품은 역시 C가 좋겠다.

    라는 제3의 의견이 튀어나온다.

    스발.

    답례품 하나 주는 것도 이렇게 신경 써서 주는데 나랏일은 오죽하겠냐고.

    근데 이걸 1년이나 더 하라고?

    안 해. 아니, 못 해.

    “전 이짓거리 1년 더 못 합니다, 절대로요.”

    그래서 툭 까놓고 말했다.

    대신들이 경악스런 표정을 짓건 말건.

    “···?”

    “저번처럼 선수 치죠.”

    “서, 선수요?”

    “저번에 천하일주에 대한 어심을 막은 건 충심이었습니다. 맞습니까?”

    사실 엄밀히 따지면 기군망상이지만 우리 모두가 공범이다.

    똑같은 죄를 저질렀는데 응, 충심은 개뿔 그거 기군망상이었어.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이다.

    “그, 그렇지요. 충심이 아니었다면 저희가 어찌 합심하여 나섰겠습니까?”

    “이번에도 같습니다.”

    “어인 말씀이신지?”

    “지부사 대감.”

    “예, 합하.”

    “북해국 구원하는 계획 형님께서 짜고 있다 하셨지요?”

    “아, 예. 그렇지요.”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어떻게 돼가고 있냐고 물으신다면은··· 뭐, 이번에 살짝 계획을 수정하시긴 하셨습니다. 대내전의 사신이 오면서요.”

    “어떻게요?”

    “대내전에 통보해서 길안내를 받는 걸로 수정을 하셨지요.”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들 합시다.”

    “···?”

    어리둥절해 하는 대신들에, 생존 욕구에 의한 잔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

    어심을 돌리기로 마음 먹은 이상 우리는 모두 동지였다.

    계획을 정한 우리는 모두 신시말(오후5시)에 행동에 나서기로 모두 각자의 관청으로 돌아갔다.

    신시말에 승부를 보려면 일단 각자 할 일들은 끝내놔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신시말까지 이제 세네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세네시간 안에 섭정승으로서 밀린 업무들을 처리하고, 모두 다 같이 강녕전으로 가야 한다.

    “해당 건은 형조로 이관하세요.”

    “아, 이건 저한테 올릴 게 아니라 승정원에 올려야지요.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니 승정원을 통해 전하께 고하도록 하세요.”

    “신극성 처벌 말입니까? 굳이 의금부에 이관할 필요 있겠습니까? 서계 보니까, 이미 여죄까지 드러났더만요. 형조로 이관하시고, 법대로 처리하라 하세요.”

    속전속결로 업무를 봤다.

    섭정승의 경계가 왕과 신하의 그 중간 지점에 있다 보니, 밑에 관리들도 내가 처치하기 곤란한 사안들까지 뭉퉁그려서 올려보내곤 한다.

    내가 정말 처치하기 곤란한 것들은 승정원을 통해 형님이 처리하도록 하시지만, 애매한 것들은 모두 내 선에서 커트한다.

    그렇게 속전속결로 업무를 처리하니 딱 신시말이었다.

    약속 장소인 빈청으로 가자, 이미 모든 대신들이 와있었다.

    우리는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계획을 더듬어보고, 강녕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하. 대원군 합하 이하 대신들이 북해국의 일로 알현을 청했사옵니다.”

    내관이 우리가 왔음을 알리자, 곧 들라하라 라는 형님의 육성이 들려왔다.

    안으로 들자 침소 안이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어지럽다.

    각종 책들과 종이들이 흩날려있고, 형님은 의자 놔두고 바닥에 앉아 계신다.

    그림이나 시라도 쓰고 계셨던 모양이다.

    “북해국에 관한 일로 알현을 청했다던데 경들 모두가 걸음하니 의아한 일이로다.”

    “빈청에서 마침 북해국에 관한 일이 논의 되었던터라 급히 아뢔어야 할 듯 하여 걸음하였나이다.”

    의심쩍어하시는 형님에 허침 할아버지가 스무스하게 받아쳤다.

    “음. 어떤 게 논의되었길래 대원군은 물론이고 의정대신과 육조장관 모두가 걸음을 하였단 말인고?”

    이건 내가 나서야 한다.

    “북해국을 구원하는 장수로 지부사가 부적합하다는 말이 나왔고, 그래서 누가 더 적합한가 하는 논의를 주게 받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몇몇 인사들이 거론됐습니다. 지부사보다는 그 인사들이 어떤가 형님께도 여쭤보려고 찾아온 거구요.”

    “그런 거라면 진성이 너 혼자와도 될 텐데 굳이······.”

    떨거지들은 뭐하러 달고 왔냐는 표정이시다.

    하지만 이 떨거지(?)들은 플랜 B를 위한 병풍들이시다.

    플랜 A가 막히면 곧바로 플랜 B의 밑밥을 깔기 위한 병풍들.

    “이국을 구원하는 일인데 조정대신들도 모두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뭐,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그래, 누가 거론되었더냐?”

    선의의 거짓말이 먹힌 듯, 별 의심은 없어 보이신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소종도 목사 한숙창이랑······.”

    “한숙창? 하지만 한숙창은 이제 막 소종도 목사로 부임하지 않았더냐.”

    “이제 막 부임한 건 사실이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감조관으로서 머물고 있었으니 그들의 풍습에 해박하다 해서 거론이 됐습니다.”

    “음. 그리고?”

    “최부입니다.”

    “최부? 단천에 정배돼 있는 그 최부 말이냐?”

    “예.”

    곰곰이 생각하던 형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 모두 북해국을 구원하는 원수로서는 적임이 아닌 듯 하다. 특히 최부는 죄인의 신분이거늘······.”

    큰 일 났다.

    플랜 A 실패다. 한숙창이라면 형님께서도 구원군 대장으로 적임이라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대신들에게 눈치를 줬다.

    플랜 A 실패니 플랜 B로 갈아타자고.

    그렇게 내 눈치를 받은 대신들이 플랜 B의 밑밥을 깔려하던 그 때.

    “아,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원군의 말처럼 내 원래는 지부사를 북해국을 구원하는 일의 원수로서 보내려고 했다만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지부사는 적임이 아닌 듯 하다. 지부사에게는 미안한 말이다만, 지부사와 함께 북해국의 일을 논하다 보면 의지가 있는지 의심 될 때가 많았다. 저런 인사를 북해국에 보냈다가는 오히려 먹칠만 할 테니 과연 지부사가 부적합하다는 말은 타당하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말인데··· 마침 경들도 모두 이리 한자리에 모였겠다··· 또, 빈청에서 북해국의 일을 논의하고 있었겠다······.”

    꿀꺽.

    “아무래도 내가 대장군으로서 또 한 번······.”

    “형님!”

    “아이쿠, 귀야.”

    “제가 가겠습니다!”

    “응? 네가?”

    “대, 대감!”

    이건 플랜 B가 아니잖습니까?

    라는 표정의 허침 할아버지가 보인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지르고 말았다.

    더 이상 섭정질을 할 수 없다는 어떤 절박한 심정··· 그 심정을 그대들은 알까?

    그 심정이 날 이리 극단적으로 만들고야 만 거다.

    그만큼 난 절박하게 섭정질을 하기 싫다.

    절대 싫다고! 네이버!

    “···예, 제가 가겠습니다.”

    나는 흡사 영화 《300》에서, 크세르크세스 황제의 대군을 고작 소수의 병력으로 막기 위해 출정한 테미스토클레스의 그것에 빙의해서 말했다.

    단호하고··· 비장하고··· 처절한··· 출정 직전의 테미스토클레스의 그것처럼.

    “하지만 내 어찌 너를 그런 오랑캐의 나라에 보낼 수 있단 말이냐?”

    “그러는 저는 형님을 어찌 그런 오랑캐의 나라에 보낼 수 있겠습니까?”

    말문이 막힌 형님이시다.

    슬쩍.

    주춤한 형님에 나는 허침 할아버지에게 눈치를 줬다.

    틀어진 계획에 당혹스러워하던 허침 할아버지가 내 눈짓에 금방 호응해주셨다.

    “사, 사실 대원군께서 소종도 목사 한숙창과 죄인 최부가 거론됐다는 말씀도 하셨지만, 그 이전에는 대원군께서 본인 스스로 요즘 문란해질대로 문란해진 선비들의 본이 됨과 함께, 백성들에겐 의무를 팽개치는 종친 대신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 백성들에게 존경 받는 왕가의 모습을 보여주시겠다면서 자원하신 적이 있었사옵니다. 다만 신들이 앞다투어 말려 그 대신 한숙창과 최부가 거론 된 것인데 대원군 합하의 뜻이 이처럼 단호하고 완강하니 신들이 어찌 그 아름다운 뜻을 꺾을 수 있겠나이까? 북해국을 구원하는 일은 대원군께 맡기소서.”

    금붕어처럼 눈을 끔뻑거리며 갑자기 바뀐 계획에 당황해하던 대신들도, 허침 할아버지에 금방 눈치를 챘는지 후방 지원을 해왔다.

    특히 대사헌 김전이 인상적이었다.

    “그, 그렇사옵니다, 전하. 무릇 선비의 뜻을 꺾는 것은 폭군 걸왕도 막지 못 한다 하였으니 과연 신들이 어찌 대원군 합하의 아름다운 뜻을 훼손하고 더 나아가, 그 의지를 무참히 꺾어버릴 수 있겠나이까? 이는 젊은 선비를 방치하는 일이요, 젊은 선비의 기개를 비겁함으로 바꾸는 일이니 온당한 일이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하니 대원군 합하를 북해국 구원의 원수로 삼아 보내소서.”

    “신이 지금 대원군 합하의 마음을 감히 들여다보자면, 대원군 합하께서는 읍참마속의 심정과 같을 것이옵니다. 감히 생각건대 전하께서 북해국을 구원하려는 것은 어찌 된 까닭이겠사옵니까? 우리 조선은 과연 동국에서 최초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 난 나라이옵니다. 그리하여 전하께서는 온천하에 교화를 펴시려 북해국을 구원하시고, 수의지화(교화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태평한 시대)한 시대를 열려 하시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하온데 생각해본다면 한숙창이나 최부를 보낸다 한들 그 뜻이 온전히 전해지겠나이까?”

    그 다음으로 인상적인 건 대사성 이점이었다.

    “온전히 전해지겠냐니 그건 무슨 말인가?”

    형님이 관심을 보이자 이점은 이 기회를 놓칠새라 다급히 말을 이어나갔다.

    “한숙창은 정세를 읽지 못 하는 위인이요, 최부는 죄인이니 설령 북해국을 구원하는 일을 맡긴다면, 구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을 교화 시킬 순 없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대원군 합하께선 어떻겠습니까? 정세에 해박하여 조정에 도움이 된 바가 적지 않으니 북해국에 가서도 가진 바 지식으로 북해국을 이롭게 할 것이요, 그 뛰어난 인품을 바탕으로 오랑캐를 교화할 테니 이 어찌 전하께서 바라시는 왕업이 아니시겠사옵니까? 바라건대 진성대원군을 보내소서! 보내서, 온천하에 전하의 위엄과 교화를 떨치소서!”

    이점의 말을 끝으로 침전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꿀꺽.

    우리는 모두 마른 침을 꼴깍거렸고 형님은.

    긁적긁적.

    싱숭생숭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셨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나온 말은······.

    “듣고보니 경들의 말도 일리가 있긴 하군.”

    “하아.”

    도처에서 터져나온 한숨은 탄식이 아니라 안도의 한숨이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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