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83화 (28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83화>

    ***

    “정말 그 안처진인가?”

    “아까 청내로 들어가실 때 보니까 그 안처진치고는 나이가 좀 들어뵈던데······.”

    “이 사람아, 그럼 어사가 새파랗게 어릴 줄 알았는감?”

    “안처진은 어리잖은가?”

    “그건 패설이니까, 어린 거지.”

    상주 경찰청 앞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이틀 전, 해괴한 소문이 상주 전역에 나돌았다.

    이번에 부임한 경찰청장 안처직이 사실은 안처진전의 그 안처진이라더라.

    그 안처진이기 때문에 공명정대하게 명판을 내릴 것이다.

    안처진전의 안처진이 조선의 탐관오리를 모두 다 때려 족쳐서 탐관오리의 씨가 말랐던 것처럼 이제 경상도의 탐관오리란 탐관오리는 모두 씨가 마를 것이다······.

    등등.

    소문에 솔깃한 사람들은 모두 안처진전의 그 안처진 얼굴이나 보겠답시고 경찰청 앞에 모여 들었다.

    물론 이로인해 골치 아픈 사람도 생겼으니······.

    “일이 커진 것 아닌가?”

    안처직이었다.

    “···”

    “왜 말이 없나? 일이 커진 것 아니냐니까?”

    처직은 불안한 눈초리로 포도부장에게 물었다.

    부장은 애써 처직의 눈길을 회피했다.

    “내가 안처진전의 안처진이 아닌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일세, 이 사람아!”

    안처진전의 주인공은 분명 자신을 본으로 삼아 묘사한 게 분명했다.

    그건 추측이 아니라 틀림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각색 되거나 윤색 된 게 너무 맞았다.

    진성대원군 합하께서 대사헌이던 시절 함께 충청도에 저수지 지대 사건을 해결하러 내려 간 적은 있었지만, 탐관오리가 보낸 자객에 의해 비명횡사 할 뻔한 적은 없었다.

    역시, 저수지 지대 사건과 관련해 은진현에 합하와 머물렀던 적은 있지만 수령을 봉고파직시킨 까닭에 수령을 대리해서 송사를 처결하고 명판 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다.

    뜬금없이 왜구가 나타나서 해안 고을을 노략질 한다는 소식에 어사질 관두고 왜구를 소탕하러 간 적도 없었고, 기생과 정분이 난 적도 없었다.

    하다못해······.

    -안처진은 쌍거풀이 전무하고 눈썹은 꼭 숯을 바른 것처럼 진하니 턱은 각졌으되 각지지 않아 갸름한 듯 각져보이며 코가 반듯하고 오뚝 솟아 태산과 같으니 그 기개가 바로 코에서 비롯된 것이니 입은 또 어떤가······.

    아닌 말로, 안처진전에 묘사된 것처럼 잘 생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 모두 그 안처진전의 안처진을 구경하러 온 것이었으니 처직으로서는 괜히 뜨끔 할 수 밖에 없었다.

    “소인도 사람들이 이리 호응을 할 줄은··· 송구하옵니다.”

    고개를 떨구는 부장에 처직은 담장 너머를 슬쩍 바라봤다.

    그러다 순간 까치발 들고 청내를 구경하던 주민과 눈이 마주쳤다.

    “흡.”

    “저기 계신다!”

    “어디, 어디?”

    “영감. 어찌 숨으시옵니까?”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겠는가 이 말일세.”

    “설마 실망까지 하겠사옵니까?”

    “신고는 아직 안 들어왔나?”

    애당초 이름 석 자를 판 것도, 안처진으로 선전하면 신고가 잘 들어올 거라 여겨서였다.

    예상대로 인파는 구름떼처럼 몰렸으니 이제 좀 달라졌을 거라 여겼는데 착각이었다.

    “예, 아직······.”

    “이런 낭패가 있나.”

    처직이 낙담하던 그 순간이었다.

    “영감! 신고자이옵니다!”

    포도군관의 외침에 처직은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할 일이 생긴 것 같다.

    ***

    “지금 뭐하는 거래?”

    “같이 봐놓고, 뭐하냐고 물어보는 건 무슨 심보인가? 신고 하러 왔다잖은가.”

    “신고가 뭔데?”

    “고소 이 사람아. 사람이 그리 무식해서 얻다 써?”

    “무식하긴 피차일반이면서 무안주긴······.”

    방금 전까지는 안처진을 보겠답시고 이목이 집중됐다면 이번에는 달랐다.

    신고라는 걸 본답시고 이목이 집중돼 있었다.

    그 이목들에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고 기뻐한 것도 잠시.

    처직은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마른 침을 꼴깍거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신고를 받는다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신고자가 어떤 내용을 신고하면 사건의 경중에 따라 절차대로 처리하면 되는 문제니까.

    문제는······.

    “그러니까, 네 말은 관찰사의 비리를 신고하는 것이란 말이렷다?”

    처직이 굳은 표정으로 되묻자, 신고자 고삼은 괜스레 처직의 눈치를 살폈다.

    처직이 보기엔 아무래도 수령방백의 으뜸인 관찰사를 신고한다는 부분에서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예.”

    고삼이 긍정하자 처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 고삼의 신고는 잘못된 게 아니다.

    다만.

    ‘왜 하필 첫 신고부터··· 제기랄.’

    첫 신고치고는 사건이 중하다.

    “어떤 걸 신고하려 함이냐?”

    당혹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처직은 최대한 위엄있는 어조로 말했다.

    안처직을 안처진으로 생각하는 백성들이 보고 있었다.

    평정심을 잃으면 안 된다.

    “그게 말입니다요.”

    고삼의 입에서 신고 내용이 술술 새어나왔다.

    신고 내용은 별다를 게 없었다.

    형벌 남용.

    권력을 이용한 치부.

    뇌물 수수 등등.

    처직이 관직에 있으면서 숱하게 보아온 탐관오리들의 범죄 내용이었다.

    ‘그 다음은······.’

    형관이었다거나 어사였다면, 다음 절차는 아주 간단하다.

    조정에 이 사실을 보고하거나 어사의 직권으로 탐문 및 수사를 하다가 심각한 경우라면 봉고(창고를 잠그고 감찰함)하고 파직 혹은 서울로 압송하면 되니까.

    문제는 경찰관리로서 다음 절차가 생각이 안 났다.

    “크흠. 잠시 기다리거라.”

    “예.”

    고삼에게 기다리라 말한 처직은 방으로 돌아간 뒤, 허둥거리면서 문갑을 뒤졌다.

    한참을 뒤진 끝에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수첩이었다.

    수첩에는 경찰신조라는 글자가 써있었는데, 처직은 망설임없이 수첩을 펼쳐들었다.

    「부정부패 조(條)」

    -신고를 받으면 무조건 접수하여 철저한 수사로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한다.

    “이건 아니고.”

    휘릭-.

    -출도 시에는 권마성(가갈)을 하지 않는다.

    “아직 출도 전이고.”

    -수령방백 및 아전들의 비리 신고는 즉시 출도하고 봉고하여 증거를 인멸하지 않게 한다.

    -봉고한 뒤 철저히 수사하여 무고가 아닌지 파악하고 해당 죄인의 범죄가 드러나면 대전에 따라 처벌하되, 사건이 중한 경우 의금부나 형조에 이관한다.

    한참을 뒤진 끝에 드디어 경찰 관리로서의 다음 절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보고 나니 허무했다.

    몇 번이고 외웠던 내용인데 막상 상황이 닥치니 이 간단한 걸 까먹었다니······.

    “출도다!”

    좌우지간, 다음 절차를 보자마자 처직이 경찰청 예하의 관리들에게 소리쳤다.

    경찰청장 부임 이래 첫 출도였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안처진에 너무 몰입을 해서일까.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는 처직이었다.

    ***

    동헌.

    “아니, 왜 울고 그러는 것이냐? 내 꼭 불러 들인다니까?”

    “정인을 두고 떠나버린 뒤에 부임지에 두고 온 정인을 잊어버리는 사내들이 한 둘입니까? 분명 영감께서도 조정에 돌아가시면 소첩을 잊으시겠지요··· 그걸 생각하면 소첩이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향란이 울먹거리자 극성은 안절부절 못 해 하며 향란을 달랬다.

    “아니다, 날 어찌 그런 소인배들과 동격으로 여긴단 말이냐? 내 너를 어찌 버린다고? 내 돌아가거든 부인을 설득해 널 첩실로라도 안채에 들일 것이다. 그러니 울지말거라. 네가 울면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단 말이다.”

    계속 된 극성의 위로에 향란이 조금은 풀어진 듯 한 얼굴로 말했다.

    “참말이십니까?”

    “암, 참말이고 말고. 내 언제 너에게 거짓을 이른 적이 있더냐? 나 신극성이. 일평생 거짓을 일러본 적이 없는 사내니라. 기다리거라. 네 조만간 널 서울로 데려가 호강시켜줄 터이니!”

    “하면 믿어도 되겠습니까?”

    “나만 믿으라니까!”

    “역시 영감 밖에 없습니다.”

    향란이 극성의 품에 안기자 극성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한데 영감.”

    “응?”

    “참말로 영전은 하실 수 있는 게지요?”

    “내 말을 허투루 들었더냐? 두고 보거라. 조만간 의정대신에 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니라.”

    “그거야 청장 영감께서 어찌 포폄(褒貶) 해주시냐에 따라 다른 건데··· 영감께서 잔치도 마다 하신다면서요?”

    “쯧쯧. 사람 보는 눈이 그리 없어서야 쓰겠는고.”

    “···?”

    “안 청장 그치가 세간의 소문과 달리 낯을 많이 가리는 것 같더구나.”

    “낯이요?”

    “그래. 그러니 잔치도 마다하는 게지. 하지만 자고로 주색 마다하는 사내는 없는 법. 그런데 또 내가 누구냐? 풍류라면 조선 으뜸이 아니더냐. 조만간 안 청장과 친해질 수 있을 게다. 친해지기만 해봐라. 필시 청장이 대원군 합하와 전하께 내 관찰사로서 어떤 선정을 베풀었는지 포(褒) 할 게다. 그렇게만 되면······.”

    흐흐흐.

    극성이 망상의 나래를 펼치던 그때였다.

    “관찰사 영감. 청장 영감께서 오셨습니다요.”

    동헌에 딸린 방지기(심부름꾼)의 말에 극성의 입이 또 다시 귀에 걸렸다.

    “흐흐. 봐라, 봐.”

    피식거리며 거드럭거린 극성은 향란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방을 나왔다.

    동헌 뜰에는 익숙한 안처직이 뻘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오, 이게 누구시오. 안 청장 아니시오? 자자, 날도 더운데 밖에 계시지 말고 들어갑시다. 모처럼 오셨으니 내 오늘 저녁에는······.”

    “관찰사 신극성.”

    “왜 그러시오?”

    “그대를 청장의 직권으로 포박하여 하옥하고 감영을 봉고한다. 포박하라!”

    “포, 포박이라니! 아, 안 청장. 왜, 왜 이러시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발악하는 극성에, 처직은 동헌 밖을 흘겼다.

    출도를 따라온 백성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에 처직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어제의 탐관오리를 벌하지 않는 것. 그건 내일의 탐관오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과 같으니 내 어찌 그대를 벌하지 않으랴.”

    라고 말하자, 밖에서 동헌 뜰을 들여다보던 백성들이 술렁였다.

    “판박이네 판박이여.”

    “진짜 안처진인가봐. 안처진이 장소동 처벌할 때 딱 저 말 했잖어?”

    백성들이 경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은근히 그 시선들을 즐긴 처직이 포도군관들에게 소리쳤다.

    “끌고가라!”

    “옛!”

    ***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주에서 올라온 안처직의 서계를 읽어나가던 내가 정색하며 묻자, 상선 대감은 본인이 다 민망하신지 헛기침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조금 더······.”

    “벌써 한달이나 지났는데요?”

    사람은 누구나 첫만남에선 낯을 가리면서 고상한 척을 떨어대지만, 차차 상대가 익숙해지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도 그렇다.

    익숙하다 못 해 친근함마저 느끼는 상선 대감에게, 나는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투정 부리듯 징징(?)거렸다.

    물론 타당한 징징거림이다.

    섭정질(?)을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다니······.

    “그게 아무래도 에, 그러니까······.”

    “형님 고뿔 들었던 것도 사실은 꾀병이었죠? 그러고 보면 이상하긴 했어요. 고뿔 들어서 거동도 불편하다던 형님이 최도경 때려 잡으러 갔던 것도 그렇고······.”

    “꾀, 꾀병이라니요. 아닙니다. 어찌 전하께서 칭병을 하셨겠습니까? 그건 옳지 않으신 말씀이옵고··· 에, 아! 경찰청 일은 어찌 되고 있는지요? 그, 전하께서도 경찰청에 대한 기대가 무척 크셨던지라, 차후 서계가 올라오면 꼭······.”

    “화제 전환 하시는 거죠?”

    “···”

    상선 대감은 궁궐밥만 반세기를 잡수셨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거짓말에 익숙하다는 말이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앞에서는 거짓말을 잘 못 하신다.

    아니, 안 하신다.

    상선 대감도 날 손자처럼 여겨서 그런 것 같은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후··· 얼마나 더요?”

    “예?”

    “얼마나 더 대리하고 있으면 되는 건데요?”

    “전하께서 따로 언질은 없으셨습니다만··· 에, 그게······.”

    “괜찮습니다. 편히 말씀하세요. 매도 몇 대 맞는지 알아야 마음 편하지, 몇 대 맞는지도 모르고 매 맞으면 더 아픕니다.”

    “1년 정도······.”

    순간 인지부조화가 일었다.

    “한 달이요?”

    “아뇨, 1년······.”

    “그게 무슨······.”

    얼이 나가 있는 내게 상선 대감은 쐐기를 박으셨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북해국을 몸소 구원하려 하시는 듯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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