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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82화 (28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82화>

    ***

    경상도 상주.

    평소 동헌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라고는 사또가 주색 잡는 소리나, 기생의 교성 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연신 실실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옳지! 다 때려 잡아라, 다!”

    신극성은 이부자리에 드러누운 채로 주먹까지 불끈쥐며 책에 몰입하고 있었다.

    요새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안처진전》이었다.

    바로 어제 이 책을 받아본 극성은 날이 꼬박 새도록 책을 읽고 있었다.

    이게 뭐랄까, 말로 형용 할 수 없는 어떤 만족감을 주는 것 같았다.

    안처진의 비범한 성장 과정은 마치 나의 성장 과정 같고, 안처진이 산적떼를 만나 비명횡사 할 뻔 할 때는 내가 산적떼를 만나 목숨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고, 훗날 안처진이 장원급제 했을 때는 내가 장원랑이 된 것 같고, 안처진이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좌천 될 때는 내가 좌천 된 기분이고, 안처진이 왕의 총애를 사서 어사로 발탁 될 때는 내가 발탁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안처진전의 묘미는 탐관오리를 때려 잡는 장면에 있었다.

    -···하므로 그대는 고을의 민심과 민생은 챙기지 않고 오로지 주색만 탐하고 여색에 빠져 고을을 도탄에 빠뜨린 죄가 있으니 내 어찌 망설이랴! 어사의 직권으로 죄인을 파직한다!

    탐관오리를 무릎 꿇린 채 말하는 이 장면은 가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물론 탐관오리를 때려 잡는 장면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자라면 으레 관심을 가질 법한,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한시와 시문에 뛰어나고 그러면서도 정조가 굳은 기생과의 연애사도 담겼으니 이게 또 안처진전의 다음 묘미였다.

    -어사 나리, 소녀는······.

    꿀꺽.

    극성은 마른 침과 함께 괜히 뻐근해진 하초를 주물럭거리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사 안처진이 예의 현령을 봉고파직 할 수 있었던 건, 이 기생이 안처진에게 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안처진은 기생의 서간을 토대로 수사에 착수했고, 마침내 사또를 파직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작중에선 수십차례 주고 받은 서간으로, 얼굴도 안 본 둘의 마음에 연정이 싹트고 있었다는 묘사가 있었으니 이제 시작이었다.

    그런데.

    “감사또. 호장이옵니다.”

    한참 중요한 부분을 읽어 내려나가던 극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산통이 다 깨진 기분이었다.

    “제기랄, 뭐냐!”

    “경찰청장께서 이제 문경새재 초입에 들어서셨다고 하옵니다. 슬슬 채비하고 마중을 나가야 되지 않을까 해서······.

    “경찰청장?”

    극성은 기억을 더듬었다.

    “아.”

    기억이 난다.

    포청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설치되는 기관인데 시범적으로 경상도에 먼저 설치 된다고 들었다.

    다만.

    “그게 오늘이었더냐?”

    극성은 경찰청장이 도착하면 후하게 대접할 테니 도착 예정일에 맞춰 알리라 신신당부를 했었다.

    문제는 그걸 까먹고 있었다는 게 문제지.

    “···예.”

    극성은 아쉬운 표정으로 안처진전을 내려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청장은 소홀히 대접해도 되는 그저 그런 뜨내기가 아니다.

    그저 그런 뜨내기가 아니라, 극성 본인이 장차 중앙의 요직에 나아갈 수 있냐 마냐를 판가름 짓는 판결사가 될 자였다.

    수차례나 친공신의 반열에 올랐고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권신이신 섭정승 합하와도 막역한 친분을 자랑하는 위인이니까.

    줄 한 번 잘 대면 육조판서가 대수인가?

    의정대신도 노려봄직하다.

    “잔치 준비는 다 했겠지?”

    “이를 말이겠사옵니까?”

    “그럼 얼른 가도록 하지.”

    청장이 이제 문경새재를 넘었다니 관아까지 오려면 족히 반나절 이상은 걸릴 테지만, 청장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극성은 허둥지둥 동헌을 빠져나왔다.

    ***

    안처직은 머리를 지끈 눌러 감쌌다.

    “아니, 또?”

    “예.”

    “내 여독이 채 풀리지 않으니 호의만 받겠다 전하고 돌려보내게.”

    “관찰사께서 불쾌해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벌써 두차례나 거절 하셨는데······.”

    “두차례건 세차례건, 돌려보내시게.”

    단호한 처직에 경찰청 소속의 군관이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갔다.

    군관이 물러가자, 그래도 제법 근엄한 자태로 앉아있던 처직은 대청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잔치는 무슨 얼어 뒤질.”

    그의 입에서 상스러운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욕을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 경찰청에 부임한 지 벌써 열흘.

    첫 날부터 마중을 나온 관찰사는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줬다.

    이는 관행이기도 하니 처직도 별 생각없이 잔치를 받아들이고 부어라 마셔라 해댔지만 그 이후로 벌써 두차례.

    관찰사는 또 잔치를 베풀 테니 참석해달라고 사람을 보내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피곤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경찰청이라는 기관은 이제 막 신설됐다.

    처직은 그 기관의 초대 장관이었고 그러다 보니 모든 게 낯설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수령들의 지침서와 같은 수령칠사(守令七事)같은 경찰신조라는 게 따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낯선 근무 환경(?)에서 뭐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게 사실이었다.

    일단은 경상도 전역에 부정부패나 비리와 관련 된 사건은 관아가 아니라 경찰청에 신고하라 방을 붙여둔 상태였지만, 신고는 고사하고 문의도 안 들어오고 있었으니 오히려 조바심이 나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이 조바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상주의 경찰청은 조정에서 논의가 되자마자 설치가 됐기 때문에 따로 건물을 지어 올릴 시간이 없었다. 관아를 택일해서 임시 경찰청으로 삼았는데 결과적으로 상주 향교가 채택됐다.

    명색이 종이품아문인데 서리들이 집무를 보는 질청 따위에 설치하면 격이 떨어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다만 그로인해 상주 유생들이 경찰청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옛날 같았으면 들고 일어나도 골백번 들고 일어 났을 일이다.

    조바심 나랴 유생들 눈치 보랴··· 잔치를 즐길 여유는 개코딱지 만큼도 없는데 잔치를 베풀겠답시고 사람을 보내오니 첫 날 받았던 후대에 대한 호의도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밖에 부장 있는가.”

    “불러 계시옵니까, 청장 영감.”

    “신고는 안 들어왔나?”

    “···예, 아직.”

    처직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자네 의견이라도 따라야 하려나.”

    예의 부장은 팔도에 처직 본인의 명성이 휘날리고 있으니 이를 토대로 선전하면 충분히 경찰청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게끔 만들 수 있을 거라 조언을 해줬었다.

    물론 말이 조언이지, 좀 더 상스럽게 표현하면 이름 팔아 먹으란 소리였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이름을 사삿일에 팔 수는 없다고 펄쩍 뛰며 반대했던 처직이지만 이렇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벌써 열흘이다.

    상주 하나만 관할한다면 그런가 보다 싶을 수도 있지만, 경상도 전역의 고을에서 사건, 사고가 없다는 건 의심의 문제 일 수 밖에 없었다.

    경찰청이 제 기능을 하진 않을 거라는 의심.

    하지만 부장의 말대로 처직 본인의 이름을 팔면 능히 해결 가능한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처직의 명성은 팔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도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저승차사니 도깨비니 하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진 않았었다.

    게다가 앞서 말한 명성은 악명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였다.

    정의로우면서도 공명정대한 이름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안처진전······.’

    누가 쓴 건진 몰라도 처음에는 잡아다 경을 치려 했었다.

    이건 누가 봐도 본인이었다.

    비록 극적으로 각색 된 부분과, 처직 본인이 겪은 사실들이 적당이 윤색되거나, 혹은 겪지 않은 사실도 사실처럼 묘사가 되긴 했지만 이 글의 저자가 누굴 본으로 삼아서 글을 썼는지는 알 만한 사실이었다.

    어떻게 확신하냐면, 아주 옛날에 진성대원군께서 대사헌이던 시절 함께 은진에 어사로 나간 적이 있었다. 작중 등장하는 고을이나 탐관오리들의 이름은 다르지만, 작중 묘사가 당시와 일치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다 우연이라 쳐도 제목은 어찌하지 못 한다.

    안처진전.

    좌우지간, 이 안처진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덩달아 그 명성도 올라가게 됐다.

    안처직의 공명정대함이 여느 명판관들 못지 않다··· 안처직의 정의로움이 원혼들마저 구제했다··· 안처직이야 말로 조선의 포청천이다 등등.

    좋든 싫든 명성을 갖게 된 건 사실이니, 부장의 말처럼 이를 토대로 적당히 선전하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터였다.

    “일단은 조정에 보고 할 거리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으니 이런 민망한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특히 대원군 합하께오서도 이 경찰청에 거시는 기대가 크시니 내키지 않으시더라도······.”

    잠시 생각에 잠긴 처직이 마음을 굳힌 듯 은근하게 물었다.

    “내 이름을 이용한다면 어찌 이용했으면 하는가?”

    “쉽습니다.”

    “쉬워?”

    “그러니까······.”

    ***

    “왜 못 하는데?”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니까? 그 나이 먹고 안과 못의 차이도 모르나?”

    “말장난은··· 그럼, 안못 한다고 함세. 왜 안못 하는데?”

    고삼은 계속해서 추궁하는 이웃한 친구 창산의 말에 말없이 꼬던 볏짚을 마저 꼬왔다.

    “안못하는 게 아니라 역시 못 하는 거지?”

    뻘떡!

    “아, 안 하는 거라니까!”

    “아니, 왜 또 성질은 부리고 그러나. 그냥 딱 그 맹호놈 눈깔 뒤집히는 거 무서워서 못 한다고 사내답게 인정하면 되지. 거, 사람 성질머리하고는 예나 지금이나······.”

    고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못 할 것 같은가?”

    창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었으면 그 청장인지 뭔지 하는 양반 부임 했을 때 진작 했겠지. 객기나 부리지 말던가.”

    달포 전.

    최도경이란 역적의 팔이 관아 앞에 전시됐을 때였다.

    고삼은 창산 앞에서 관찰사를 고발하네 마네로 실랑이를 벌인 적이 있었다.

    물론 객기였다.

    고삼도 창산이 이리 끈덕지게 달라붙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쯤되면 이젠 자존심 싸움이었다.

    “나 진짜 함세?”

    “누가 말려? 하라니까?”

    창산의 연이은 냉소에 주먹을 불끈 쥔 고삼은 집을 나섰다.

    “아, 어디가?”

    “하라며!”

    “지, 진짜 가게?”

    “그럼 가짜로 가나?”

    “그러다가 호랑이 놈이 알면 어쩌려고! 가지말게. 내 실언을 했구만.”

    “됐네, 이 사람아. 내 자네 말마따나 호랑이 놈 잡는 착호갑사 한 번 되고 마을에 비석이나 하나 남기지, 뭐.”

    호기롭게 소리친 고삼은 씩씩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1리··· 2리··· 3리······.

    4리쯤 되니 걸음 속도가 종전과는 다르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자존심 때문에 집을 박차고 나오긴 했는데 막상 사또를 신고하려니 두려움이 업습한 탓이었다.

    “헉! 헉! 아, 고삼이! 천천히 좀 가! 무슨 범이라도 된단 말인가? 뭐 이리 날래?”

    어느 새 뒤쫓아온 창산이었다.

    “얼른 돌아가세. 이러다 진짜 큰 일 나겠네 그려!”

    “언제는 하라고 등떠밀더니?”

    “아, 농이었지. 얼른 가자니까?”

    “안 가네. 내 꼭 호랑이 놈 잡고 맘세.”

    고삼과 창산이 옥신각신 하던 그때였다.

    저 멀리 동네 아우인 거먹이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이 둘의 시야에 들어왔다.

    “거먹이 봇물 뚫으러 간다고 안 했나?”

    거먹이 뛰어가는 방향은, 봇물 뚫으러 간다던 거먹의 논과는 방향이 달랐다. 창산이 의하해 하자 고삼이 거먹을 불렀다.

    “이봐, 거먹이!”

    “어라.”

    “봇물 뚫으러 간다더니 어디가나?”

    “형님을 소문 못 들으셨소?”

    “무슨 소문?”

    “글세, 이번에 상주에 온 경찰청장이 안처진전의 그 안처진이라지 뭐요. 사람들 다 구경간다고 밭일 팽개치고 뛰어갔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거먹은 곧, 이번에 상주에 내려온 청장이란 양반이 안처진전의 주인공인 안처직이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해줬다.

    고삼이 불신하자 거먹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하더라니까요?”

    “본인 입으로?”

    “예. 그래서 동네 사람들 죄다··· 아니, 상주 사람들은 죄다 진짜 안처진 구경하러 갔소.”

    ‘안처진전의 그 안처진이라면······.’

    정말로 안처진전의 그 안처진이면 딱히 사또를 고발하는 일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용기를 얻은 고삼은 거먹과 함께 경찰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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