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76화 (276/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76화>

***

나는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는데?

사환 문경인은 밑도끝도 없는 멘트에 순간적으로 인지부조화가 일었다.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눈앞의 선비는 분명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비였다.

딱히 고관대작의 자제 같지도 않았다.

옷차림이 화려하다거나··· 하다못해 패용한 술띠가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사정터(활쏘기터)에 가면 으레 볼 수 있는 한량.

딱 그 정도였다.

“실성한 사람인가?”

이윽고 경인이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제법 일리가 있는 추론이었다.

요즘 왕이 미쳐 날뛰는 통에 실성한 선비들이 한 둘이 아니란 말이 나돌았다.

이건 경인도 겪은 일이었다.

그는 정읍의 재지사족이었다. 그러다가 여러 선생들이 광화문에서 천인소를 올릴 거라는 말에 함께 상경했고, 역적 혐의가 씌워져 내수사 노비로 전락해버렸다.

셈에 밝다는 사실 덕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나마 편해 보이는 사은원에 배속 될 순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정읍에서 떵떵거리던 삶은 송두리째 사라졌고 그는 일개 취미로나마 익히던 산학을 이제 업으로 삼게 됐다.

아마 눈앞의 선비도 그 화를 입은 당사자거나··· 뭐, 아니면 친인척이 연루돼 실성한 게 아닐까 싶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고 실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에 측은지심이 일기도 했지만 순간적인 감정에 불과했다.

“남들이 보면 오해하니 썩 비키시오.”

지금 눈앞의 실성한 선비는 경인에게 있어 동병상련의 아픔에 실성한 불쌍한 사람이라기 보단, 귀찮은 존재에 가까웠다.

경인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선비는 허!

짧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거기서 끝이었다면 보통 실성한 게 아니군··· 혀를 차고 말았겠지만······.

“점장 어딨는가?”

“점장 나리는 왜 찾소?”

경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선비는 경인을 살짝 흘기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점장 어딨냔 말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경인은 문앞에 진을 치고 있는 군사들을 불렀다.

사은원은 미친 왕이 백성들을 위한답시고 만든 기관이지만, 어딜가나 왕처럼 미친 놈들은 있기 마련이다.

불과 몇 년 전에는 홍 가(家)라는 도적놈(홍길동)이 관원을 사칭한 적도 있었으니 간이 배밖으로 나온 도적놈들에게, 곡식이 한가득 보관돼 있는 사은원은 보물창고에 가까울 터였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사은원에는 봉해위의 위사 마흔명이 철통 같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이 선비님이 소란을 피워 다른 손들이 식곡 할 수가 없으니 완력이 필요하지 싶소.”

“어떤 놈이 감히 사은원에서··· 허억!”

“···?”

경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사들은 하나같이 우락부락했다.

범강장달이라는 말에 딱 부합하는 체구에, 모두 정군으로 팔도에서 내로라하는 자들이다. 설사 북방의 정군들과 맟붙어도 꿀리지 않을 거라는 말이 나도는 게 바로 이 봉해위의 위사들이란 말이다.

실제로 경인도 처음 사은원에 배속돼서 이 위사들을 봤을 땐 오줌을 지려버릴 뻔 했었다.

그만큼 대단한 기세를 가진 위사가 선비를 보더니 사색에 질린다.

사색에 질린 정도가 아니라, 숨이 멎은 것처럼 미동도 않고 있다.

그리고 잠시 후.

털썩!

위사 하나가 부복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다른 위사들이 하나, 둘 부복하기 시작했다.

범강장달이처럼 우락부락한 위사들이 부복하자,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됐다.

“어라, 자네는 1대대에 있던 강식이 아닌가? 사은원에 배정됐나 보구만.”

방금 전까지 점장 어딨냐 고래고래 소리치던 선비가 돌연 환히 웃더니 위사를 알은 체 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하온데 여, 여긴 어찌······.”

“잠행을 좀 나왔네.”

“하오나 어찌 호위 하나 없이······.”

“뭐, 그런 잔소리는 듣고 싶지 않고.”

“잔소리라니 가당치도 않사옵니다. 소신은 그저 걱정 되는 마음이 앞서서······.”

끔뻑끔뻑.

선비와 위사의 대화에 경인은 눈을 끔뻑거렸다.

아까 전처럼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실성한 선비가 점장 나오라 소리친다 -> 소란에 위사를 불렀다 -> 범강장달이 같은 위사가 기세 좋게 선비를 제압하려는데 선비의 얼굴을 보고 부복한다 -> 선비가 알은 체를 한다 -> 화들짝 놀라 부복한 위사가 전하라 불렀다 -> 그리고 잠행이 언급됐다.

이건······.

“히이이익!”

경인이 사색에 질린 정도가 아니라 숨이 곧 넘어 갈 것 같은 비명을 내지르건 말건.

실성한 선비(?) 융이 강식에게 말했다.

“아무리 불러도 점장이 나오질 않으니 어찌 된 영문인가? 속히 불러오게.”

“집무실에 계신 것 같사온데 신이 얼른 불러오겠사옵니다.”

잠시 후.

호조에 종육품 산학별제(算學別提)로 있다가, 사은원이 생기면서 종오품 사은원 점장으로 승차인지 좌천인지 모를 이관을 하게 된 점장 이명학(李銘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갑작스레 펼쳐진 진풍경에 사은원에 식곡하러 온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림도 들려왔다.

“정말 전하신가?”

“에이, 설마. 전하께서 여길 어찌 오신다고?”

“그렇겠지? 아니겠지?”

“그런데 위사들이랑 윗분들 태도 보면 맞는 것 같은데?”

수군거림이 들려오건 말건, 그리고 헐레벌떡 뛰어온 이명학이 예를 갖추건 말건.

“점장은 들어라.”

“하, 하문하소서, 전하.”

“내 당초 이 사은원이라는 기관을 어찌 만든 것이냐?”

“저, 전하께오서 백성을 어여삐 생각하시는 마음이 계시옵고 또한 고리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많다는 간언에 이를 측은하게 여기시어서··· 그래서······.”

“사은. 하사할 사(賜)에 온정 은(恩). 네 말대로 백성을 가여삐 여기는 마음에 나는 이 사은원을 내탕고의 재물로 지은 것이다다.”

“그, 그렇사옵니다. 참으로 백성들이······.”

쓰윽.

“어디 임금의 말을 가로챈단 말인가?”

“···주, 죽여주시옵소서.”

“나는 이 사은원을 지으면서 적을 어디에 뒀는지에 따라 차별하여 식곡하란 지시를 내린 적 또한 없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는 점장의 지시인가?”

화들짝 놀란 명학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옵니다. 신은 결단코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나이다.”

“그럼 어찌 저 노비 놈이 조금 글줄 깨나 외웠다고 백성을 능멸한단 말이냐? 이건 어찌 해석 할 수 있는 일이냐?”

꿀꺽.

명학은 문 가놈을 흘겼다.

‘제기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자식이었다.

셈에는 분명 밝은 것 같고, 취미로 공부했다기엔 상명산법(詳明算法), 산학계몽(算學啓蒙) 등을 줄줄이 꾀고 있어서 분명 어지간한 산생(수학생)들 보다 수준은 뛰어난 자였다.

문제는 만사를 귀찮아 한다는 게 눈으로 보이던 놈이었다.

아마 이번에도 비슷했을 거다.

처리 할 일거리가 느는 게 귀찮아서, 대충 한성부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면 식곡 해줄 수 없다고 얼버무렸겠지.

제놈이 정읍에서 떵떵거릴 때라면 상관없다.

한데 저놈은 지금 노비 신분이다.

내수사 노비.

문 가 놈뿐만 아니라 이 사은원의 사환 태반은 내수사 노비들로 이뤄졌다.

언젠가 사고를 칠 거란 예상은 했지만 설마 개시 첫날부터 사고를 칠 줄이야······.

“시, 신의 불찰이옵니다. 신이 교육을 단단히 시켰어야 하온데 신이 불민하여 미처 이같은 폐해가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나이다.”

임금은 사은원에 거는 기대가 컸다.

공사 기간에도 틈틈이 잠행을 나와 둘러보고 갔다는 말이 관리들 사이에 나돌았고, 보름 전에는 사은원에 배속 된 관리와 사환들에게 직접 어식(御食)을 하사해주며 격려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문 가 놈이 일을 저질렀다.

일단 바짝 엎드리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자신을 향한 임금의 화는 누그러진 듯 했다.

다만.

휙!

융은 고개를 돌려 경인을 바라봤다.

경인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바짝 부복했다.

“경기도에 적을 두고 있으면 식곡을 해줄 수 없단 말이렷다?”

“저, 전하··· 그, 그게 아니옵고··· 그저, 시, 신은······.”

“백성이 사은원에서 식곡하려 함은 단순히 임금의 은혜를 받기 위함이 아니다. 고리에 신음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고리를 변제하고 저리로 삶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네놈은 단순히 귀찮다는 이유로 낭떠러지에 몰린 백성을 돌려보내려 했다. 네놈이 비록 천한 신분으로 전락했다지만 성인의 말씀을 깨우치지 못 한 것은 아닐 텐데 어찌 임금을 능멸하고, 백성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이냐.”

“저, 전하. 전하 그게······.”

“위사들은 들어라.”

“하교하시옵소서!”

“내 일찍이 장리로 식곡하지 못 하게 하는 특지를 내리면서, 장리로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자는 그 목을 베어 해당 고을의 관아에 효수하라 했다. 이 노비 놈이 저지른 일이 그에 해당하지는 않으나, 임금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첫 날 이같은 만행을 저질렀으니 내 따로 전지(傳旨)를 써서 금부에 내릴 터인 즉. 저놈은 당장 금부에 끌고가라.”

“예!”

강식을 필두로 한 위사들이 경인을 질질 끌고 나갔다.

경인이 살려달라 애걸복걸 했지만, 융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상선.”

“예, 전하.”

“팔도의 사은원에 이같은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진성에게 이를 어찌 감찰할지 논하게 하게.”

“입궐하는대로 그리 전하겠나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융의 시선에 바짝 얼어 있는 을동이 들어왔다.

“너는 얼마를 식곡하려 찾은 것이냐?”

“워, 워, 원금과 이자가 백미20석 정도라서 20석을 식곡하려 와, 왔습니다요.”

“뭐라? 20석? 잡곡이 아니라 백미 말이냐?”

“예.”

“아니, 원금이 얼마였기에 20석이나 빌려가려 한단 말이냐?”

융은 단순히 궁금해서 질문한 것에 불과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자작농이라 해도 백미를 20석이나 빌려 갈 일은 많지 않다.

그런데 20석이라니.

“워, 원금은 백미로 4석인가 됐었습죠.”

“4석? 언제 빌린 것이냐?”

“6년인가 7년 됐사온데······.”

6~7년 전에 빌린 4석이 20석이 됐다.

묘한 촉(?)이 발동한 융이 물었다.

“이자는?”

“6할입니다요.”

“6할? 임금인 내가 이자를 2할로 영정하겠단 방은 보지 못 한 것이냐?”

“봤습지요. 봤지만······.”

을동이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아니, 이런 쳐죽일 놈을!”

“그래서······.”

“아니, 이런 육시랄 놈을 다 봤단 말인가?”

“그러다 보니······.”

“아니, 이런 패죽여서 젓갈을 담가 버릴 놈이 천하에 아직도 있단 말이냐!”

임금이 공분해서 맞장구 치자, 용기를 얻은 을동은 계속해서 내막을 털어놨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렀을 즈음.

어느 새, 융은 치밀어 오른 열 때문에 씩씩거리고 있었다.

“내 이놈을 내 손으로 때려 죽이리라! 상선!”

“예, 전하.”

“당장 내 군복을 가져오고, 금군 마병과 금부 관원들 모두 사은원으로 모이게 하라.”

“어, 어찌 하실 생각이시옵니까?”

“내 마땅히 그놈을 때려 죽이고 젓갈로 담가버리리라!”

상선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임금이 도성에 잠행을 나오는 건, 무리한 일이어도 불가한 일까진 아니다.

하지만 임금이 도성 밖, 그러니까 경기도까지 나갈 일은 보통 온행이나 원행, 혹은 능행 때 밖에 없다.

그것도 예법에 맞는 절차가 있어야만 거행(擧行) 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금상께서는 사냥이나 위사들과 축구를 하신다며 자주 경기도 밖까지 나가긴 하셨지만 그럼에도 한강 너머까지 가신 일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번엔 살곶이 다리(성수동에 있는 다리)를 건너시겠다니······.

말리고 싶었지만 어찌 말리랴.

“···예, 전하.”

임금이 시정잡배 마냥 날뛰는 모습을 사은원의 백성들이 모두 목격했지만, 그들은 감히 임금이 시정잡배만도 못 한 어휘를 구사한다 입을 놀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가슴에 작은 감흥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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