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75화 (27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75화>

    ***

    이번에 4,679명의 선비들이 창졸간에 노비가 되면서 나는 임의로 그들을 노비 조합이라고 불렀다.

    노비 조합이라고 하면 어감이 좀 이상한가?

    근데 만날 4,679명이라고 일일이 숫자를 늘어 놓으면서 말 할 수도 없고, 마땅히 부를 만한 말이 있어야지.

    이 노비 조합의 대표는 나석수였다.

    물론 조합의 대표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석수는 내수사 소유의 노비가 되었다가 지금은 동대문 인근에 있는 내수사전(內需司田)을 경작하고 있다.

    동대문에 배속 된 건 성은이다.

    너희들 그 좋아하는 성균관 폐허 바라보면서 농사나 지으라는 성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농번기를 맞아 한참 바쁠 시기인 나석수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일전에 광화문에서는 목에 핏대가 서도록 왕권타도! 신하중심! 구호를 외쳐대던 나석수는 몇 달 만에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돼서 나타났다.

    잔뜩 주눅 든 모습과 얼굴 군데군데 있는 멍자국은 내수사 노비 생활이 편치만은 않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중간 관리자한테 흠씬 두들겨 맞고 살았겠지.’

    내수사는 왕실의 개인 금고에 가깝다.

    한마디로 왕의 재산이란 뜻.

    이 왕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왕당파일 수 밖에 없다.

    특별히 충심이 깊은 자들을 선별해서 뽑기도 하니까.

    그런데 관리자 입장에서, 창졸간에 씹선비에서 역적이 돼서 들어온 노비가 있었으니······.

    일을 잘 하면 또 말을 안 해.

    일평생 손에 흙 한 번 안 묻혀 봐서 이거 시키면 이것도 못 해, 저거 시키면 저것도 못 해··· 관리자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패주고 싶은 놈이 지시하는 일마다 알아 쳐듣질 않으니 복날 개패듯 팼겠지.

    자연스럽게 석수가 쳐맞는 모습이 떠올랐다.

    우악스런 주먹이 석수의 턱을 강타하고, 복부를 강타하고······.

    나도 사람인지라 안쓰럽기도 한 마음에 전금이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대감마님?”

    “가서 내 밥하고, 여기 노비놈 먹을 식은 밥이나 좀 내어와라.”

    “네.”

    잠시 후.

    전금이가 소반을 들고 나타났다.

    소반에는 먹음직스럽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된장찌개, 깻잎 장아찌와, 곽자반(미역자반)과 제철나물, 오이냉국, 메인으로는 잘 양념한 쇠고기를 속으로 채워서 만든 송이찜이 올라가 있었다.

    나석수는 소반의 먹음직스런 음식들을 보고 침을 꼴깍거렸지만······.

    “아, 이건 내거.”

    석수가 먹을 건 이따 나올 거다.

    말이 나오기 무섭게, 전금이가 소반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대감마님, 식은밥 들어갑니다.”

    전금이가 내려놓고 나간 소반에는 꽁보리밥과 된장이 전부였다.

    “그게 자네거. 원래 나 정도 되는 사람은 노비랑은 겸상하면 안 되는데, 자네 말마따나 나는 권신이 아닌가? 누가 뭐라 할 거야? 내 특별히 오늘은 선심씀세. 들지.”

    나는 수저를 들었다.

    내가 수저를 들자마자 나석수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허겁지겁 보리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맞은 것도 맞은 거지만, 굶기까지 한 모양이다.

    아니면 밥을 소량만 배급 받았다던가.

    “깻잎 장아찌 좀 먹을텐가?”

    석수가 미친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들면서 듣게.”

    “마, 말씀하십시오.”

    “자네 여행 가봤나?”

    “여, 여행이라시오면······.”

    “유람.”

    “안 가봤습니다요.”

    “이번 기회에 가보면 되겠군.”

    “···”

    “거두절미하고, 자네들 중에 딱 986명만 대내전에게 팔아 넘기기로 결정이 됐거든.”

    “푸훕!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인이 노비놈 돈 받고 판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한가?”

    “하, 하오나 어찌 금수만도 못 한 왜종들에게······.”

    “에이, 금수만도 못 하다고 하면 듣는 대내전이 섭하지. 명색이 대내전은 백제국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던데 말일세.”

    잠시 얼이 나간 나석수가 누가 뺏어갈까 손에 꽉 쥐고 있떤 보리밥을 내려놓고 바짝 엎드렸다.

    “대, 대감! 사, 살려주십시오. 어, 어찌 그런 오랑캐의 땅에 저흴 보내려 하신단 말이옵니까? 대감께서 저희를 마뜩찮게 생각하는 건 알지만 사람에겐 일말의 도라는 게 있는 법이옵니다.”

    “애걸복걸하라고 자네 불러서 비싼 밥 먹이고 있는 건 아닐세. 질질 짠다고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인 건 더더욱 아니고.”

    “대, 대감. 하지만 금수의 땅이옵니다. 그 금수 같은 자들은······.”

    “내 말 안 끝났는데?”

    “···”

    “좌우지간, 자네를 포함해서 딱 986명이 왜국으로 넘어갈 걸세. 왜국에 가서 무슨 생활을 할지는 나도 잘 몰라. 여기서처럼 종놈처럼 지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일본인들이 보기에 제법 무예가 출중한 사람들은 병사로 삼을 수도 있겠고··· 뭐, 자네들이 배운 게 아주 없진 않으니 실력가의 선생질을 하면서 지낼 수도 있겠지.”

    “···”

    “뭐가 됐던 나랑은 상관 없어. 막말로 자네랑 나랑은 악연에 가까우니까. 내가 그런 걸 왜 신경 쓰겠나?”

    “···”

    “문제는 후자지.”

    “시, 실력가에 초빙되는 일 말이옵니까?”

    끄덕.

    “아마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겠지. 자네 말마따나 일본은 무식한 ‘금수의 나라’가 아닌가?”

    아연식샐한 석수에 역시나 동정심이 일었지만 자업자득이다.

    “오히려 잘 된 일일 수도 있겠지.”

    부들부들.

    석수 입장에선 내 말이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여기 선비들은 일본을 증오한다.

    21세기의 반일 감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정이다.

    오랑캐이면서도 해안가를 자주 노략질 했던 원수이고, 그러면서도 도리를 전혀 모르는, 도저히 교화란 게 안 통하는 족속이라는 게 일반적인 선비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다.

    이건 단순히 증오라는 감정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하긴 복잡한데 뭐랄까··· 묘하게 선민의식과 결합 된 증오심이랄까?

    그러니 만큼 석수 입장에선 날 한 대 치고 싶었을 거다.

    “보아하니 여기선 매질도 자주 당하고, 굶는 일도 다반사 같은데 최소한 실력가에 초빙돼서 선생질 하면 매질 당하고, 굶는 일은 없을 것 아닌가?”

    “하지만 모름지기 선비란······.”

    “옛말에 고상한 씹선비도 사나흘 굶으면 여염집 담장을 넘는다는 말이 있지. 노비 생활 사나흘 한 게 아니잖나, 자네는. 자네 나이가 지금 서른 여섯이던가? 원래 나쁜 놈들일수록 오래 사는 법이니 자네가 천수 누려서 환갑까지 산다 치고, 남은 반평생을 그렇게 종놈 생활 하며 살 수 있겠나? 그럴 자신 있어? 그쯤 되면 본인이 선비였다는 자각도 사라질 걸?”

    “···”

    “하지만 비록 일본이 성인의 교화가 닿지 않는 곳이라 해도, 일단 사람 사는 곳일세. 반면 자네들은 노비 신분이더라도 식자지. 선생으로 초빙되면 지금과 같은 생활은 하지 않을 거란 말일세. 뭐, 이건 내가 자네 다독이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 진짜 중요한 말은 따로있네.”

    “···”

    “가거든 여기서 하던대로 하게. 자네들이 진짜 선비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겠지. 단.”

    “···?”

    “무려 986명이 건너가게 됐네. 뿔뿔이 흩어지겠지. 누구는 병사가 되고, 누구는 실력가의 선생이 되고··· 그러다 보면 출세하는 사람도 생기겠지. 어쩌면 일본말로 다이묘라는 세력을 이룰지도 모르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하날세.”

    “···”

    “누가 다이묘가 되든, 뭐 거기서 하는 말로 천하인이 되든, 아니면 왜왕이 되든 나랑은 알 바가 아니야. 중요한 건 하던대로 하란 걸세.”

    “하, 하던대로요?”

    “여기서 하던대로, 일본인 주인이 칼을 들고 있다고 해서 간언하지 말고, 직언하고 여기서 하던대로 일본인 주인이 으름장을 놔도 성인의 말씀으로 교화시키란 거지. 자네는 일본이 교화가 안 되는 곳이라 했지만, 교화가 안 되는 곳이 어딨겠나?”

    “···”

    “어쩌면 자네들 986명이 일본은 이상적인 나라로 만들 수도 있겠지.”

    “이상적인 나라······.”

    “출발은 달포 뒤일세. 잘 채비하게.”

    ***

    강녕전.

    “으음··· 그래?”

    “예.”

    “잘 처리 됐다니 다행이군. 과연 왕재는 내가 아니라 진성이 아닌가?”

    듣기 망측한 말인지라 옛날 같았다면 상선은 넙쭉 부복부터 했겠지만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자주 듣는 말이었다.

    “그래도 나석수가 역적이긴 하지만 천륜지간에 자식과 생이별을 하게 되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진성에게 따로 사람을 보내서, 나석수를 포함한 노비들을 일본에 보내기 전에 가족들과 해후 할 수 있게끔 조치하라 전하게.”

    “아, 하옵고.”

    “응?”

    “대원군께서 도주의 신병은 안처직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신 듯 하옵니다.”

    “안처직에게?”

    “예.”

    “과연 처직이라면 도주의 신병을 확보하는 일에 제격이겠지. 어찌 보면 도주도 참 불쌍하구나. 제 발로 사지에 걸어들어온 셈이니······.”

    아닌 게 아니라 도주는 스무일 전, 부산진을 통해 입국했다.

    왜관의 상인들을 격려한다는 차원이었다.

    본인 딴에는 수하들을 격려하고 자비를 베풀기 위해 찾아온 것이겠지만 그게 사지일 줄 어찌 알았겠나.

    긁적긁적.

    “뭐, 이쪽으로서는 다행이려나.”

    만약 도주가 섬에 상주하고 있었다면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섬에는 감조관이었던 김억수의 후임으로 한숙창(韓叔昌)이 가있는 상태였는데 감조관과 감조관을 시위하는 군사들이 상하는 일도 피할 수 없었을 터였다.

    “과연 하늘이 우릴 돕는구나.”

    선비의 도를 잘 닦는 사람들이 들으면 혹세무민하는 소리라 여기고 버럭 역정을 냈겠지만, 적어도 융은 그렇게 느꼈다. 왠지 그런 기분이었다.

    하늘이 조선을 돕는 기분.

    “본시 하늘은 용기있는 자에게 감동하고, 또한 정성을 쏟는 자에게 상서러운 기운과 복을 내린다 하였는데 전하의 치세에 하늘도 감복하여 우리 종사에 길한 기운과 복을 내린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상선의 대답에 피식 웃은 융은 손에 든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선에게 밑도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오늘인가?”

    “그러하옵니다.”

    “채비하지.”

    “예.”

    밑도끝도 없는 질문을 받은 상선이 곧 의복을 내어왔다.

    용포는 아니었다.

    일반 선비들이 입는 도포와 갓이었다.

    잠행 준비를 마친 융은 곧 상선과 함께 금군들 몰래 궐담을 넘었다.

    그의 목적지는 엿새 전 완공되고, 오늘 비로소 영업(?)을 개시하는 사은원 한양 본점이었다.

    ***

    경기도 광주목(지금의 강남구) 한터골(지금의 대치동)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 을동의 가정 형편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정도였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소작농이셨으니 가난을 대물림 받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삶을 살았던 건 아니다.

    예전에는 넉넉하진 않아도 밥 걱정은 없이 살던 때도 있었다.

    가세가 급격히 기운 건, 아버지가 원인 모를 괴질에 걸려 몸져 누운 뒤였다.

    일평생 고생만 하신 아버지를 이대로 손놓고 지켜만 볼 수 없겠다 판단한 을동은 없는 형편에 의원을 불렀다.

    의원은 무슨 약을 쓰면 기력을 회복 할 수 있을 거라 했는데, 그 약값이 을동으로서는 쉬이 대기 힘든 가격의 돈이었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역시, 일평생 땅만 보고 살아오신 아버지셨다.

    호강은 못 시켜드려도 최소한 품에 손주 녀석은 안겨드리고, 손주의 재롱은 보게끔 해드리고 싶었다.

    그 마음으로, 을동은 아버지에게 소작을 맡긴 최 생원에게 찾아갔다.

    최 생원은 이 한터골에서는 행세 깨나 하는 집안의 가주로, 일대 한터골의 논밭 절반이 최 생원 집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부자였다.

    그런데도 인심이 박하고 소작농들 피말리는 일을 자주해서 악평이 자자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마땅히 손 벌릴 곳이 없는 을동에게는 최 생원이 구세주에 다름이 없었다.

    을동은 최 생원에게 약값을 빌렸다.

    이율이 무려 6할에 달했지만 뒷일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이자는 이자를 낳았고, 소작해서 버는 돈으로는 갚아도 갚아도 좀체 원금이 깎일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돈도 갚아야 했고, 후유증으로 몸을 못 쓰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장가도 못 간 채 4년만 죽어라 일만 했다.

    형편이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악화 되어만 가자 혼기가 꽉 찬 6살 어린 여동생은 최 생원 댁에 을동 몰래 첩실로 들어갔다.

    평소 최 생원이 을동의 동생에 흑심을 품고 있었는데, 본인의 첩실로 들어오면 너희 가족의 빚은 탕감해주겠다 꼬드긴 것이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여동생은 고민 끝에 첩실로 들어갔지만, 최 생원은 빚을 탕감해주기는커녕 순진한 동생을 노리개처럼 쓰다 내다버렸다.

    이미 최 생원의 노리개란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 동생을 시집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뒤늦게 땅을 치고 일을 막지 못 한 자신을 원망했지만, 역시 뒤늦은 후회였다.

    그렇게 다시 2년.

    아버지는 동생이 최 생원집에서 쫓겨 나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대로 쓰러지신 채 돌아가셨고, 동생은 그 뒤로 실어증에 걸려 거의 폐인처럼 집에만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을동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건, 어머니와 점차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동생 덕이었다.

    이 빚만 갚으면, 이 빚만 갚게 되면······.

    그럼 언젠가는, 자신은 몰라도 동생만은 시집 보낼 수 있을 터였다.

    그거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란 생각으로 몸을 혹사시키던 을동은, 문득 사은원이라는 기관이 만들어진다는 방을 봤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아무리 나라에서 운영하게 될 구휼 기관이라지만, 이자가 고작 5푼이라니······.

    하지만 이미 끝이 보이지 않는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는 을동이였다.

    밑져야 본전인 셈.

    이자가 5푼인 사은원에서 돈을 빌리고, 그 돈을 최 생원에게 갚으면 된다. 고작 5푼의 이자니 그럼 어떻게든 구명할 길이 생길 거다.

    그렇게 생각한 을동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사은원이 개시 한다는 날, 사은원을 찾았다.

    문제는······.

    “아니, 왜 안 된다는 겁니까?”

    한참 농번기인 시기에 오늘 하루 공친다는 걸 알면서도 먼 길을 달려왔다.

    그런데 식곡(대출)이 안 된다니······.

    그나마 남아 있던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살고 있는 곳이 광주목일세.”

    “그런데요?”

    “광주목은 경기도 관할이니 역시 식곡을 받으려면 경기도 사은원으로 가야지.”

    “아니, 경기도 사은원은 감영 옆에 있지 않습니까?”

    을동이 살고 있는 한터골은 상대의 말처럼 경기도 광주목에 속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거리상으로는 경기감영에 있는 사은원보다는, 침교동(지금의 오장동~예관동 일대)에 있는 한양 사은원이 훨씬 가까웠다.

    “난들 어쩌겠나. 규정이 그런 걸.”

    “하, 하지만 나리. 오늘 식곡해서 가져가지 못 하면 쇤네에게 다음은 없습니다요.”

    한터골에서 최 생원에게 돈을 빌린 사람은 물경 스물이 넘는다.

    그 스물이 모두 사은원이 개시하길 고대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최 생원이 모를 턱이 없었다.

    최 생원은 노복들을 시켜 채무자들을 감시했는데, 오늘은 요행히 최 생원댁 노비들의 눈을 피해 올 수 있었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밭에 나가 있어야 할 시간에, 밭에 없는 자신을 발견한 최 생원댁 노복들에 다음은 감시가 더 철저해져서 못 나올지도 몰랐다.

    “그거야 내 알 바는 아니지.”

    을동은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울만한 일을 못 겪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을 겪어 본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성한 사내의 울음이란 건 희망이 좌절됐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을동은 그 희망을 맛 본 적이 많지 않았으니 울음이 안 나오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일수도 있었지만, 웬일인지 오늘은 왈칵 울음이 터져나왔다.

    ‘이게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동생을 시집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수단.

    최 생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수단.

    어머니를 호강 시킬 수 있는 마지막 수단.

    그 꿈이 좌절됐다는 생각에, 터져나오는 눈물이 좀체 멎질 않았다.

    엉엉 목놓아 우는 을동이었지만, 상대는 아랑곳 않았다.

    “다음.”

    오히려 사무적인 어조로 대기자를 불렀다.

    을동의 뒷줄에 서있던 다음 대기자는 말끔한 차림의 선비였다.

    사은원 사환은 말끔한 차림의 선비에 흠칫거리다, 이내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돈을 꾸러 오셨소? 아까 봐서 알겠지만 여긴 한양점이오. 한양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면 식곡이 불가하니 미리 알아두시오.”

    “···”

    “보아하니 기호(경기도)에서 올라왔나 보군. 줄이 기니 이만 나와보시······.”

    역시나 사무적인 태도로 선비를 대하던 사환에, 예의 선비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희한한 일이로다. 나는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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