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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74화 (27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74화>

    ***

    흠칫.

    ‘아니, 왜 또 인상은 구기고 지랄이야.’

    형님께 허락을 받자마자 동평관으로 달려왔다.

    나 정도 되는 인사가 동평관에 와주면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텐데 아까 편전에서 본 쓰네히사라는 일본인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습관적으로 인상을 구기는 것 같은데 보는 사람은 오금이 저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냐고 묻사옵니다.”

    “저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방금 전 무례를 사과 할 겸 대작을 하고 싶은 거라 전하시게.”

    역관이 그 말을 쓰네히사에게 전달하자.

    와락!

    쓰네히사의 인상이 또 다시 구겨졌다.

    제기랄.

    아무리 일본이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라 해도 이건 너무 하잖아.

    난 그래도 대원군인데 말이다.

    ‘절대 칼은 섞지 말아야겠다.’

    인상을 구긴 쓰네히사는 날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표정을 읽으려 한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노려보는 것과 진배 없었다.

    전쟁통의 세상에서 살다온 사람이라 그런지 무의식 중에 살기가 담겨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그저 무의식 중에 뿜어나오는 살기만으로도 기선제압을 당해버렸는데 칼은 얼마나 잘 쓰겠나?

    못 해도 몇 사람은 죽였을만한 눈빛이다.

    다시 한 번, 절대 저 사람하고는 칼 섞을 일 없게 해야 될 것 같다는 다짐을 하던 즈음.

    구겨진 쓰네히사의 안색이 돌연 밝아졌다.

    표정을 풀고 환하게 웃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저게 더 무섭잖아!’

    쓰네히사의 볼에는 자상이 나있었다. 한 7~10cm는 됨직한 자상이었는데 웃으면서 볼끝이 패이자, 그 자상이 도드라져서 더 험상궃게 보였다.

    꿀꺽.

    “어찌 마다하겠냐고 하십니다.”

    후.

    나는 쓰네히사가 마음을 바꾸고 칼을 빼들까 얼른 밖에 대고 소리쳤다.

    “들여 보내게.”

    내 말에 동평관의 딸린 노비들이 주안상을 들여보냈다.

    주안상이 들어오자, 굳어 있던 쓰네히사의 안색도 어느 정도 풀어졌다.

    나는 쓰네히사에게 잔을 건넸고, 쪼로록- 술을 한가득 따라주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았다.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 줄이 있는 것처럼 여전히 팽팽했다.

    쓰네히사는 어떻게든 내 저의를 알아내려고 안간힘을 썼고, 나는 나대로 내 속내를 숨기려 안간힘을 썼다.

    물론······.

    “아, 그러고 보니 사신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일본국은 선비가 없나?”

    전에 했던, 이제 나도 정치인 다 된 것 같다는 말 취소다.

    정치인은 개뿔이고, 코흘리개 찔찔이도 파악할 만큼 부자연스러운 뜬금포적인 질문이었다.

    “그건 어찌 물으시냐 하시옵니다.”

    “아니, 만날 대장경만 요구하고 경전 같은 건 딱히 달라는 말을 안 하니까, 거긴 불씨(스님)들만 있나 해서 말이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일본에도 없는 건 아니지만, 샌님들의 말을 깊게 공부하는 사람들은 얼마 없다고 하옵니다.”

    씹선비의 대가들이 들었다면 공자와 맹자를 샌님 취급하는 저 발언에 발끈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난 아니란 말씀.

    기분 상할 일은 1도 없다.

    “한데 그건 어찌 물으시냐 하옵니다.”

    “내가 들어보니 일본에는 무사들이 많다던데 역시 칼질만 하는 거골장들이라 그런지, 무식한 위인들이 많은 것 같아서 말이오.”

    벌떡!

    “무, 무슨 말씀이시냐고······.”

    역시나 오금이 저린다.

    당장이라도 칼을 빼들 것 같은 기세다.

    내가 살아왔던 대한민국은 수출강국이었다. 오로지 수출 하나만으로 세계 경제의 한 축을 맡은 나라다.

    아주 자랑스러운 나라였지, 그런데 그 전신인 조선이라고 수출을 못 하겠어?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그 수출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선비를 키우는 건, 치국에도 용이할 텐데 왜 국가적으로 키우지 않나 싶어서 말이오.”

    “치국에 용이한 건 알지만, 불씨의 세가 강세인데다 지금은 난세이니 누가 선비를 자처하겠냐 하옵니다.”

    “그러니까, 더 선비를 키워야지. 선비를 키우면 불씨의 세력도 줄일 수 있고, 난세에 선비를 키워야 뒷통수 맞을 일도 없지 않겠소?”

    분노에 부들부들 몸을 떨던 쓰네히사가 털썩 주저앉는다.

    “조선과 달리 일본은 난세라 하옵니다. 난세가 필요로 하는 건 영웅과 호걸이지, 샌님이 아니라 하옵니다.”

    “아니, 왜 선비들이 전부 샌님이라고 보시는 거요? 우리나라 샌님들 보면 죄다 활쏘기는 기본에 마상무예도 특출나, 거기다가 병법에도 능한데?”

    물론 병법에 능한 건 소수다.

    선비들은 병법을 잘 읽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손자병법 정도는 읽지만, 그걸로 병법에 능하다는 말을 할 순 없다.

    하지만 활쏘기를 잘 한다는 건 팩트다.

    여긴 개나 소나 시위를 당기거든.

    “우리나라 샌님의 덕목은 문무출중이오. 문과 무 한 곳에만 치우치면 진정한 선비가 될 수 없는 거지.”

    이건 구라다.

    씹선비들의 활쏘기는 놀이에 가깝지, 무가 아니니까.

    “그건 처음 알았다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일본국에는 성인들의 말을 뜻있게 공부하려는 자도 없거니와, 설령 학문에 열의가 있다 한들 장차 쓰임이 없으니, 공자도 난세에 본인의 사상을 치국에 접목하려 전국을 주유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귀향하지 않았냐고 묻사옵니다.”

    “그건 공자가 의지박약인 거고!”

    “···”

    “대장부가 한 번 포부를 품었으면 그걸 이뤄야지, 포기하고 귀향한 건 나는 잘났지만 세상이 내 수준을 알지 못 한다 자위하는 게 아니면 뭐겠소? 하지만 일본은 다르지. 일본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요?”

    조선인에게 본국에 대한 칭찬은 처음 듣는지, 쓰네히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일본은 정말 칭찬할 만한 나라다.

    특히 AV 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

    크흠.

    “그리고 일본에 만세일계란 말이 있다던데, 솔직히 이게 일본의 자랑은 아니잖소.”

    한차례 칭찬에 고무(?) 됐던 쓰네히사가 다시금 인상을 굳혔다.

    나는 쓰네히사가 오해할까 싶어 얼른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일본 무사들의 충심은 높이 사겠소. 힘이 있어도 천황을 폐위하지 않는 건, 충심 때문이지 다른 목적 때문은 아니잖소?”

    “···”

    “하지만 그게 자랑은 아니오. 무기력하고 구심점이 될 수 없는 왕은 신하의 힘으로도 끌어내릴 수 있는 거요. 맹자도 말했소.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군주가 군주답지 못 하면, 신하의 힘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는 거요. 그런데 왜 일본은 천황을 끌어내리지 않는 거요?”

    “그야··· 천황을 끌어내리려 하면 전국의 공적이 되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선비가 더 필요한 시점이지. 내가 일본의 정세는 자세히 모르지만 지금 사신의 주군인 대내의흥은 일본국왕(쇼군)을 옹립했소. 반대로 일본국왕은 대내의흥의 수중에서 벗어나려 하겠지? 다른 다이묘들과 접촉하려 할 테고, 이리 붙고 저리 붙으면서 대내의흥의 힘을 약화시키려 할 거요. 그런데 대내의흥 같이 힘있는 사람이 왜 천하를 차지 못 하는 거겠소? 그놈의 만세일계 때문 아니겠소이까.”

    “···”

    “따지고 보면 만세일계도 공자가 전국을 주유하다가 결국 자위하면서 귀향한 것과 마찬가지인 거요. 아니, 어느 왕조가 천년 넘게 한 나라의 왕으로 남소? 이건 절대 자랑이 아닌 거지. 뭐, 사신은 천황을 노리는 순간 전국 다이묘의 공적이 되기 때문에 모두들 사리고 있는 거라 했지만, 다이묘들이 전부 성인의 가르침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소?”

    “···”

    “군주답지 못 한 왕은 신하의 힘으로 폐위시킬 수도 있다는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길 테고, 힘있는 신하의 곁으로 모이지 않겠소? 그 힘 있는 신하가 대내의흥이 되는 거고.”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지만, 누차 말했다시피 일본에는 선비도 없고, 성인의 말씀을 공부하려는 학자도 없는데다 설령 있다 한들 깊이가 얕기 때문에······.”

    “사신은 난세의 일본에 필요한 게 영웅과 호걸이라 했지만, 결국 영웅은 책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요. 그리고 그 책사는 불씨의 설법만 듣는 땡중들이 맡겠소, 아니면 성인의 말씀을 듣고 동서고금의 역사를 공부해 병사에도 능한 샌님들이 맡을 수 있겠소? 당연히 후자지!”

    “하지만 일본에는 선비를 키울 여력이 없고······.”

    “선비를 조선에서 판다면?”

    “무슨 말씀이시냐 묻사옵니다.”

    “이번에 역적으로 끌려온 선비가 수천명은 되오. 모두 사서삼경은 기본으로 뗀 식자들이지. 내 이들을 대내의흥에게 팔겠다는 말이오.”

    내 말에 약간 얼이 나가 있던 쓰네히사가 별안간 피식 웃었다.

    드디어 앞뒤가 연결 되는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속 보이는 협상이었다.

    “거절하면 조선은 도주의 신병을 넘겨주지 않겠지요?”

    “무, 물론이지! 우린 소이전(쇼니씨)한테 도주의 신병을 넘길 거요. 아, 아마도.”

    “우리에게 딱딱한 말이나 해대는 샌님 따위는 필요없지만 대감의 말씀처럼 충이 절실한 시대이고, 영웅은 책사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이기도 하니 어찌 거절하겠냐 하십니다.”

    정말 저 말 때문에 협상에 응하는 건 아닌 것 같다만······.

    어쨌든 목적 달성이다.

    “대금은 어찌 지불하면 되겠냐 하옵니다.”

    대금?

    “대금은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

    진성이 장내를 빠져나가자, 시립해서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미츠마루가 인상을 구긴 채 다가왔다.

    “쓰네히사님. 주군께서는 쓰네히사님께 노비를 사오라 보내신 게 아닙니다. 게다가 속이 빤히 보이는 거래를 어찌······.”

    “너에게는 무슨 속이 빤히 보였다는 말이냐?”

    “본인 입으로도 역적들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노비로 삼았다지만 함부로 처치하기란 곤란했겠지요. 그걸 남의 손을 빌려서 해결하는 한 편, 재물까지 얻을 수 있으니 어찌 조선에겐 일거양득의 거래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럼 조선이 쇼니씨에 서게 두라는 말이렷다?”

    “그건 아니지만··· 대세는 주군이십니다. 조선이 고작 노비 따위에 연연해서 장차 우리와의 관계를 포기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노비들이 더 절실한 것이다.”

    “예?”

    “저 애송이의 말처럼 우리나라에 식자는 없다. 모두 칼질하는 일자무식들만 있지. 다이묘들 중에는 제 이름도 쓰지 못 하는 백치들이 천지분간 못 하고 날뛰고 있고, 모두 텐카닌(천하인)의 자리를 놓고 다툼하지만 결국 텐카닌의 텐(天)자도 쓰지 못 하는 일자무식들이 태반이지.”

    “···”

    힐끗.

    “너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미츠마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그건······.”

    “물론 난세인 시점에 모두가 식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지. 지금 우리나라는 칼만 잘 쓰면 출세가 보장됐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래서 너도나도 글은 팽개치고 칼만 들려하지.”

    “···난세에 필요한 건 글이 아니라 칼입니다.”

    “안다. 누가 그걸 모른단 말이냐? 하지만 난세가 종결되면?”

    “조, 종결이요?”

    “주군께선 이미 간레다이(일종의 섭정)에 오르셨다. 진정한 텐카닌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게지. 그렇게 난세가 종결되고, 주군께서 진정한 텐카닌이 되시려면 필요한 건, 무사가 아니라 식자다. 미츠마루.”

    “예.”

    “일자무식의 사람을 제법 그럴싸한 식자로 키우려면 얼마의 시간이 소요되고, 얼마의 경비가 소요되겠더냐?”

    딱히 공부를 해본 적 없는 미츠마루로서는 가늠도 잘 안 됐다.

    “무사를 키우는 일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천만에. 이런 난세에 무사를 키우는 일은 오히려 쉽다. 하지만 이런 난세에 그럴싸한 식자를 수백, 수천 키우는 건 천문학적인 돈이 들 테지. 설령 돈이 있더라도 이런 난세에 수백이 넘는 식자를 일시에 키울 시간적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이냐.”

    난세는 1년이 곧 10년이고, 10년이 곧 100년과 같다.

    그만큼 형세가 금세 뒤바뀌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군께선 헐값에 책사를 데려오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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