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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73화 (27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73화>

    ***

    강녕전.

    평상(平床)은 세간의 평상과는 자못 달랐다.

    테두리가 옻칠 돼있었고, 평상의 여섯 다리는 금으로 조각돼 있었다.

    그 옆의 밑부분은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 길게 늘어져있었으니, 과연 농군들의 평상과는 다른 평상이었다.

    그리고 그 평상에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처럼, 한껏 늘어진 남자가 있었다.

    평상에 드러누워 있던 사내가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벌떡 일어난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평상 앞에 놓여 있는 백동화로를 뒤적거렸다. 백동화로에는 이미 까맣게 탄 재만 남아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사내를 근시하던 노인이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없다.”

    “뭘 말씀이시온지······.”

    “내가 간밤에 쓴 그거 말이다.”

    사내가 말하자 노인은 어안이 벙벙한지 눈만 끔뻑거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전하께오서 이런 잡문(雜文)은 불태워야 한다면서 화로에 집어 넣지 않으셨사옵니까?”

    “분명 그랬지. 하지만 재라도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어찌 그러시온지······.”

    “초고가 아닌가? 생각해보면 고금의 문인들은 글과 시가 본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다 버려버리는 습관이 있는데 진성이는 그 초고들을 모두 보관한다 하지 않았더냐? 내 그게 지금 생각났다. 비록 잡문일지라도 어필이니 후인들이 보면 얼마나 감탄할 텐가.”

    어떻게 보면 고작(?) 진성의 말마따나 초고를 보관하기 위해 어수(임금의 손)로 화로를 뒤진 셈이었다.

    상선은 맥빠진 표정으로 문차비에게 눈짓했다. 눈짓을 받은 문차비들이 문을 열자, 나인 두엇이 잰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물에 젖은 수건을 공손히 바쳤다.

    수건을 받은 융은 재가 묻은 손을 대충 쓱 닦아내며 말했다.

    “진성이는 잘 하고 있겠지?”

    “···듣기로 빈청이 난리가 났다고 하옵니다.”

    “뭐,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지.”

    “···”

    “그 눈은 무엇인가?”

    “아, 아니옵니다.”

    “나는 와병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고뿔은 진작 나았다지만··· 문인의 마음으로 걸작을 탄생시키기로 다짐하였는데 고작 졸작만 주구장창 썼으니 내 마음이 곧 찢어질 듯 하다. 그러니 어찌 와병이 아닌가?”

    “···천번 온당한 말씀이시옵니다.”

    상선의 긍정에 융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뿔이 들었던 건 맞았다.

    그간 과로에 시달려서인지 진성이 말하는 그 면역력이란 것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하기사.

    몸이 온전하길 바라는 것도 어쩌면 요행일지 몰랐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정사를 돌봤으니, 몸이 축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정사를 돌보는 일이 재밌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학을 뗐던 상소문이나 상언을 읽는 것도 재미 있었고, 특히 삼남의 제방들에 대한 수령들의 보고를 읽는 것이 가장 재밌었으며, 왕의 정치에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보는 것 역시 재밌었다.

    그렇게 몸이 축 나는지도 모르고, 정사를 돌보다 고뿔이 들어 몸져 누운 거고.

    그런데도 아직까지 고뿔이 안 떨어졌다는 핑계로 두문불출하며 진성에게 대리를 맡긴 건······.

    휙!

    융은 고개를 돌렸다.

    평상 앞에 있는 서안에 아직 책으로 엮이지 않은 종이들이 한가득 올라가 있었는데, 종이의 상단에는 《설공찬전》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우상도 진성이를 따라 글씨를 쓰려 하는데 최소한 우상의 설공찬전에 필적할 글씨는 써야 내 마음이 편안 할 것이다.”

    한참 즐겁게 정사를 돌보던 때였다.

    어느 날, 우의정 채수가 알현을 청했다.

    정승급 인사의 알현은 보고를 위해서거나 특정 사건 때문이니 냉큼 받아들였는데 글쎄.

    이 설공찬전이란 걸 갖다 바치지 뭔가.

    본인이 진성에게 영감을 받아 쓴 건데 문제 될 소지가 다분하니 만약 마음에 들지 않거들랑 불에 태워달라면서······.

    확실히 설공찬전은 문제 될 소지가 다분했다.

    불씨의 윤회가 담겨 있었고, 동시에 도가적인 면도 있었기 때문에 진성이 말하는 씹선비들이 당장 들고 일어나도 할 말이 없는 글씨(작품)였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웃어 넘길 수 있더라도 작중 나오는 단월국에 대한 표현은 채수를 역적으로 엮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저승에서 높은 벼슬을 한다는 게 줄거리였으니까.

    게다가, 계집도 글만 할 줄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는 곳이라니 과연 백성을 혹세무민하는 글이라 해서 금서령을 내려도 할 말이 없는 처사일 테지만······.

    ‘글씨가 재밌단 말이지.’

    무진장 재밌었다.

    그건 진성의 《정여립전》과는 사뭇 다른 맛이었다.

    무거우면서도 장엄함 속에 깃든 재미랄까?

    비록 우상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에 태워달라 했지만 융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책으로 엮어서 출간시킬 생각이었다.

    물론 문제 될 소지가 있는 책이다.

    하지만 역대의 임금들이 금서령을 내리고, 문제 될 소지가 있는 책을 불태운 건 본인의 정치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 책들이 도화선이 돼서 민란이 일어나고, 봉기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어쩌면 그 민란과 봉기를 막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하지만 융은 이것들에 대한 자신이 있었다.

    고작 설공찬전 하나가 민간에 유포 된다고 해서 민란이 일어날 리도 없거니와, 설령 일어나도 백성의 지지만 받는다면 금방 떨쳐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폐하긴 왜 폐한단 말인가?

    오히려 호승심이 일었다.

    이 설공찬전에 버금가는 걸작을 탄생시키겠다는 호승심.

    그게 지금 고뿔을 핑계로 두문불출하고 있는 이유였는데 문제는 마음에 드는 글이 뚝딱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후. 내 당초 엿새면 글씨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이게 막상 해보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빈청에 일러 임금의 병세가 심해져서 당분간은 진성의 대리로 정사를 돌봐야 할 테니, 오직 진성의 말을 나의 말처럼 믿고 따르라고 전하도록 하라.”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군왕이 처리 할 수 있는 정사가 있사옵고, 신하가 처리 할 수 있는 정사가 있사옵니다.”

    “이미 경이 말한 군왕이 처리 할 수 있는 정사는 내 모두 매듭 지어 뒀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온데 대내전의 일은 괜찮을지요?”

    “대내전의 일?”

    “아까 미처 말씀 아뢔지 못 했사온데 빈청에 난리가 난 까닭이 진성대군께서 왜국과 교역을 허락하고, 동시에 대내전의 사신에게 왜국에, 왜관 같은 땅을 떼어달라 요청했다 하옵니다.”

    “진성은 언제나 교역이 곧 국부를 쌓는 길이라 하였으니 진성의 말이 나의 뜻인 것이다. 그게 난리가 날 건덕지나 된단 말인가?”

    “여기까지는 대신들도 수긍을 하는 눈치였사오나 다만 다짜고짜 대마도가 조선땅이라는 문기를 일본국왕(쇼군)이 확실히 해달라는 말을 사신에게 했다고 하옵니다.”

    상선의 말에 융은 길게 늘어진 수염을 쓸어내렸다.

    과연 그거라면 앞전의 교역 문제와는 다르게 빈청에서 난리가 날 만한 이유다.

    외교적인 무례고, 결례니까.

    다만.

    “뭐, 그런 걸로 호들갑을··· 진성이 천방지축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는 일인데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대마도를 경상도로 편입하는 일은 필요한 일이다. 이를 계속해서 미루고 미룬다면, 훗날 대마도가 다시 왜구의 소굴이 될 건 자명한 일 아닌가? 속히 나의 교화를 받들도록 해야 하니 진성의 말이 무례기는 해도 어찌 무리겠는가.”

    “···그 말을 들은 대내전의 사신이 도주의 신병도 요구했다 하옵니다.”

    “뭐라? 그게 참말이냐?”

    “예.”

    앞전의 문기가 조선의 결례라면, 도주의 신병은 대내전의 무례였다.

    일본국의 정세를 생각하면, 단순히 도주의 신병만 요구한 게 아니니까.

    이전까지는 멀찍이 떨어져서 불구경 했다면, 도주의 신병 요구를 받아들이는 건 불을 진압하는 일에 함께 해달라는 일에 가깝다.

    융은 사색에 잠겼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도주의 신병은 문제 될 게 없다. 무릇 쓸모 없어진 사냥 개는 버리는 법이니.”

    지금까지 도주를 없애지 않은 건, 단순히 그를 어여삐 여겨서만은 아니다.

    그를 없애는 순간 왜인들이 봉기할까 섣불리 건들지 못 한 것에 가까웠다.

    지금도 그 위험성은 존재하지만, 자고로 돈의 맛을 본 장사치들에게 있어 군신의 의리란 짚신과도 같다. 왜관에 있는 대마도의 종자들이 그렇다.

    이미 돈의 맛을 이전보다 수십곱절은 본 자들이니, 도주를 어찌 하든 이쪽 눈치를 살필 것이다.

    “음. 뭐, 어쩌면 그쪽이 나으려나.”

    “하, 하오나······.”

    “됐다. 이미 엎지러진 물인데다 왜국과 교역을 하려면 어느 쪽이든 손을 잡아야 한다. 지금 대내전의 힘이 일본국왕을 능가한다 하고, 과연 그 기세가 패자(霸者)에 가깝다 하니 손을 잡아야 한다면 대내전과 잡는 게 나을 테지.”

    “···”

    “이만 나가보라. 내 얼른 글씨를 써야겠다.”

    “아, 예.”

    상선이 종종걸음으로 침소에서 물러나던 그때였다.

    “전하. 진성 대원군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밖에서 들려온 문차비의 음성에 융은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 뜬 째 상선을 바라봤다.

    상선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인지 눈을 부릅 뜨고 있었다.

    “사, 상선!”

    “저, 전하!”

    공범자(?)인 둘은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서둘러 책상에 흩어진 문방사우와 설공찬전의 원고들, 그리고 작품을 쓰는 데 참고하겠다며 가져온, 도처에 흩어진 책들을 부리나케 정리했다.

    대강 정리가 되자 융은 평상에 이불을 덮어쓴 채 드러누웠고, 상선은 어디서 가져온지 모를 탕약을 쟁반에 받쳐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들라하라.”

    진성이 들었다.

    “형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진성의 물음에 칭병이 들통날까 융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뿔이 심한 듯 하다··· 여름 고뿔이 독하다더니 과연 알 만하다.”

    라는 말에 진성은 상선이 쟁반째 들고 있는 탕약을 흘겼다.

    “약은 드셨습니까?”

    “상선이 방금 가져와 먹었다만 차도가 없는 듯 하다··· 여름 고뿔은 개도 안 걸린다던데 내 하는 짓이 개만도 못 해 하늘이 벌을 내린 듯 하다······.”

    “개만도 못 하다니요.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형님의 정치에 백성들이 태평가를 부르고 있는 걸요.”

    “그러냐··· 그럼 다행이구나.”

    “정말로 병색이 짙으신 듯 합니다.”

    “그, 그럼! 저, 정말이지. 내가 칭병이라도 하겠느냐.”

    “아뇨, 뭔가 얼굴이 핼쑥해지신 것 같아서 정말 아프신 것 같아서요.”

    ‘드, 들통난 건가?’

    뭔가 아는 듯 말하는 진성에 융은 마른 침을 꼴깍거렸다.

    진성에게 고작 신하의 글씨에 영감을 받아, 그에 버금가는 글씨를 쓰기 위해 칭병했다는 사실은 끝까지 감추고 싶었다.

    이건 왕으로서도 왕으로서지만, 무엇보다 형으로서 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그, 그나저나 네 옮을지 모르니 오지 말랬는데 어찌 걸음하였느냐······.”

    “아, 부탁 드릴 게 좀 있어서요.”

    “부탁?”

    “이번에 내수사 소유가 된 노비들 있잖습니까.”

    “역적들 말이냐?”

    “네.”

    “어찌 처분하실지는 결정 하셨습니까?”

    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비는 곧 재물이다.

    일자무식인 노비도 재물인데 하물며 그들은 식자인 노비들이다.

    그들을 어찌 쓸지는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

    다만.

    “임금 된 자로 재물 운운하는 게 여간 창피한 일이 아니다만 내 이번에 역적들을 쓸어버리면서 막대한 돈을 수중에 넣었으니 옛날에 네 말한 국민이 앎을 아는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러셨습니까?”

    “그래서 아마 그 노비들은 그런 곳에 쓰지 않을까 싶다. 모두 천자문 정도만 뗀 게 아니라 사서삼경 정도는 간단히 독해 할 능력의 식자들이니, 그 학교란 것을 팔도에 지어 선생으로 삼는 것이지. 노비된 자가 서당 훈장질도 하니, 하물며 관노가 훈장질을 못 할 연유가 없지 않겠느냐.”

    “음. 과연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래도 그렇게 모두를 훈장으로 삼진 않겠죠?”

    “그렇겠지.”

    “그럼요. 저한테 한 천명만 파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천명이나? 그 버러지들을 가져다 어디에 쓰려고 말이냐?”

    “그게 그러니까요.”

    곧 진성이 식자 노비 천명이나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찬찬히 설명을 듣던 융은 파안대소했다.

    “푸하하하!”

    “형님?”

    “과연 탁월한 이이제이의 책이다. 그치들은 성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 할 테니 천여명이나 되는 유학들이 넘어간다면, 능히 그 가르침을 이해 할 수 있을 테고 그러다 보면··· 푸하하.”

    융은 배꼽을 잡고 웃어제꼈다.

    그러다 너무 웃어제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융은.

    콜록콜록-

    기침을 터뜨렸다.

    “괘, 괜찮으십니까?”

    “병이 깊은 와중에 웃었더니 목이 아프구나······.”

    “좌우지간, 천명 정도만 어떻게 가능하시겠습니까?”

    “물론이다마다.”

    긍정하자 진성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럼 저는 얼른 동평관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몸조리 잘하시구요. 정사는 걱정마십시오.”

    융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후다닥 방을 빠져나가는 진성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선.”

    “예, 전하.”

    “속은 것 같지?”

    “···그런 듯 하옵니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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