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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72화 (27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72화>

    ***

    가끔 일본 영화를 볼 때면 드는 의문이 있었다.

    저것들은 왜 이렇게 목소리를 저음으로 내려깔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지?

    겉멋만 들었나?

    하는 의문이었다.

    이 의문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어떤 일본 영화를 봐도 저런 캐릭터는 조연으로라도 나왔으니까.

    그 의문이 오늘 비로소 풀렸다.

    내 눈앞에 있는 니자경구(尼子経久).

    그러니까, 아마고 쓰네히사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정사였다. 천황이 보낸 사신이 아니니 정사라 부를 순 없겠지만 어쨌든 사신의 우두머리는 맞다.

    그런 쓰네히사는 나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공손하고 정중했지만 한편으로는 목소리가 살이 떨릴 만큼이나 저음이었다. 표현이 부적절할 테지만 살기가 담긴 저음이라고 할까나?

    좌우지간.

    500년 전에도 이런 캐릭터가 있는 걸 보면 기나긴 일본의 전통 같다.

    ‘생각해보면 전쟁을 오래 겪은 나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칼을 뽑지 않고도 상대의 기세를 제압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역사적으로 필요했겠지.

    “주상 전하께오서 입조를 윤허하여 주셨으니 그 은혜가 참으로 하해와 같다고 하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들어도 쓰네히사의 저음은 적응이 안 될 것 같다.

    “크흠.”

    쓰네히사의 저음에 잠시 넋이 나간 나는 헛기침을 터뜨리는 허침 할아버지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래, 난 여기 형님 대신 있는 거다. 기세에 밀려선 안 된다.

    나는 최대한 편하게 원좌에 늘어졌다.

    상대가 보면 예의라고는 눈씻고 찾아 볼 수 없는 싸가지라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지만··· 원래 예의란 건 무조건 지킨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때론 막나가야 할 때가 있다.

    그게 지금인 거고.

    “뭐, 사신도 들었겠소만 형님 전하께서는 경연에 나가셨소이다. 원래라면 경연이 끝나고 형님 전하께서 사신의 입조를 지켜봤겠지만··· 이, 뭐랄까. 격이 다르다고나 할까?”

    물론 경연은 폐지 된 지 반백년은 지났으므로 구라다.

    굳이 형님이 와병 중이란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을 뿐이다.

    “격 말이옵니까?”

    “대내전(오우치 씨)은 옛날 삼한의 백제국의 후손을 자처한 족속인데 대내전 본인이 직접 온 것도 아니고 가신을 사신으로 보내왔으니 뭐랄까나··· 딱 예조참의와 면대하면 의리상 맞다고나 할까. 그래도 뭐, 말했다시피 백제국의 후손을 자처하는 족속인데 참의를 보낼 수도 없어서 본인이 나온 것이오.”

    빠직.

    통역을 들은 쓰네히사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 모습에 나는 움찔했다.

    일본이었다면 이런 치욕이 없다면서 당장 칼을 뽑아서 삼도류를 시전했겠지?

    하지만 여긴 조선이다.

    똥개도 제 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

    무엇보다, 백제국 후손 운운한 건 시나리오의 일환이다.

    선수를 친 거란 말이지.

    무슨 선수냐면 나는 몰랐는데 저 대내전이란 족속은 허구헛날 찾아와서 본인들이 백제국의 후손이니 뭐니 하면서 이런저런 물건을 요구했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 여긴 빈청의 당상들과 의논 끝에 우린 선수를 치기로 결정했고, 그 일환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 대내전이 왜 그대를 사신으로 보낸 것이오? 또 원숭이를 갖고 온 건 아니겠지?”

    이것 역시 몰랐는데 2년 전 찾아왔을 때, 원숭이를 바치면서 환심을 사려 했었다.

    “조선국 폐하께서 원숭이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니 다른 걸 가져왔다고 하옵니다.”

    여담이지만 일본의 다이묘들은 때때로 우리나라 왕을 폐하라 칭한다.

    진짜 제국의 황제라 여겨서가 아니라, 아첨의 일종인 것이다.

    마치··· 정삼품 목사(牧使)에게 지방의 선비들이 글을 올릴 때 합하(閤下)라 칭하는 것과 비슷한 아첨인 셈이다.

    “다른 거?”

    물으면서 허침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나는 대내전과의 외교에는 익숙지가 않다.

    형님을 대신해, 꼭두각시로 이 자리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은이라 하옵니다.”

    “은이면 우리도 많은데?”

    라고 말하자 허침 할아버지가 조용히 귀엣말을 건넨다.

    “···대감. 교역을 의미하옵니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군요. 그냥 교역하고 싶다고 말하면 될 것을······.”

    “···”

    민망해진 나는 쓰네히사를 바라봤다.

    “그대도 알겠지만 우린 역사적으로 왜국과 교역을 크게 한 일이 없소. 왜구 때문이지.”

    “본인들은 왜구가 아니라 백제국의 후손이라 하옵니다. 또한, 지금도 대내의흥(오우치 요시오키)은 왜구의 발호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니 어찌 본인들이 왜구라면 그런 짓을 하겠냐 하옵니다.”

    “음.”

    나는 침음을 흘렸다.

    사실 교역을 허가하는 건, 문제가 안 된다.

    형님께 대내전과의 외교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은 적은 없지만, 아마 이건 내 권한으로도 될 거다.

    최근의 형님은 어떻게든 교역국을 확대하고 싶어하셨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하는 거라면 굳이 손해 보는 장사는 하고 싶지 않다.

    “교역을 하고 싶다는 건, 왜관에서의 교역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고 하옵니다. 지금도 폐하의 은총으로 왜관에 들어가있는 자들이 상당수있지만, 그 수가 수십에 불과한데 반면 대마도주가 보낸 자들은 수백을 넘으니 과연 의리상 이게 맞는 것이 묻사옵니다.”

    아마 본인들은 백제국의 후손이고, 대마도주는 왜구의 두목인데 이리 대하는 게 맞냐는 물음일 것이다.

    “백제는 천년전에 망했고, 대마도는 바로 지금도 이웃하고 있소. 천년 전 망한 나라를 아직도 운운한다는 건, 어린 아이가 떼쓰는 것 밖에 안 되지. 이게 무슨 말이냐.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단 말이오.”

    내가 노골적으로 뭐 내놓을 거냐고 물을지는 꿈에도 몰랐는지, 살기 가득한 쓰네히사의 표정이 잠깐 일그러졌지만, 말그대로 찰나에 불과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못 알아듣겠다고 하시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했으니 못 알아들으면 그게 칠푼이다.

    알아 들었다. 분명 알아 들었음에도 굳이 뭘 원하냐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 내가 말해야지.

    “내가 듣기로 대내의흥은 일본국왕(쇼군)을 근시(近侍)하고 있다던데 그런 분이 땅 하나 떼주고, 독점권 주는 게 어려울까 싶소만.”

    “땅 말이옵니까?”

    “뭐, 큰 땅을 원하는 건 아니고 그냥 우리나라로 치면 왜관같은 상업지 하나만 떼달라는 거지요.”

    근엄하기 짝이 없었던 쓰네히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앞전처럼, 불쾌한 일그러짐이 아니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일그러짐 같았다.

    그렇겠지.

    말이 상업지 하나 떼달라는 거지, 결국 내 말도 1:1 직접 교역을 하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물론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그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왜관에 우리가 대내전 족속의 거점을 마련해주는 건, 일본이 우릴 상대로 교역을 하는 거지만, 저쪽에 거점을 마련하면 우리가 일본 상대로 교역을 하는 거다.

    “그건 어렵지 않다 하시옵니다. 다만 독점권은 무엇이냐 물으시옵니다.”

    “내 다른 상품은 일절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뭐 인삼라던가··· 서책이라던가, 중국의 수입품이라던가··· 이런 것들은 그대들이 헐값에 사가서 금값에 내다 팔던 말던 신경 쓰지 않겠지만 다른 상품에 대한 독점권은 인정해달란 말이죠.”

    “다른 상품이라시면?”

    “연필이나 비누 같은?”

    잠시 고민하던 대내의흥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독점이란 게 거창한 조건은 아니라고 여겨서겠지.

    “암상(暗想)까지 어찌할 방도는 없지만 어려운 조건은 아니라 하옵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얘기해도 되겠소?”

    “말씀하시라 하옵니다.”

    긁적긁적.

    “그, 아까 말이 나온 대마도 말인데.”

    “···?”

    “대마도는 옛 문기에도 우리 삼한의 땅이라 기록돼있소이다. 근자에 대마도주가 날뛰어서 입조시키고, 종속을 약조 받았는데 이게 또··· 나중에 양국이 이런 황무지 같은 섬 때문에 의리가 상할 수도 있지 않겠소? 문기로 확실히 했으면 하는데.”

    이건 빈청의 대신들과 얘기하지 않은 사안이다.

    그냥 대내전이 쇼군을 옹립한 사람이라길래, 대마도 땅을 조선령으로 정식 편입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사실상 별 어려운 조건도 아닐 거다.

    대마도는 황무지다. 돈만 무진장 들어가고, 아무도 탐내지 않는 황무지.

    “대마도는 예로부터 소이전(쇼니 씨)을 섬겼으니 그 족속들이 어찌 되든 말든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문기로 확실히 해달라하니 귀국하는대로 윤허를 받겠다 하옵니다.”

    그럼 끝인가?

    라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단, 본인들에게도 조건이 하나 있다 하온데······.”

    “응?”

    “왜관에 소이전의 입국과 도주의 입국을 금지해달라 하옵니다. 또한 가능하다면 도주의 신병을 본인들에게 넘겨달라고······.”

    ***

    도주의 신병 문제가 거론되자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술렁거리는 분위기에서 사신과 면담(?)을 할 수 없었다.

    비록 내 손에 의사봉은 없었지만, 나는 휴정을 선포했다.

    사신들은 동평관으로 안내됐고, 편전에 남은 나는······.

    “하오나 대감. 일본국과의 교역은 대원군 대감의 독단으로 처리 할 문제가 아니옵니다.”

    “더군다나 대내의흥이 비록 일본국왕을 옹립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정세란 난세에 다름이 없어서 함부로 끼어 들었다간 곤란한 일만 생길 터인데 일본국에 왜관 같은 곳을 떼어달라니요··· 전하께서 윤허하신 일이 아니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저치들이 도주의 신병을 요구한 까닭이 무엇이겠사옵니까? 도주는 소이전(쇼니 씨)을 받들던 자이옵니다. 반대로 소이전은 폐위 된 일본국왕을 다시금 추대하려는 자이니, 이게 무슨 뜻이겠냔 말이옵니까?”

    후비적, 후비적.

    자기들 편에 서란 거겠지, 뭐.

    “그리고 대마도가 삼한의 땅이라 기록돼 있었으니 이를 문기로 확실히 해달라니요. 비록 저치들이 왜인이라 하나 이는 무례이옵니다.”

    대사성 이점, 그리고 대사헌 김전의 말을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교역을 확대하려는 건, 형님 전하께서 기존에 갖고 계신 뜻인데다가 저희들이 빈청에서 무슨 말씀을 드렸었사옵니까?”

    기억을 더듬어봤다.

    형님께서 완쾌될 동안 적당히 간 보면서 시간만 끌어달라고 했던가?

    아마 그랬을 거다.

    “기억이 안 납니다.”

    나도 정치인 다 된 것 같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정치인들의 일격필살을 눈하나 까딱 않고 내뱉는 거 보면 말이지.

    “대감!”

    “다 잘 된 일 아닙니까.”

    “대감께는 이로운 일이겠지요. 삼성이 일본국에서 교역을 하게 됐으니 말입니다.”

    “나라에도 이로운 일일 걸요?”

    “어찌 말이옵니까?”

    날카롭게 정곡을 파고 드는 김전이다.

    이럴 땐 아무말 대잔치라도 해야한다. 아니면 김전은 어떻게든 물고 늘어질 거다.

    “첫째로 일본국의 정세가 어떠한지 눈으로 확인했구요. 두 번째로 무슨 의도로 입국했는지 확인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세 번째로는 창칼 한 번 안 들고 대마도라는 땅을 얻지 않았습니까?”

    “···대마도는 아까 편전에서 대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황무지이옵니다. 일본국도 별 관심을 갖지 않는 나라이니, 그게 어찌 장차 나라에 이로운 일이옵니까?”

    “혹시 압니까? 수백년 뒤에는 이로운 일이 될지.”

    “국가의 앞날도 가늠 할 수가 없는데 수백년 뒤의 일을 어찌 가늠 할 수 있겠사옵니까?”

    말문이 막혔다.

    틀린 말씀은 아니다.

    이럴 땐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거지.

    “그럼 거기서, 더 어떡합니까!”

    “시간만 끄셨어야지요.”

    “아니, 그럼 아까 편전에서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편전에선 조용하시더니······.”

    “그, 그거야······.”

    이번엔 이점의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땐 화제 전환이다.

    “그나저나, 대내전이나 다른 왜국의 영주들이나 왜 입국할 때마다 하필 대장경을 요구하는 겁니까?”

    “불씨의 말을 숭상하는 자들이 정작 불씨의 난언을 담은 책이 없으니 어떻게든 앞다투어 대장경을 받아 가려는 것이옵니다. 불씨의 난언이 담긴 책이 수중에 있으면 민중을 혹세시키기도 수월하겠지요.”

    화제 전환 성공이다.

    “그치들은 경전 같은 건 필요 없답니까? 경전이라면 내 얼마든지 줄 수 있을 텐데요.”

    “성현의 말씀을 이해 못 하는 오랑캐들에게 경전을 준다 한들, 뒷간에서 쓰이기 밖에 더 하겠사옵니까?”

    ‘뒷간에서 쓰인다고?’

    일단 의도대로 화제 전환은 성공했다.

    이점은 특히나 더 열을 내며 오랑캐 운운했다.

    그런데 왜 일까?

    나는 그런 이점의 모습에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버렸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이다.

    극중 최익현 씨는 동료 세관 직원인 장 주임과 우연히 마약을 손에 넣는다.

    장 주임이 마약을 놓고 고민하자 최익현의 대사가 명대사에 가까웠다.

    -일본으로 히로뽕 수출 존나 해가? 예? 오줌 질질 싸면서 다 뒤졌으면 좋겠습니더. 아, 애국이 별겁니꺼?

    물론 내 손에 최익현처럼 마약은 없다.

    대장경도 없다.

    하지만 애국심과 함께,

    ‘씹선비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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