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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71화 (27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71화>

    ***

    “생각보다 번영하고 있군요.”

    아마고 쓰네히사(尼子経久)는 함께 온 미사와 미츠마루(三沢光晴)의 말에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생각 이상의 번영이었다.

    거리의 물산은 풍족했고, 거리를 지나는 백성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었다.

    “조선은 난세가 아니니까.”

    그 모습에 약간 부러운 마음이 든 쓰네히사는 치기 어린 결론을 내놓았다.

    난세.

    조선은 일본과 달리 난세가 아니었다.

    반면 일본은 난세다.

    진무 텐노(신화 속의 초대 천황)이래 일본국의 역사 속에서 이만큼의 난세가 또 있었을까 싶을 만큼의 난세에 가까웠다.

    “과연 평화롭습니다.”

    “탐이 날 정도의 평화군.”

    질투가 났다.

    이 평화로운 땅을 무참히 박살내버리고, 이 땅의 백성들이 신음하건 말건 이 평화를 모조리 본국으로 가져가버리고 싶을 만큼의 질투.

    그러나 그럴 순 없음이다.

    차근차근, 아주 신중하게 계단을 밞아나가다 보면 일본도 이런 평화를 맞을 날이 올 터였다.

    그 날을 고대하기에 쓰네히사는 조선행을 자처했다.

    그의 주군 요시오키(오우치 가의 당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본의 난세를 종결시키고 그의 손으로 천하인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 천하를 삼키기 위해.

    “조선왕이 만나주겠지요?”

    “봐야 알겠지.”

    미츠마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도는 지극히 조심스러웠지만 미츠마루는 요시오키가 붙인 감시인에 가깝다.

    아직 쓰네히사는 요시오키의 신임을 받지 못 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조선행을 자처했으니, 요시오키로서는 의심이 갈 밖에.

    하지만 조선행은 누가 오든 왔어야 했다.

    쓰네히사가 바라 본 요시오키는 분명한 호걸이었다.

    그 호걸은 상락에는 진작 성공했다.

    그 누구도 가능하리라 여기지 않았던 요시타네(폐위된 쇼군)를 복귀 시키는 데에도 성공했고.

    하지만 안정적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요시타네를 사로잡지 못 했다. 반정으로 요시타네를 옹립했던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가 암살돼, 반정군의 기세가 주춤하긴 했지만 아직 방심할 때는 아니었다.

    전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곧 반정군 측은 다이묘들을 모을대로 모아 회심의 일격을 가할 터였다.

    그때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고, 그 일환이 조선행이었다.

    듣기로 쇼니 씨(소이전)의 가신인 쓰시마는 날이 갈수록 번영하고 있다고 했다.

    왜관을 통한 교역 덕이었다.

    오우치 가문이 그 교역을 확대시킬 수만 있다면 군자금을 모으는 건 물론이고, 돈으로 반군측에 선 다이묘들을 회유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아니, 그럴 것이라 쓰네히사의 주군인 요시오키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2년 전에는 조선왕을 만나지도 못 하고 빈 손으로 돌아갔으니 이번에는 기필코 성사시켜야 합니다, 쓰네히사님.”

    쓰네히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네가 걱정 할 일이 아니다.”

    “···”

    그 사이.

    조선국의 관리가 안내한 곳에 도착했다.

    “지금 아조에 급히 논할 일이 있으니 전하께서 부르실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시오.”

    “급히 논할 일?”

    “그거야 사신이 알 것 없고.”

    예의 관리는 오만한 말과 함께 장내를 빠져나갔다.

    ***

    오늘은 오랜만에 개똥이에게 1:1 과외를 했다.

    이 녀석, 못 본 새 늠름해지고, 공부도 열심히 했······.

    다면 스승으로서 더할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개뿔.

    힐끗.

    보라는 책은 안 보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라서는 자꾸 이상한 데만 힐끗거리고 있다.

    개똥이가 힐끗거리고 있는 곳에 뭐가 있냐면······.

    “사혜. 빨래가니?”

    나는, 늦었는지 빨래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마당을 후다닥- 뛰어가는 사혜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혜는 행랑식구다.

    올해로 열다섯살인데, 사혜는 일반적인 노비랑은 조금 다르다.

    역적의 딸이거든.

    최근 옥사에 연루 된 역적의 딸이 아니라, 박원종의 난 때 연루된 역적의 딸이다. 이름이 신 뭐시기 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역적의 차녀였다.

    당시 형님께 하사 받은 아이인데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진 것과 진배가 없어서, 동정이 가는 아이기도 하다.

    “네!”

    그러면서도 밝고 쾌활해서 더 마음이 쓰이는 아이였다.

    사실 그렇잖아.

    아비는 무관이었고, 박원종의 부관의 부관이었다.

    부관의 부관이면 고위지휘관 축에도 못 끼는 거지만, 무과 급제는 했다는 소리다.

    생원진사과에만 급제해도 동네에서 소 댓마리는 잡고, 생원진사 타이틀 붙고 떵떵거리면서 사는데 서반의 반열에 오른 이가 아비였으니 아비가 역적이 아니었다면 양갓집 규수로 자랐을 아이다.

    한마디로, 어렸을 때 고생이란 안 하고 자랐을 거란 거지.

    그런데 한순간에 역적의 딸로 노비 신세가 됐으니 본인의 신세가 한탄스럽고 아비가 원망스럽기도 할 텐데 내색 없이 적응 잘 하고, 다른 식구들과도 잘 지낸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역적의 딸년이라고 업씬여겼던 행랑식구들도, 요새는 사혜를 살뜰히 챙긴다고 하니 말 다 했지, 뭐.

    좌우지간, 문제는 사혜가 아니라 개똥이다.

    힐끗.

    꾸벅 인사하고 대문을 빠져나가는 사혜에게서 눈길을 못 뗀다.

    어제 개똥이가 사혜를 흘겨봤을 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확신에 가깝다.

    이건, 소년의 풋사랑이다.

    “커흠.”

    인기척을 내고 마루에 올랐다. 그런데도 개똥이 아는 체도 안 한다. 오히려 앞을 가로막는 내가 장애물이라도 됐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좌우로 흔들어 사혜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 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혜가 육안에서 사라지자, 연거푸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떨구는 개똥이다.

    “개똥이 너.”

    “힉!”

    “뭘 그리 놀라고 그러냐? 귀신이라도 봤어?”

    “귀신은 안 봤는데요. 도깨비는 본 적 있어요.”

    “도깨비?”

    “네. 방금 도깨비한테 홀린 것 같아요. 절대적으로 분명해요.”

    풉.

    웃음이 터져나왔다.

    “너 사혜 좋아하지?”

    “아, 아니거든요! 사, 사혜가 누군데요?”

    “방금 나간 아이.”

    “···”

    “좋아하지?”

    “아, 아니라니까요!”

    “이 자식아, 아니면 아니지 왜 발끈해.”

    사춘기인가?

    “그게 아니라······.”

    “연결 시켜줘?”

    “여, 연결이요?”

    “너 전금이 알지?”

    “알죠.”

    “덕산이랑 전금이도 내가 연결해준 거잖아. 솔직히 덕산이 자식 나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상투도 못 틀었을 걸?”

    꿀꺽.

    “저, 정말이요?”

    “이 스승님이 거짓말 하는 거 봤어?”

    “조금······.”

    “그건 선의의 거짓말이구.”

    “하, 하지만 사혜는 저한텐 관심도 없는 걸요.”

    “관심?”

    아······.

    그러고 보니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

    보름 전.

    -스승님 이번에 떡 좀 찧었는데 드시라고 갖고 왔어요.

    열흘 전.

    -스승님 공부하다가 막힘이 있어서 찾아왔는데요. 뭐가 어떻게 막히냐면요. 잠깐 실례좀 할게요.

    엿새 전.

    -스승님 삼촌이 서과(수박) 하사해주셨는데요. 엄마가 스승님 갖다 드리래서요. 저 잠깐 뒷간좀······.

    닷새 전.

    -스승님 그, 있잖아요. 그거 까먹었는데요. 행랑이 어디있었죠?

    나흘 전.

    -스승님. 남녀가 유별하다는데 왜 노비들은 같이 생활하고 그래요? 그래서 생각난 건데요······.

    이틀 전.

    -개똥이 너 왜 코피가 나냐? 어디 아픈 거 아냐?

    -네? 아, 아니예요.

    요즘 들어 자주 찾아왔다.

    찾는 방법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장시간 자리를 비웠었다.

    이게 뭘 의미하겠어?

    어떻게든 사혜한테 눈도장 찍어보려고, 말 좀 걸어보려고 알짱가렸다는 말이겠지.

    “사혜는 저한테 만날 도련님이라면서 말도 안 걸어주는 걸요.”

    “자신감을 가져, 인마. 개똥이 너 정도면 어디가서 안 빠지잖아?”

    졸부 같은 느낌의 집안이긴 하지만 개똥이네는 어엿한 공신 집안이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1년 전에는 웬 취객이 길가던 팔석 씨한테 시비 걸었다가 포청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그 소식이 형님께도 전해졌고 노발대발한 형님이 금부로 끌고가서 수사하라 했고, 그걸로도 분이 안 풀리는지 그냥 공신을 무시한 역적 놈이니 부대시에 처하라고 하셨었다.

    술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 한 그 취객은, 팔석 씨가 본인은 괜찮다며, 본인 때문에 사람이 죽는 건 원치 않는다며, 탄원서(?)를 제출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개똥이?

    말해 뭐 해?

    알다시피 장안에 파락호가 사라진 게 벌써 몇 년 전이다.

    그리고 그 파락호들이 자취를 감춘 건 개똥이 때문이었다.

    개똥이한테 손찌검 했다는 이유로, 장안 전체의 파락호 씨가 말라버린 것이다.

    비록 졸부 집안 느낌은 있지만 임금이 총애하는 공신 집안이고, 하사받은 재산도 적지 않다.

    거기다가······.

    ‘이 녀석 점점 재수없게 잘 생겨진단 말이지.’

    개똥이 나이 벌써 열 다섯 살이다.

    이 녀석 처음 봤던 5년 전, 코흘리개 찔찔이일 땐 몰랐는데 왜 그런 말도 있잖나.

    어려서 예쁜 아이들은 커서는 못 생겨지고, 어려서 못 생긴 애들이 커서 예뻐진다는 말.

    언제부턴가 존잘남의 태가 나기 시작했다.

    뒤늦긴 하지만 이젠 제법 의젓해지기도 했고.

    얼굴이면 얼굴, 집안이면 집안.

    사혜에 꿀릴 게 전혀 없다.

    “그래도 아직 결혼은 이른 걸요.”

    참고로 여긴 남자랑 여자가 눈만 맞으면 결혼이다.

    연애=결혼인 셈이지.

    사혜와 개똥의 신분 차이가 걸리긴 하지만 사랑엔 국경도 없다는데 뭐.

    “너 벌써 열다섯이잖아? 슬슬 장가가야지?”

    “장가······.”

    장가란 말에 녀석의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각시와의 신혼 생활을 상상하고 있는 모양이다.

    딱!

    “아얏.”

    녀석이 펼치고 있는 상상의 나래를 딱밤으로 날린 내가 말했다.

    “미녀는 용기 있는 사람이 쟁취한다고 했다. 너 자꾸 어물쩡거리기만 하면 다른 놈이 채 갈 걸?”

    “그건 안 돼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스승님이 도와줄게. 어? 알잖아? 나 빈말 안 하는 거.”

    “어, 어떻게 도와주실 건데요?”

    개똥이 방법을 묻는 그때였다.

    “대감마님!”

    덕산이었다.

    “왜?”

    “예조참의 나리가 찾아오셨습니다요.”

    “타이밍 죽이네.”

    “네?”

    “아냐, 됐어. 근데 승정원이 아니라 예조에서 왔다고?”

    “네.”

    “용건이 뭐라시는데?”

    “급히 빈청에 좀 와달라고 하시는뎁쇼?”

    절레절레.

    “하··· 개똥아. 이 스승님이 이렇게 바쁜 몸이시다. 너 연애 사업은 갔다 온 뒤에 얘기하자. 그 동안 얌전하게 공부하고 있어, 알겠지?”

    “네.”

    ***

    “형님이요?”

    “예.”

    “아니, 얼마나요?”

    “아직도 기절하신 듯 어침(御寢)에 들고 계시다 합니다.”

    “아니, 무슨 고뿔에 그리······.”

    예조참의 권인손을 따라 빈청에 온 나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어제부터 열이 좀 있던 형님이 간밤에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더니 아직도 주무시고 계시다는 소식이었다.

    병명은 고뿔, 그러니까 감기였다.

    한여름 감기가 독하긴 하다지만 무슨 감기가 그리 독하길래 사람을 해가 중천에 뜰 정도까지 재우는지 모르겠다.

    “고뿔도 고뿔이지만 어의의 말로는 과로가 겹친 탓이라 합니다.

    수긍이 갔다.

    형님은 4,679명의 역적들이 탄생(?)한 뒤부터 지난 한 달간 아침~밤까지 끊임없이 일만 하셨다.

    그 좋아하던 축구도 뜸하셨고 사냥도 뜸하셨다.

    오직 일, 일, 일이었다.

    대신들도 놀라워 할 만큼의 워커홀릭이었는데, 한 번은 걱정돼서 쉬엄쉬엄하셔야 되지 않겠냐 하니 하시는 왈.

    -만기가 이리 재미진 줄 몰랐다. 무엇보다, 백성이 태평한 시대라야 사족들이 날뛰지 못 하지.

    였다.

    이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아닌 게 아니라 형님이 벌써 보위에 오르신 게 14년째다.

    햇수로 치면 15년.

    그런데 씹선비들이 고분고분 해지고 난 뒤 비로소 정무에 재미를 느꼈다니······.

    그래도 형님의 말씀이 일리는 있었다.

    백성의 지지를 받는 왕은 귀족들도 함부로 못 했다.

    고금의 진리다.

    그래서 더는 말씀 안 드리고 뒀는데 결국 사달이 났다.

    “침소에 계십니까?”

    “예. 다만 전하께서 잠깐 일어나신 적이 있는데, 대원군께서 찾아오시면 고뿔이 옮을 수 있으니 찾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었습니다.”

    “그래도······.”

    “그리고 또 하나 령을 내리신 게 있는데.”

    “또요?”

    “지금 대내전의 일과 국내의 여러 가지 일로 조정이 시급한데 처지가 정무를 보긴 힘드니 대원군께서 대리해달라셨습니다.”

    “하, 하지만 세자 저하도 계신데.”

    “저하께선 아직 연소하시다 보니 외교를 맡기기엔 무리란 판단을 하신 모양입니다.”

    여러모로 난감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형제간에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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