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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70화 (27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70화>

    ***

    진성 솔루션이 도움 된 건, 형님 뿐만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됐다.

    은행이라는 키워드에 불현듯 소재 하나가 떠오르지 뭔가.

    그리고······.

    “···드디어 끝이다.”

    나는 손에서 연필을 놓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확실히 나는 신필이 분명하다.

    장장 10일 간에 걸쳐 신들린 듯 글을 썼다. 그리고 그 끝을 비로소 맺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딱 하나 있긴 하지만··· 뭐, 상관 없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서안 위의 어지럽게 흩어진 원고들을 바라봤다.

    《허생전》

    ···내가 이번에 쓴 작품의 제목이다.

    뭔가 익숙한 제목 같다면 그건, 이현호로 살던 시절에 언어 영역 1등급이었던 내가 장담 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다가 여러분의 착각인 것이다.

    저 제목에 따른 연관검색어로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 구운몽 등등이 떠오른다면 그것 역시 착각이고, 감히 불경(?)하게도 박지원이라는 이름 함자가 떠오른다면 그건 불측한 사고다.

    10일에 걸쳐 신들린 듯 썼던 글은 허생전이 전부가 아니었다.

    《공주의 남자》

    사실 허생전 자체는 3일 밖에 안 걸렸다.

    줄거리를 기억하고 메모하는데 하루.

    쓰는데 이틀.

    그래서 총 3일 걸린 것이다.

    막상 허생전을 다 쓰고 나니까 뭔가 허전하지 뭔가.

    나는 《정여립전》의 저자가 나라는 사실을 아무한테나 떠벌리진 않는다. 당장 구사가 나라는 사실은 형님과 조 사장, 경덕이와 석평이 그리고 여울이 밖에 없다.

    공주의 남자는 여울이 덕에 탄생한 작품이기도 하다.

    여울이는 감사하게도 정여립전을 참 재밌게 봐줬다.

    예의상이 아니라, 실제로 몇 번 씩이나 앞장을 넘겨서 읽어볼 정도였고, 문장도 하나, 하나 곱씹으면서 읽은 진정한 독자였다.

    그런 1호 팬이 정여립전은 분명 다른 패설들과는 다른 맛이 있지만, 아녀자의 기호에는 안 맞을 거라는 정확한 평을 해줬다.

    사실 맞는 말이다.

    정여립전이 인기가 있는 건, 사실 소재 자체가 자극적인 것도 있지만 뭔가 남자가 가진 판타지를 정여립전이란 인물이 대신 이뤄주기 때문일 것이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정여립전에는 로맨스 요소가 1도 안 들어간단 말이지.

    여울이의 진단은 정확했고, 여성 독자들도 외면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의 남자는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뭔가 TV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허생전처럼 착각이다.

    절대적으로다가 모방하지 않았다.

    굳이 해명하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도 착각이다.

    좌우지간, 고민이다.

    뭐부터 6월자 신문에 내보낼지 말이다.

    내가 볼 땐 시기적으로 허생전이 딱 좋은데 미리 읽어본 여울이 말로는 허생전 보다는 공주의 남자가 시기적으로 더 좋을 것 같단다.

    7월이면 뙤약볕 때문에 아무 것도 하기 싫지만, 6월은 그나마 7월에 비해 선선하기 때문에 창문 열어놓고 선선한 바람 쐬면서 패설로 소일하는 아녀자들이 많을 거라나?

    고민은 짧았다.

    아내 말 들어서 손해 봤다는 남자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으니 여울이 말 듣기로 결정했다.

    6월자 신문의 소설은 공주의 남자다.

    “자, 그럼 가볼까나.”

    글도 다 썼겠다··· 6월자 신문으로 뭘 내보낼지 결정도 했겠다··· 나는 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딜 가냐고?

    논공행상이 있대서 거기 간다.

    ***

    소재 하나 또 떠올랐다.

    도사를 소재로 나중에 하나 써야겠다.

    5월인데도 볕이 보통 강한 게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도술 하나 뚝딱 써서 빈청으로 순간이동 하고 싶을 정도였다.

    뭐, 이건 구상 잘 해보고 나중에 쓰든 폐기하든 결정하기로 하고.

    일단은 논공행상에 집중하자.

    “···하므로 교성군은 빠질 수 없겠습니다. 또한 전하께서 심중에 풍원부원군의 공을 기려주길 바라는 눈치였으니 부원군 역시 빼놓을 수 없겠는데 부원군은 바로 얼마 전, 증작(贈爵)되었으니 예판.”

    허침 할아버지가 부르자 예조판서 신수영 아저씨가 고개를 들었다.

    “예, 대감.”

    “혹 문제 될 소지가 있겠습니까?”

    “훈공을 기리는 일에 시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특히 이번 옥사를 무마하는 데에는 부원군의 공이 작지 않았으니 전하께서도 빈청에 논의케 하라는 분부를 내리시기 전에 ‘부원군이 빠질 순 없겠다’는 첨언을 다실 정도 였습니다. 설령 증작 된 자는 또 훈공 할 수 없다는 말이 대전에 명시 돼있어도 부원군을 빠뜨릴 순 없겠지요.”

    “흠. 하지만 부원군은 그 작호가 벌써 부원군에 이르렀는데 그 이상 올릴 게 없으니······.”

    허침 할아버지의 침음에 임사홍 아저씨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전하께서 특별히 분부를 내리셨다고는 하나 크게 마음을 쓰신 건 아닐 것입니다. 그저 군신의 의리로서 공언(空言)을 조금 하셨을 테니 여러분들께서는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하지만 전하께서 공언을 하셨다면 굳이 언급을 안 하셨겠지요. 좌상은 괜찮다 하시지만 분부를 받드는 우리의 입장도 생각을 해주십시오.”

    역시나 겸연쩍은 표정의 임사홍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분들이 부원군의 훈공을 어떻게 기려야 하나 고민하던 즈음.

    넌씨눈 노공필 할아버지가 끼어드셨다.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

    숭재 씨 말로는 요새 위세가 등등하다던데··· 사실인 모양이다.

    불과 얼마 전까진 빈청에서도 거의 합쭉이 신세였는데······.

    “지금 걱정이 부원군 이상의 작호로 올릴 수 없다는 것에 있으나 나는 여러분들이 왜 이리 부원군의 훈공으로 왈가왈부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부사?”

    “음서가 제도에 어찌 등장 했겠습니까?”

    “음서요?”

    “아비가 자식으로 인해 귀해지듯이 자식 역시 아비로 인해 귀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제예가 풍원위의 작호로 있으니 부원군의 공을 대신해 봉군을 청하는 건 어떻겠냔 말이지요.”

    “하지만 부마에게 봉군을 허용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세종대왕 시절부터 지켜져오지 않았습니까?”

    “옛날부터 지켜져왔다고 해서 지금도 지켜야 한다면 편전에서 서얼을 출사케 하지 말라 말씀 아뢔야지 않겠습니까.”

    강하게 나가는 노공필 할아버지다.

    “흐음. 그 문제는 차차 논하도록 합시다. 급한 건 아니니 말입니다. 다음은······.”

    차례로 공신들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반가운 이름도 있었다.

    억수 씨와 안처직이었다.

    특히 이 둘의 공이 크다 해서 봉군까지 빈청에서 논의가 됐는데 억수 씨는 그래도 신분 문제가 걸렸는지 봉군 심사(?)에서 탈락했고, 안처직에게는 봉군을 청하자는 말들이 나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지막으로 대군 대감이신데······.”

    나?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나는 이번 옥사 때 한 일이 전혀 없거든.

    두 작품이나 모방 한 것도··· 아니, 모방은 아니지만 어쨌든 찔리는데 공 안 세우고 상 받으면 양심에 무진장 찔릴 것 같았다.

    “하지만 전 이번 옥사 때 세운 공이 전혀 없습니다만?”

    “아, 전하께서 특지를 내리셨었습니다.”

    “특지요?”

    “예. 다른 친공신(조상 덕 없이 스스로 공을 세운 사람들)들도 친공신들이지만 특히 대감의 공은 전례에 얽매이지 말고 파격적으로 논하라는 분부가 계셨던지라······.”

    “그래요? 아무 공도 안 세우고 받기는 좀 양심에 찔리는데······.”

    “전하의 분부시니 저희가 어찌하겠습니까? 대감께선 낯뜨겁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뭐, 이해 한다손 치더라도 저도 부원군처럼 더 이상 올라갈 작호가 없지 않겠습니까?”

    친왕(親王)에 봉할 게 아니라면 말이지.

    물론 농담이다.

    제왕은 제후(왕작)를 봉할 수 있고, 제후는 가신(군작)을 봉할 수 있다.

    제후가 제후를 봉하면 그건 제후가 아니라 제왕이다.

    한마디로 황제를 참칭하게 되는 거지.

    아무튼 더 이상 올라갈 작호가 없다는 팩트폭력에 편전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 즈음이었다.

    노공필 할아버지가 말했다.

    “여러분도 모두 서얼의 일로 특히나 깨우치게 되셨겠지만, 대전이란 것은 시대에 따라 고쳐 써야 하는 법입니다. 사실 법이란 게 그렇지 않겠습니까? 순장법을 지금 적용하면 구태한 법이지, 어찌 치국에 용이한 신법이겠습니까? 이 사람은 성화 2년(1466년)에 출사하여 지금까지 40년 넘도록 조정에 있으며, 금상 전하까지 네분의 임금을 섬겼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을 조정에 있으면서 대군의 지위로서 친공신의 반열에 오른 종친은 없었으니 어찌 작금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전을 뜯어 고쳐서라도 내 자리를 만들어주겠다는 노공필 할아버지의 노력이 가상하다.

    “교성군 대감. 저는 괜찮습니다. 굳이 대전까지 고칠 필요까지 있나요.”

    당사자가 괜찮다는 말에 노공필 할아버지는 괜히 난리부르스를 추시면서 말씀하셨다.

    “제가 안 괜찮습니다, 대감. 조종조 이래 대군의 지위로 친공신의 반열에 오른 분이 몇 분이나 계셨겠습니까? 있다면 태종대왕과 세종대왕, 그리고 세조대왕 이분들 밖엔 없는데, 이분들 역시 엄밀히 친공신이라 할 순 없고, 또한 모두 보위에 오르신 분들이니······.”

    “어허! 말씀을 가려하시오!”

    지금까지 온화하게 지부사의 말을 들어주던 허침 할아버지가 버럭 호통을 치셨다.

    사실 듣는 이의 관점에 따라 자칫 내가 어좌를 탐내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좌우지간. 대군으로서 친공신이 된 사람은 없으니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그 훈공과 미덕을 기리는 것은 나라로서도 온당한 처사요, 충신으로서도 온당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대전을 어찌 뜯어 고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답답하시긴··· 아, 왜 일전에도 월산대군의 부인께 부부인(府夫人)의 작호에서, 자리를 하나 더 만들어 부대부인(府大夫人)으로 그 위계를 올린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이건 벌써 3년 전의 일화다.

    부대부인은 나나 형님께는 큰 어머니 되는 분인데, 동시에 역적 박원종의 누나이면서도 과거 형님께 나돌았던 추문의 당사자 되시는 분이기도 하다.

    겁나 복잡하지?

    형님은 옛날에 잔병치레가 많았단다. 그래서 큰 아버지인 월산대군 집으로 피접(요양)을 자주 나가셨고, 큰 어머니인 부대부인은 올 때마다 형님을 극진히 보살펴주셨단다.

    거의 친어머니처럼 말이지.

    그 은혜 때문인지 형님은 3년 전, 박원종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신하들이 부대부인도 벌해야 한다는 말에도 꿈쩍않고 오히려 출가외인이라면서 보란 듯이, 부대부인으로 증작 시켜주신 적이 있다.

    그리고 추문은 뭐냐면 형님과 부대부인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인데··· 옆에서 형님을 오랜 시간 지켜본 내가 볼 땐 확실히 헛소문이다.

    잔칫날이나 종친들이 모이는 날에 보면, 형님은 진짜 부대부인을 거의 어머니 대하듯 한다.

    지금 생각하면 이 소문이 나돈 게 3~4년 전 쯤인데, 역적 놈들이 낸 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야 반정에 성공하면 큰 어머니와 간통한 천하에 둘도 없는 호로 새끼라는 명분을 얻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뭐, 그냥 그렇다는 거다.

    “생각해둔 이름이라도 있으십니까?”

    “대군의 으뜸이라 해서 앞에 원(元)자를 붙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원대군이요? 그건 뭔가 어감이······.”

    “그럼 원 자를 가운데에 넣어서 대원군은 어떻습니까? 오, 말을 뱉고보니 그럴싸합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노공필 할아버지지만, 다른 분들 모두 떨떠름한 표정이다.

    나도 떨떠름··· 한 것 같았는데 듣다 보니 괜찮은데, 대원군?

    “진성대원군 대감. 어떠십니까?”

    차마 내 입으로 마음에 든단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어색하게 웃었다.

    “나쁜 것 같지도 않고, 괜찮은 것 같지도 않고··· 에, 뭐.”

    “영상대감. 더 망설일 게 있겠습니까? 전하께 이리 주달 드리면 될 듯··· 아!”

    “···?”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 대원군 대감께서 친공신의 반열에 오른 일을 말씀하시면서, 무릇 장부란 아내의 내조가 없으면 대장부가 될 수 없다 하셨으니 과연 대군저의 내조가 없었다면 어쨌겠습니까? 특히나 부부인을 승격하는 일은 전례에 없는 일도 아니니, 부대부인으로 증작하는 일을 함께 청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하께서 아주 기뻐하실 듯 한데요.”

    .

    .

    .

    솔직히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아직도 세간에는 임사홍 아저씨랑 숭재 씨가 간신이란 말이 많거든?

    요새는 좀 뜸해진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근데 지금 보면 임사홍 아저씨랑 숭재 씨는 절대 간신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간신 보는 눈 없는 나도 누가 간신인진 딱 알겠어, 아주.

    이 이후에 논해진 건, 논공행상에 비하면 아주 자잘한 사안들이었다.

    일본에서 대내전 씨라는 족속의 사신들이 오는데 입조를 거절해야 되냐 말아야 하냐 하는 문제 정도?

    내가 조선 최초의 대원군 대감이 될 수도 있는 문제에 비하면 자잘한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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